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를 주웠다면 섭종까지(2)

1차백합/3화빌런

 

형광색 섞인 바다 한가운데의 맵, 푸른 돌고래의 섬 1장에 입장하자마자, 이미 본 컷신 스킵 기능을 켜 둔 고인물들은 아직 한창 스토리 영상을 보는 중인 뉴비를 빠르게 둘러쌌다.

 

하나같이 유열을 기대하는 와인잔 든 고인물의 행태 그 자체였다.

 

“현미라떼님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영상 천천히 보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영상을 시청 중인 뉴비의 토끼 수인 종족인 레비타 캐릭터를 두고, 토끼공주들의 캠프 채팅이 은밀하게 오갔다.

 

[캠프] 니포켓쌔비지: 뉴비님 잘 꼬셔서

[캠프] 니포켓쌔비지: 아로나스까지 우리가 데리고가자

[캠프] 감나빗: 개나쁘네

[캠프] 감나빗: 마음에 들었습니다

[캠프] 시슴: ㅋㅋㅋㅋㅋ

[캠프] 시슴: 아 빳따죠

[캠프] 시슴: 낙원바다 레이드 헬퍼는 그거 보는 맛에 오는거지

 

낙원바다에 일반-하드 난이도 통폐합되었다면서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고인물들이 낙원바다 확장팩 레이드 초행팟이 열렸다 하면 날아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스토리에 영혼을 갈아넣는 월드 오브 판타지아가 메인 스토리만큼, 때로는 메인 스토리 이상으로 공을 들이는 게 바로 레이드 퀘스트 시리즈의 스토리와 연출이었으므로.

 

[캠프] 홍게: ㅋㅋㅋㅋ아로나스는 이 멤버 그대로 가도 되겠다

[캠프] 홍게: 뉴비님…. 죽고 싶어요? 어림도없지 힐받아라

[캠프] 시슴: 성기사의 가호 추가요

[캠프] 서울대입구: ㅋㅋㅋㅋㅋㅋㅋ

 

그 중에서도 낙원바다 확장팩의 레이드 시리즈는, 오리지널의 첫 레이드 <까마귀 우는 밤>에서부터 시작된 시리즈의 스토리가 한 번의 대격변을 찍는 변곡점이었다. 그동안 살포된 떡밥들이 대거 회수되고, 시나리오 라이터가 플레이어들에게 울어!! 하는 연출이 아주 곳곳에 꽉꽉 차 있는 레이드 시리즈였던 것이다.

 

정확히는, <푸른 돌고래의 섬> 바로 다음 레이드인 <죽은 현자의 동굴>부터. 푸른 돌고래의 섬은……. 도입부라서, 아직은 왜 이러는지 다 이해가 안 될 법도 하다. 그래도 다 봐야 하느니. 정점인 <착저선 아로나스>까지는 꼭 데리고 가야 고인물들도 유열을 즐길 수 있는 법이다.

 

현미라떼는 한창 영상에 집중하고 있는지 말이 없었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지연은 여유롭게 콜라 캔을 땄다. <까마귀 우는 밤>에서 다 죽어가는 에트알과 함께 여행자에게 도움을 청했던 안젤리카가, 어째서인지 애증 섞인 표정으로 바닷물에 손을 담그는 영상이 아마 이 부분이었을 것이다.

 

궁금하시죠 뉴비님. 저도 처음 밀 때 오지게 궁금했거든요. 저 와인잔 준비해도 되는 거겠죠? 오늘 안에 다 못 깨면 제가 뉴비님 친추할 거니까요. 모니터 뒤의 표정이 자못 음험했다.

 

“저 영상 다 봤어요!”

“네, 그럼 준비 확인 돌릴게요.”

 

컷씬 영상이 끝난 현미라떼 캐릭터가 폴짝폴짝 토끼처럼 뛰었다. 시슴이 현미라떼를 쓰다듬었다. 아유 귀여운 뉴비.

