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관

영지듀오_술 안주安住

위층으로 도망가는 해골바가지쯤 눈 감고도 맞췄다. 백골이 되어선 사람 흉내를 내느라 폐허에 살림을 차렸다. 덕분에 쓸어갈 물건이 많은 건 좋지. 열을 머금은 총열을 후 불었다. 그러든 말든 잘만 식지만 기회가 있을 때 뽐내야지. 브룩스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다. 뭐만 해도 멋지다 멜리사…!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익살스러운 광대 모자 끝에 방울까지 달면 온종일 달그락 시끄러울걸. 꼭 호들갑이 아니더라도 원체 소심해서 움츠러들었다가, 퍼덕 놀라는 둥 바빴다.

거 덩칫값 좀 해라.

조심해!

브룩스의 외침은 물소리에 묻혀 먹먹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탓에 젖어 드는 게 잘 느껴졌다. 비릿하고 시큼한 악취는 본래 이 버려진 성의 입구에서부터 진동하던 냄새와 비슷했다. 정도가 심해졌을 뿐. 장갑을 낀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눈을 뜨니 장갑에 검은 오물이 묻었다. 내 꼴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썅, 기분 잡치게. 그나마 안까지 다 젖진 않았거니와, 갑자기 튀어나온 창살에 몸이 꿰뚫려 죽은 놈들을 생각하면 천운이었다. 그치만 입술 사이로 맛까지 느껴져 짜증이 확 올라왔다. 욕과 함께 침을 모아 뱉었다.

여기 닦아….

덜덜 떠는 목소리에 표정을 풀었다. 몇 초 만에 다시 구겨졌지만. 매운맛은 대체 뭐야? 브룩스가 건넨 헝겊으로 얼굴을 닦고 머리를 털었다. 쇠냄새가 얼핏 나는 것이, 녀석이 낫을 닦는 천인 모양이었다. 낫에서 밴 게 아니라 덜 빠진 피냄새겠군. 아니나 다를까 도로 가져간 브룩스가 낫을 닦아냈다. 살점일랑 없는 해골을 상대했으니 먼지와 뼛가루 정도나 털었다. 습관적으로 그랬는지 브룩스가 얼른 손을 멈췄다.

미안, 앞으론 수건 가지고 다닐게.

그 다음은 베개도 들고 다니게? 됐어. 잘 보고 피하면 그만이야.

응. 나도 잘 볼 테니까. 아! 앞에 개울이 있었어.

그래. 대강 씻어내고 챙긴 건 영지로 돌아가서 확인하자.

엉거주춤 걷자 브룩스가 졸졸 따라왔다. 겨울바람에 젖은 몸이 확 싸늘해졌다. 암만 버섯대가리와 돼지 괴물이 돌아다니는 동네라도 그렇지. 날씨가 너무 제멋대론 거 아냐. 으…. 잇새로 죽는소리가 나왔다. 브룩스가 얼른 튀어나와 가로막았다. 이러면 바람이 덜할거라며 어깨를 쭉 폈다. 어찌나 바람이 세던지 머리카락이 오물과 함께 얼어붙었다. 물에 손을 넣는 순간 한기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이러다간 개울가에서 얼어죽겠다. 입만 겨우 헹구고 영지로 방향을 틀었다.

그냥 가자.

턱이 달달거려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브룩스도 마찬가지인지 고개를 까딱했다. 그리곤 광대 가면을 꺼내 내 얼굴에 씌워주었다. 눈구멍 사이로 빨갛다 못해 터지기 직전인 얼굴이 보였다. 양심이 있지, 얼른 벗어다 돌려줬다. 그러자 브룩스는 가면을 쓴 채 앞장섰다. 걸음을 맞춰 걸었다. 덩칫값하란다고 정말 해버리고. 아버지의 용병들보다 훨씬 말을 잘 듣는단 말이지.

마을은 울타리와 건물이 바람을 막은 덕에 추위가 덜했다. 웅크린 어깨를 바르게 폈다. 그 옆에 브룩스의 팔뚝이 나란히 왔다. 그래봤자 허허벌판보다 나은 수준이라 길에 다니는 이가 없었다. 점찍어 둔 여관은 아래층이 술집이었다. 그래서 골랐냐면, 맞아. 문을 열자마자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 어디 갔나 했더만. 방은 있으려나 훑어보는데 할망구가 문 안 닫냐며 소리를 팩 질렀다. 손잡이를 우악스레 잡아당겼다. 큰 소리가 나며 두 눈동자가 이쪽을 쳐다봤다. 사람은 넷인데 이 멋진 영지에 어울리게 두 사람은 외눈박이였다.

방 하나 씁시다!

문도 박살을 내려고 들질 않나, 시끄럽게 굴지 마쇼!

주변이 좀 시끄러워야지! 나도 조용히 말하고 싶어요!

