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요

[레이츄린] 살아가세요 행운을 빕니다

. by 마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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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는 거야."

고개를 들어 올리자 문가를 짚은 채 다급히 숨을 몰아쉬는 레이시오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이곳저곳 살피더니 사무실로 들어왔다. 정리하기 위해 바닥에 늘어뜨린 물건을 피해 다가오는 걸음이 초조해 보였다.

"뭐하냐니. 사무실을 정리하잖아."

"그러니까 왜 갑자기 정리하는지 묻는 거다."

"못 들었어? 나 회사 그만뒀어."

레이시오는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트렸다. "그만둬? 컴퍼니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흉악했다.

"왜 갑자기?"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어벤츄린으로서는 사내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동업자가 회사를 그만두고 사라진다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어벤츄린은 저의 전부였던 신분을 내려놓기까지의 고뇌를 단순히 축약해 말했다.

"조금 쉬고 싶어서."

그러니 발 좀 들어줄래. 허리를 숙여 레이시오의 발밑에 깔린 서류를 빼냈다. 미색 종이에 구둣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다행히 중요하지 않은 서류였다. 어벤츄린은 종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후 폐기해야 할 서류함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한참 말 없이 바라보던 레이시오가 가까이 다가왔다. 떨어진 서류를 줍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여길 떠나면 어디로 갈 거지? 돌아갈 장소는 있나?"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참견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어벤츄린은 붙잡힌 팔을 털어내고 팔짱을 끼었다.

돌아갈 장소. 한 번쯤 생각해보았으나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했다. 사직계를 제출하고 배정 받은 기숙사를 퇴소하고 사무실까지 정리했지만, 앞날에 대한 뚜렷한 방향은 없다. 어디든 발길 닿는 대로 가지 않을까 하는 낙천적인 생각과 오로지 생각을 멈추고 휴식하고 싶다는 지독한 피로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아무 말 않자 레이시오는 크게 한숨 쉬었다. 훌륭한 직장을 제멋대로 걷어찬 아둔한 남자를 보기 싫은지 석고상을 뒤집어썼다. 그대로 떠날 줄 알았으나 몸 돌리는 대신 웅크리고 앉아 떨어진 서류를 집었다. 실제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무미건조한 얼굴로 내용을 읽고 서류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신이 읽는 거 대외비인데. 그러나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에 뒀으나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다트판을 떼어내고, 고객에게 선물 받은 휘황찬란한 장식품을 치우고, 개인용 물품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워낙 개인 물품이 적어서 청소는 금방 끝났다.

어벤츄린은 책상을 짚은 채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간 사무실을 바라보았다. 전부 비우고 버렸으니 어벤츄린이라 불렸던 사내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사무실을 나간 순간 자신은 카카바샤로 돌아가는 것이다. 황무지에서 온 60탄바의 노예 카카바샤. 모든 걸 놓았지만 막연한 불안은 느끼지 않았다.

진중한 친구는 끝까지 정리를 도왔다. 치울 게 많지 않으니 도움은 필요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으나 무시당했다. 제멋대로인 남자는 끝까지 제멋대로구나. 그러나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어도 한때 임무를 함께 했던 동료다. 서투른 다정함은 그 나름의 작별인사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한적한 복도를 빠져나갔다. '어벤츄린’을 그만두었으니 구태여 말 붙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대화의 중심축을 담당하던 사람의 입이 멈추었으니 복도는 적막했다.

커다란 보폭을 좁혀 느리게 쫓아오는 레이시오는 이상하게 불안정해 보였다. 몇 번이고 팔짱을 고쳤고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헛기침했다.

어벤츄린은 참지 못하고 뒤돌았다.

"할 말이라도 있어?"

"어벤츄린. …아니, 이제 어벤츄린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군. 내가 널 어떻게 불러야 하지?"

"그냥 어벤츄린이라고 불러. 아직 전임자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겠지."

"하지만 어벤츄린은 이명이지 네 이름이 아니잖아.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건가?"

그럴 필요가 있나. 더 이상 만나지 않을 텐데. 고개를 돌려 의아하게 바라보자 레이시오는 또 다시 깊게 한숨 쉬었다.

"됐어. 이름은 차차 듣도록 하지. 그나저나 오늘 밤 어디서 머무를 생각이지? 기숙사를 나왔다면 갈 곳이 없을 텐데?"

"글쎄."

"노숙할 생각이라면 그만둬. 아직 바깥은 추워."

어벤츄린은 고개를 돌려 전면 유리로 된 창 너머를 응시했다. 캄캄한 어둠 속 눈부신 야경이 보였다. 매서운 바람에 창문이 얕게 흔들렸다. 유리에 손 얹자 소름 끼치도록 낮은 온도가 느껴졌다. 그러나 고작 손발이 얼어붙는 추위일 뿐이다. 모래언덕의 서늘한 밤과는 견줄 수 없다.

