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 로그

끝나지 않는 사랑에 대하여 (1)

이준익, 진호산

MU by 민여만이
9
0
0

태양이 얼굴을 감춘 하늘에는 작은 별빛 하나 보이지 않도록 먹구름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 아래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씻어내려는 듯 무섭게도 쏟아진다. 곳곳에 균열이 간 아스팔트 바닥에 빗물이 고여 찰박거린다. 비에 젖은 옷이 피부에 거추장스럽게 달라붙어 오고, 얼굴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에 눈을 뜨기 어렵다. 젖은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얼굴에 달라붙어 엉망이다. 그것을 정리하지도, 떼어내지도 않은 채 눈앞의 상대를 가만히 응시했다. 눅눅한 비 냄새 사이로 스며드는 피비린내, 그 사이에서 붉게 충혈된 눈동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가.

남자의 잠을 깨운 것은 그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진 형사. 진 형사! 도착했으니 이제 그만 일어나요. 아니, 대체 어떤 형사가 검사한테 운전을 시켜? 이거 위계질서 위반이야.”

진호산은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여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운전대에 몸을 반쯤 기댄 남자가 그를 바라보며 핀잔을 주고 있다. 목소리와는 달리 반짝이는 회색 눈동자는 걱정이 어려 있다. 진호산은 가벼운 한숨을 내쉰 후에 아무렇지 않은 척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계질서는 무슨. 운전 직접 하시겠다면서요. 이제 와서 딴소립니까?”

“아니, 그건 진 형사가 내 말벗 해 줄 때의 얘기지. 누가 기절이라도 시켰어요?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자던데.”

“혹시 나 잠꼬대했습니까?”

“여느 때처럼.”

“어쨌든 당신보단 나았겠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음 섞인 한숨 두 개가 차 안을 채웠다. 각자 자기 쪽의 창문 밖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다르겠지만,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창문에 비친 진호산을 바라보고 있던 검사 이준익이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약속 시간까지 조금 남았으니까, 빗줄기가 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립시다.”

“예, 알겠습니다.”

이준익이 익숙한 듯 차에 내장된 라디오를 켰다. 조용하고 나긋한 목소리의 진행자가 다음에 재생할 노래에 대해 무어라 설명하더니, 드뷔시의 어느 곡을 재생시켰다. 서정적인 운율이 빗소리와 어우러져 차 안의 정적을 메웠다. 진호산은 가만히 방금 꾸었던 꿈과 제 과거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

몇십 분짜리의 긴 클래식이 절정을 지나 마무리를 지을 즈음, 현실로 돌아온 진호산이 입을 열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럽니까?”

“이상하다. 왜 갑자기 시비지? 진 형사, 꿈꿨어요?”

“당신 애인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습니까?”

“뭐요? 나 이 대화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사람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바뀌어요.”

“⋯⋯.”

이준익은 진호산의 알 수 없는 질문의 흐름에서 그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직감했다. 본인 역시도 잘 알 수 없어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던 문제였으니.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뒤통수를 조용히 바라보던 이준익이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진호산 역시 말없이 따라 내렸다.

이준익은 비를 완전히 막아주지 못하는 커다란 금속제 처마 밑에서 어깨에 묻은 빗물을 털어냈다. 멀끔하던 구둣발은 진흙이 튀어 더러워졌고, 곧게 다림질한 정장 바짓단도 마찬가지였다. 포장도로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고 허름한 판잣집들이 없더라도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큼 나무가 우거진 산 동네였으니, 그로서는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진호산이 말한 ‘마음이 쉽게 바뀌었다’는 것은 이 장소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4년 전, 이 근처에서 사랑하던 사람의 시체를 발견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찾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옆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은 약속한 것처럼 각자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젖은 담배는 불이 잘 붙지 않아 몇 번을 시도해야 했다.

“공교롭게도 이번 피고인의 고향이 여기네요.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일 때문에 억지로 온 거라고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십쇼.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잖습니까. 내가 궁금한 건 대체 왜, 어떻게 괜찮아졌냐는 겁니다. 트라우마라는 게 그렇게 쉽게 없어져요? 그렇게 빨리 지울 수 있는 기억이었습니까? 대체 왜,”

“진호산 형사. 투정 부리지 마, 생각하고 뱉어.”

점점 격양되던 목소리가 멈추었다. 불이 꺼져 가는 담배를 다시 입에 물어 깊게 삼켰다.

“사람이 얘기할 시간은 좀 주세요. 내가 진 형사를 어떻게 속이겠습니까? 사람 꼴 같지도 않던 그 시절을 제일 잘 아는 사람 중 하나가 당신인데. 내가 정말로 쉽게 변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거 아니잖아.”

이준익이 답답한 듯 담배 연기를 내쉬었다.

“그러니까 무례하게 군 것은 넘어가 주겠습니다. 진 형사도 진 형사 나름대로 답답한 게 있다는 거 나도 아니까. 그럼 일단 질문에 하나씩 답해 볼까요. 우선 첫 번째 질문은 질문 같지도 않았으니까 패스.”

“인정합니다.”

“옳지. 그럼 다음은 두 번째 질문, 내 애인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 사실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죠? 우리가 진 형사 앞에서 염병 떨 때마다 미친 듯이 괴로워한 거 내가 다 아는데, 이렇게 염병 떨 판을 깔아줄 리가 없지.”

그 대답에는 진호산도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알고도 그랬습니까? 어쩐지 애정 표현이 격하더라니.”

“재밌잖아요. 뭐, 아무튼. 내 생각에 진 형사가 진짜 하고 싶었던 질문, 그리고 세 번째 질문 모두 한 가지 답으로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국 하나로 귀결되거든요. 나도 이에 대해 꽤 오래 고민했으니까 아마 확실할 겁니다.”

이준익은 대답하기 전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진호산이 재촉하는 듯 애타는 눈으로 쳐다봐도 묵묵부답이다. 진호산의 속처럼 담배 끝이 반쯤 타들어 갈 즈음, 이준익의 휴대전화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피고인의 가족에게 찾아가겠다 통보한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다. 반짝이는 화면을 잠시 일별하다 알람과 담배를 끄고 처마 밑에서 나왔다.

“역시 그 대답은 ‘사랑’이 아닐까. 자, 우선 일부터 합시다.”

진호산은 혀끝이 텁텁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이준익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그 뒤를 따랐다.

카테고리
#오리지널
커플링
#천준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