어우, 고약해! 물 올려줄 테니까 좀 비키셔.

앞서 들은 노파의 목소리보다 크게 외쳤다. 그러는 할망구도 목에 핏대를 세우고 대답했다. 열쇠를 던져주며 뭐라고 꿍얼거렸는데, 입 모양을 보아하니 다 늙어서 살아 뭐하나, 이딴 말이었다. 안 들려서 그렇지 삐그덕거리며 무너지려고 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할망구가 물통 나르다 부숴지지나 않아야 할 텐데. 방에서도 낡은 나무바닥 사이로 싸우는지 웃는지 모를 게 들어왔다. 그래도 이제 문을 여는 소리 정도는 들렸다. 날씨가 날씨인 만큼 펄펄 끓는 물이 마녀처럼 삶아버리겠다는 뜻인지 친절인지 헷갈렸다. 미쳤다고 귀한 장작을 화풀이에 써제낄 리 없으니 후자겠지.

나는… 아래층에 가 있을게. 펴, 편히 씻어.

구석에서 우물쭈물하던 브룩스가 말을 마치자마자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별, 내외는 혼자 다 해. 아버지의 크림슨 불렛 용병단은 아무때나, 또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겨제꼈다. 그래서 못 볼 꼴 많이 봤지. 꼴 보기 싫으니 치우라 하면 ‘영광의 상처’가 가득한 등판을 잘 보라며 더 들이밀었다. 오만상을 쓰곤 딸려온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았다. 망토와 겉옷은 물을 조금 적셔 빨고는 방 안에 널었다. 기지개를 켜는데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어쩜 브룩스는 노크 소리도 저렇게 쪼그라들었을까. 들어오라니까 문을 뺴꼼 열고는 손만 집어넣고 뭘 떨어트렸다. 늘 입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옷 한 벌이었다. 바지까지는 안 갈아입어도 되는데. 술값은 내가 내야겠어.

밖으로 나왔다. 브룩스는 난간에 기대고 서서 낫을 다듬고 있었다. 들어가라고 턱짓하자 꾸물꾸물 방에 들어갔다. 낫을 들고 괴물들 사이를 헤집어놓고, 만돌린으로 빠른 선율을 빚으면서 뭐하러 굼뜬 척한담. 혀를 차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나마 덜 시끄러운 자리를 찾아 앉았다. 기다릴까 하다가 먼저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기분 탓인가. 입안에 아직 그 썩은물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이번엔 브룩스가 굼뜬 체 않고 자리를 찾아왔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기본 안주로 나온 콩을 주워 먹었다. 녀석이 많이 배고픈 모양이다. 아까 총열에 입김을 불며 잰체했지만 오늘의 활약상은 누가 뭐래도 브룩스 헤이워드 로튼이었다. 해골에 얼마 남지도 않은 살점 부스러기까지 저며낼 듯이 낫을 휘둘렀다. 그러면서 틈틈이 만돌린 현을 튕기며 주의를 끌어 내가 사격하기에 충분한 거리를 벌었다.

네가 먹고 싶은 걸로 골라.

구리동전을 몇 닢 보여 오늘 누구 주머니에서 돈이 나올지 알려줬다. 브룩스의 눈이 동전처럼 동그래졌다. 알아먹었겠니 도로 집어넣었다. 녀석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돼지로 만든 소시지, 삶은 옥수수와 감자 따위를 골랐다.

정말 그걸로 되겠어? 우린 이게 밥이야.

그러면…. 콘소메 수프도 먹을게. 술은 나도 맥주.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가는 점원을 불러세웠다. 점원은 시장통 같은 술집에서 일을 얼마나했는지 척척 알아먹었다. 곧 맥주잔 두 개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가지고 돌아왔다. 저쪽 바 너머에서 끓는 냄비가 콘소메인가보다. 브룩스가 숟가락으로 수프를 한 술 떴다가 부랴부랴 술잔을 부딪쳤다. 나무로 만든 잔에 입을 붙이고 그 자리에서 세 모금을 삼켰다. 탄산에 목이 따끔할 정도였다. 브룩스는 그제야 주눅 든 얼굴이 풀어졌다. 소시지가 나오자 헤실거리기까지 했다. 얘가 서른셋이라고? 뻔한 거짓말이다. 나이로 얕잡아 보이기 싫거나 사정이 있겠지.

멜, 어서 먹어 봐. 맛있어.

오냐.

손수 잘라준 소시지를 포크로 찔렀다. 육즙인지 기름인지 모를 게 흘러나왔다. 속에 뜨끈한 게 들어가니 살겠다. 술맛도 더 달았다. 이거 때문에 그 고생하지. 중얼거렸다. 브룩스가 어떻게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내가 살게. 브룩스의 입이 말하랴 먹으랴 바빴다. 의자에 푹 기대자 귀신같이 삐그덕거렸다. 까딱하면 무너질 것 같은데 장식처럼 걸어둔 술병이 예사롭지 않았다. 손이 닿는 칸은 도박장에서 한탕 건지면 무리가 아니다만 맨 위는 이런 시끄러운 술꾼들을 상대로 하기엔 과했다. 할망구가 눈이 침침한가. 아니면 빈병일지도. 브룩스의 시선이 따라왔다.

