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의 변증법 (2)
싱클레어 시클라멘 | 2023.07.07
트라우마 반응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 국가 폭력에 대한 언급이 존재합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내가 잘못한 걸까? 싱클레어.”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마리아 소볼레프스카-우드워드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리아가 어떨 때 자신을 ‘싱클레어’라고 부르는지 알았다. 그것은 증인으로서의 호명이다. 그것은 그가 지금은, 지금만큼은 마리아의 친구가 아닌 사라진 역사의 대리인으로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고통스럽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지금도 가끔씩, 몸에 사무치는 한기를 느낀다. 영화관의 꿈을 꾼다. 낭랑하니 울리던 안내 방송. 버석거리는 낡은 코트와, 푹신한 의자의 촉감. 눈 앞에서 돌아가는 초침….
그는 ‘싱클레어 시클라멘’이 아닌 ‘싱클’로 남아있고 싶었다. 지나간 생의 증인이 아닌 지금 여기, 마리아의 친구로 남아있고 싶었다. 그 한기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행복조차 알지 못했던 과거의 망령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수많은 말을 들어도, 그 사이에 여러 일을 겪었음에도, 그는 그 사람을 자신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모르겠어. 그냥, 어쩐지…”
마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두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그래선 안 되었던 것 같아.”
마리아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부탁을 꺼냈던 순간을 떠올린다. 폭력에 대한 글로 가득 찬 책장 앞이었다.
마리아는 말했다.
나는 마리아 소볼레프스카-우드워드인 것만큼이나 메리 우드워드야. 내게는 죄가 있고 책임이 있어. 그러니 내가 그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 버리지 않도록 도와줘.
그는 마리아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겼다. 메리 우드워드는 마치 싱클레어 시클라멘이 그러했듯 마리아와 별개의 존재였다. 그와 마리아 모두, 자아가 나뉘지 않은 것은 순전히 한쪽이 죽음을 맞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아의 죽음. 표면으로 드러날 만큼, 그들과 싸워서 승리할 만큼 강인하지 않은 것. 메리 우드워드와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서로 다른 편에 서서 서로 다른 결과를 얻었음에도 그 점만은 같았다.
그러나 정말로 같았던가?
“…한 가지 물어볼게. 마리아 소볼레프스카-우드워드. 네가 스스로 생각해봤으면 좋겠어.”
마리아는 메리 우드워드를 과거의 망령으로 두지 않았다. 둘 수 없었다. 죄업을 계승했다.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 스스로를 가해자의 위치에 두었다. 망각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간과하지도 않았다. 마리아의 모든 행위 뒤에는 과거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었다. ‘싱클’은 마리아가 극복하길 원했으나, 나아가길 바랐으나… 그것은 그의 바람처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궁금했다. 마리아와 그의 차이가. 채무라면 그 역시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얼마든지 메리 우드워드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불사조 기사단이 된 것은 어쩌면 운일지도 몰랐다. 아낌없이 보살펴진 운, 무시당하지 않은 운, 폭력에 내몰리지 않았다는 운. 다시 말해, 권력을 가졌다는 운. 특권은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는다. 그것을 누가 가지고 누가 가지지 못하느냐는 언제나 운일 뿐이었다.
물론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폭이 넓고 좁을지언정, 항상 선택은 할 수 있다. 메리 우드워드는 악이 되기를 선택했다.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선의 편에 서기를 선택했다(그는 결코 자신을 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차이의 이유일까?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옳은 편에 섰고, 메리 우드워드는 그른 편에 섰다는 사실이 지금의 차이를 만들어냈을까? 하지만 그는 보았다. 과거를 돌이키지 않은 수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 당장 죽음을 먹는 자 중에서도 뻔뻔할 만큼 변명을 늘어놓는 자들이 있었다. 많았다. 재판을 한 번만 오갔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당장 자신이 직접 저지른 행위조차도 부인한다. 저주에 걸렸을 뿐이라며 핑계를 댄다.
“너는 왜 그러길 원하는 거야?”
마리아는 더 쉬운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그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은 기껏해야 열 명 남짓. 그 정도 인연이야 끊어버리면 그만이다. 얼마든지 잘라낼 수 있었다. 충분히 부인할 수 있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마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몸을 기울였다. 허리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올렸다. 마리아를 응시했다. 바라보았다. 그 갈색 눈동자 안에 담긴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싱클레어 시클라멘’이었다면 이해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싱클’보다 더욱 현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야만 했던, 그렇게 자신을 몰아가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벽 쪽에 자리한 거울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곳에 비치는 것은 단지 찬장뿐이어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건, 중요한 질문이야.”