"걱정 마. 몸뚱이 하나만은 튼튼하니까. 춥다고 해도 고작 감기에 걸릴 뿐이야."

"어벤츄……."

"여기서 이만 헤어질까."

어벤츄린은 상대의 말을 끊고 빙글 몸을 돌렸다. 뒤따라오던 사내를 마주 보고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레이시오는 내민 손을 맞잡았다.

어벤츄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외였다. 결벽한 남자가 스스로 손을 맞잡을 줄이야. 뒤엉킨 손바닥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밀려왔다.

"사무실 정리를 도와줘서 고마워. 보답하지 못해 미안하군. 안타깝게도 회사를 그만둬서 수중에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가 됐거든. 그렇지만 말뿐인 감사 인사는 섭섭하니 시일 내로 보답할 방법을 생각할게."

어벤츄린의 말이 사내의 신경을 거슬렸는지, 레이시오는 의아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빈털터리가 됐다고? 네 재산이 고작 한두푼이 아닐 텐데."

"응? 아, 물론 재산은 남아 있지만, 난 컴퍼니의 소유물이라 개인의 물건은 전부 회사의 자산으로 취급되거든. 회사에 있을 땐 그들의 재량으로 사용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안 될 일이지."

어벤츄린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자리에서 내려온 즉시 사형이었지만 나의 다정하신 주인께서는 아량을 베풀겠다고 하시더군. 붉은 동전 여섯 닢을 뛰어넘는 막대한 가치를 창출해냈으니. 그동안 열심히 일했던 보답이라고 할까."

어벤츄린은 작게 웃었다. 무미건조한 웃음이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 돈으로 날 샀어.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되었지."

60탄바에 팔려 온 노예의 값이 이토록 치솟다니 웃긴다니까.

석고상을 쓴 채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레이시오는 가면을 벗었다. 단단한 가면 아래 드러난 얼굴은 참담했다.

"그렇다면 수중에 아무것도 없다는 소린가? 넌 그런 상태로 길거리에 나앉으려고 했고?"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됐네."

"내 집으로 와."

"뭐?"

레이시오는 힘주어 또렷이 말했다.

"우리 집에 와. 사용하지 않는 방이 여러 개 있어. 길 잃고 헤매는 아이를 재우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집이다. 불편하지 않을 거야."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 이상한 비유에 어벤츄린은 웃었다.

"괜찮아. 민폐를 끼칠 순 없지. 게다가 낯선 사람이 집에 있으면 불편하잖아."

"됐으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잡고 성큼성큼 앞섰다. 난폭하게 잡아당긴 탓에 어벤츄린은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레이시오는 멍청하게 평지에서 비틀거리는 사내를 위해 속도를 늦췄다.

아프니까 손 좀 놓아줘. 부탁했지만 단단히 얽힌 손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회사에서 납치 당해 레이시오의 차량에 탑승했다. "멍청한 녀석! 이 추운 겨울에 신용포인트도 없이 밤거리를 헤매려고 했나? 그러다가 범죄에 휘말리면 어떡하려고? 내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후……." 레이시오는 붙잡은 남자가 도망치지 않게 안전벨트를 매주며 한참을 중얼거렸다.

화려한 장신구와 옷을 벗고 욕조에 몸을 담갔을 때, 어벤츄린은 비로소 자신의 상황을 인식했다. 장신의 남자가 발을 뻗을 수 있을 만큼 드넓은 욕조에 무릎을 굽혀 앉아 천천히 눈만 굴렸다. 공간을 뿌옇게 채운 수증기와 가슴선까지 받은 따뜻한 물. 수면에 띄운 앙증맞은 아기오리. 레이시오가 입욕제를 풀어준 덕분에 욕조엔 몽실몽실한 거품이 가득하다. 어벤츄린은 느릿하게 수면을 휘휘 저었다. 평소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한 시간이었다.

곳곳에서 레이시오의 향이 났다. 안정되는 것도 잠시, 아름다운 장소에 흙 묻힌 발을 들인 것 같은 불쾌감이 치솟았다. 어벤츄린은 얼어붙은 몸을 녹일 생각 않고 서둘러 몸을 씻었다. 

레이시오가 준비해 둔 가운은 품이 넉넉하다 못해 흘러내릴 지경이었다. 자꾸만 기우는 어깨선을 붙잡고 욕실을 빠져나오자 눈앞에 레이시오가 있었다. 손에는 커다란 수건을 들고.

"머리를 말릴 줄도 모르나?"

