운수 좋은 날

69년 7월 13일 저녁

Trigger Warning!! : 부상, 유혈 묘사

24살의 여름, 유이한은 한가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당장 내일로 다가온 동생의 생일 선물을 무엇으로 해주어야하는지 영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이 고민의 이유였다. 갖고 싶은 것이 있는지 계속 물어보아도 별로 갖고 싶은게 없다고 하고, 그렇다고 필요한 것이 뭔가 부모님을 콕콕 찔러봐도 모르겠다고 그러시고…. 일은 바쁘지, 비번 날에 전화를 해봐도 단서는 없지. 꼴이 마치 제대로 된 증거품 하나 없는 준 미제 사건을 마주한 형사 같다고 생각하며 이한은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장난감이나 음식은 일단 패스. 애가 더이상 애기도 아닌데 장난감 사준다고 좋아할리도 없고, 음식은 집에서 먹을 거니까 다른 방안이 필요하다. 책? 애초에 쟤가 책을 읽던가…. 아니면 옷? 아니다, 난 내 미감을 믿지 아니한다. 애초에 옷은 취향을 너무 탄다. 전자쪽 매장으로 가봐야하나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

“저기….”

낮고 거친 느낌의 목소리. 뒤를 돌아보면 자신보다 머리 하나 작은 약간 후줄근한 차림의 남성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의 외형과 목소리로 짐작하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인가. 모자 그늘 아래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불편함을 품고 나서야 자신이 뒤를 돌아본 이래로 아무말도 하고 있지 않은채 상대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어…. 무슨 일이세요?”

머쓱한 표정을 연기하며 뒷목을 긁적이면서도 시선은 상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초면의 상대에게 말을 걸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 길을 잃었거나

둘, 일행을 잃어버렸거나

셋, 뭔가를 권유할 목적이거나

넷, 해를 끼칠 목적이거나.

실내에서까지 모자를 쓴 것을 보면 자신을 감출 의도가 다분하고, 뭔가 긴장한 듯 숨이 거칠다. 옷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일행을 찾는 것은 아니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니 뭔가를 강권할 목적 또한 아닌 것 같다. 세상이 아무리 흉흉하다 한들 무턱대고 초면의 사람을 의심하는 티를 내는 것은 좋지 않다. 좀 수더분한 청년처럼 보이려 연기하며 눈을 끔뻑였다.

“저기… 제가, 길을 잃어서요. 그…. 생활용품 매장은 어디로 가야하죠…?”

길을 잃은 사람이었나. 경계를 조금 풀며 말로 설명하다가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기 위해 손으로 가리키며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마치 예언자에게 계시가 내려오는 것과 같이 어떠한 깨달음을 얻으며 일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백화점엔 어떤 사람도 알기 쉽도록 표지판이 설치되어있다. 두 눈 멀쩡하기만 하다면, 아니 의안이라도 기계체를 통해 앞을 볼 수 있다면 충분히 길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남자는 시각에 문제가 있는가? 그를 보조하는 무언가를 사용하는 중인가? 그렇다면 알 수 있었어야 했다. 지팡이를 사용하든 의안을 사용하든 알아챌 수 있었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시각보조기기는 제법 눈에 띄는 기종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지팡이도 없었다. 눈에 띄는 시각보조기기 또한 없었다. 거친 숨결, 반들거리던 눈동자. 아, 왜 알아채지 못했을까. 이건 현장에서 난동부리던 범죄자들의 눈과 닮아있었다는 걸.

긴장감에 감각이 확장됨을 느낀다. 뒤돌아.

뒤에서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내는 소리, 뒤돌아. 뒤돌라고.

등을 찌르는 예리한 칼날 같은 살기, 뒤돌아, 뒤돌아, 당장 뒤돌아!!

뒤를 돌기엔 이미 늦었음을 깨닫는다.

예리한 흉기가 얇은 옷을 가르고 살갗을 찢으며 안을 파고 드는 감각. 날이 선 칼날의 차가움이 느껴지면 몸이 굳는다. 날이 잘 든 칼은 들어오는 감각도 뒤늦게 깨닫는다던데 순 거짓말이라는 엉뚱한 생각이 일순, 작열하는 듯한 고통이 드는 것과 동시에 칼이 빠져나가며 빈자리를 붉은 피가 채워나가는 감각이 든다.

격통으로 몸이 휘청이고, 찔린 곳을 지혈하려 손을 뻗기도 전에 허리에 다시 같은 감각이 들이친다. 이 미친놈, 사람 잡으려고 작정했구나! 하필이면 기습을 허용하고 등 뒤에서 일어난 일이라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근거리여서 팔을 휘둘러도 별 타격이 없고, 어딜 잡아챌 수도 없었다. 어처구니 없이 두 번 더 칼에 찔렸다. 이명으로 시끄러운 귓속에서 이런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어째서, 너네만… 해?”

