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de 1
끊이지 않는 불안과 불면.
해가 떠야 잠드는
불안한 사람들을 위해.
더 늘어날 상처가 두려워, 감히 사냥터를 떠돌지 못하고 상처를 핥으며 점점 어두운 곳으로 슬금슬금 밀려났다. 나는 내 인생을 불쌍하다고 한탄하는 동시에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다지 좋지 못한 방향으로..
정확한 날짜는 기억 못 한다. 다만 날씨는 좋았고, 공기는 뜨거웠으며, 아버지와 동생들은 빨래한 옷들을 햇볕에 널고 있었다.
전날 술을 잔뜩 마셨던 나는 냄새나는 걸래짝처럼 무거운 몸을 창가에 널어 그 모습을 구경 했다. 얼굴에 닿는 햇살이 간질거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살랑거리는 바람에 귀를 기울였다.
“누나! 일어나! 밥먹어~!”
쌍둥이 중 남자애가 말을 걸었다.
“뭐 있는데.”
“차가운 당근수프 있어. 누나 어제 엄청 마셨으니까 그거 먹고 정신 차리라고.”
“그래...”
눈만 괜히 비비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창가에 놔 둔 의자에서 거의 넘어질 뻔했다.
벽을 짚고 몸을 기대가며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에 넓직한 천으로 덮어둔 그릇이 보였다. 슬쩍 들춰보니 당근과 크림냄새가 확 퍼졌다.
자리를 잡고 고개를 처박았다. 머리가 무겁다.
“얘, 어린애도 아니고 또 그렇게 머리를 박고 먹어?”
“그러다 체한다?”
아버지와 쌍둥이중 여자애 인 쪽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남겼다.
그러나 저러나 개의치않고 수프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그릇을 싹싹 핥았다. 맛만 좋네.
깡그리 비워버린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코를 짜부러트린다.
모든 것이 귀찮다.
“얘, 맥스~ 아빠랑 동생들이랑 시장 갈 건데 같이 갈래?”
“아니 됐어.”
“뭐 먹고싶은건 없구~?”
“응.”
“알겠어~ 수프 다 먹었으면, 개수대에 넣어놓기라도 하구~ 설거지하라고는 안 할 테니까~”
“응.”
“얘가 참~”
아버지의 잔소리에 건성으로 대답한 나는 세사람이 나간 것을 확인하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대들보 사이로 세워진 서까래가 보인다. 저 중 하나 정도는 들떠있을 텐데.. 기다란 밧줄을 매달고 불길한 올가미를 매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는 번뜩 일어나 수프그릇을 들어 개수대로 향했다. 양철통에 담아둔 물을 조금 부어놓고 2층의 내 방으로 올라갔다.
방 안 침대에 누워 소리를 질러보려 했지만, 집안 에선 조용히 해야 한다. 슬프고 고통스러웠던 때를 상상하며 눈물을 흘려 보려 했지만, 집안 에선 부정적인 감정을 비춰선 안된다. 나는 이 집의 대들보니까, 흔들려선 안된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나는 짐을 싸서 떠났다.
무작정
그렇게 집에서 탈출했다.
가족은 내 삶의 전부였지만, 살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숨통을 조여 오는 목줄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할 수 있는 만큼 멀리 떨어져서. 소리라도 고래고래 질러보고 싶어 졌다. 어머니를 죽인 내가 왜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는 것 인지. 아무도 답을 찾아줄 수 없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 여행에서, 잉게르를 만났다.
“있지, 잉게르..”
“네?”
“... ...”
“왜요 또~”
맥스는 생 푸성귀가 가득한 식탁을 가만히 바라보며 관자놀이를 가볍게 짚고 있었다.
“... 그, 있잖아... 지하 저장고에 있는 소세지... 그거 좀 구우려고 하는데... 너도 먹을래?”
“네~? 이렇게 많은데 또 뭘 꺼내게요? 전 못먹으니까, 당신 먹을 만큼만 구워요~”
“응... 그래, 그게 미안해서 물어 본 거야.”
“...”
“아, 아! 그러니까... 우리가 입맛이 다르다는 거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말야! 네가 요리하는 날에 굳이 내가 먹고 싶은 걸 꺼내먹는 거..! 나쁜 짓인 거는 아는데..! 그게..!”
“풉!”
“...”
“에~이~ 뭐가 기분이 나빠요~ 말을 하지~ 제가 또 눈치없이 군 거죠?”
“아잇..! 아니 그러니까..! 눈치없다고 하는 게 아니라..!”