어벤츄린은 또 다시 레이시오에게 붙잡혀 얌전히 머리털을 맡겨야 했다. 험상궂은 표정과 달리 손길은 부드러웠다. 물기가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꾹꾹 누르고 헤어드라이어를 들어 뿌리부터 천천히 말렸다. 어벤츄린은 제 머리와 목덜미를 더듬는 손길에 뻣뻣이 굳은 채 끝나지 않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얼추 말리고 나서야 드디어 풀려났다. 어벤츄린은 레이시오가 놓아주자 후다닥 일어나 멀찍이 몸을 떨어뜨렸다. 벽면에 등을 붙이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상대를 살폈다. 상대가 돌변했을 때를 대비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분위기에 휩쓸려 이미 너무 많은 부분을 허용했지만 그 이상은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두려웠다.

레이시오는 마치 겁먹은 고양이를 다루듯 다가오지 않았다. 자리에 멈춘 채 물었다.

"많이 늦었지만 저녁은 먹을 건가?"

어벤츄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먹어."

그럴 거면 왜 물어 본 거야?

늦은 저녁 식사는 아주 조용히 이루어졌다. 레이시오는 원래 말이 없었고 어벤츄린은 더 이상 동업자가 아닌 사내와 할 말이 없었다. 서로 대화할 마음이 없으니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렸다.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어벤츄린은 그릇에 놓인 음식을 묵묵히 씹어 삼키는 데 집중했다. 한입 크기로 잘린 당근을 포크로 찌르고 고기를 삼키고 마련된 물로 가볍게 입을 헹구었다. 탁자를 가득 채운 음식은 전체적으로 불균형한 섭식하는 자를 고려한 식단이었다. 그러나 소식하는 어벤츄린은 레이시오가 덜어준 그릇만 겨우 비웠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레이시오의 뱃속에 들어갔다.

식사 도중 레이시오가 "음식이 입에 맞나?" 하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으로 대답했으나 사실 음식의 호불호를 만들 만큼 식량이 풍족한 행성에서 자라지 못했다.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식사를 마친 후 따뜻한 물과 풍족한 음식으로 노곤해진 몸을 소파에 뉘었다. 직접 음식까지 대접한 집주인은 물기가 묻은 접시를 마른 천으로 닦는 중이었다.

어벤츄린은 그를 돕겠다고 말했지만 제지당했다. 이렇게 보여도 생활력에는 자신 있다. 은혜를 갚기 위해 설거지도 빨래도 집 청소도 자신이 하겠다고 말했지만 레이시오는 끝끝내 아무 일도 주지 않았다. 손님으로 초대받았으니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불명의 말을 반복했다.

"어벤츄린, 졸리면 먼저 자도 좋아."

이 사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비어 있는 방이 많으니 좋을 대로 골라. 거실 맞은 편 복도에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을 추천하지. 조용하고, 낮에는 해가 들어 나무의 그림자가 아름답게 드리우지."

허벅지까지 덮는 앞치마를 입은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다정한 웃음이 드리웠다.

"혹시 혼자 잠들지 못하나?"

어벤츄린은 체격에 맞지 않게 커다란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 헤드에 쌓아둔 베개와 오리 인형을 끌어안고 뻣뻣이 굳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내는 어벤츄린을 마치 어린아이 돌보듯 대했다. 두터운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리고 어둡지 않게 불빛의 조도를 조절했다. 이마를 덮은 밀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눈 감고 문 닫히는 소리만을 기다렸다. 어벤츄린은 사내가 나가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가득 채운 인형이 우르르 떨어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라서 머리가 복잡했다. 레이시오는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얼른 자라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언제나 밤늦게까지 업무하다가 새벽녘에서야 겨우 잠드는 몸이었다. 푹신한 침대와 베개가, 인형에 둘러싸인 잠자리가 지독히도 어색했다.

불편한 장소임을 인식할수록 잠이 더욱 멀어졌다. 단말기라도 있으면 시간 때우기 좋겠지만 퇴사할 때 모든 물건을 제출해 아무것도 없었다. 어벤츄린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소리를 낮춰 조용히 문을 열었다.

내일도 일정이 있을 테니 잠들었다고 생각했던 사내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경줄을 늘어뜨리고 서류를 읽고 있었다. 레이시오는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렸다.

"잠자리가 불편한가?"

"아니, 그런 건 아냐."

"그런가."

이유를 캐묻고 타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레이시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소 지은 채 옆자리를 톡톡 쳤다. 옆에 앉으라는 의미였다. 어벤츄린은 망설이다가 푹신한 가죽에 엉덩이를 붙였다.

"잠이 오지 않는다면 영화라도 볼까. 좋아하는 게 있나?"

"영화?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모르겠어. 그런데 내일도 출근하는 거 아냐?"

"걱정 마. 당분간 휴가를 갖기로 했으니."

"나 때문에?"

