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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들의 시간은 흐른다

그들의 시계는 부지런히 똑딱거렸다.

Malibu Nights by 늑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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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측 권건영&강민 IF 로그

가열차게 달리는 바람에 숨이 턱끝까지 찼다. 잡생각을 없애는 데 이만큼 효과있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손으로 대강 닦아내고 생수통을 따 벌컥벌컥 들이킨다. 오늘 몇 킬로를 뛰었더라? 찌르르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는 근육통에 건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조금 무리를 한 성싶었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서에 어기적거리며 출근할 뻔했다. 잠시 쉬기라도 해야할 것 같아 근처 벤치를 찾아 앉아 겸사겸사 공원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벚꽃은 다 떨어지고 파란 잎들이 자리잡아 곧 여름이 오리란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래… 벌써 여름이란 말이지? 건영은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알림이 울릴 때마다 확인하는 터라 쌓인 연락은 없었지만 전화번호부를 눌러 목록을 하나하나 훑기 시작하더니 이내 찾았는지 그 이름을 꾹 눌러 통화를 건다. 

"형님, 술 한 잔합시다. …오늘 민이 기일이잖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중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대답은 짧았다. 건영은 통화가 끊기자마자 주변을 정돈하고 일어나 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화창한 어느 늦봄의 하루, 오늘은 강민의 시계가 멈춘지 딱 2년이 되는 날이었다. 

남겨진 자들의 시간은 흐른다

 건영은 민의 부고를 한 통의 전화로 알게 되었다. 웬일로 먼저 전화를 다 건담. 아이, 이 새끼 이제야 이 삼촌이 보고 싶었구만? 참 오오래도 걸렸다. 받으면 왜이리 늦게 연락했냐며 핀잔할 생각으로 받았던 전화는 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들 녀석이 알고 지내던 사람이오? 저 너머로 들려오는 낯선 사내의 목소리와 민을 부르는 호칭에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예예, 갑작스런 민의 아버지의 전화에 너무 싸가지없게 들린건 아닐런지 걱정이 되었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건영은 그런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는 생각이었는지 깨닫고 말았다.

단촐했다. 순직한 경찰이기 때문인지 민의 아버지인 중환이 치장을 좋아하지 않는 성정인지 장례식장은 더도말고 덜도말고 꼭 있어야 할 것들로만 이루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민이 이 놈이 바르게 산 덕택에 추모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다. 모두가 민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장가가 흘러나오자 울음소리가 곳곳을 메운다. 웃기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곡소리내며 울어야 이 놈이 저승길 편하게 갈텐데……. 건영은 부의금이나 두둑히 넣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슬프지 않았냐하면 그건 아니었다. 슬프기는 오질라게 슬펐다. 안 슬플리가 없었다. 건영이 도망자로 그 회사에 있었을 때 민은 제 조카 삼아 아꼈던 놈이었다. 누명을 벗고 경정으로 승진했을 때도 자기 일마냥 좋아하던 순진한 놈에다가 말본새는 어디다 굴러먹었는지 한 대 쥐어박아야 그제야 공손해지는 웃기는 놈이었다. 찰칵, 라이터 불을 담배 끝에 붙여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건영은 너무 많은 이별을 겪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동료들을 잃었고, 방화로 일가족을 잃었고, 이제는 다시 얻은 조카마저 잃었다. 이쯤되니 울음보다는 헛웃음이 나오는 거다. 이 권건영이 팔자 왜이리 기구하냐고. 그리고 강민이 너는 왜 일찍 갔냐고. 왜 이리 일찍… 이 삼촌이랑 뭣도 못해보구……. 저 안에서는 한창 곡소리가 나는 중일텐데 밖은 아무 일 없다는 듯 평화로웠다. 그 간극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건영은 묵묵히 담배를 태우기만 했다. 발치에 쌓인 꽁초가 하나 둘… 늘어간다. 건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괜히 감상에 젖어 이미 잃은 이를 하나씩 센 탓이다. 담뱃갑에서 잡히는 게 없어질 때까지 줄담배를 태우다 포차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중환은 건영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들 녀석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모르는 사람들이 여러번 다녀갔지만 그건 아들이 한 일이지 자신이 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도 장례식이 끝나니 연락이 뚝 끊겼다. 아내도 잃었고 하나 뿐인 아들도 잃었다. 이런 자신이 더 살아봐야 무엇하나 싶다가도 아들 녀석이 마지막으로 남긴 음성 메세지 하나 붙들고 꾸역꾸역 사는 게 다였다. 그리울 때마다 음성 메세지를 반복해서 틀었다. ……아빠 미워한 적 한 번도 없어. 사랑해요. 나 잔다. 진짜 안녕. 중환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사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거무틱틱한 목재 천장이 그저 검게 보인다. 이대로 눈을 감았다 뜨면 아내와 아들이 있는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수없이 하던 어느 날 건영은 집으로 찾아왔다. 민이 삼촌되는 사람이라며 소개하는 그는 본 적 있는 얼굴이긴 했다. 민이가 한 번 소개를 해줬더랬지. 중환이 기억하는 건영은 장난끼 많은 사람이었다. 민이를 그렇게 허물없이 대하는 사람은 얼마 없었는데 건영은 민의 이마를 쥐어박기까지 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잠깐 얼굴 보이고 사라졌던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찾아와 뭣하나 싶어 돌려보낼 성싶으니 건영이 닫혀가는 대문을 턱하니 잡고 넘어왔다. 민이 내가 민이 삼촌이면 그라면 우리는 형 동생 아니우, 안그래요? 다분히 억지스러운 말을 하면서. 처음에는 거절했었다. 아들 놈 잃은 것도 힘든 마당에 모르는 사람을 상대하기엔 지쳐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건영은 끈질기게 찾아왔다. 낯짝에 철판깔고 지 집마냥 들어오는게 어이없기도 했지만 막을 힘은 없어 종종 건영과 하루를 보냈다. 직접 만든 반찬을 들고 와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어놓질 않나 이제는 다 부서져가는 집구석을 손 봐주질 않나 뭐만 하면 형, 형하며 촐랑거리지 않나. 중환은 어느새 건영이 찾아오는 일상이 익숙해져 있었다. 술 잔을 기울일 때면 둘은 거하게 취해 마룻바닥에 드러누워 농담을 시시덕거렸다. 중환은 왜 건영이 여길 찾아오는지 물은 적이 있었다. 

