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레토르트 파스타

크리그어 3 스포일러

개인서고 by 새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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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님이 써주신 갓글은 여기로~ https://posty.pe/31d4aa

크리그어 3에 대한 스포일러!!!!!!!!!!!


흐렸던 하늘에 눈이 내렸다. 글을 쓰고 있다가 창밖을 바라본 렌은 생각했다. 이런. 시로군이 아직 일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잠시 손 위로 펜을 빙그르르 돌리며 고민하던 렌은 다시 상념을 지워냈다. 알아서 하겠지. 저 정도 눈에 구애받을 정도로 크리쳐가 약한 것도 아니니까. 안전지대는 봄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일이 봄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 또 다시 지독한 겨울.

 

“…….”

 

겨울이라……. 잠시 바깥을 흘긋거린 렌은 이윽고 관심을 껐다. 애석하게도 쿠로다 렌은 얼굴이 아주 많이 팔렸으며, 얼굴이 아주 많이 팔렸고, ‘구' 안전지대의 관리자는 밖으로만 나가도 “저, 혹시…….” 라는 말을 듣기 쉬웠으므로 골이 나든 말든 그가 집 안에 처박히는 것은 아주 마땅하고 합리적이었다. 여기서 밖으로 나갔다가 또 얼굴이 팔리면 아주 지겨운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루 소일거리라고는 집안일을 끝낸 후 기고문 써서 신문사에 투고하는 게 전부인 인생이라니.

 

“…….”

 

띵.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에 렌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레트로트 파스타였다. ‘쿠로다 렌’은 그런 것을 먹지 않은지도 꽤 되었을 것이다. 그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구태여 안전지대의 관리자가 그런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지 않나. 물론 그는 고작해야 눈알 하나 분의 지분을 지니고 있었고, 그마저도 100년 전이었으며, 나머지는 방주로 채워진, 뭐랄까……. 잡종? 이런. 그리 기분 좋은 단어선정은 아니었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방주에 눈알 하나가 채워진 게 비율 상으로는 더 맞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는 따지자면……저 레토르트 파스타 같은 존재다. 진짜 파스타를 먹어보고 나서도 레토르트 파스타가 파스타 본연의 맛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뭐, 쿠로다 렌은 맛 따위 신경쓰지 않고 레토르트든 통조림이든 건량이든 고급식품이든 상관 없이 활동을 위한 연료라고 생각하는 주의였지만 말이다.

 

레토르트 파스타를 대충 가져오고, 옆에 놓인 원고지를 밀어낸다. 이번에는 뭘 써보지. 그가 ‘방주' 혹은 ‘중앙관리장치'로써 쌓은 지식은 방대했다. 100년 하고도 10여년 전, 세상을 바꿀만하다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과학자의 머리를 물려받은 쿠로다 렌의 천재성(비록 그는 일부였으나)은 이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으므로, 기고문을 쓰는 것이 크게 어렵지도 않았고. 얼마 되지 않는 고료였으나 그는 시로가 홀로 돈을 버는 것을 두고보면서 편하게 있고 싶지는 않았다.

 

창밖을 보았다. 눈보라는 여전히 치고 있었다.

 

 

**

 

 

“일부는 전체가 아니죠. 하지만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가 아예 다른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렌은 심각하게 말했다.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다육식물이 어떤 못된 정부기관이 쳐들어온 덕에 싸움에 휘말려 쾅-! 뭉개진 후의 일이다. 미도리는 안타깝게 뭉개져서 죽었지만 다행히 줄기가 조금 남았으므로, 쿠로다 렌은 미도리의 일부나마 건져다가 삽목해서 새로운 식물을 하나 키우기로 한 것이다.

 

“왜 미도리 2호는 안됩니까?”