"설마. 내가 쉬고 싶어서 쉴 뿐이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런가? 그런 거구나. 어벤츄린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밤중의 상영회가 시작되었다. 영화는 전적으로 어벤츄린의 취향에 맞춰 골랐다.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대화를 위해 유행하는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건 어때? 온갖 소음과 폭음이 난무하는 오토바이 추격 장면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그렇다면 이건?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가 잔뜩 나오는 애니메이션이었다. 만화 영화를 볼 만큼 자신의 정신연령이 어리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수많은 예고편을 봤지만 끌리는 영화가 없었다. 쓸모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아서 결국 아무거나 선택했다.

어벤츄린이 선택한 영화는 불행한 남자의 일생을 그린 이야기였다.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직장까지 잃은 남자는 사고로 기억까지 잃었다. 눈을 뜨니 모르는 장소였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도 처음 보는 얼굴뿐이었다. 의사는 사무적인 어투로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눈 떴더니 몸뚱이만 남기고 일생의 기억을 전부 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혼란은 있어도 마음을 좀먹는 불안은 없었다. 오로지 고통뿐인 삶이었다. 지난한 인생 중 고통만을 덜어냈으니 새로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기억을 지운 남자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았다. 고난을 모르듯 웃었고 사람을 쉽게 믿었다. 자신을 도울 새로운 인연도 얻었다.

이상향을 그린 듯한 이야기였다. 고작 기억을 덜어냈다고 삶이 바뀔까. 의문이 들었다. 어벤츄린은 옆에 앉은 사내를 곁눈질로 살폈다.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태평한 전개에 사내는 어떤 모습을 보일까. 지루해할까. 예상과 달리 레이시오는 진중하게 영화를 시청했다.

영화는 결말에 치닫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왔다. 어벤츄린은 지루한 영화 대신 레이시오를 훔쳐보느라 내용에 집중하지 못했다.

"재밌었나?"

"응. 나쁘지 않았어."

감상은 그게 전부였다. 건조한 소감에도 레이시오는 깊게 웃었다. "그래. 나쁘지 않은 이야기더군." 레이시오는 오늘따라 웃음이 많았다. 웃는 얼굴이 신기해 오래도록 바라보자 그는 의아한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어벤츄린은 입을 크게 벌려 하품했다. 시스템 시간으로 새벽 네 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깨어 있는 건 드물었다. 평소였다면 약물을 사용해서라도 잠들었을 시간이었다. 목적 없는 삶이란 이리도 방탕하구나. 실없는 생각하며 무겁게 내려온 눈꺼풀을 문질렀다.

"졸리나?"

레이시오는 눈꺼풀을 비비는 손을 다정히 떼어냈다.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자."

"벌써 자고 싶지 않아."

"영화를 더 보고 싶은 건가? 내일 일정을 비워뒀으니 느지막이 일어나 식사하고 온종일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레이시오는 팔꿈치를 붙잡아 부드럽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장 안쪽 방으로 어벤츄린을 이끌었다. 두터운 이불을 들쳐 어벤츄린을 밀어 넣고 꼼꼼히 이불을 덮었다. 바닥에 떨어진 인형을 안겨주었다. 이마를 어루만지며 '좋은 꿈 꾸길' 다정히 속삭였다.

눈을 감았다. 수면을 유도하며 깊이 호흡했다. 정신이 가라앉으며 얕은 잠에 들었다. 미동 없이 잠든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깼다. 어벤츄린은 웅크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눈 뜨자 꿈을 장악하던 악몽은 빠르게 흩어졌다. 그러나 불쾌한 감각은 확실히 몸에 남았다.

시계도 단말기도 없어서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어벤츄린은 몸을 웅크리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해가 떠오르고 나무의 그림자가 새하얀 시트에 드리웠다. 레이시오가 말했던 대로 흩어지는 빛줄기가 아름다웠다. 커튼 사이로 반짝이는 빛을 망연히 응시했다. 눈이 부셔 미간을 찌푸렸다.

어벤츄린은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밤새 악몽을 꾸고 깨어나길 반복했다. 오래 눈 감고 있었으나 깊게 잠들지 못해 육체에 쌓인 피로는 그대로였다. 피로가 눈꺼풀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혼곤했다. 이대로 눈 감은 채 평생 잠들고 싶었다. 

멍청한 소리 마. 어벤츄린은 자신을 다그쳤다. 게으르게 누워 있는 사이 세상은 바쁘게 돌아간다. 일거리가 산더미같이 쌓인 책상에 새로운 업무가 쌓인다. 그 누구도 자신의 업무를 대신해 주지 않으니 맡은 일은 확실히 해야 했다. 어벤츄린은 무거운 머리를 흔들며 일정을 복기했다.

밤새 쌓인 업무용 메일을 회신하고 급한 연락이 오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그 뒤에 가볍게 아침 식사하며 오전에 있을 회의 자료를 검토한다. 눈을 감은 채 평평한 협탁을 더듬던 어벤츄린은 의아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항상 잠들기 전 제자리에 두었던 단말기가 없었다. 낮은 협탁에는 단말기 대신 취침용 등과 물기가 흥건히 흘러내린 물컵이 놓여 있었다.