어차피 마리아가 하는 행동은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마릭은 위로받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의 행동은 그저 잊고 나아가려는 그를 방해할 뿐이다.
사라진 역사의 피해자들도 위로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꿈속을 떠도는 망령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른 불사조 기사단들도 위로받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의 경험이 아니다. 그들이 메리 우드워드에게 겪은 일 중에서 ‘실종’이나 고문이나 죽음은 없었다. 남아있는 이들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꽤 운이 좋은 사례였다.
“싱클레어, 나는…”
마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입이 열렸다가 다시 다물리는 것이 보였다. 입술에 힘이 들어가 일자로 당겨졌다.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침묵했다. 망설이다가, 머뭇거리다가,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말을 짜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통 속에서, 바닥까지 내려가 단어들을 긁어모으는 것처럼.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일까. 그는 자신이 그 이유를, 모른다는 사실마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싱클레어.”
“듣고 있어.”
“너는 내 증인이지.”
마리아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한 발짝 늦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더이상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
“…조금 더 설명해봐.”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야.”
“…”
“언젠가 네게 말한 적 있었지. 내 이야기는 말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가해자의 말은, 피해자를 위한 증언이 아니라면 또 다른 가해가 되기 쉬우니까.”
“알고 있어.”
“하지만 말이지, 싱클.”
마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입가가 떨려왔다.
“이것이 내가 감당할 원죄라 하더라도, 내가 져야 하는 책임이라 하더라도,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야.”
아.
그는 마리아를 응시했다. 그 갈색 눈 안에 서린 고통을 보았다. 그가 함께하기로 했던 고통이다. 함께하지 못한 고통이다.
“매일 밤, 악몽을 꿔.”
마리아는 두 손을 맞잡고 꾹 눌렀다. 차분히 말하려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있다.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 고개를 숙인 채, 마리아의 고통을 들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 사람들 중 누구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체로 얼굴이 없는 모습으로 나와. 가끔씩은 네가 이야기해준 이름들이 적힌 명단으로 나올 때도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묘지 한가운데 서서 비 대신 내리는 핏물을 그대로 맞고는 해.”
문득 한기가 그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는 옷을 여몄다. 저 멀리, 아득한 곳에서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숨을 쉬기가 힘들어. 주기적으로 기억들이 나를 덮쳐와. 한순간 내가 서 있는 땅이 어디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 비명 소리가 너무 생생하게 들려. 심장이 아플 정도로 세게 뛰어.”
알고 있었다. 그 길이 고통스러우리라는 것 정도는.
단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프고, 힘들어. 내가 저지른 일이지만, 나는 그때의 그 사람과는 달라. 그 사람은 그런 짓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도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타인이다. 그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살고 싶지 않았다. 싱클레어 시클라멘의 말년은 그에게 언제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었다. 비록 마리아의 것에 비견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는 생각했다.
그는 싱클레어 시클라멘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어떻게 그 모든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가면을 쓰고, 전쟁에서는 단 한순간도 군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듯 친구였던 이를 죽인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고집스레 쓸쓸히 죽어간다.
희망도, 증인도, 보상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삶. 그 모든 것을 버려버린 삶.
그래서 그로서는, 그 삶을 보는 것조차 괴로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떨리는 목소리. 마리아는 두 손을 꼭 쥐었다.
외상 사건을 겪은 사람은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나오는 문장이었다. 외상 사건은 피해자의 뇌에 영구적인 손상을 남긴다. 치유는 가능하다. 회복도 가능하다. 그러나 깨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마치 싱클이 도자기 인형에 대한 기억을 가져버린 때처럼, 마리아가 자신이 어디까지 가버릴 수 있었는지 알아버린 때처럼.
“아무도, 아무도 이런 걸 경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싱클.”
언제나 궁금했다. 마리아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자신을 증인으로 세우고, 보답받지도, 보답받아서도 안 되는 속죄를 계속하는 이유가. 친구로서 고통스러웠다. 증인으로서는 고민했다. 이것이 한 사람을 위한 속죄라면 마릭이 원하지 않을 때 멈추어야 했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진작에 그만두어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
마리아를 보았다. 마리아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몸을 한데 웅크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온몸이 떨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마리아.”