“ㅎㅎ... 우리 이러다 싸우겠어요~ 그만해요~”
“... 화난 거... 아니지?”
지하저장고에서 소시지를 대여섯개 들고 나오면서 눈치 본다고 하는 말이 그거였다.
잉게르는 아무런 유감도 없었다. 그저 저 짜고 기름진 소시지가 어디가 맛있다고 신나서 먹으려는 맥스가 새로울 뿐.
맥스는 화로 앞으로 가 무쇠 프라이팬에 소시지를 내려놨다. 맥스는 이제 익숙해졌지만, 잉게르의 집에서 마법으로 작동하는 고급 화덕을 처음 본 순간을 기억한다. 장작 없이도 불을 내는 화덕이라니!
이제는 익숙해진 마법의 불로 소시지를 맛있게 익힌 후, 프라이팬의 내용물을 제 접시에 쏟고, 자리에 앉았다. 지난 며칠간 맥스는 공용어 시험을 준비한다고 식사준비를 못 했기 때문에 한동안 식사는 소스 없는 샐러드요, 잘 정돈한 푸른 소채뿐이었다. 오늘은 견디고 견디다 못해 애인의 정성을 소시지와 같이 구워냈다. 짓이기고 뭉갠 돼지의 살과 지방을 얇은 내장으로 감싼 기름진 한 입이 감격스러웠다. 맥스의 조상이자 깊이 숨어있는 야생동물의 영혼이 신나서 고개를 들이밀고 미소를 지었다.
“와.. 엄청 맛있게 먹는 것 좀 봐~”
“아..! 아니..!”
“보기 좋아서 하는 말 이에요. ㅎㅎ”
“그...”
“와, 이 얼굴 두고두고 보고싶다.”
“추상화라도 그려서 기억하려고?”
“아... 좋은거 생각났다.”
“응?”
잉게르는 멍한건지 생각하는 건지 눈을 굴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맥스, 저 방금 좋은생각 났는데요.. 이거 좀, 어... 정리 좀 해주실래요?”
“응? 어, 어.. 그래~”
“정말 고마워요! 며칠만 좀 틀여박혀있을게요!”
“응...!”
잉게르는 급히 방으로 올라갔고, 맥스는 그것을 지켜보다가 다시 소시지로 눈길을 돌렸다. 제 애인은 상당히 실력 좋은 마법사였다. 언제 어디서든 새로운 마법의 힌트를 얻고 신나서 마법을 연구하러 틀어박힌다. 솔직히 그런 집중력과 창의력이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소시지는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남은 그릇을 정리했다.
어차피 잉게르가 며칠간 방에 틀어박힌다고 말을 한 이상, 제 공용어 시험은 물 건너 간 사항이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돌봐줘야 하는 것 이 깊은 산속 오두막이니까.
살며시 2층으로 올라가 잉게르가 학구열을 불태우는 모습을 슬쩍 훔쳐봤다. 고개를 쳐박고 뭔가를 열심히 쓰거나, 책이나 종이뭉치 따위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주 조용히 문을 닫고 층계를 내려왔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지난 며칠간 빨래를 못 했다. 생각난 김에 해치우러 빨랫감을 양 팔로 집어 들고 화장실 옆 세탁실로 들어갔다.
세로로 기다란 수조 안에는 오물물고기가 뻐끔거리며 헤엄치고 있었다. 맥스는 빨랫감을 하나하나 살피며 수조로 넣었다. 물고기밥도 빨랫감 양에 맞춰 넣은 후, 수조의 뚜껑을 닫아 오물물고기들이 빨랫감 속 더러운 것과 먹이를 빙글빙글 먹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이건 언제 봐도 멍하니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맥스는 뜨거운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헉헉대고있었다. 고용주들이 아직 탐사 중인 유적 안에 있다. 맥스를 비롯한 몇몇 용병들은 바깥에 놔둔 짐을 정리하고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이제 고용주 들만 돌아오면 몇 달 만에 집에 갈 수 있다.
익숙한 발소리가 낡은 건물 안쪽에서 울려퍼진다. 저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닥에서 소용돌이가 일고, 모래가 푹 파이면서 물건들이 흘러나렸다. 이건...
“개미지옥이다!”
탐사팀 중 치유사가 외쳤다.
맥스는 재빨리 짐들을 멀리 던져놓고 칼을 빼들었다. 같이 고용된 호위병들과 합을 맞춰, 모래 속에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지옥 속 개미귀신에게 달려들었다.