아. 일정을 계획하며 바쁘게 돌아가던 머리가 멈췄다. 갑작스럽게 생긴 빈 공간에 얼기설기 짜인 잡념이 흘러들었다. 

며칠 전. 어벤츄린은 충동적으로 사직계를 제출했다. 사무실을 정리하던 도중 레이시오를 만났다. 의도를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납치당해 그의 자택에 끌려왔다. 그 뒤 보송보송하게 씻겨져 레이시오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그의 침대에서 잠들었다.

"아……."

빗질하지 않아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한숨 쉬었다. 정신에 달라붙은 수마가 단숨에 날아갔으나 마주한 현실 앞에 피로가 더 짙어졌다.

어벤츄린은 서늘한 대리석 바닥에 발을 내렸다. 벽면에 머리를 기울인 채 가지런히 놓인 물컵을 응시했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없던 물건이다. 밤새 잠을 설쳤는데 도대체 언제 두고 갔을까. 어째서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을까.

마치 생존을 포기한 듯한 덜떨어진 행동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어벤츄린은 언제나 정신과 육체를 날카롭게 벼르며 살았다. 타인과 같은 공간에서는 호흡조차 의식했으며 인기척을 느끼면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어렸을 적부터 도피 생활을 일삼느라 몸에 달라붙은 생존본능이었다. 유약한 몸은 표적이 되기 쉬우니 혹독한 경험으로 뼈저리게 몸에 각인시킨 것이다. 그 본능이 레이시오의 앞에 무너졌다.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난 안심감 때문일까. 상대가 레이시오였기 때문일까. 어벤츄린은 이미 답을 알았다. 세심한 다정이 경계심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렇지만 너무 마음을 내어줄 수도 없었다. 그 다정함이 자신의 기대와 어긋난다면 너무 아플 테니까.

힘없이 내려간 입꼬리를 추어올렸다. 피로한 얼굴에 미소를 붙였다. 불확실한 다정함에 모든 걸 내어줄 수는 없으니 최소한의 벽을 세웠다. 그러나 어설픈 노력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힌 상대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일어났나?"

"아, 응."

어벤츄린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앞치마를 입은 레이시오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고소한 버터 향기와 갓 구운 빵 냄새가 흘러들었다. 입맛을 돋우는 냄새를 맡은 몸은 빠르게 각성했다. 잡념에 짓눌려 있던 허기를 자각하고 배가 작게 고동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를 들은 레이시오가 웃었다.

"벌써 낮이야. 너무 오래 잠들었어."

건조했으나 타박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원래 잠이 많은 편인가?"

어벤츄린은 고개를 저었다. 따지자면 잠이 없는 편이다.

"그렇다면 피곤했나 보군. 넌 피로에 자각이 없으니 스스로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 좋아. 어제처럼 늦게 잠들면 다음날 더 피로할 거다."

레이시오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헝클어진 이부자리를 다듬었다. 주름진 시트를 팽팽하게 펼치고 바닥에 떨어진 베개와 인형을 주웠다. 커튼을 열자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열린 창 사이로 서늘한 겨울 공기가 밀려들었다.

"아침을 먹으려면 얼른 세수하고 와. 어제 보니 많이 먹지 못하던데 토스트 정도는 충분히 먹을 수 있겠지?"

어벤츄린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문장에 휩쓸려 바보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에 들어가 얼굴을 씻고 식탁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놓였다. 

식빵을 두툼하게 잘라 구운 프렌치 토스트에 신선한 딸기와 블루베리가 올라갔다. 취향에 맞춰 곁들여 먹을 수 있도록 요거트와 딸기잼, 메이플 시럽이 작은 그릇에 담겨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레이시오는 중간에 놓인 거대한 샐러드 볼을 집어 엄청난 양을 앞접시에 덜었다. 나머지는 어벤츄린이 먹으라며 앞으로 내밀었다. 어벤츄린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차려진 음식을 내려보았다.

"왜 그래?"

커틀릿을 들어 크게 식빵을 잘라낸 레이시오가 물었다.

"양심에 찔려서 그래. 네가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잠만 잤잖아."

"몇 번을 말해. 신경 쓸 필요 없어. 너는 이 집에 초대받은 손님이다. 머무를 동안 배부르게 먹고 느긋이 쉬기만 하면 돼."

커틀릿을 건네받은 어벤츄린이 난처하게 웃었다.

"난 평생 그런 대접을 받아본 적 없어. 불편하다고."

"그렇다면 이제 익숙해지면 되겠군. 넌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야."

 아무도 그런 말을 해준 적 없는데. 내가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될까.