목소리가 잠기는 것을 느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울을 향해 걸었다. 생각이 깊어질 때면 나타나는, 오랜 버릇이었다.
“그렇다면 네가 그 길을 걷는 이유는, 스스로 안정을 찾기 위해서일까?”
환상을 마주한다. 아직 머리가 길었을 무렵이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지팡이는 두 손으로 잡고 있다. 마치 부러뜨려버리려는 것처럼 힘을 준다. 지팡이는 부러지지 않았다. 그 대신 금이 간 자국이 남는다. 절망이 그 얼굴을 스쳐지나간다.
그는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멈추었다. 다시 지팡이를 쥔다.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환상은 똑바로 거울 너머를 응시한다. 굳은 표정으로 등을 돌린다. 어딘가를 향해 달려나간다.
다시금, 환상이다. 이번에는 조금 더 나이가 든, 머리를 짧게 잘랐을 적의 모습이다. 두 발은 가지런히 모여 있다.
처음으로 떠올려보는 순간이다. 말년이 아닌, 그 영화관과 한기가 아닌, 정말로, 오랜만에 떠올려보는 기억이었다.
거울 속의 환상,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말한다.
다시는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아.
나의 어리석음으로 같은 결과를 맞는 것은 사양이야.
나의 오만으로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아.
나의 과신으로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만들고 싶지 않아.
나는 안식을 구하지 않을 거야.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맞서서 싸우고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마리아 소볼레프스카-우드워드를 마주했다. 이제 마리아는 고개를 들고 있었다. 목소리는 더이상 떨리지 않았다. 얼굴에는 단호함이 어렸다. 굳은 결심이, 그 안에서 느껴졌다.
싱클레어 시클라멘은 생각했다. 마리아는 언제나 가해자였다. 메리 우드워드가 저지른 가해는 그들의 관계를 핏빛으로 덧칠했다. 그는 증인으로서 그것을 기억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가 마리아와 약속한 것이었다. 마리아가 자신의 가해를 부인하지 않도록, 자신의 죄를 책임지도록, 그는 과거를 소환하고, 떨쳐내고 싶은 기억을 가져온다. 마리아가 눈을 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러나, 아니. 어쩌면 그래서 싱클은 공감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이 그러하듯 마리아 역시도 과거의 목격자였다. 그의 기억이 쓸쓸했던 것만큼이나, 그 고독이 사무치도록 시린 만큼이나, 마리아의 기억은 잔혹하며 끔찍했다. 그가 때때로 지독한 한기를 느끼는 것처럼, 마리아는 아즈카반의 축축한 냄새를 맡을 것이다. 영화관의 기억이 그를 붙잡는 것처럼, 위원회의 기억은 마리아를 괴롭게 할 것이다.
그러니 착각이었다. 그것은 속죄가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과 같은 사람이 또 나오지 않는 것. 그래서 그 누구도 아프지 않는 것. 아무도 변형되어버리지 않는 것.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지 않는 것.
마치 오래전의 싱클레어 시클라멘이 소망했던 것처럼….
“그렇다면,”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추었다. 마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싸워, 마리아.”
너의 싸움을 응원한다. 증인으로서, 친구로서. 이것은 배신이 아니다. 피해자를 저버리는 일도 아니다. 그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마리아를 비판할 것이다. 과거를 일깨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지금만큼은…
“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은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리아가 맞서 싸우려는 대상은 너무도 거대하다. 볼드모트는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지금도 머글 세계에서 수많은 볼드모트들이 누군가를 죽이고 고문하고 있다. 알고 있다. 이 싸움이 얼마나 가망이 없는 길인지, 온몸을 내던져서 부딪히는 일인지. 그 편린만을 알 뿐이라 하더라도.
그러므로, 그는.
“그런 마음이라면, 나는 언제나 네 편일 거야.”
마리아의 손을, 맞잡는다.
결국 그의 후회란 감정을 포기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나아가, 마리아 소볼레프스카-우드워드.”
네가 찾으려는 답이 궁금하다. 가게 될 길이 궁금하다.
그리고 궁금하다.
어쩌면, 아주 만약에, 그 끝없는 싸움에서 마리아가 답을 찾는다면…
자신도 풀려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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