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끝에서 자줏빛 꽃의 겉잠을

눈물의 끝에서 자줏빛 꽃의 겉잠을 3화

히스클리프

아니, ‘눈물’이라는 별명이 붙은 건 ‘피도 눈물도 없기’ 때문이었던 것 같은……

엄청 합리적인 사람이었대.

그래서, 더 레이븐을 퇴치하지 않았던 것도, 백성이나 공주에게 불이익을 가져올만한 사정이 있었던 게 아닐까.

클로에

그, 그랬구나. 로맨틱한 별명인데도……

히스클리프

아……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추측이야.

편지나 일기에서 공주의 생각을 알 수 있을만한 건 거의 발견되지 않아서.

피가로

차갑다던가, 비정하다던가, 소문은 많지.

어쨌든 그녀가 더 레이븐을 잠들게 한 건 사실이야.

이후, 눈을 뜰 때마다 한 명의 마법사와 7명의 인간으로 의식을 행했다고 하던데……

이번에는 저번 이후로 20년하고 조금밖에 안 지났는데도, 눈을 뜰 징후가 보인다고 해.

아서

성에서도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 영지 내에서 까마귀에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고.

파우스트

그게 눈을 뜰 징후다. 아마, 재액의 영향을 받은 거겠지.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을 땐,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오웬과, 토착주술의 전문가인 미스라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루틸

잘 부탁드립니다. 오웬 씨, 미스라 씨.

미스라

그래요. 잘 부탁해주세요.

오웬

난 잘 부탁해지고 싶지 않아.

우연히 있었던 것 뿐인데, 왜 나까지 그런 귀찮은 의식에 가야만 하는 거야?

파우스트

옆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네 힘이 필요해서 말을 건 것인데……

오웬

게다가 미스라까지 묘하게 할 마음이 있어 보이고.

전문가라고 치켜세워져서 우쭐해지긴…… 우웩!

미스라

시끄럽게 굴지 말고 가죠.

<아르시무>


미스라의 마법으로 우리들은 눈물의 공주의 성을 방문했다.

아키라

성에서 저번 의식에 참가한 할머니에게 얘기를 들을 수 있다고 했었는데…… 아직 안 온 모양이네요.

루틸

너무 빨리 온 걸지도?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요.

하지만…… 여기, 신기한 성이네요. 라벤더가 정말 좋은 향인데, 조금, 술렁거리는 듯한……

아키라

에?

히스클리프

그러네……

……왠지, 머리가 무거운 것 같은…

파우스트

<사틸크나트 무르클리드>

괜찮은가, 히스.

히스클리프

아…… 편해졌어요. 감사합니다. 파우스트 선생님.

파우스트

더 레이븐이 눈을 뜬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이 저택 일대에는 질서가 어지럽혀져 있어.

네가 감수성이 풍부한 만큼, 이러한 장소에서는 마음이 과격해지기 쉽다.

여기서는 일부러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라.

히스클리프

감각을 둔하게……

전에 알려주셨죠. 해보겠습니다.

피가로

괴로우면 내 옆으로 오렴. 약을 처방해줄게.

루틸, 클로에. 너희들도. 아서도, 자력으로 대처할 수 있겠지만 힘들 땐 사양하지 않아도 돼.

루틸, 클로에

네~!

아서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피가로 님.

미스라

하지만 귀찮네요. 이런 기척으로 뒤죽박죽이면, 더 레이븐이 도망쳤을 때 쫓기 힘들어요.

오웬

그럼 먼저 죽여버리자.

아키라

죄송해요, 퇴치가 아니라 의식의 의뢰라서……

할머니

후, 읏샤……

미안해요, 영주님의 명령으로 의식의 얘기를 한다던가 어쩌구……

루틸

앗, 오셨다! 할머니, 잘 부탁드려요.


루틸

……그렇구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시는 길 배웅해드릴까요?

할머니

아들이 여기까지 와있으니까 괜찮단다.

고맙구나, 현자의 마법사 씨.

파우스트

……그닥 새로운 정보는 없었군. 마법사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끝난다, 라는 단순히 귀찮은 항례 행사라는 인식이었나 보군.

아서

그리고, 저번 의식에 참가했던 마법사는 여행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고……

피가로

뭐, 중앙의 마법사에게는 자주 있는 이야기지. 기질적으로 원래 거처를 떠나기 마련이라고 할까.

파우스트

확실히……

아서

그럴지도……

미스라

전에 마법사 따위, 만날 필요 없어요. 전문가인 제가 있으니까.

빨리 침실로 가서 더 레이븐의 상태를 지켜보죠.


루틸, 클로에, 아키라

와아……!

아서

방 가득 라벤더가…… 이건, 압권인데……

더 레이븐이 잠들어 있는 곳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방이었다.