어벤츄린은 어설프게 커틀릿을 움켜쥐었다. 혼자였다면 손과 얼굴에 묻히며 너저분하게 식사하겠지만 레이시오와 함께하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를 따라 하듯 나이프를 세웠다. 포크로 빵 끄트머리를 짚고 칼을 밀어 넣었다. 나이프는 고기를 썰 만큼 충분히 날카로웠지만 어설픈 움직임 탓에 제대로 썰지 못해 자꾸만 빵이 밀려났다.

레이시오가 토스트를 절반 먹는 사이 어벤츄린은 한 입밖에 먹지 못했다. 끙끙대는 모습을 보다 못한 레이시오가 대신 토스트를 한입 크기로 잘라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벤츄린은 미약한 수치심을 느꼈다.

"고마워. 아직 아무것도 갚지 못했는데 네게 갚아야 할 빚만 늘었네."

입안에 남은 음식을 전부 씹어 삼킨 레이시오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네가 말하는 그 빚 말인데. 갚을 방법은 내가 결정해도 되겠지?"

"응. 당연하지. 뭐 필요한 거라도 생겼어?"

어벤츄린은 커틀릿을 내려놓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당분간 같이 어울려 줬으면 좋겠어."

"어울려? 내가 필요한 일이야? 아니면 정보를 원해?"

"말 그대로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줘. 함께 식사하고 나들이 가자.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전시회가 있어. 영화를 본 적 없다고 했으니 영화관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어벤츄린은 레이시오의 말을 한참 곱씹었다.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너와 함께 식사하고 나들이 가고 영화를 보는 게 너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

"이득 같은 건 없어. 그저 네가 빚을 갚고 싶다고 말하니 나름대로 갚을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을 뿐이야."

"정말 그것 뿐이야? 그걸로 돼?"

"그것만으로 충분해." 

난 너와 함께하고 싶어.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어벤츄린은 표정을 숨기듯 턱을 괴었다. 남긴 블루베리를 포크로 짓눌렀다. 과육이 작게 뭉그러져 과즙이 튀었다. 무슨 의도일까. 당신은 내게 무얼 바라는 걸까. 한참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충동이었다. '어벤츄린’의 자리를 내던지고 상층부와 담판 지어 자유를 되찾았던 그 모든 과정을 충동적으로 저질렀다. 치밀하게 살아야 했던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린 감정적 결단이었다. 정식으로 사직계가 수리됐을 때 그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통쾌함과 자유를 느꼈다. 흥분한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인수인계서를 작성하면서도 흥분은 가실 줄 몰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토파즈가 웃는 얼굴로 찾아왔다. 앞으로 무얼 하고 싶어요? 나는……. 그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자리에 멈추어 선 채 숨을 골랐다. 난 무얼 하고 싶을까. 수중에 남은 돈은 없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다. 모성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방법을 모른다. 죽은 가족들의 얼굴은 이미 흐릿해 보이지 않았다. 들뜬 가슴이 내려앉았다. 난 이토록 치열하게 달려 어디에 도달하고 싶었을까. 

카카바샤는 곧 자신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돌아보지 마. 멈추면 안 돼. 언젠가 누이가 했던 말로 자신을 타이르며 평생 목표를 위해 달려왔다. 죽음에 삼켜질까 봐 필사적으로 달렸다. 탈진하여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서야 비로소 고단했던 인생을 돌아봤다. 자신의 인생은 남에게 부여받은 목표로 연명하는 삶이었다. 한 번도 제 삶을 가져본 적 없었으니 주어진 삶을 살아갈 방법도 몰랐다. 카카바샤는 드넓게 펼쳐진 길 앞에 길을 잃고 헤맸다. 그럴 때 레이시오가 자신을 찾아왔다. 기뻤다. 믿음직스러운 그가 자신에게 새로운 역할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시오를 따라왔다. 그가 원하는 대로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함께 식사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하며 영화를 골랐다. 그가 부여할 새로운 목표를 고대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레이시오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느긋이 휴식하길 바랄 뿐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반복했다.

당신은 도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야. '어벤츄린’을 그만둔 이상 카카바샤는 유용하지도 쓸모 있지도 않다. 그 무엇도 돌려 줄 수 없다. 아무것도 줄 수 없다면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 카카바샤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삼켰다. 자신을 집어삼키고 잘게 부수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차단했다. 모르겠다. 알 수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카카바샤는 생각을 멈춘 채 레이시오를 응시했다. 익숙하게 커틀릿을 사용하는 모습이 참으로 우아했다. 교수님은 이런 데서조차 교육을 잘 받았구나. 실없는 감탄을 흘렸다.

카카바샤는 커틀릿을 내려놓았다. 그릇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벌써 다 먹었나?"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한참 남았잖아."

"배불러서 더 이상 못 먹겠어."

"조금만 더 먹어둬. 밥 먹고 외출할 거니까."

"응? 오늘은 집에서 보낸다고 했잖아. 볼 영화도 생각해 뒀는데."

