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우드워드

포연이 걷힌 자리

메리 우드워드 달비명 AU | 2023.08.16

양마키 님의 “달의 비명”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여 쓰여진 로그입니다. 단, 시나리오에 대한 스포일러는 거의 포함하지 않습니다.

적나라한 욕설, 차별적인 표현, 전쟁 범죄, 질식사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등장합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제국주의 전쟁 범죄의 가해자 시점으로 서술된 글입니다. 전쟁 범죄에 대한 화자의 정당화 과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자의 말과 생각에서 드러나는 사상에 오너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도 전장의 냄새를 맡는다.


 

문이 열리자 복도의 빛이 새어든다. 아주 작은, 쥐 정도나 겨우 드나들 법한 미닫이문이다. 하루에 두 번 이곳으로 배식이 주어진다. 간수가 귀찮거나, 그 일말의 배식 재료마저 빼돌리려 할 때는 그 정도도 사치가 된다.

투박한 손 하나가 나타나더니 묽은 수프와 딱딱한 빵 쪼가리를 대뜸 들이민다. 그때쯤이면 내 배는 이미 고파질 대로 고파진 채다. 여기에 자존심 따위가 끼어들 틈은 없다. 걸신이 들린 사람마냥 빵 쪼가리를 가로채면 다시금 문이 닫힌다. 가끔은 그 과정에서 짧게 대화가 오갈 때도 있다.

 

“오늘의 식사다. 너무 땅바닥에 붙어서 먹진 말라고.”

“이스트엔드의 마녀라더니, 하는 꼬라지를 보면 암X가 따로 없네.”

 

어휘의 태반은 욕설에, 말투는 상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독방에 갇힌 채로 있다 보면 그런 말이라도 반가운 법이다.

 

“입 닥쳐.”

 

그것이 내가 그들에게 비굴하게 대할 이유를 만들어주지는 않지만.

그들의 떨어지는 언어 선정 능력만큼이나, 내가 보이는 반응도 천편일률적이다. 그들은 내 반응을 본 다음에는 한 번 세게 문을 후려친다. 내가 거기에 놀라든, 놀라지 않든 낄낄대는 웃음이 그 뒤를 잇는다. 수레를 미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져간다. 나는 땅바닥에 놓인 수프에 딱딱한 빵을 적셔 조금씩 입안에 넣는다. 어둠 속에서, 눈이 다시금 적응하길 기다리며.

 


 

뉴게이트 교도소는 모두에게 평등하다. 당신이 기껏해야 소매치기나 하던 잡범이건, 살인을 저지른 개자식이건 상관없다. 결국 당신은 ‘그’ 수레를 타고 밧줄을 목에 걸게 된다. 귀족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평민은 교수대에서 버둥거려야 했던 때도 있었다지만 더이상은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었다 한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겠지만.

무엇을 부정하랴. 나는 패배했다. 내가 줄을 대었던 귀족은 지금쯤 먼저 지옥으로 떠났을 것이다. 그가 죽어 나자빠지기 전에 누가 그의 몸뚱어리를 그 가련한 목으로부터 잡아당겨 주기나 했을지 모르겠다. 그는 생전에 원한을 산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군중들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환호뿐이었다. 거기에 슬픔이 섞일 자리는 없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이고.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쌓은 것은 명성이 아닌 악명이었다. 찬탄이 아닌 두려움이었다. 내가 맡은 업무란 그런 종류였다. 골드핀치 백작의 그림자. 불법적이고,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될, 온갖 더러운 일을 맡는 그만의 비밀 사병. 하인들은 나를 두려워했다. 윗분들은 나를 경멸했다. 메들린 골드핀치는 내가 자신의 개 취급을 받는 것을 즐겼다. 그의 적은 곧 나의 적이었으나, 그의 편이 곧 나의 편은 아니었다. 적과 아군, 오로지 이 둘로만 나뉜 세상에서 나의 적은 많았고 아군은 그 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전쟁 이후, 내가 등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적, 적, 적, 그리고 적뿐.

재판이 시작되자 백작은 모든 혐의를 나의 것으로 돌렸다. 반역도, 그 ‘추악한’ 범죄들도, 가장 최근 저택에서 일어난 일마저 전부 내가 한 짓이라는 것이 백작 측 변호인의 요지였다. 나를 위한 변호인은 배정되지 않았다. 배급받은 식사에는 독이 들어있었다. 내가 입을 열기를 두려워할 이들은 꽤 많았다. 모두가 나 하나로 끝날 수 있기를 바랐다. 

가장 말단에서 잘라낼 수 있다면 모두에게 이롭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짐승 새끼는 내 예상보다 유능한 탐정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어디까지 파고들었는지, 들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국방부에서 일하는 H경이나 골드핀치와 함께 이 계획을 총괄했던 K경에게까지 도달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가 가져온 증거들은 골드핀치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끌어내릴 수 있었다. 저 광장에 이미 매달린 목의 주인 말이다.