 

[시슴: 현미라떼님 영상 다 보셨네요]

[시슴: 준비확인 돌릴게요]

[시슴: 스탠스 확인 도핑 확인 내구도 확인 딸바님은 털뭉치 주인님 확인]

[딸기바나나: 콜오브캣 걸리면 내 몫 탱버는 포켓님이 맞아줄거야]

[니포켓쌔비지: 헛소리 밴]

 

“랜덤매칭으로도 나오는 곳이라 일부러 조율 걸고 온 거니까요, 스킬 중 레벨 조율 걸려서 안 되는 거 있어도 너무 당황하지 마시고 하시면 돼요.”

“네!”

 

아이구, 어느 집 뉴비인지 이렇게 말도 잘 듣는담. 역시 탱탱볼에서 빼와야겠다. 억울하십니까 탱탱볼? 그럼 너네 뉴비 좀 잘 케어하지 그랬니. 너희의 뉴비, 우리가 데려가겠다.

 

“그럼 카운트다운 돌릴게요.”

 

푸른 돌고래의 섬, 1장의 보스인 바람소리 유령새 앞에서, 시슴 캐릭터가 카운트다운을 띄웠다. 캐릭터들이 일사불란하게 레이드 시작을 준비했다.

 

[카운트다운: 20초]

 

20초, 지연은 자기도 깜빡했던 탱커 스탠스를 켰고, 10초, 뉴비가 올린 자가 버프 스킬 아이콘이 파티창에 떴다. 5초, 네크로맨서의 사령의 울림이 캐스팅되기 시작했다. 4, 3, 2, 1과 함께 시슴이 유령새에 돌진했고, 시작! 문구와 함께 뉴비의 스킬이 유령새에 착탄했다.

 

“A징으로 갈게요. 가운데 비워 주세요.”

“A징 쪽으로 가면 되나요?”

“아뇨, 현미님은 B징으로.”

 

시작하고 30초 안 돼서 가운데에는 즉사 장판인 유령새의 새장이 생기니, 가운데는 무조건 비워야 했다. 탱커와 근딜은 미리 찍어 둔 11시의 A징으로, 원딜과 힐러는 12시의 B징으로. 여기서 페이즈 넘어가면 탱커와 근딜이 B징으로, 원딜과 힐러는 다시 1시의 C징으로 가야 한다.

 

“탱커 옆으로는 절대 오지 마시구요.”

“네, 네!”

“탱버 맞으면 원마딜은 즉사에요.”

 

우리 귀한 뉴비 미터기 로그에 데스 찍히면 내 마음이 아파. 근딜들이 후측을 잡기 편하게 머리를 돌리며, 지연은 차분히 뉴비를 위한 리딩을 불렀다.

 

“쫄 팝업되면 현미님이 바로 잡아주세요.”

“네!”

“발밑에 장판 뜨니까 잠깐 산개하셨다가 다시 B징으로.”

 

광역 데미지가 두어 차례 쓸고 가면서, 광역 데미지만으로 피가 절반은 깎인 현미라떼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운데에 새장 떴고, 발밑 장판인 둥지의 손길 떴으니 이제 쫄인 새끼 유령새가 뜰 차례였다.

 

여기서 어지간한 초행 원마딜은, 퓨딜이 처리해야 하는 쫄 두 마리를 혼자 다 못 처리하기 마련인데…….

 

‘……이것 봐라?’

 

지연은 곁눈으로 미터기에 뜬 딜량을 확인했다. 썩은물을 넘어 석유라 해도 과언이 아닐 도적 니포켓쌔비지에는 못 미치지만, 안티메이지 감나빗과 딜량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양치기 서울대입구가 근소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거의 딜 포텐 순서대로 딜러들의 딜량 순위가 정렬된, 클린한 미터기. 여기에 현미라떼가 초행임을 감안한다면…….

 

“쫄 다 잡았어요!”

 

아무래도 이 뉴비는 천재 퓨딜이다.