가장 덩치가 큰 오크종 검사가 개미귀신의 거대한 턱을 힘으로 벌리고, 인간종 마법사가 하피족 치유사와 지옥 밖에서 힘을 모으는 동안, 코볼트 맥스가 개미지옥의 나머지 다리를 공격하고, 힘을 꺾어놓는다.
마법사들이 신호를 주는 순간, 코볼트가 검사와 함께 몸을 숨긴다. 거대한 마력이 마치 창처럼 개미귀신의 몸통을 꿰뚫는다.
확실히 머리를 떼어내기 위해 검사와 코볼트가 칼을 고쳐 든 순간이었다. 개미귀신의 움찔거리던 다리가 발작을 일으키듯 마구 움직였다.
코볼트는 검사를 뒤로 밀쳤다.
귀신의 날카로운 발이 코볼트의 얼굴을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모래 속에 파묻힌 검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깨닫고, 커다란 대검을 들어 개미귀신의 머리를 으깨버렸다. 아직도 신경이 남아 파들 거리는 다리들을 하나하나 으깨듯 부숴버렸다.
마법사와 치유사가 스태프를 내밀어 그 연약한 팔로 거대한 짐승 두마리를 끌어올렸다.
맥스는 제 오른쪽눈을 부여잡고 있었다.
치유사는 안절부절 하며 치유마법을 준비했다. 맥스의 손을 치우고 상처부위를 천천히 치유하던 그때였다.
“아, 뭐하는거야 너네? 내가 분명 짐 정리해 두랬잖아.”
“사.. 사장님, 여기 유적을 지키는 개미귀신 몬스터가...”
“뭐야? 그런건 알아서 했어야지! 야, 너.. 너 뭐 하냐? 니가 뭔데 치유마력을 낭비해?! 야! 당장 그만둬! 야! 뭐 해!”
고용주는 손을 휙휙 털어내며 맥스를 치유하던 치유사를 가볍게 밀쳤다.
얼굴의 출혈은 멎었지만, 깊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이거 봐라~ 멀쩡하잖아~! 앞도 보이는거같고, 피도 멈췄고. 됐지? 너 오늘 행운인 줄 알아라 임마~ 이녀석이 얼마짜리 치유사인지 알아~? 도시에서도 손꼽히는 부자나 귀족들만 고용 할 수 있는 최고급 치유사란 말이야~! 그런 치유사님의 마력은 쓸 때 마다 돈이 나가는거라고~! 알아~? 내가 특!별히! 네 치료비용은 반만 청구하마! 이게 다~ 내가 귀족놈들이랑은 다르게 배포가 두둑!해서! 그런 건 줄 아니까, 감사한 줄 알라고~! 으이? 알겠지?! 아하하하~!”
맥스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조에 얼굴이 비춰 보였다. 눈가에 길게 난 흉터를 멍하니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얼마 전 잉게르의 사전에서 읽은 표현이 하나 있다.
배포 (명사)
1. 머리를 써서 일을 조리 있게 계획함, 또는 그런 속마음. 예시) 배포가 두둑하다.
그 고용주가 자신의 넉넉한 마음씨에 대해 말 하고 싶었더라면, ‘베포가 두둑하다’는 옳지 못한 표현이었다.
이젠 고용주는 하늘이고 자신은 땅바닥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의 잘못이나 실수 등등을 알아채고, 정답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이상 맥스는 이 흉터에 마음 상하지 않는다.
“꺼 놨어요.”
“뭐?”
“마력 카운트는, 여기 나와서 사장님을 기다리는동안 이미 꺼놨다고요! 이분을 다 치료하든 말든 사장님한테 추가요금은 붙지도 않는다고요! 이 코볼트양에게 청구한다는 말 취소하세요! 치료마력 보장은 고용인들의 당연한 권리라고요!”
“아아니...”
“아잇! 진짜! 마법을 도중에 훼방놔서 흉 졌잖아! 어쩔 거예요! 내 완벽한 치유마법에 이런 흉터라니..!”
그 당시 맥스는, 공용어를 거의 익히지 못해 치유사의 말을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다. 이제야 겨우 이해한 것이다.
뒤늦은 고마움이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 치유사에게 찾아갈 수는 없을까? 잉게르의 인맥을 이용하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맥스~! 올라와봐요~!”
맥스는 놀라서 큰 숨을 내쉬었다. 때도 기가막히지..
“뭔데~”
그리 대답한 맥스는 천천히 잉게르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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