"그렇지만 하늘을 봐."

카카바샤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응시했다. 너머에 새파란 풍경이 펼쳐졌다.

"영화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렇게 좋은 날에 집에만 있기 아쉽지 않나?"

"어디 갈 건데?"

레이시오는 냅킨으로 입을 닦고 말했다.

"공원."

레이시오가 말한 공원은 회사 근처에 있는 넓은 호수 공원이었다. 카카바샤도 잘 아는 장소였다. 커다란 원형 유리 돔을 씌운 공원은 온도가 조절되어 계절과 상관없이 사시사철 꽃이 피었다. 조경이 잘 갖추어져 아름답고 안에 휴식 공간이 많아 점심 먹고 산책하기에 딱 좋다고, 부하직원이 떠들어댔다. 같이 가실래요? 권유 받은 적 있지만 모두 거절했다. 점심도 거르고 사무실에 틀어박혀 일만 하는 카카바샤와는 상관 없는 얘기였다. 굳이 시간 내어 가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그런 장소를 다른 사람도 아닌 레이시오 교수와 함께 왔다. 손에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바깥은 아직 날이 추워 서늘했지만 공원은 따뜻했다. 덕분에 평일 오후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대낮부터 할 일도 없나. 잔디를 깔고 누운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유유히 산책로를 거닐었다. 가족의 손을 붙잡고 빈손에는 돗자리와 바구니를 들었다. 아이들은 강가에 매달려 오리에게 먹이를 건넸다. 카카바샤는 낯선 세계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손등을 건드는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

레이시오가 손목을 잡아 끌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나란히 잔디밭을 걸었다. 

레이시오가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자리를 고르는 사이, 카카바샤는 목을 꼿꼿이 세워 허공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다. 저에게 잠깐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시선이 에브긴 특유의 화려한 눈동자를 보는지, 눈앞에 지나간 사물을 무심히 일별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카카바샤는 불쾌감을 숨기고 능청스럽게 웃었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네. …선글라스 끼고 올걸."

"햇빛이 그렇게 강한 것 같진 않다만."

엉뚱한 대답에 웃음으로 흘려 넘겼다.

레이시오는 그늘이 드리운 나무 아래에 자리 잡았다. 부드러운 잔디밭에 풀썩 주저앉아 바구니에서 책을 꺼냈다. 카카바샤도 마찬가지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다리를 끌어안고 무릎에 턱을 올렸다. 아이들이 뛰노는 광경을 바라보는 대신 시선을 내려 말끔한 구두를 응시했다.

가볍게 차려입은 사람들과 달리 카카바샤의 차림은 영락없는 직장인이었다. 체구에 딱 달라붙은 셔츠와 반듯한 정장 바지, 끝이 뾰족한 구두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았다. 옷장에 걸린 수많은 옷 중에 가벼운 옷차림이 없다니. 그 레이시오조차 캐쥬얼하게 입었는데. 카카바샤는 난생처음으로 일만 하고 살았던 자신을 원망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사적으로 사람을 만난 적 없고, '어벤츄린’은 언제나 화려한 치장을 요구받았다.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무대에서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선 그 누구보다 화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 모든 게 이제와서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오래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구두를 벗었다. 값비싼 재킷과 조끼도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왁스를 묻힌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헤집었다. 셔츠 단추 두어 개를 풀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이제 뭘 해야 할까. 레이시오는 책에 푹 빠졌고 자신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흐르는 강물을 질리도록 바라보는 건 지루했다. 카카바샤는 고개를 돌렸다. 답을 줄 사람이 옆에 있었다.

"레이시오. 이제 뭘 해야 해?"

"가만히 쉬어."

레이시오는 쉽게 답을 내렸다. 

가만히 쉬라고. 어떻게. 카카바샤는 단 한 번도 가만히 휴식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바쁜 사람이었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다음 수를 생각해야 했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고민하며, 지루함에 몸 비트는 과분한 삶을 살았던 기억은 없었다. 평범한 일상은 초조함마저 불러일으켰다.

레이시오는 그런 불안 따위 모르듯 굴었다.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선선한 바람과 발밑에 깔린 부드러운 잔디를 당연하게 여겼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온통 이해되지 않는 일 투성이었다.

초조하게 손가락만 꼼지락거리자 레이시오가 읽던 책을 덮었다.

"심심한가?"

이 초조함이 지루함에서 비롯되었을까. 카카바샤는 잘 알지 못했지만 아예 입을 다물 바에는 레이시오와 대화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심심해. 날 공원에 데려다 놓고 혼자서 책만 읽을 거야? 같이 얘기하자."

마치 아이 같은 투정이었다. 다 큰 성인의 투정에도 레이시오는 반갑게 웃었다.

"정 심심하다면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까."

"응. 아이스크림 먹자. 먹을래."