 

새끼 유령새 세 마리 중 두 마리를 혼자 갈아버리고서, 현미라떼는 다시 바람소리 유령새를 타겟팅하고 딜을 박아넣었다. 프리딜 구간이 끝나고, 페이즈 전환 연출 타이밍에 귀신같이 캠프 채팅이 올라왔다.

 

[캠프] 서울대입구: 와X바 뉴비님 뭐임

[캠프] 서울대입구: 난 내가 새끼 3마리 다잡을줄

[캠프] 시슴: ㄹㅇ

[캠프] 시슴: 개오진다 나 이 뉴비 필요하다

[캠프] 감나빗: ㅋㅋㅋㅋ

[캠프] 감나빗: 그래 우리가 공대 정착할 때도 됐지

[캠프] 시슴: 나 이거 끝나고 뉴비님 친추할래

[캠프] 시슴: 내가 키워서 하컨 데려가야지

[캠프] 홍게: 키잡이냐ㅋㅋㅋㅋㅋㅋ

 

“보스 언제 내려오나요?”

“곧이요.”

 

이 정도 하는 퓨딜은, 뉴비든 아니든 구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딜러를 많이들 하면 뭘 하나. 적어도 사람 딜은 해야 하드컨텐츠 같이 갈 게 아닌가. 딜도 못 하는데 패턴 처리도 안 하는 속 터지는 퓨딜이 어디 한둘이냔 말이다.

 

“저, 잘 하고 있나요?”

“엄청 잘하고 있어요. 완전 짱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만난 이 뉴비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패턴 처리에만 조금 익숙해지면 금방 최상위권이다.

 

딜러는 딜을 잘 해야 한다. 딜이 좋아야 패턴 하나라도 더 빨리 넘기고, 패턴 하나라도 더 빨리 보고 많이 봐야 클리어 각이 일찍 선다. 자고로 라이트 유저는 레이드 패치 첫 주에 전부 클리어하고 파밍할 때만 레이드 가는 유저인 법이다.

 

“쉐어징 나와요. 힐러한테 붙어 주세요.”

 

이것 봐, 리딩 하면 하는 대로 착착 움직이잖아. 이미 지연에게는 뉴비깍지가 단단히 씌었다. 낙원바다 레이드를 다 깨고 난 뒤 현미라떼가 그대로 바이바이하면 뉴비 앞에 드러누워서 울 수도 있을 만큼.

 

“피 40% 되면 페이즈 전환 한번 더 있어요.”

“아, 지금 39%……!”

“와, 현미님 딜 진짜 좋으시네. 딜싸 따로 보셨어요?”

“아, 아뇨. 저 그냥, 툴팁 보고…….”

 

직접 딜사이클 짰어요. 소심하게 덧붙인 그 말에 지연은 콜라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

 

……우리 뉴비님 진짜 천재인가봐!

 

“대박. 네크로맨서 완전 잘하셔서, 아웃벤에서 딜싸 따로 찾아보신 건 줄 알았는데.”

“아, 아뇨. 저 그런 건 잘 몰라서.”

“전에 따로 레이드 겜 하신 적 있으세요? 발밑 장판 나와요, 산개.”

“레이드 게임은 이게 처음이에요.”

 

이 뉴비는 잡아야 한다. 반드시. 기필코. 고인물의 확신이 점점 굳건해지고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처음 해 본 레이드겜에서 툴팁만 보고 딜싸 최적화를? 이건 진짜 천재다. 월판의 신께서 나한테 내려 주신 딜러다. 패턴은 머리 박아가면서 익숙해지면 되는 거니까.

 

“레이드가 생각보다 좀 많고 길어서, 오늘 안에 낙원바다 다 못 깰 수도 있는데. 현미님만 괜찮으시면 제가 친추해도 될까요?”

“정말요? 그, 도움만 받으면, 좀 죄송한데.”

“아냐, 아냐. 매칭도 모집도 잘 안 되면, 이 팟으로 산호초까지 쭉 미는 게 더 나아요. 정원부터는 그래도 이번 확팩이라 모집은 잘 되긴 하고.”