사실 그도, 나만큼이나 더 윗사람들에게는 잘라내기 좋은 가지였던 거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빵과 수프를 먹어치우고 나면 영원할 것만 같은 기다림이 찾아온다. 하루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독방의 창문은 복도를 향해 뚫려있기에 해의 높낮이가 보이지 않는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울려오는 성묘 교회의 종만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전부다. 그런 실낱같은 단서들을 제외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내가 들어온 날로부터 시간은 얼마나 흘렀는지, 다음 식사는 언제인지, 오기는 하는 것인지, 언제쯤 나는 저 광장에 서게 될 것인지….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 나는 독방에 갇혀 있다. 동료 죄수 따위가 존재할 리 없다. 간수들은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내게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에겐 괴롭힐 더욱 만만한 죄수들이 널려있다. 가족들은 내가 전쟁터를 전전하던 도중 죽었다. 사귀었던 친구들은 모두 전장에서 스러졌다. 골드핀치 백작은 이미 지옥으로 가는 길을 거니느라 바쁘시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넘쳐나는 시간을 해소할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나, 우리 죄수들에게 선택지는 오직 세 가지다. 석방되거나, 탈옥하거나, 사형당하거나. 그러니 감옥 역시도 그 세 가지 선택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를 살려놓는 정도면 충분했다. 두 번의 식사, 그때 간수와 나누는 짤막한 대화, 그것이 내가 하루 동안 하는 상호작용의 전부였다. 내가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변화였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다르다.

 

쾅.

거친 울림에 문이 흔들린다.

 

“일어나. 설마 그새 곯아떨어지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지난 식사 때 들었던 목소리다. 나는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본다.

 

“무슨 일이지?”

“네 사형 날짜가 내일로 결정되었다. 그전까지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이야기하도록.”

 

가벼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감옥에서 나가는 방법은 세 가지다. 석방, 탈옥, 그리고 사형. 감옥의 일상에 변화가 생기는 순간도 이 세 가지와 연관되어 있다. 누군가 탈옥을 시도했거나, 석방이 주어지거나, 반대로 처형 날짜가 결정되거나.

 

“위스키에 시가로 하지. 쿠바산으로.”

“아주 호화스럽구만. 반역자 주제에 요구사항만 들으면 네가 무슨 귀족 나으리라도 되는 줄 알겠어.”

 

간수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린다. 짐짓 태연하다는 듯 말을 잇는다.

 

“그래서, 들어주지 않을 건가?”

 

간수는 작게 욕설 따위를 구시렁거리다가 애꿎은 문에게 화풀이한다.

 

“어디 네가 얼마나 태연할 수 있을지 보자고.”

 

씩씩거리는 그의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문에다 발길질하는 소리가 몇 차례 들리더니, 이내 다시 멀어진다. 아마 상관에게 보고하러 가는 것이겠지.

쥐었던 주먹을 편다. 내가 주먹을 쥐었다는 사실조차 이제 자각했다. 손은 축축하다. 긴장이라도 한 것일까?

실소를 흘린다. 죽음을 태연하게 여긴 지는 오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아직은 애송이인 모양이다.

 


 

처음 죽음을 마주했던 것은 크림반도에서 러시아 놈들과 싸웠을 때였다. 우습게도 나를 죽일 뻔한 것은 전쟁이 아닌 티푸스였다. 온몸에는 발진이 들끓고, 머리 위에는 불덩이를 올려놓은 것만 같았다. 불 가까이에 있어도 몸은 떨려왔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통증에, 눈앞은 흐려졌다. 병상에 누워 있으며 생각했다. 아, 이대로 나는 죽는구나. 가족들도 다시 보지 못한 채로 꼼짝없이 개죽음을 당하겠구나.

두려웠었나? 그랬던 것 같다. 천막 안에서는 하루가 멀다고 누군가 죽어서 실려 나갔다. 남은 이들은 저 높이 계시는 분과 부모를 찾으며 울고 통증에 비명을 질러댔다. 전방에서는 오늘도 동료의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어제의 동료를 오늘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것이 내가 깨닫게 된 죽음의 모습이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명예도 없었다. 고귀함은 사치였다. 아름다움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시체와, 눈물과, 비명과, 내 몸을 자꾸만 긁게 만드는 빌어먹을 발진뿐이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터진 인도 놈들의 반란 때도 비슷했다. 삼림 속에서 이루어진 전투는 언제 어디서 적들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한 걸음 걸었을 뿐인데 동료가 쓰러지는 경우도 부기지수였다. 마을을 가장 조심해야 했다. 대부분 우리가 간 지역의 마을은 현지인들이 이미 세포이 놈들 편에 서 있었다. 언제 어디서 총탄이 날아올지 몰랐다. 풍토병에 걸려 죽을지 몰랐다. 

