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를 주웠다면 섭종까지(3)

1차백합/3화빌런

 

 

지연은 지금 행복한 시슴이었다. 천재퓨딜뉴비를 발견한데다 뉴비한테서 친추까지 받았다. 다이어리에 예쁘게 써 놔도 이 뿌듯함을 다 기록하기엔 모자랐다.

 

오늘은 기념일로 삼아야지. 천재뉴비를 만나서 친추를 받은 날이라고 꼭 써놔야겠다. 할 거 없네 게임 개노잼만을 중얼거리다 정말 할 거 없이 게임 끄는 세기말에서 시슴을 구원해 준 현미라떼님이 강림하신 날……. 점점 수식어가 늘어 갔지만 지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디스코드에 대고 육성으로 랩하지 않았으니 아직까지는 세이프다.

 

“저 방금 친추 수락했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긴요 제가 더 감사한걸…….”

 

월드 오브 판타지아를 플레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뉴비님. 이 삭막한 세기말에 친히 강림해주신 당신은 천사. 유 아 마이 앤젤.

 

현미라떼가 <푸른 돌고래의 섬>의 2장을 여는 동안, 지연은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오후 4시 30분에 파티에 가입했었는데, 지금은 5시 2분이었다. 고인물 소환의식과 출발준비에 15분 정도에, 클리어에 8분이 걸렸고, 현미라떼는 이제 2장을 막 여는 중이었다.

 

집에 밥 있던가. 없다면 굶어서라도 이 뉴비의 헬퍼를 뛰어주리라. 지연의 남다른 각오였다. 물론 우리 귀한 뉴비님이 밥을 거른다는 건 밥에 진심인 코리안인 지연의 사전에 없었지만.

 

“저, 2장 열었어요!”

“아, 2장 방금 여셨구나. 아이템 내구도 한 번만 확인 부탁드려요.”

“네! ……어, 저기, 이거, 수리……잠깐 해도 될까요? 어어, 그런데, 여기 수리공이 어디 있지…….”

 

헤드셋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이쿠, 뉴비님 아이템 내구도가 간당간당하신 모양이구만.

 

“이 맵은 특수 맵이라 수리공 NPC가 따로 없어요.”

“아, 그럼 맵에서 나가야 하나요?”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고.”

 

걱정말아요, 귀여운 뉴비. 당신을 위한 고인물에몽이 여기 있답니다!

 

“제 캐릭터에 우클릭하시면, 지금 파티 상태니까.”

“네…….”

“수리 부탁하기, 라고 보이시죠?”

“네, 보여요.”

“그거 눌러보시면 돼요.”

 

월드 오브 판타지아의 양심 중 하나, 수리 부탁하기.

 

물론 파티 가입은 다른 맵에 있는 유저도 할 수 있었고, 미션 입장도 꼭 미션 맵에 가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혹시나 귀한 뉴비가 수리공 못 찾아서 울까 봐, 지연은 현미라떼가 2장을 여는 동안 후다닥 낙원바다 맵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와, 이런 기능도 있었네요. 툴팁 다 읽어봤다고 생각했는데…….”

“게임 하다 보면 제작직 키워서 자가 수리를 많이 하니까요. 수리 재료 떨어진 게 아니면 잘 안 쓰게 되긴 하죠.”

 

허구한 날 사료처럼 뿌려대는 게 수리 재료이다 보니 떨어진 적이 없는 것 같지만…….

 

아직 채집·제작직 키운 게 없는 뉴비님한테는 먼 얘기처럼 들릴 게 뻔했다.

 

“자, 수리 다 됐어요~.”

“감사합니다! 저, 맵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야 하는 줄 알고……. 다들 기다리고 계시는데, 저 때문에 더 기다리시게 할까 봐…….”

 

세상에 이 뉴비님 진짜 천사인가 봐.

레이드 헬퍼 구한대서 가 봤더니 레이드 열지도 않아서 30분 넘게도 기다려 본 지연이 감격에 입을 틀어막았다. 착한 뉴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야만…….

 

“그럼 준비 확인 올려도 될까요?”

“네, 저는 아이템 내구도도, 수리 다 됐고……! 그, 털뭉치 주인님……도, 안 키우니까요!”

 

세상에, 딸기바나나님의 털뭉치 주인님 얘기를 기억하고 계셨네. 귀여워라. 지연의 눈에는 지금 뉴비가 하는 모든 게 다 귀여웠다. 나만 고양이 없는 게 아니다.