얇은 천을 겹겹이 쌓은 덮개 침대.

바다처럼 전면에 깔려진 라벤더.

어렴풋이 향이 나는, 조용하고 품위있는 냄새.

히스클리프

전에는 객실이나 침실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공주를 저주한 괴물이니까, 틀림없이 좀 더 거친 느낌일 거라고……

미스라

그런 것보다 더 레이븐이 어쩌고 있는지를 보죠. 이불을 뜯어낼까요?

클로에

뜯어내는 건 위험하지 않아!?

파우스트

얼굴만 보자. 더 레이븐이 얼마나 깊게 잠들어 있는지는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을 거야.

우리들은 조심히 침대로 걸어갔다. 다가갈 수록 괴로운 목소리인 듯한, 작고 이명 같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틸

읏……!

이게, 더 레이븐… 원래는 마녀었던 것?

아서

……어찌 이리, 가여운……

우아한 덮개 침대에서 잠들어 있던 것은, 까마귀와 사람을 엉망진창으로 합친 듯한, 기괴한 괴물이었다.

까마귀 그 자체인 새까만 머리와, 꺾여서 굽어진 새의 다리. 날개가 자라난 양팔.

하지만, 앙상한 하얀 어깨나, 날카로운 갈고리 모양의 발톱이 붙은 손의 형태는 어떻게 봐도 인간의 것이었다.

내 발 근처에 앉아있던 사쿠쨩의 귀가 조금이지만 뒤로 눕혀졌다. 더 레이븐을 경계하고 있는 거겠지.

아키라

(……원망한다고 이런 괴물이 되다니. 그 정도로 공주가 싫었던 걸까.)

(전통에서 마녀가 공주를 배신한 계기는 잘 모르겠지만…)

더 레이븐

아……그, 으으으. 아, 아아아……

더 레이븐이 기묘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것을 내려다 본 오웬이, 무심코 어깨를 움츠렸다.

오웬

……무리네. 이 녀석.

파우스트

무리?

오웬

말 할 수 없어. 이미, 말 그 자체를 잊어버렸어.

클로에

에……

오웬

몇백년도 불길한 괴물로 있던 탓에, 영혼이 일그러지고 비틀어진 거겠지.

아마도, 전에는 마녀였던 것도 잊어버린 거 아냐?

루틸

그런… 그렇다면…

아서

…<거대한 재앙>의 영향으로, 더 레이븐이 잠들지 않는다는 비상 사태가 일어난다면, 쓰러트릴 수밖에 없는 거군.

클로에

하, 하지만, 눈물의 공주의 명령으로 더 레이븐을 퇴치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

피가로

그렇게 되지 않도록 힘내자. 8명이나 마법사가 모여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힘을 합치면 괜찮아.

…하지만, 묘하네.

찬찬히 관찰하는 듯이 더 레이븐을 바라보면서, 피가로가 턱을 쓰다듬었다.

피가로

토벌도 봉인도 금지당할 정도야. 틀림없이 기분을 거슬리게 하면 큰일 날 타입의 마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미스라

뭔가, 생각보다, 평범하게 약하네요. 이성을 잃어도 귀찮을 느낌도 아니고.

파우스트

확실히, 주술이 약해지고 있는 지금도 얌전히 잠들고 있으니까 말이야.

긴장을 풀면 안 되지만…

히스클리프

…그렇다면 공주는, 어째서 더 레이븐을 의식으로 잠들게 하라는 명령을 남긴 걸까요.

백성의 심정이나 금전의 부담을 생각하면, 토벌이나 봉인을 하는 편이 합리적일 텐데…

마법사들

……

히스클리프의 의문에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무언이 계속되는 중, 악몽에 시달리는 더 레이븐의 신음 소리만 들려왔다.

ㅡ그때, 활짝 열려있던 침실의 문 너머에서, 파란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높게 묶은 블루 그레이의 머리카락. 품위있게 입은 복장이나, 훌륭한 파란색 드레스. 아름답지만 날카로운, 가늘게 째져있는 눈동자.

얼음을 연상시키는 차갑지만 고상한 영애가 복도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키라

(엣…누구?)

놀라움에 생각치도 못하게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미 그녀는 없어져 있었다.

아키라

(어라? 잘못 봤나?)

(아, 하지만, 루틸도 같은 곳을…)

루틸

……

그도 같은 영애를 본 것일까. 질문할까 망설이던 참에, 파우스트가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파우스트

공주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우리들이 해야할 일은 변하지 않아.

의식은 내일부터다. 하지만, 그 전에 준비로써 이 성을 감사와 축복으로 채울 필요가 있어.

오늘은 함께 내일 의식을 대비해서 준비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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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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