우리는 두려웠기에 죽이고 또 죽였다. 아녀자를 강간하고, 아이들을 우물에 던져넣고, 포로들의 목을 자르고, 포탄에 넣어 하늘로 쏘아 올렸다. 반란이 진압되고 우리는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어떠한 자긍심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깨달았을 뿐이다. 우리는 나약하며, 잔인하다. 명예란 피를 가리기 위함이요, 선이란 피 앞에서 눈을 가리는 것이다. 평화를 외치는 이들은 두 부류다. 유약해 빠진 병자, 아니면 우리가 무엇 위에 서 있는지 모르는 위선자.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행동에 거침이 없어졌다. 포로의 목을 꼬챙이에 꽂아 밖에 내걸었다. 금품을 약탈하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이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여댔다. 어차피 우리의 문명은 잔인함 위에서 세워진 것.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않았다. 인도 놈들이 좀 죽는다 해서 우리를 탓할 이들은 없었다.

그것은 광기였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본질이었다.

잔혹성.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을 세운 원동력.

잔인함. 우리 백인들로 하여금 저 야만인들을 무릎 꿇게 만든 힘.

우리는 잔인했기에 강했다. 냉혹했기에 이겼다.

 

그곳에서, 밤마다 스스로 그렇게 말했어? 당신은 도구고, 저들은 물건이니까 이건 피와 살점이 아니며, 저건 비명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면 상관이 없어졌나? 헛구역질이 멈추고, 손이 떨리지 않고, 눈앞에 어른거리던 잔상이 멈췄어?

 

그래. 끊임없이 말했다. 끊임없이 속삭였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래야 버틸 수 있었으니까.

 


 

문이 열린다. 수레가 움직인다. 온몸은 밧줄로 꽁꽁 묶였다. 머리에는 검은색 두건이 씌워졌다. 흐릿한 형체들이 내 옆에 있다. 아무래도 오늘 나의 동료가 될 이들인 모양이다.

수레 안은 조용하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거친 도로 위를 지나는 덜컹이는 소리뿐이다. 모두가 침묵에 잠겨있다. 아마도 닥칠 미래가 두려운 것이겠지. 곧 우리는 목이 매달리고, 호흡이 막혀가는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멀리서 환호성이 들려온다. 우리의 죽음을 구경하고자 하는 군중들이다. 간수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내가 두려워하기를 바란다는 듯 사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큰 소리로 떠벌려댔다.

 

“수레를 옮기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지. 너 같은 범죄자들이 죽는 걸 구경하려 몰려든 구경꾼들이 수레를 아예 둘러싸 버리거든. 그러면 그곳에서 옴짝달싹 못 한 채 몇 분이나마 늘어난 목숨을 허비하는 거야.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말대로다. 이내 수레는 군중들이 미는 통해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한다. 저들은 우리를 향해 야유를 퍼붓고 고함을 지른다. 휘파람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무언가가 딱딱한 것이 머리를 가격한다. 

우리는 걸어다니는 과녁판이다. 수많은 물건들이 우리에게 날아온다. 물컹한 것이 터지는 소리, 딱딱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 참지 못하고 새어나오는 비명과 신음들. 

그들에게 내 죄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정말 잘못을 한 것인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그저 볼거리를 원한다. 나의 죽음을, 나의 고통을 원한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움츠리지 않는다. 부러 고개를 치켜들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다. 두건 아래에 조소를 머금는다.

수레가 느리게 나아간다.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형장이 조금씩 가까워진다. 죽음이 지척으로 다가온다. 심장이 거세게 뛴다. 수레의 턱을 움켜쥔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사방에서 함성이 들려온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이상한 일이다. 이곳은 전쟁터가 아닌데. 그런 것이 맡아질 리가 없는데도.

 


전쟁터에서 벗어난 지도 15년이 지났다. 나는 인도의 반란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제대를 택했다. 그놈들에게 왼쪽 다리를 꿰뚫린 뒤로 나는 다리를 절게 되었다. 군대는 내가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대로 나를 전역시켰다.

내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가족들은 한창 세포이 놈들을 때려잡던 시기에 전부 콜레라에 걸려 죽어버렸다. 제대한 군인에게 명예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제대한 군인들이 받는 연금도 기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받지 못했다. 내가 다시 군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다리를 멀쩡하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었냐고? 그저, 꿈이다. 

