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를 주웠다면 섭종까지 (1)

1차백합/3화빌런

<뉴비를 주웠다면 섭종까지>

 

 

 

1화.

 

할 거 없네. 망겜이 다 그렇죠.

 

세기말이면 으레 튀어나오는 문답을 가만히 되새김질하며, 지연은 게임 <월드 오브 판타지아>의 파티모집 창을 다섯 번째 새로고침했다. 5월? 화창한 봄날? 알 바냐, 게임이 세기말인데.

 

[24인 레이드 복면가왕팟]

[24인 레이드 암살팟]

[불참새 탈것작]

[<절대방어성채 슈반슈타인> 솔탱솔힐 파티]

 

······진짜 세기말은 세기말이네. 파티모집 페이지는 죄다 예능팟이거나, 지연은 이미 다 모은 탈것을 먹기 위한 탈것작 파티거나였다. 그나마 현 확장팩 <추억을 위하여>의 마지막 8인 고난도 레이드인 <절대방어성채 슈반슈타인>의 솔탱솔힐 파티가 있기는 했으나······.

 

김지연은 글로벌 서비스 중인 레이드 게임, 월드 오브 판타지아의 하드컨텐츠 고인물 유저. 이른바 토끼공주 중 하나였다. 주직인 성기사는 물론이고 전 직업 만렙, 직업을 숨기고 들어갔다가 입장 직전에 플레이할 직업으로 바꾸는 복면가왕팟과 온갖 아사리판을 보여주는 예능팟도 제패. 솔탱솔힐은 물어볼 것도 없었다.

 

이미 다 시도해서 깼다는 뜻이다. 심지어 파티소개에 적혀 있는 ‘아스피린식 공략 씁니다’의 아스피린식 공략 영상의 탱커가 그녀였다.

 

할 거 더럽게 없네. 지연은 심드렁하니 다시 한번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려다가, 스크롤 끝에 걸린 파티모집을 보고 그대로 의자에서 튀어오를 뻔 했다.

 

"잠깐만 이거 뭐야?!"

 

[<푸른 돌고래의 섬> 레이드 초행 도와주세요 | 현미라떼]

 

"초행? 푸돌섬 초행?"

 

초행? 그 귀한 뉴비?! 닉네임 옆에 붙어있는 마크는 틀림없이 뉴비의 표식이고, <푸른 돌고래의 섬>이면 <낙원바다> 확장팩의······. 아, 그랬지. 지연은 파티모집창을 클릭하자마자 이놈의 망겜을 다시 한번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분홍 키보드에서 욕설이 튀어나갈 뻔했다.

 

[푸른 돌고래의 섬 초행입니다 매칭이 안 돼서 파티모집 올립니다ㅠㅠ 스토리 밀게 도와주세요]

 

“망할 낙원바다 이래서 통폐합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라니까-!!! 미쳤다고 일반이랑 하드를 통합하냐고---!!!”

 

아이고 귀한 뉴비 다 접겠네! 안 그래도 요새 뉴비 없는데! 들리냐 훌그레인게임즈! 이를 득득 갈며 지연은 혹시라도 우리 귀한 뉴비님 파티모집 안 돼서 울며 게임 접을까봐 파티가입 버튼부터 빠르게 눌렀다. 이미 지연의 머릿속에서 뉴비는 고인물을 기다리며 서럽게 울고 있는 가련한 비운의 뉴비였다.

 

[시슴: 안녕하세요]

[시슴: 메인스토리 진행하다 막힌 건가요?]

 

아차, 좀 더 상냥하고 다정한 고인물의 천사처럼 첫 마디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한 박자 늦게 후회해봤지만, 언제나 엔터키가 그녀의 생각보다 빨랐다. 생각을 하고 엔터를 치자. 뇌 뺄 거면 엔터키도 빼자. 오늘도 지연의 반성문이 한 줄 늘었다.

 

[현미라떼: 어서오세요!]

[현미라떼: 메인스토리 진행하려는데 앞전 레이드를 다 깨고오래서]

[현미라떼: <붉은 절벽 요새 공성전>까지는 어떻게 깼는데]

[현미라떼: 여기부터 매칭이 영 안잡히네요ㅠㅠ]

 

다행히 뉴비는 갑자기 튀어나온 고인물에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지연은 파티창에 뜬 뉴비의 정보를 짧게 스캔했다.

 

닉네임, 현미라떼. 활성화된 직업은 네크로맨서 하나. 네크로맨서는 이른바 퓨어 딜러로, 입문은 쉬워 보여도 후반으로 갈수록 파일럿을 더럽게 타는 원거리 마법 딜러였다. 어려운 거 고르셨네. 뭐, 메인 스토리 밀기는 괜찮은 직업이지. 다른 직업도 해 보시면 좋을 것 같은데.