저런 건 언제 마셔보냐.

며칠 동안 오늘처럼 벌이가 좋다면 몇 잔은 살 수 있었다. 그치만 용병들이 으레 그렇듯 내일은 허탕을 칠지 몰랐다. 재수 옴 붙으면 제삿밥도 못 먹는 고기 신세였다. 애써 모은 돈은 내 시체를 발견한 용병 손에 넘어가지. 그러니 벌이에 써먹는 총이며 도구들에 들일 돈 빼고는 홀랑 써버렸다. 어쩌다 돈이 모이면 팔이 부러졌어도 주점이나 도박장을 기웃거렸다.

내가 다음 말고, 오늘 살까. 나도 브랜디가 좋아.

브룩스가 말하며 번들거리는 입을 닦았다.

지난번처럼 술집에서 공연이라도 하게?

아니, 아니.

도리질하며 품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드물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주머니를 꺼냈는데 안에서 또 다른 주머니가 나왔다. 어떤 신줏단지인지 입구만 벌려 내용물을 보여줬다. 보석은 허름한 주머니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침침한 불 아래서 저렇게 반짝이는 걸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하나, 둘 셋… 다섯 알. 누가 볼라 재빨리 손을 뻗어 주머니를 닫았다. 브룩스가 곧 으스대는 눈빛을 보냈다.

대체 어디서 났어?

해안 만에 갔다가 보물 상자에서 꺼냈어.

전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온 원정 말이지. 그 약값을 생각하면 이걸로 부족할 정도야.

그날은 단순히 허탕이라 칠 게 아니었다. 금화가 든 상자를 찾아 시작이 좋았지만 신비학자가 다 그르쳤다. 따개비에 뒤덮인 고물을 두고 제단이라느니, 꼭 가져가야 한다느니 눈이 벌게졌다. 재주껏 끌고 다니도록 냅둔 게 천추의 한이었다. 전투 중에도 치료는 안 하고 빌어먹을 따개비만 끌어안고 자빠졌다. 생선 대가리가 던진 작살에 브룩스가 꿰뚫렸는데도. 물고기가 그대로 뽑아내 미친놈 대갈빡에 날아갈 때도 그러고 있었지. 빠르게 식는 광대의 몸뚱이를 질질 끌고 겨우 빠져나왔다.

영지에 씨가 마른 사제를 찾아가 ‘헌금’을 내서 겨우 살려냈다고.

으…. 아직도 배에 구멍이 난 것 같아.

그렇게 얻은 보석을 술에 쓰자고?

그럼 어디에 써?

살다 살다 브룩스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날이 오다니. 제법 큰돈을 만든들 그걸로 뭘 해야 할지는 몰랐다. 남들처럼 집을 얻나. 그럼 나머지 벌이는 어떻게 한담. 배운 것이라곤 죽이거나 훔치고 빼앗는 일이었다. 브룩스는 그나마 어디 가서 공연이라도 하겠지. 머뭇거리는 사이 브룩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요란스럽게 점원을 불러 벽장의 맨 위를 가리켰다. 휘둥그레지는 사람을 붙잡고 한 잔씩만 달라고 말을 바꾸었다.

가진 게 있다고 떠벌리면 위험해.

아…!

브룩스가 주머니를 품에 넣었다. 태연한 척했지만 뻣뻣하니 영 어색했다. 차라리 가면을 쓰던가. 그건 그거대로 눈길을 끌겠군. 브룩스에게 남은 맥주를 마시게 시켰다. 기껏 비싼 술을 마시는데 취해버리면 아쉽지만 긴장이 풀려야지. 나도 타는 목을 축였다. 그리곤 바지에 맨 주머니를 열었다. 다 털으니 두 잔씩은 마실 수 있겠다.

그건 왜?

바보야, 여기서 그걸 내밀 생각이야? 우선 이걸로 내고, 내일은 팔러 나가자. 못 팔면 마구간 빌릴 돈도 없어서 노숙 행이야.

팔아도 노숙이야. 해가 뜰 때까지 진탕 마실 수 있을거야.

그래! 딱딱대는 해골바가지는 상대하지 말고 배나 뜨듯하게 데우자고.

마침 점원이 나타나 탁자에 술잔을 올려놓았다. 한 모금도 안 되게 흘려 넣어도 독주가 입안에 퍼졌다. 벌써 알딸딸해지는 기분이 최고의 안주였다. 목소리는 커져만 갔고 말끝마다 와하학 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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