"건영아, 너는 왜 여기를 왔더냐? 민이랑 친했지, 나랑은 친한게 아닌데도."

"사람 하나 살리러 왔수다, 형님"

건영은 그리 대답했다. 술 기운인지 묻지 않았는데도 건영은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읊기 시작했다. 일가족을 화재로 잃었다는 말에 놀라 건영을 쳐다 본 중환은 이윽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나마 자기는 복수심에 미쳐 살았다지만 중환은 무어가 있느냐며. 건영은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입꼬리를 올려 애써 웃는다. 

"겸사겸사 나도 살고요, 응?"

말 없이 너머로 전해지는 애환을 잊을 길이 없다.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 민이를 잃은 그 날부터 한 번도 잊어보지 않은 감정을 그녀석은 다 감내하고 있었다고. 중환은 그 날 건영을 동생으로 삼았다. 다 잃은 사람끼리 뭉쳐서 남겨진 세상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술 잔을 기울이면서. 진창 굴러도 아들 놈이 준 목숨 허투루 보내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건영은 현충원에 세워진 민의 비석을 벅벅 닦고는 소주병을 까 비석 근처에 휘휘 뿌렸다. 근처에 다른 순직 경찰 비석에도 튄 것 같은데 그런 사소한 건 신경쓰지 않았다. 민이 녀석 명복 빌어주는 김에 겸사겸사 빌어주지 뭐. 중요한 건 이 녀석 묘다. 다른 묘보다 번쩍번쩍 광을 내겠답시고 집에 있는 깨끗한 천이란 천은 다 가져왔다. 너무 벅벅 닦았는지 중환이 '고마해라'하고 나무랐다. 그래도 우리 조카 묘가 다른 묘보다 더러워서야 쓰겠나. 건영은 소주 한 병 털어내고서야 쭈구려 앉아 맨 손으로 비석을 만졌다. 중환은 국화를 그 앞에 두고 짧게 묵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칙칙하던 그 때 모습은 이젠 거의 사라졌다. 민아, 네 아버지다. 봤냐? 내가 때빼고 광내서 사람 만들었다, 욘석아. 어떻게 너랑 또오옥닮았냐. 이래서 혈육이라고 하는가보다. 근데 잘 생긴건 너 아버지쪽이더라… 그런 실없는 소리를 마음 속으로 전하고 있었을 때 중환이 슬슬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벌써 가요?"

"그럼, 이제 가야지. 건영이 너는 안보이드나. 저어기 사람들."

"보이긴 하죠. 그래도 좀 더 있다가면 민이가 좋아할 거 아닙니까."

"아니다. 이제 2년이나 지났는데, 오래 보고 있으면 뭣허냐. 보고만 싶지."

