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자 이야기
꼭, 이야기 해야 해?_비야체 얀의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온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 봐. 볕이 잘 드는 창가 근처의 책상에 엎드려 있던 아이가 눈을 비비적 부비면서 일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얀, 얀 프로이데. 불과 몇 년전만 해도 하 얀, 이라고 불리던 아이가 왜 이름을 바꾸었는가. 이유는 애석하게도 간단했다. 1년 전 복합주택에서 일어난 화재로 일가족 중 혼자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를 맡아줄 일가친척도 없었던 탓에 그는 어린 나이에 보육원에 들어왔고, 다행스럽게도 치료와 그 외적인 것의 복지를 지원받으며 모나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야, 야. 잠꾸러기! 일어났냐? 축구하자, 축구!”
“간식 먹고…….”
“너 그렇게 먹고 자고 하면 돼지 된다?”
“라임 너……. 죽고 싶냐?”
뭐, 애들이 놀다 보면 험하게 말도 하고 그런 법 아니겠나. 하여튼 그는 다른 원생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며, 선생님들의 말도 잘 듣는… 소위 얌전한 아이였다.
“바나나 먹고 싶다…….”
복도를 지나다니면서 그는 뻐근한 뒷목을 쓸었다. 간식시간은 한참 전에 지나버린 지 오래지마는, 과하지 않은 이상 안 줄 선생님들은 아니니까. 그러다 마주친 것은 녹색 머리의 어느 남자. 몇 번인가 먼발치에서 본적은 있지만 제대로 마주한 것은… 얀이 이 남자에게 치료를 받은 후로 거의 처음과도 다름없었다.
“오, 이런.”
“안녕하세요, 아저씨.”
“하하. 좋은 점심, 얀. 잘 잤나?”
“네, 햇볕이 좋아서… …에?”
티, 나나? 얀은 더듬더듬 제 얼굴을 만졌다. 별로 티는 안 나는 것 같은데. 중얼거리고 있으면 남자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말했다.
“이마에 빨갛게 자국났다.”
“아.”
“귀엽기는……. 다리는 좀 어때? 괜찮아?”
“네. 덕분에요.”
그래. 누군가는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마는, 이 남자는 의사다. 그것도 꽤 실력 있는 의사. 얀이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왔을 때에 가장 먼저 달려왔던 사람이었기에, 그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이 남자를 쫓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아들이라고 하던 형과 같이 왔었지. 너무나도 똑 닮았기도 했고, 자신의 또래라 기억하고 있었다. 화목해 보였지. …부러울 정도로. 약간의 상념에 빠져있을 때, 남자는 얀의 곱슬거리는 머리를 헝클었다.
“이 아저씨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딱히……. 별생각 없었는데요.”
“얼씨구, 생각만으로는 은하수도 만들었겠는데? 이 아저씨는 못 속여요~.”
저 자상하면서도 장난스러운 말투, 바쁜 일상임에도 꾸준히 찾아오는 덕에 아저씨는 원생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뭐, 키다리 아저씨만큼은 아니지만. 잠깐 말없이 그 손길을 받고 있자 아저씨의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아저씨는 익숙하게 그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살피다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가봐야겠는걸.”
“바빠요?”
“내가 아니면 누가 가겠어? 또- 힘내서 구해봐야지. 나중에 보자, 꼬맹아?”
다시 한번 머리 위로 따스한 손길이 쏟아진다. 어쩌면 햇살 같기도 한 그 손길은 다급하게 사라지긴 했지마는, 그 온기만은 남아 있었다. 그 남은 온기마저도 좋아서 얀은 자신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나쁘진 않아…….”
그렇게 조금은 짧으면서도 따뜻하고, 그러면서도 그리운 만남이 지나고, 하루, 이틀… 한 달. 그 시간 동안 얀과 남자는 종종 연락하면서 지냈다. 자신의 꿈이라던가, 미래에 어떤 일을 하고 싶다던가, 오늘 식사 메뉴라던가, 그런 소소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남자는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가끔은 얀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뛸 듯이 기쁘기도 했지만, 이미 죽은 아버지가 생각나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서… 약 반년 정도 지났을 무렵.
“얀. …우리 집에 오지 않을래?”
원내의 벤치에 앉아 싸구려 믹스커피를 한 잔씩 마시던 아저씨가 한참의 침묵 뒤에 했던 말이었다. 얀은 다 마신 종이컵의 끝을 잘근잘근 씹어먹다가 잘 못 들었다는 듯이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평소의 장난기를 빼고 진지하게 말했다.
“멋대로 말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네가, 음. 내 가족이 되어줬으면 했거든. 처음 병원에 실려 왔을 때부터, 네가 의식을 차릴 때까지… 꽤 오래 봐 오기도 했고. 계속 마음이 쓰이고, 그러니까… 이런. 준비는 열심히 했는데, 말이 잘 안 나오네.”
남자는 어색하니 웃으면서 얀을 바라보다가 “강제는 아니야! 네 생각이 가장 중요한 거니까.” 하고 덧붙였다. 얀은 이 상황이 갑작스러워 놀라기도 했고, 그럴까? 하고 고민되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해도 될까? 하는 의문도 동시에 들었다. 이 보육원에는 자신보다 한참 먼저 들어온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어째서 자신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오, 그럼 그럼. 당연하지. 원한다면 얼마든지 기다려줄게. 우리 집에… 놀러 와도 좋고? 하하, 사실. 그… 원장님께는 허락 다 받았거든. 편할 때, 얼마든지 연락해! 늘 그랬듯이 말이야.”
부드러운 손길이 얀의 머리 위를 덮었다. 마치 따스한 햇 빛같은 손길에 얀은 마치 낮잠에 들듯이 눈을 감았다. 심경이 복잡하지만, 그럼에도 이 손길만큼은 정말로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럽지만, 평화로웠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흘러서, 흘러서,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을 기다리고 고뇌했다. 그리고 지금이 되었다.
“그게, 벌써… 10년이나 됐나.”
“그러게나- 말이다. 흑…! 그 작았던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커서 대학을 간다고—.”
“아, 좀! 아버지도 참… 그런 이야기 크게 하지 마요. 진짜 부끄러우니까.”
“이 아빠가 부끄러운 거야?! 얀아, 이 아빠는……!”
“으휴, 진짜.”
그래. 얀 프로이데는 비아체 얀이 되어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과거에도 그랬고, 후에 이어질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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