 

뉴비가 오래오래 월오판을 해 주는 미래에 대해 김칫국을 동이째로 들이키며, 그녀는 뉴비에게 부클로 권할 만한 직업을 잠깐 떠올려봤다. 사수도 좋고, 정령사도 좋고. 레이드 끝나고 권해봐야겠다. 지금 당장은 낙원바다 레이드 클리어가 중했다.

 

[시슴: 낙원바다 확팩 레이드가 매칭이 잘 안잡혀요ㅎㅎ]

[시슴: 안그래도 세기말이라서]

 

<월드 오브 판타지아>, 약칭 <월오판>은 레이드가 메인 컨텐츠인 MMORPG 게임이다보니, 다들 신규 확장팩의 신규 레이드 위주로 플레이하고는 했다. 이전 확장팩들의 레이드는 이벤트 할 때나 반짝 사람이 몰리는 판이었다. 거기다 이번 세기말은 유독 길어서, 고인물들은 월오판을 바탕화면으로 켜 두고 다른 게임을 하고는 했다.

 

 

여기에 <낙원바다> 확장팩 레이드의 X랄 같음도 한몫 단단히 했다. <낙원바다> 들어서 제작진이 갑자기 미쳤었는지, 일반-하드-신화 난이도로 운영하던 레이드 난이도에서 갑자기 일반-하드를 통폐합해버렸던 것이다.

 

유저들의 반발은 당연히 컸고, 여기에 낙원바다 확장팩의 레이드를 <추억을 위하여> 확장팩 메인스토리의 진입조건으로 걸어버렸으니, 아무리 고인물이 많고 월오판의 레이드 퀘스트 스토리가 좋다 해도 운영진 이놈들 미쳤나 싶은 것이다.

 

결국 낙원바다 레이드에도 일반 난이도가 추가된다고 간담회 발표가 있었으나, 그게 다음 확장팩인 <종소리 없는 묘지>에서 추가된다고 하여······. 현재로서는 그대로 깨는 수밖에. 뉴비한테 ‘두 달만 기다리시면 일반 난이도 나와요!’ 같은 미친 소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지연은 침착하게 자신의 캐릭터, 시슴의 상태창을 점검했다. 직업, 성기사. 레벨 80. 풀파밍. 아이템 내구도 100%. 어딜 가도 탱버 한방에 뚝배기 깨져서 삭제되지는 않을 스펙이다. 이대로 매칭 돌리면 한 시간쯤 기다리면 잡히려나. 한 시간은 너무 길긴 했다. 만렙존 가서 외치기라도 하면서 모아봐야 하나.

 

[현미라떼: 그래서 사람이 안 오는 건가 봐요]

[현미라떼: 한시간째 모집중인데 아무도 안 오셔서ㅎㅎㅠㅠ]

 

뭐라고.

한시간 째 모집중이라고?

 

F키가 빛보다 빠르게 눌렸다. 지연의 화면에서 켜진 창이 하나 늘었다.

 

<현재 접속 중인 친구>

[감나빗]

[서울대입구]

[니포켓쌔비지]

[아스피린]

[딸기바나나]

 

있을 고인물 대충 다 있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월오판의 레이드는 기본이 8인 레이드이었므로, 지연은 귓속말을 하나씩 날린 뒤 카톡을 켜 하나를 더 불러 깨웠다. 같이 공팟을 도는 하드컨텐츠 힐러 친구인 최서율을.

 

[김지연: 야 일어나]

[김지연: 최서율 일어나]

[김지연: 홍게홍게 게장만들기전에]

[최서율: 뭔데]

[김지연: <스크린샷>]

[김지연: 뉴비가 낙원바다 레이드 모집중]

[최서율: 지금들어간다]

 

좋아. 뉴비를 도와줄 고인물들의 소환의식은 대강 끝났다. 다들 현 시점의 매칭과 파티모집의 지X같음을 알 만큼 아는 고인물들이니만큼 반응이 빨랐다. 모니터 뒤의 본체의 표정부터 가다듬고서, 지연은 상냥하고 다정한 천사같은 고인물 헬퍼에 빙의해 타자를 쳤다.

 

[시슴: 현미라떼님]

[시슴: 저한테 파장 주실 수 있나요?]

[현미라떼: 네]

 

파장도 척척 넘길 줄 알고, 기특한 뉴비구만. 지연은 혼자서도 파티장 넘기기 기능을 쓰는 뉴비에 찡해져서는, 아예 <낙원바다행 어선> 이라는 이름으로 디스코드 서버도 하나 만들었다. 뉴비님이 리딩 필요하시다 하면 링크 드려야지. 공략을 봤어도 리딩이 있으면 아무래도 편한 법이다.

 

[시슴: 현미라떼님 공략 따로 보셨나요?]

[현미라떼: 아뇨 캠프에서 초행은 공략 보지 말고 한번 가보라 하셔서]

[시슴: 캠프 들어가셨어요?]

[현미라떼: 닻내림 항구에서 캠프 가입 권유가 왔어서 가입했어요]

[시슴: 혹시 바운스볼 캠프?]

