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MA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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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전자가 달아오르며 요란하게 물 끓는 소리를 낸다. 창밖으로 몰아치는 눈보라와는 별개의 소음이다. 로시난테 베르디우스는 뒤섞인 소음 사이로 간간이 흔들리는 유리창 너머를 응시한다. 온통 흰 외부를 훑던 시선이 여전히 요란스레 끓어오르는 주전자에 닿는다. 온종일 눈이 내리니 원. 작은 중얼거림 이후에는 몸을 일으켰다. 지금의 티타임이 늦었는지,
<겨울나기> 늦가을, 북부 자작저 “이번에 부탁할 물건은 없나?” “으음, 흠. 아마도? 당장 생각나는 건 없으니 몸 성히 오기나 해.” “별 걱정을 다 하는군.” 아침이라기엔 이른 시간부터 성의 경계를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 있다. 소규모로 이루어진 인원 뒤로 말들이 이끄는 수레가 따라 붙었으니 공적인 일을 해치우기 위해 꾸려진 인원임을 예상하기
수도에 있는 어느 백작저에서는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돈다지요?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폭삭 망해버린 집안이라 이런저런 저주를 받았다는 둥 여러 풍문이 나돌았다는 건 수도로 상경한 지 오래 되지 않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이게 다 이십 년 새에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어서 그럴 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가장 처음의 백작님께서는 조금 은둔하기는 했어도 가문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노라 예견했던 시점에서 스무 해 정도를 더 살아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그 기간이 한 사람을 바꾸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몸에 밴 습관 정도는 적절히 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미 오랜 나날을 살아와 고착화 된 것이 많이 배어 있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로시난테는
늦가을의 하늘이 맑다. 오래전이라면 이즈음도 눈보라가 쳤을 테지만 기어코 북부에도 가을이 비집고 자리를 차지했다. 창밖에선 아직 맑은 햇살이 구름 사이를 간간이 지나 성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작은 창이 난 복도를 거닐던 이바르 베르트손은 홀로 날아다니던 종이비행기가 창문을 지나 망토에 콕 날아와 박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털 사이로 얌전히
<기다리는 것> 그레미움 침공 전일 딸랑, 이른 오후, 무겁지 않은 손길로 페인트칠이 반쯤 벗겨진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소음이 들린다. 아주 오랜만에 방문한 가게임에도 짤랑대는 풍경의 소리만큼은 변한 게 없었다. 로시난테는 고개를 들어 빛바랜 청동 물고기를 일별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부로 성큼성큼 들어서더니, 가로로 길게 배치된 유리 전시장 위
무게 없는 걸음이 마을을 가로지른다. 신전에 도착한 시간이 제법 늦었으니 아직까지 열려 있는 상가는 많지 않겠으나, 그래도 돌아보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하나 뿐인 시선이 문을 닫은 가게들을 훑어보듯 둘러본다. 어둠 속에서는 사물을 가름하기가 영 쉽지가 않아서 미간을 좁혀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골목 사이사이로 간간이 웃음소리가 번지는 게 생경했
내게도 신실했던 시절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정말이야. 그때는 신전을 자주 들락거렸지. 신관의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경건하게 울리는 성가 속에서 다가올 내일을 기도하며 세상이 언제나 다정하기를 빌었다. 사소한 잘못으로도 신관께 달려가 고해를 청하고, 한 주의 고단한 일정이 끝이 나면 손을 붙잡고 백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신전에서 영광된 삶을
님벌스에 도착하고도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큰 마을을 지나 사람들의 인적을 찾기 힘든 들판이 하나 있다. 온화한 기후 속 사시사철 보리가 가득 피어 있는, 대류가 일렁일 때면 은빛 늑대의 갈기처럼 쉼 없이 움직이는. 처음 그곳에 뿌리를 내린 씨앗은 바람결에 실려 온 보리 이삭이었다고 한다. 정령이 가장 처음 눈을 떴을 즈음엔 대지 위에 사람의 흔적이라곤 없었
베르디우스 백작가의 본저에는 오래도록 묵은 소문이 있다. 이제는 다소 유행이 지난 고딕 형식으로 지어진 근사한 저택에는 깊은 밤만 되면 무언가가 기어 나온다 했다. 실제로 오래전, 달조차 뜨지 않은 깊은 밤이면 백작저의 창밖으로 흘끔 보이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희끄무레한 형체로 빚어진 무언가는 도무지 사라질 수 없는 구조에서 순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희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