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관

지은은호_2025년

동산정도 되는 뒷산이 학사를 에워쌌다. 여름부터 초봄까지는 저게 무슨 나무였더라 가물가물했다. 사월이 오면 벚꽃에 싸여 지냈고, 늦봄이 되면 금새 잊어버렸다. 사범대를 마치고 남부로 돌아간 동기는 삼월 초부터 벚꽃 사진을 보냈다. 벚꽃의 꽃말이 실은 중간고사라더라. 그 말을 시작으로 문제 출제를 하다 동료 선생과 정말 문제가 생긴 이야기, 기시감이 들어 보면 작년 시험과 비슷해 문제라는 말이 오갔다. 나는 주로 후자였다. 홀수반 권 선생님은 사람이 좋았다. 교차점검을 하면서 수정점을 넘기면 바로 받아들였다. 애초에 문제 삼을 부분이 적었다. 반대로 내 오류를 짚을 때면, 평소부터 부드러운 목소리에 조곤조곤한 어조를 섞었다. 내후년이면 새 부임지를 받을 연차라니. 좋은 일이 한 번 있으면 나쁜 일도 한 번 즈음… 혹은 겹으로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이 말에 동기들은 걱정을 사서 하는 건 여전하다니까, 내지는 그런 걱정을 해보고 싶다는 말이 돌아왔다. 주관식을 채점하고, 이의제기를 받아 해결하는 게 더 큰일인 것으로 귀결되었다.

담당 과목인 윤리과목 시험시간이 되면 교무실에 앉아 대기했다. 교무실은 복도 끝에 딸린지라 학교치고는 조용했다. 벚꽃이 한창인 지금은 더했다. 평시 구보 소리가 들렸건만 창문을 열어도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점점이 찍힌 분홍꽃 군락이나 흔들렸다. 꽃잎은 복도에 걸린 시처럼 움직였다. 올해는 분분한 낙화[1]였다. 이번 시험이 끝나면 바다나 보고 싶어요. 나는 수험생도 아닌데. 흘러가듯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젯밤에나 떠올렸지마는. 지은 씨와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채점을 해봐야 알겠지만 내일이면 거사는 지나간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그럼 우리 이번 주말에 바다 보러 갈까요.

그 말을 기억하고 계셨어요?

내가 은호 씨 말을 그냥 흘리겠어요? 그렇게 생각했다니 섭섭한데.

알아요. 쿠키도 잘 먹고 있어요.

책상을 힐끔 쳐다보았다. 반짇고리만한 틴케이스에 넣어둔 쿠키가 반 밖에 남지 않았다. 언젠가 친구를 따라간 카페에서 먹은 과자였다. 휴대전화에 사진만 남고 가게 이름은 잊어버렸다. 사장님, 지은 씨는 그것만 보고 어느 카페인지 알아봤다. 웬걸 동기의 고향집에 놀러갔을 때 갔던 곳이었다. 쿠키는 택배배송을 한다고 알려주었다. 주말이면 카페투어를 다니신다더니. 그러면 바다가 잘 보이는 카페를 찾아볼까. 봄을 아껴두려 창문을 닫았다.

받는 사람이 좋아하는 분야로는 좋은 선물하기가 어렵다고, 찾은 카페는 이미 지은 씨가 아는 가게였다. 메뉴가 다양한데 거진 맛있어서 기억해둔 곳이라며. 주변에 SNS에서 유행하는 카페가 있어 이쪽은 조용한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같이 갈까 생각하던 차에 잘됐다 덧붙였다. 깜짝 놀래켜주려는 계획은 물건너 갔다만 반대로 생각하면 안심이 되었다. 모처럼 나가는 봄나들이를 망칠 수야 없으니까. 거창하게 들리지만 당일치기였다. 그 당일치기에 손세차를 맡기고, 멀끔해진 아반떼를 조심조심 지하 주차장에 넣어두었다. 운전할 생각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한참을 뒤척였다. 수학여행 처음 가는 중학생도 아니고. 그러게 당일치기도 이런데 1박2일 여행이라도 가면 무슨 난리를 칠는지. 1박…. 얼굴을 식힐 겸 세수를 하러 일어났다. 거울을 보고 열이 더 오를라 고개를 푹 숙였다.

눈을 떴을 땐 알람도 울리기 전이었다. 오분 후에 울린다는 걸 끄고 이불을 정리했다. 미리 꺼내놓은 시리얼을 먹고 또 골라둔 블라우스를 입었다. 준비한 바를 차례차례 따라가다 웃음이 나왔다. 어지간히도 들떴구나 나는. 간밤의 부끄러움은 어디로 가고 떨림에 기분이 좋았다. 운전석에 앉아선 아예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신호가 따라주어 운전하기 좋았다. 일찍 도착했건만 아파트 입구에 선 지은 씨가 보였다.

우리 자기 왔어요?

네, 자기 왔어요.

차문을 열기 전 지은 씨가 열린 창으로 몸을 기울이고 말했다. 지은 씨를 싼 창틀이 액자틀이라면 좋을 텐데. 여름이 오기 전에 중고 카메라를 구해서 다루는 법을 알아봐야겠다. 긴 머리를 뒤로 넘기고 조수석에 타는 모습도 포착하려면 능숙해야겠지. 연습이 필요할 성싶다. 안전벨트를 맬 때까지도 손에 쥔 꽃다발을 보지 못했다.

자기 왔다는 말도 할 줄 아는 자기한테 주는 선물.

길고 노란 잎이 겹겹이 싸인 꽃이었다. 채 트지 못한 꽃망울도 섞였는데 갈라진 틈으로 노란 빛이 새어나왔다. 참, 프리지아예요. 호명에 이제사 달콤한 향을 맡았다. 이내 차안 가득 꽃향기가 퍼졌다.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2]이었다. 벚꽃은 분분히 떨어졌다만 오늘이 완연한 봄이었다.

예쁘다…. 덕분에 꽃선물 많이 받아요. 고마워요.

저번에 은호 씨 차 탔을 때 그 노래 나왔잖아요.

노래요?

마로니에, 그 노래.

아아. 프리지아 꽃향기를 내게 안겨줄 그런 연인을 만나봤으면….[3]

마음 울적한 날로 시작하는 소절보다는 약한 후렴부였다. 뒷좌석에 꽃다발을 두고 운전대를 고쳐잡았다. 속으로 가사를 곱씹었다. 오늘 일정에 노래까지 따라하려면 당일치기론 한참 모자랐다. 게다가 노래가 그거 하나뿐인 것도 아니었다.

그거 다 따라하려면 내년 봄까지도 바쁘겠어요.

후년, 내후년 봄도 있고. 4년 후는 뭐더라.

내년 가서 내후년이라고 하죠.

선생님이 알려주셔야지. 이래도 되나요.

주말이라서 오늘은 은호 씨예요.

자기이기도 하고요.

자기도 자기. 코러스를 넣듯이 중얼거렸다.

 

[1] 이형기, 낙화

[2] 김춘수, 꽃

[3] 마로니에, 칵테일사랑

 tmi) 은호 혼자 운전하면 썬구리 써서 습관대로 썼다가 멋쟁이 소리 들었습니다 (여유님 :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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