 

그래도 그것도 나랑 가면 좋지. 자꾸만 히죽거리는 웃음을 눌러 삼키며 지연은 뉴비를 살살 꼬셨다. 신규 확장팩의 신규 레이드에서 패턴 하나라도 더 보고 클각 1분이라도 일찍 보려면 딜 잘 하는 딜러는 필수다. 어떻게든 여기서 꼬셔서 공대로 데려가고 싶었다.

 

뉴비님, 우리 공대 와 줘. 나 오이도 먹을게.

 

유령새 피 25%, 여기서부터 간간이 뜨는 유령새의 깃털 방패를 폭딜로 깨부숴야 한다. 아 맞다 그 전에 탱버 오지. 까먹을 뻔한 성기사의 가호를 딱 늦지만 않게 올리자, 서브힐러를 잡은 최서율의 살벌한 욕설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뒤질 뻔했네.”

“괜찮으세요?”

“안 뒤졌으니 괜찮습니다.”

 

살았으면 된 거죠. 지연은 긍정적인 마인드를 장착하기로 했다. 깃털 방패가 한낮의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내리고, 지연의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렸으므로. 어쩜, 뉴비님 너무 잘한다.

 

“C징으로.”

 

유령새의 피가 10% 밑으로 떨어졌다. 광역 데미지, 새끼 유령새의 원혼이 파티를 터트릴 기세로 뻥뻥 터지고, 맵의 절반을 휩쓰는 장판, 유령새의 칼날깃도 번갈아 가면서 뻥뻥 터졌다.

 

이런 걸 내면서 일반 난이도를 하드랑 통합하다니 정말이지 양심도 없는 훌그레인게임즈. 이러니 초행팟 헬퍼로 오는 썩은물 아니면 잘 안 오려고 하지. 세기말만 아니었어도 올 썩은물은 왔겠지만, 하필이면 지금은 세기말이었다.

 

‘덕분에 내가 뉴비를 줍게 된 것 같지만.’

 

그러니 이건 나의 승리랄까~. 장판을 피해 머리를 돌리다, 범위형 탱버에 실수로 니포켓쌔비지를 암살해버린 지연이 멋쩍게 웃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니포켓쌔비지: 시슴 뒤진다]

[니포켓쌔비지: 대한민국 3대 마요]

[니포켓쌔비지: 치킨마요 참치마요 힐러님 저새끼 힐 주지 마요]

 

“저, 도적님, 괜찮으신 걸까요?”

“딜 꼴아박아서 안 괜찮긴 할 건데 뭐 어쩌겠어요. 자기 팔자려니.”

“네?”

“그런 게 있어요. 착한 뉴비님은 따라하면 안돼요~.”

 

아차. 내뱉고 나서야 지연은 자기 입이 뇌 빼고 엔터키를 쳤음을 자각했다. 뇌 뺄 때는 엔터키도 뺍시다 복창해야겠다…….

 

근딜인 니포켓쌔비지가 급사해버렸지만, 현미라떼의 딜이 안정적이다보니 무난하게 남은 피를 마저 까낼 수 있었다. 니포켓쌔비지가 부활 수락을 누르기 직전, 화면이 전환되고 클리어 문구가 떴다. 캠프 채팅창에 올라오는 욕설이 살벌했다.

 

[캠프] 시슴: 나 이 로그 업로드해도 돼?

[캠프] 니포켓쌔비지: 뒤진다 진짜

 

캠프 채팅창은 아랑곳하지 않다 못해 아예 꺼버리고는, 지연은 헤드셋 마이크에 최대한의 상냥함과 나긋나긋함을 끌어모았다.

 

“현미라떼님.”

“네?”

“2장 가기 전에 친추해도 돼요?”

“아, 그게.”

“안 돼요?”

 

힝. 안 된다 하면 나 울 거야. 지연이 헤드셋에 대고 징징거리는 추태를 보이지 않은 건, 순전히 뉴비가 한, 하늘에서 내려온 복음 같은 한 마디 덕분이었다.

 

“제가, 방금 걸었어요.”

 

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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