 

[캠프] 시슴: 우리 뉴비도 고양이 없대

[캠프] 시슴: 들립니까 딸기바나나님 그러니 고영 사진을 더 내놔라

[캠프] 딸기바나나: ㅋㅋㅋㅋ

[시슴: 자 그럼 스탠스 확인 도핑 확인 아이템 내구도 확인 딸기바나나님 콜오브캣 확인]

[준비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8/8]

 

“자 그럼 2장 갑니다~.”

 

[캠프] 시슴: 환 장의 세계로 떠 나요~~

[캠프] 감나빗: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캠프] 아스피린: 장판 틀리지 마세요 진짜 힐러 환장하니까

 

아스피린의 짜증 섞인 경고 채팅과 함께, 현역으로 달렸던 유저들이 부르기를 환장늪이라 했던 푸른 돌고래의 섬 2장의 보스 모래늪 바다뱀이 화면에 등장했다.

 

“공략 따로 안 보셨죠?”

“네, 2장 바로 여느라요.”

“그럼 그대로 리딩해드릴게요.”

 

걱정 말아요, 나의 귀여운 뉴비. 고인물이 다 리딩해줄게요. 레이드 무섭지 않아요. 이대로 레이드에 재미 붙여서 쭉 레이드 뛰어주는 뉴비가 되어주세요. 아웃벤을 모른다 하니 미터기도 아직 잘 모르겠다 싶지만, 물어보면 답해줄 고인물이 기다리고 있다. 잘 하는 뉴비는 언제나 환영이다.

 

“여기는 1장이랑 장판이 좀 다르게 나오는데요…….”

 

1장의 바람소리 유령새가 맵 절반을 못 쓰게 하는 식으로 패턴이 나왔다면, 2장의 모래늪 바다뱀은 머리 둘 달린 페이크치는 뱀새끼였다. 청기백기도 아니고, 저놈의 뱀새끼가 선사해 준 받는 피해 증가 디버프 중첩이 몇 개던가.

 

여기에 머리 두 개에 각각 어그로가 끌리다 보니, 1장은 솔탱으로 해도, 2장은 절대 솔탱이 불가능했다. 파티원들이 딸기바나나, 물리딜러, 홍게와 시슴, 마법딜러, 아스피린으로 나누어 각각 오른쪽, 왼쪽에 정렬했다.

 

“오른쪽 머리 뒤가 빛나면 장판 나오는 대로 피해야 하고, 왼쪽 머리 뒤가 빛나면 반대에요. 장판 나오는 위에 서 있어야 해요. 그리고, 마법 딜러이시니까, 왼쪽 머리 치셔야 해요. 오른쪽 머리 치시면 반사뎀 들어와요.”

“마법 딜러는 왼쪽 치고, 왼쪽 머리가 빛나면 장판 위에……. 알겠습니다!”

“네, 패턴 나올 때 다시 리딩해드릴게요. 그럼 갈게요.”

 

1장보다 짧은 15초의 카운트다운이 돌고, 탱커 둘이 각각 머리 하나씩을 맡아 어그로를 잡았다. 근접마딜 안티메이지, 감나빗이 시슴 옆에서 디버프를 착실히 집어넣었다. 머리 위에 징이 뜨자마자, 시슴은 멀찍이 바깥으로 빠졌다.

 

“직선 범위 탱버 와요. 피하세요.”

 

이번에도 현미라떼는 착실하게 미터기에서 자신이 퓨어딜러임을 입증하고 있었다. 이거 얼마 안 걸리겠는데. 모래늪 바다뱀이 페이크치는 환장늪이긴 해도, 패턴 알면 할 만한 보스였다. 어쨌든 랜덤 파티원 대상 패턴은 안 나오니까. 멀찍이 장판 빼고 와야 하는 징이 근딜인 니포켓쌔비지나 감나빗에게 걸리면, 그날은 디스코드에서 현란한 욕설 랩을 들을 수 있는 날이었다. 적어도 그런 패턴은 여기는 없었다.

 

“맵 바깥쪽 휩쓸기 와요,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리딩하면 리딩하는 대로 척척, 딜도 퓨딜답게 척척. 여기에 1장에서 감나빗이 넣은 안티메이지의 보스 대상 디버프 아이콘을 그새 읽어봤는지, 이번에는 감나빗의 디버프 타이밍에 맞춰서 버스트를 넣었다. 뉴비가, 뉴비가 진화했어. 학습할 줄 아는 뉴비야. 우리 뉴비 알파고랑도 못 바꿔.

 

“이번에도 쫄 나오나요?”

“좌우에 두 마리씩 나오니까, 한 마리 맡아서 잡아주세요.”

“네!”

