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교환
유료

병열상실

사회적질타회피 연교

  “칼리,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었던 곳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헤세드가 말했다. 그는 그 뒤로 지독한 침묵이 흐르다가 게부라가 뭐라 말을 하기 전에 신경 쓰지 말라며 애매한 표정을 하고 말을 흐렸다. 이 날은 그들이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에 입사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날이었다. 그날도 여전히 직원들은 일을 했다. 지극히 평범한 날이었다. 헤세드는 커피를 내렸고 게부라는 그가 하는 뜬금없는 소리들과 약간의 잔소리, 능청스러운 아부들을 듣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도망간다- 라고 함은 도망친다- 라는 말과 같았다. 도망친다. 어떻게? 아니 무엇으로부터? 다니엘은 구태여 그 대상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말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삶은 만들어진 것. 그 삶을 만들어준 조물주로부터 도망치는 피조물이 이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 가. 피조물은 창조주를 사랑한다. 모든 신화의 바탕이다. 신화는 현실에 있는 것들을 배경으로 만든다. 현실에도 피조물은 창조주를 사랑한다. 이 명제는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헤세드가 이상해졌다.


병열적 기억상실에 대하여.  

W. 마라집

헤세드의 사무실에선 언제나 커피향이 났다. 진한 원두냄새. 기계에 저런 걸 넣어도 괜찮나 싶지만은 엔케팔린을 입에 털어 넣는 다른 이들을 보면 ‘뭐 괜찮지 않나’라는 감상이 앞섰다. 그르륵 거리며 갈리는 원두소리, 따뜻한 물을 부으면 방안 가득 퍼지다 못해 앞 복도까지 차는 커피향내는 생각을 까무룩 잊기에 좋았다. 헤세드의 정신사나운 말들은 몇 번 대꾸해주면 금방 잦아들었고 이내 서류들이 팔락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언제부터 였더라. 헤세드가 저리 여상하게 굴어댄 게.

다니엘이 L사 입사 후에 고분고분하고 자존심도 없다는 듯이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그 바뀐 태도가 게부라의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긍심 높은 도련님. 도시 외곽의 사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도련님. 아아, 자신의 발 아래에 닿는 것들으 처우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고결한 도련님. 그런 이를 빛 바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런 삶도 있음을 알게 만들 생각은 추후도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이건 실수였다. 다만 그 일에 있어서 후회는 하지 않었다. 칼리는 그저 일을 했었던 것이었고 이 사실을 다니엘이 모르지 않았다. 둘 모두가 알고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누구 하나 구태여 그때의 일을 끄집어 내어 해부하려 들지 않았다. 이는 어떤 약속이었다.

“오늘도 마키아또?”

“그래.”

“하하. 그냥 블랙커피도 맛이 좋을텐데.”

헤세드는 게부라가 쓴 커피를 마시지 않는 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꼭 한번씩은 그 여부를 묻고는 했다. 뒷골목에서는 쓴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다. 설탕을 많이 넣어 커피 향은 커녕 혀에 감기는 단 맛만이 남는다. 싸구려 원두의 향을 감추고 개인의 기호보다는 오직 원료로서의 도구적인 형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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