[현미라떼: 맞아요ㅎㅎ 아시나요??]

 

알다마다. 뒷목이 뻐근해지는 것 같다는 게 이런 거구나, 지연의 새삼스럽고도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월드 오브 판타지아는 유저를 여행자, 유저들의 길드를 캠프라고 부르는 게임이었다. 캠프 전용 채팅 기능 때문에라도, 유저들은 마음 맞는 사람끼리 크고 작은 캠프를 꾸려 게임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지연도 친구 동생인 감나빗이 만든 부스터샷 캠프에 가입 중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많고많은 캠프 중, 바운스볼 캠프라 하면······.

 

월오판의 시작점, 닻내림 항구에서 가입권유 남발하고 다니면서 뭣모르는 뉴비를 있는 대로 데려오고서는, 정작 사후 케어는 전혀 없다시피 한 초대형 캠프였다. 별거 없어요, 공략 보지 말고 한번 가 보세요, 말은 하면서도 같이 가 드릴까요? 라고 따라붙지는 않는 양심 죽은 놈들. 뉴비를 그렇게 데려왔으면 책임을 지란 말이다!

 

당장 생면부지의 뉴비 앞에서 뉴비가 들어가 있는 캠프를 뒷담하긴 좀 그래서, 지연은 ㅎㅎ만 치고 말았다. 모니터 뒤에서는 쌍욕이 날아다닌 건 당연지사였다.

 

“양심 있으면 뉴비 줍지 말아라 진쯔······.”

 

아, 그래. 양심 죽었지. 캠프원수 업적 점수만 받아가면 땡인 탱탱볼에 무슨 양심이 있어.

 

[시슴: ㅎㅎ]

[시슴: 유명하니까요 대형캠프고]

 

사람이 많긴 한데 뉴비 챙겨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이라는 말이 앞에 생략되어 있는 채팅이었다. 뉴비님 제발 거기서 나와서 다른 더 좋은 데 찾아보세요, 라는 말은 뒤에 생략되어서 붙어있었다.

 

[시슴: 공략 안 보셨어도······. 헤딩도 재밌으니까요. 공략은 정 못 깨겠다 싶을 때 보셔도 돼요~.]

 

물론 지금 들어오는 이 고인물들은 네크로맨서 뉴비 하나 죽는다고 못 깰 위인들은 아니긴 했다. 죄다 토끼공주들이라.

 

띠링, 알람이 울렸다. 파티초대를 받은 겜친들이 하나씩 파티에 가입하고, 금세 8인 파티가 다 찼다.

 

[니포켓쌔비지: 안녕하세요]

[현미라떼: 헉 안녕하세요!]

[감나빗: 지금 포지션 다 정해졌나요?]

[시슴: 하던대로 하면 될 듯?]

[감나빗: ㅇㅋ 안티메이지함]

[아스피린: 수사요]

[아스피린: 멘힐 제가볼게요]

[니포켓쌔비지: 도적 각]

[서울대입구: 양치기요]

[딸기바나나: 보안관 잡을게요]

 

원마딜인 네크로맨서 뉴비를 두고 고인물들은 빠르게 교통정리를 마쳤다. 힐러직인 화가로 섭힐을 맡은 홍게, 최서율이 산개 매크로를 올렸다. 산개 매크로를 보고 말이 없는 뉴비에 지연은 재빨리 디스코드 링크를 채팅창에 붙여넣었다.

 

[시슴: 뉴비님 공략 아직 안 보셨다고 하니까]

[시슴: 필요하시면 제가 리딩해드릴게요]

[시슴: 듣톡만 하셔도 되니까요]

[시슴: <디스코드 링크>]

[현미라떼: 감사합니다ㅠㅠ]

[현미라떼: 디스코드 링크로 들어가면 되나요?]

[시슴: 네 맞어요]

 

띵, 디스코드 입장을 알리는 효과음과 함께, 다소 낮은 편인 자신의 목소리와는 대조적인 맑고 고운 목소리가 헤드셋을 통해 들려왔다. 파티원 중 유일하게 처음 듣는 목소리인 만큼, 굳이 자기소개 없이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현미라떼님이시구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현미라떼님이시죠?”

“네, 맞아요. 파티모집부터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세기말에 이렇게 뉴비님 오시면 좋죠. 낙원바다 레이드가······. 그렇게 엄청 어렵진 않으니까요, 리딩 듣고 따라오시면 금방 깰 거에요.”

 

네. 긴장감이 역력한 뉴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헤드셋을 고쳐 쓰고는, 지연이 파티원들에게 준비 확인 투표를 돌렸다. 전원 출발 준비 완료. 좋아.

 

미터기를 켜고, <푸른 돌고래의 섬> 1장의 입장 버튼을 누르자 경쾌한 매칭 알람음이 울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이때까지만 해도, 김지연은 몰랐다.

 

레이드 초행을 도와줬던 이 뉴비에게, 자기가 역키잡을 당할 것이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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