"그렇지, 술이나 하러 가요" 

끙차, 건영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빈 소주병 뚜껑을 찾아 잠갔다. 영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민의 비석을 바라보다가 중환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려 뛰어갔다. 중환은 그 2년 사이에 꽤 많이 태연해졌다. 건영이 찾아오려해도 이제는 그가 여유시간이 없을 지경이었다. 아들의 부고 소식을 들은 충격으로 쉬었던 일에 복귀했고 마을 축구 동호회에 가입해서 주말에는 종종 축구를 하러 다니기도 했다. 그와 알게 된 초반에는 우리 둘 다 민의 얘기를 약속이라도 한 듯 올리지 않다가 1년이 넘어서야 꺼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리움과 애정을 담아 가볍게 민이와의 추억을 종종 입에 올릴 정도는 되었다. 뉘엿뉘엿 져가는 노을 하늘 바라보다 포차로 향해 자리를 잡았다. 지글지글 삼겹살 구워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둘이 술 잔을 얼마나 기울였는지 세기 어려울 때쯤 중환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건영이 너는 결혼할 생각 없고?"

"와~ 이 형님 보소? 이제 형동생 한다니까 내 혼사 걱정해주는 거요?"

"그래 이놈아, 조카라도 볼라고 한다."

"조카는 무신… 됐수다. 결혼도 할 마음 없고."

건영이 툴툴거리며 술잔을 한번에 입에 털어마셨다. 친해진건 좋은데 가끔 형 노릇한답시고 결혼, 결혼 얘기해대면 건영은 참 곤란해졌다. 그렇게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어렴풋이 같이 살면 좋겠다하는 사람은 가끔 있었지만 자신 곁에 누굴 둘 생각은 아직 없었다. 그냥 이렇게 사람 온기 그리운 날엔 치대며 술을 마시고 같이 밤을 보내는 걸로 충분하다 이 말이다. 건영은 조카라고 하니 문득 민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나, 다음 생에는 삼촌 아들로 태어날까?' 그 때는 얼마든 그러라며 웃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민아, 다시 태어나도 너는 형님 아들로 태어나라. 대신에 내가 정말 삼촌이 되어줄테니까, 다음생에는 기필코 내 조카가 되어줬으면 한다는 말을 전할 길이 없어 답답했다. 괜히 소주를 콸콸 따른다. 다 넘치는 잔을 보고 있던 중환이 미간을 찌푸린다. 

"너는 뭔, 소줏잔에 화풀이를 하냐?"

"그라믄 그런 말 하지 말든가."

"동생 걱정 하나 못하드냐? 언제는 뺀질나게 드나들면서 아이고, 형님 형님 하던게-"

"아이, 언제적 얘기를 해요. 이게 걱정이요? 그냥 잔소리지."

한참을 투닥거리며 고기를 굽고 술을 따랐다. 테이블 위에 소주병이 하나 둘 늘어가면 갈 수록 별별 이야기를 다 꺼내들었다. 서로의 걱정과 잔소리가 여러번 오가고 마을의 소문이 떠돌다가 결국엔 민이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고놈이 얼마나 똘똘했는지 착했는지 속을 썩였는지… 중환은 저 이야기를 벌써 삼십번도 더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건영은 지치지도 않고 맞장구를 쳤다. 

"부모보다 먼저 간 자식은 불효자식이라던데, 그럼 민이도 불효자식이요?"

"…걔가 왜 불효자식이겠냐. 그 녀석은 나한테 항상 효자가 아닌 적이 없어."

"민이는 좋겄다. 이렇게 좋은 아버지 둬가지고."

"지랄두 잘한다, 권건영이."

중환이 코를 크게 훌쩍이며 고개를 숙이더니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건영은 빙빙 도는 머리를 꾹 눌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둘이서 몇 병을 마셨는가 하면… 거진 여덟 병이다. 쯧, 혀를 한 번차고 일어나 중환의 곁으로 가 어깨에 기댈 수 있게 했다. 민아, 민아. 그리 부르는 곡소리가 애처롭다. 마지막 잔을 비워낸 건영이 중환의 팔을 다독이듯 두드린다. 이제 슬슬 술 좀 줄이자고 말해볼까……. 건영은 잔뜩 취한 중환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이제는 외우고 있는 그의 집주소를 대신 택시기사에게 불러주고 술값을 치렀다……. 젠장, 아무래도 한동안 허리띠 졸라매고 살아야겠구만. 영수증을 본 건영은 좀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가도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내일은 아침에 두부를 사서 가야지……. 내일은 진의 형이 끝나는 날이다. 징글징글하게 따라붙어야 이번엔 그 사람이 이 위태로운 세상을 버틸 수 있지 않겠냐고. 누구든 네 곁으로 바로 오는 걸 네가 원하진 않을테니.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길이 무겁다. 

남겨진 자들의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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