내가 전장에서 살아온 기간을 합치면 겨우 4년. 이제 40살에 가까워지는 내 나이를 고려할 때 긴 기간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4년을 결코 잊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모든 잔혹을 그곳에서 맛보았고, 모든 고통을 그곳에서 겪었으며… 되풀이되는 죽음을 보아야 했다. 눈을 감으면 그곳의 풍경이 나왔다. 진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비명이 귓가에서 울렸다.

제이슨 자식은 나보다 대여섯은 어린 꼬맹이였다. 그가 내 옆에서 쓰러질 때의 나이는 스물도 채 되지 않았다. 사라 그놈은 나처럼 총에 몸뚱어리가 꿰뚫렸다. 단지 그 부위가 다리가 아닌 목이었을 뿐이다. 레이첼은 세포이 놈들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들었다. 우리가 들이닥쳤을 때 이미 그는 숨을 거둔 뒤였다.

이름 모를 인도인 여자는 우리 부대의 약탈을 막으려 들었다. 그는 그대로 목이 베였다. 반도에서 만난 어떤 아이는 겁도 없이 우리에게 돌을 던졌다. 나는 그 대가로 아이의 집을 불태웠다. 남자가 막대기를 들고 덤벼들 때 나는 망설임 없이 총을 쏘았다. 피가 목구멍을 막아 나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남자는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얼굴들이 나타났다. 풍경들은 섞이고 뒤바뀌었다. 붉은빛이 사방에 가득했다. 손에는 회색빛 가루가 묻었다. 코끝에서 폭발한 화약 특유의 매캐한 냄새가 났다.

총성. 비명. 꿰뚫는 감각. 그리고 비명. 타는 냄새. 누군가의 절규.

나는 조소했다. 이것이 제국의 진실이다.

나는 말했다. 군인은 국가의 도구이다.

나는 속삭였다. 그러므로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두건이 벗겨진다. 갑작스러운 빛에 나는 얼굴을 찡그린다. 이제는 익숙해진 함성 소리가 고막을 두드린다. 나는 이제 교수대 위에 서 있다. 눈앞에는 수백 정도 되는 군중들이 교수대 바로 아래까지 모여 있다. 입가에는 조금 전 마셨던 술의 씁쓸한 뒷맛이 남아있다.

집행인이 내 목에 밧줄을 건다. 다른 죄수들도 내 옆에서 하나둘 목에 밧줄이 걸린다. 군중들은 환호한다. 발을 구르고 박수를 치며 음식을 던진다. 내 옆의 죄수는 토마토를 맞아 얼굴에서 즙과 조각들이 흘러내렸다. 나는 썩은 계란을 맞아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되었다.

형이 집행되기까지 이제 몇 초 남짓. 나는 내가 볼 마지막 풍경을 눈에 담는다. 인도의 삼림을 떠올린다. 반도의 추위를 떠올린다. 포탄에 쏘아진 포로들을, 티푸스로 죽어가던 동료들을, 사람의 살을 처음 베어보았을 때의, 칼날이 내 몸을 꿰뚫었을 때의 감각을 떠올린다.

내가 살아온 삶이 눈앞을 스친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나는 군인이다. 여왕 폐하의 도구, 국가의 도구, 사람을 죽이기 위해 다듬어진 기계. 나는 그저 나의 목적에 충실해 왔다. 나의 유일한 잘못이라면 줄을 잘못 선 것뿐이다.

단지, 그럼에도…

 

당신을 동정해. 죽을 때까지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하면서도 스스로 뭐가 문제인지도 모를 인간.

 

왜 하필 여기서 그 짐승 새끼의 말이 떠오르는 건지.

 

집행인이 손잡이를 잡아당긴다. 안돼,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른다. 순식간에 바닥이 내려앉는다. 몸이 반동으로 위를 향해 치솟았다가 아래로 떨어진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입에서 목이 졸리는 소리가 난다. 밧줄을 풀기 위해 두 손으로 목을 긁어댄다.

시야가 흐려진다. 머리가 어지럽다. 두통이 인다.

 

내 삶. 죽고 죽이는 것뿐이었던 삶. 아군들은 모두 죽어버린 삶. 적들 사이에 남겨졌던 삶. 타인을 약탈하고, 죽이고, 전시하고, 꿰뚫고, 실험하고, 산산조각 내던 삶. 괜찮다고, 괜찮다고, 괜찮다고 수없이 되뇌었던 삶. 한평생이 전쟁터였던 삶.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삶.

 

귓가가 먹먹해진다. 모든 것이 점차 멀어져만 간다.

 

하잘것없는 삶.

 

화약 냄새를 맡는다. 피비린내를 맡는다. 전장의 냄새. 죽음의 냄새.

환호와 비명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거리와 삼림의 차이는 사라진다.

힘없는 웃음이 입가에 떠오른다. 삶의 마지막 찰나에 나는 조소를 머금는다.

결국 끝까지, 이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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