눈앞에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가족이 지나갔다. 아이는 부모의 손을 잡고 남은 손에 높다란 아이스크림을 들었다. 그들의 얼굴엔 화사한 웃음이 가득 피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화목한 광경이었다. 카카바샤는 벤치에 홀로 앉아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 레이시오를 기다렸다. 두 다리를 흔들며 잠시 멀어진 사내를 떠올렸다. 머지않아 그가 양손에 높다란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타났다. 혹여나 넘어져서 아이스크림을 엎을까 봐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퍽 진중했다. 웃음이 나왔다.

"자."

갖가지 토핑을 올린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난생처음 보는 높이에 감탄했다. 다섯단을 쌓아 올린 아이스크림을 어디서부터 먹어야 할지 몰라 곤란했다. 레이시오는 고민 없이 가장 윗단을 베어 물었다. 카카바샤도 가장 윗단을 베어 물었다. 달았다.

"입가에 묻었어."

레이시오가 뺨을 톡톡 두드렸다. 손으로 문지르자 반대쪽이야, 하고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반듯이 접은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마치 아이가 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느긋이 산책로를 걸었다.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입안에 남은 아이스크림이 달았다. 카카바샤는 평화로운 광경을 눈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한가롭네."

아이스크림을 들지 않은 손을 느리게 주먹 쥐었다 펼치기를 반복했다.

"교수 양반을 데리고 헛되게 돌아다니다니. 죄책감이 들 정도야."

"헛된 시간으로 느껴지나?"

"잘 모르겠어."

어벤츄린. 레이시오는 걸음을 멈추었다. 잔잔히 이름 부르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사람은 오로지 효율적으로만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야. 가끔은 머리를 비우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어. 인생은 기나긴 여정이다. 아무리 단단한 사람일지라도 쉼 없이 걸을 수 없지. 가끔은 멈추고 뒤돌아볼 시간도 필요해."

레이시오는 말을 멈추고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지 않으면 무너질 거야."

"난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잘 버텼어."

목구멍이 모래를 삼킨 듯 까끌까끌했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을 입에 욱여넣었다.

레이시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눈을 깊게 내리감고 부러 가볍게 덧붙였다.

"어렵지 않은 일이야.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면 지금이라도 배워보는 게 어때. 머리를 비우고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닐 거야."

레이시오는 카카바샤의 손을 잡고 잔디밭으로 이끌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어깨를 내리눌렀다. 몸은 저항 없이 기울었다. 뒤통수에 단단한 허벅지가 닿았다. 시선을 올리자 시야 가득히 레이시오가 보였다.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사내는 다정히 웃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카카바샤는 레이시오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커다란 손이 눈꺼풀을 감겨 주었다. 다정히 가슴을 도닥였다. 아이를 잠재우는 듯한 손길에 깊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자장가를 읊조리며 잠에서 깼다. 눈꺼풀 사이로 붉은빛이 스며들었다. 카카바샤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간의 흐름에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미안해. 어제 제대로 잠을 못 자서……."

목소리에 당혹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레이시오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혼자서 지루했을까. 화났으면 어떡하지. 겁 먹은 얼굴로 고개 돌리자 잠든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카카바샤는 고요히 잠든 얼굴을 응시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지만 여전히 주변에는 손을 맞잡고 산책로를 거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카카바샤는 그들의 얼굴에 차오른 아늑함을 보았다.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지금 자신처럼.

신기한 일이었다. 평생 숨 가쁘게 살았다. 고단한 일생에서 즐거움을 느껴본 적 없었다. 언제나 목숨 건 도박을 반복했으며 일에 치여 살았다. 메마른 밤을 들쑤시는 악몽 때문에 밤이 무서웠다. 그러나 지금은 무섭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달려서 도달한 여정의 끝이 이곳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레이시오."

카카바샤는 저를 평온으로 이끄는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가느다랗게 연결된 손가락을 깍지 껴 맞잡았다.

"이만 돌아가자. 계속 잠들었다간 밤에 못 자게 될 거야."

나긋한 목소리에 레이시오는 눈 떴다.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웃고 있는 카카바샤를 응시했다. 커다란 손을 들어 눈꺼풀을 문질렀다. 

"그렇게 세게 문지르면 안 돼."

이번에는 카카바샤가 눈꺼풀을 문지르는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귀여웠다. 카카바샤는 몸을 일으켜 흙 묻은 어깨와 엉덩이를 털었다. 아무렇게나 내던진 구두와 재킷을 들었다.

"어벤츄린."

바닥에 두 다리를 곧게 뻗은 사내가 아이처럼 양손을 뻗었다.

"일으켜줘. 다리에 쥐가 나서 일어나지 못하겠어."

카카바샤가 실컷 베고 누운 탓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오랜만에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하하하! 교수 양반 당신 진짜 귀엽구나!"

레이시오는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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