 

지연은 마이크가 켜져 있지 않았다면 노래라도 부를 수 있었다. 그러지 않은 건 순전히 뉴비가 히익 이 고인물 상한물인가봐! 하고 도망갈까 봐서,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였다.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시키다 보니, 지연은 그만 쫄 팝업 직전에 다른 패턴이 하나 있다는 걸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

 

뾰로롱, 소리가 난 직후 캐릭터의 발밑에서 거대한 모래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시슴과 현미라떼는 모래기둥 죽창에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이가 있다면 탱커인 시슴은 아슬아슬한 딸피로나마 살아있는 반면, 유리몸 네크로맨서인 현미라떼는 죽어있다는 점이었다.

 

“아…….”

“아, 아이고. 이 패턴이 있었지.”

“죄, 죄송해요. 어쩌죠? 저, 쫄 팝업이 두 마리면, 제가, 딜 해야 하는데…….”

 

현미라떼는 당황한 것 같았다. 사실 지연도 당황했다. 이, 이 패턴이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자니…….

 

기억하지 못할 만도 했다. 지연은 토끼공주 후레고인물이었다. 이 뒤에 무적기 쓸 패턴도 달리 없고 움직이기 귀찮다는 이유로 신화 난이도가 아닌 이상에야 여기는 무적기 써서 넘기곤 했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뉴비님은 헤딩이어도 저는 공략을 한번 다시 보고 와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스피린이 넣어 준 힐을 받아먹고서, 지연은 쫄페이즈는 감나빗이 잘 해줄 것이라고 뉴비를 달랬다.

 

“제가 더 죄송해요, 여기 패턴 하나 더 있는 걸 깜빡해버려서……. 쫄은, 어……. 감나빗 님이 다 잡아줄 거에요.”

“아……. 그거, 제가, 해야 하는 건데……. 어쩌죠, 너무, 죄송해서…….”

 

……역효과였나? 나 또 뇌 빼고 엔터쳤니?

 

“그, 현미님 잘못이 아니라, 제가 리딩 실수한 거니까요, 어, 괜찮아요. 이번 로그 업로드도 안 할게요.”

“업로드요……?”

“아.”

 

맞다. 미터기 로그 업로드하는 사이트를 아실 리가 없구나…….

 

뉴비가 미터기나 미터기 로그 사이트를 알 리가 없다는 걸 기억합시다. 뉴비는 토끼공주가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패턴을 처리하며 지연은 통렬히 반성했다.

 

자기 기억에 구멍이 있다는 걸 자각한 지연이 현미라떼가 3장을 여는 동안 공략을 복습하고 온 덕에(공략영상 제작자 아스피린이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냐고 비웃은 건 덤이다) 3장의 흰불꽃 스라소니는 무난하게 클리어했다.

 

물론, 탱커 시점에서 공략을 기억하던 탓에 원마딜용 위치선정 리딩은 삐끗했지만……. 모든 고인물이 다 완벽할 수는 없, 없겠지? 그래도 귀여운 뉴비 앞에서는 완벽한 고인물이고 싶던 지연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콜라를 쭉쭉 빨았다.

 

“저, 이번에는 괜찮았나요?”

“현미님은 엄청 잘하고 계세요. 이렇게 잘 하는 뉴비 저 진짜 오랜만에 봐요. 고인물 부캐라도 해도 믿을 것 같은데.”

“아하하.”

 

한결 가벼워진 웃음소리에 지연도 시원하게 남은 콜라를 원샷했다. 그리고 사레가 들렀다.

 

“켈록, 켁, 케헥, 쿨럭쿨럭!”

“괜찮으세요?!”

“괘, 괜찮, 괜찮습니다, 켈록.”

“그, 병원 가보셔야 하는 건,”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에요. 4장 여셨나요?”

“네, 4장은 방금 열렸어요. ……그, 진짜 괜찮으신 거, 맞죠?”

“그럼요.”

 

피씨방에서 라면딜하다 라면에도 목 막혀본 유경험자인걸요! 이 말을 하기엔 지나치게 게임 폐인 같아 보여서 소리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하여튼 지연은 자신은 멀쩡하다며 어필했다.

 

[캠프] 시슴: 님님

[캠프] 시슴: 나 공략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거 맞지?

[캠프] 아스피린: ㅇㅇ

[캠프] 아스피린: 드디어 기억이 좀 돌아옴?

[캠프] 시슴: ㅠㅠ

 

4장을 위해, 시슴은 아예 아스피린에게서 검수까지 한번 받았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완벽한 고인물이다.

 

[시슴: 스탠스 확인 도핑 확인 내구도 확인 딸기바나나님 주인님확인!]

 

저녁타임을 목전에 둔 오후 5시 30분, <푸른 돌고래의 섬> 초행팟이 드디어 마지막 장인 4장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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