“애초에 식물 이름을 왜 짓냐니까? 저번에 나왔을 때 미도리인지 미도리 2호인지 이름을 부르면서 물 주고 있는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래도 미도리잖습니까? 있던 이름을 없애는 것도 사람 할 짓은 아닙니다. 다음 식물부터는 안짓겠다고 했잖습니까.”

“아니, 그 미도리랑 얘가 같지 않다니까…….”

 

최강의 인류가 아닌 뭔 바보들 같은 대화를 주고받던 렌이 화분을 끌어안았다. 미도리였던 무언가의 곤죽을 보고 시무룩해 하던 게 다른 세계 일이었던 거 마냥 쌩쌩하고 반짝반짝했다.

 

“이번에는 제가 미도리 2호를 지켜줄겁니다.”

“혹시 저번에 재생할 때 좀 재생이 잘못된거야?”

 

……아니, 시무룩해 하지는 않으니 됐나?

 

 

**

 

 

렌은 눈보라 치는 바깥과는 대비되게 파릇파릇한 다육식물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보니 100년 전에는 쫓기는 신세에 물을 제때 줄 수 없어서 다육식물을 길렀던 건데. 봄이 오면 다른 식물도 들여볼까.

 

그때의 말은 식물 이름도 붙이지 못해서 골이 나 부린 억지에 가까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렌의 생각은 똑같았다. 일부는 전체가 아니지만, 일부라고 해서 그 전체에 속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않나? 비록 자신이나 시로나, 그 안에는 많은 것들이 섞여버렸지만 말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렌은 그 주요한 것을 ‘기억'이라고 보았다. 혹은 영혼. 어쨌거나 시로에게는 영혼이 있었고, 자신도 편린이나마 지니고 있으니 일단은 맞다고 봐도 되겠지. 렌은 안대 낀 제 왼쪽 눈에 잠시 손을 올렸다. 쿠로다 렌의 잔재는 여전해서, 그는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일부였으나 여전히 ‘쿠로다 렌'이었다. 많은 것을 잃어버렸고, 여전히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이해를 거부했고, 고집스러웠으며, 외로웠고……그럼에도 옆에는 친구가 있었다.

비록 그 외의 많은 것들, 예컨대 안드로이드로 돌아왔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시금 기능을 정지해버린 것에서 기인한 많은 사회적 혼란, 사람들의 공포, 시행착오, 자신의 과오, 죽어버린 가족에 대한 그리움, 여전히 또렷하기만 한 100년 전의 일……. 그것들은 문득, 혹은 눈으로 그 실체를 확인할 떄마다 그를 괴롭혔으며, 그는 수명이 다할 때까지 기나긴 시간을 살면서 계속해서 그런 것들을, 그리고 새로운 것들을 고민하겠지만…….

 

어쨌거나 레토르트 파스타도 파스타였다. 맛이 좀 다르긴 해도. 대놓고 상표에도 파스타라고 쓰여있지 않은가. 렌은 기계적으로 파스타를 비웠다. 어쨌거나 먹는 도중 습격당할 일 같은 것은 없으니 좋았다. 이윽고 철컥.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 문이 열리고 피부로 닿는 겨울 냉기.

 

“나 다녀왔어, 렌.”

“아, 왔습니까? 좀 더 늦게 올 줄 알았는데.”

“……나 두고 파스타 먹은거야?”

“지금 올 줄 몰랐죠.”

 

렌은 태연하게 이야기하며 고개를 돌렸다. 추위로 약간 빨개진 피부, 품에 안긴 흰 봉투, 그리고 고소한 냄새.

100년이 아니라 200년이 지나더라도, ‘쿠로다 렌'에게는 그 시간을 함께 견뎌줄 이 있었다. 고민은 삶을 살아가는 증거이기에. 그리고 그는 명백히 살아있기에. 언젠가는 그 사실이 사무치도록 견딜 수 없었던 적도 있었지만, 홀로 남아 그 모든 무게를 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던 적도 있었으나…….

‘쿠로다 렌'은 자신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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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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