찔린 위치가 좋지 않다. 미친 새끼, 도대체 얼마나 긴 칼로 쑤셨는지 배 안쪽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났다. 흐르는 피가 차갑고 움직일 수가 없어서 이러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도력을… 운용해야하는데, 어떻게 하는 거더라?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시야가 온통 붉다. 몸이 무거워. 뭐라도 해야하는데, 일어날 수가…. 초면의 상대에게 칼을 휘두를 정도면 나로 안 끝날텐데.

갑자기 든 생각과 동시에 옆으로 엎어진 시야에 놈의 발이 들어왔다 앞으로 나아가며 사라졌다. 감기려는 눈꺼풀을 힘겹게 잡아올리고 눈동자를 굴려 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사람이 있을 가게 쪽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순간적으로 동생이 맞고 왔던 어느 여름날이 떠올랐다. 비슷한 꼬라지를 두 번이나 볼 성 싶으냐. 피해는 나만으로 끝내야한다. 뭐든 나 하나로 끝내!

“끄으윽….”

물먹은 솜처럼 묵직한 팔을 들어올려 바닥을 짚고 일어선다. 제 피로 붉게 물들어 미끄러운 타일 바닥 때문에 제대로 힘을 넣기 힘들고 상처부위에서 피가 쏟아지며 안에서 무언가 딸려나오는 감각이 느껴진다. 신경쓸 때인가? 아니다. 나는 해야 할 의무를 완수해야한다. 나 하나만으로 전부 끝내야 해.

사람들이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듯 놈도 아직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네 번이나 칼 맞고 일어서는 새끼가 있을리 없었겠지. 하지만 난 아니라서 안타깝게 되었다. 운도 지지리 없는 새끼, 처음 목표로 지정한 인간이 도사에 지원대 출신인 경찰일 확률은 얼마나 될까. 저놈도 나도 재수가 없지만 다른 이들에겐 행운이 되리라. 일어서고, 두다리로 땅을 짚는다. 밀려드는 고통, 좁아지는 시야는 표적을 하나로 좁혀준다. 묵직한 돌같은 다리를 움직인다.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쏟아지는 피가 웅덩이를 만들고 발자국을 남긴다. 항상 연습했던 것처럼 뒷목을 낚아채고 몸을 돌리는 놈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우당탕! 쿵!! 아악!!!

뭐고? 뭔 일입니꺼? -으악! 사장님?! 사람 다칫다!! 경찰이랑 구급차 불러!!

멀리서 들리는 듯한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발버둥치는 놈을 제압하려고 애쓴다. 간간히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놈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이 꼬라지로 만들었으니 버티기만 하면 끝나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빠져나가 사람들을 해치고 싶어 버둥거리는 꼴이 거대한 해충을 누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던데, 이 거대한 해충은 참으로 지독하게 버둥거렸다. 다리가 뭔가에 찍히는 느낌이 났고, 채 구속하지 못한 손이 뻗어와 팔과 얼굴을 강하게 뜯듯이 할퀴는 감각이 둔하게 들었다. 점점 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도력을 운용하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어떤 지난함이라도 넘겨야하는 것이 도사의 일. 그리 생각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언제 허벅지에 박혔는지 모를 칼을 뽑아 피가 묻어 새빨갛게 물든 칼을 수갑처럼 바꾸어 구속한다. 입을 열어 미란다 원칙을 읊는 제 목소리가 남의 목소리처럼 멀었다. 나는 지금 제대로 말하고 있는걸까? 모르겠다. 하지만 의무는 해내야한다.

“당신…을, 현, 큭…시각, 부로…헉, 살인미수, 현행범으로… 긴, 급 체포…합니다. 변호, 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변명의, 크흑… 기회가, 있...고, 불, 리한 진술...을 거부, 쿨럭. -할 수, 있으며… 체포적부심을, 법원에… 신청할 수 있습니다.”

속에서 터져나오는 피 섞인 무언가를 입으로 토해내며 겨우 문장을 완성한다. 이제 다 끝났다. 그대로 놈의 위로 쓰러졌다. 귀 옆에서 무어라 막 외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진 않는다. 그저 피곤하고… 졸려서. 며칠 못 잤더니 이러는건가? 힘겹게 붙들어 둔 눈꺼풀이 느리게 뜨였다 감기기를 반복한다. 놈이 자꾸 일어나려 내 몸을 밀어내는 것 같은데 아 씨, 몰라… 피곤해죽겠어. 잘래.

“아저씨… 죄명이 살인이 안되게 기도나 해.”

마지막으로 말할 수 있었던 가장 명확한 문장을 중얼거리고 눈을 감았다. 의식이 저 밑바닥 어딘가로 가라앉으며 한동안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맞다. 애 선물… 아직 못 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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