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떠나갈 때
무심은 죄인 양하여
역경에도 지지 않는 사랑
스팸메일을 정리하기 위해 스크롤을 내리던 여울은 광고성 메시지의 제목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했다. 지지 않는 사랑. 역경. 고난. 쟁취. 하지만 모든 일의 원흉이 나라면? 내가 이미 모든 사건의 원흉이고 근원이라면, 모든 잘못이 나에게 있는데 내가 어떻게 무슨 염치로 너에게. 화면은 한참 동안 넘어갈 줄을 몰랐다. 최선의 선택이었잖아. 우리가 아프지 않고 상처받지 않을 최선이었잖아. 코끝이 찡했다.
사랑이 떠나갈 때
여울은 멍한 기분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에 만들다 만 교구의 흔적이 널브러져 있었다. 처참한 풍경이었다.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아침잠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온몸이 늘어지는 감각에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겨우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향했다. 맞은편에 비친 얼굴이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눈가가 붉게 짓눌려 있었다. 여전히 어지러운 머리를 붙잡고 찬물로 세수를 시작했다. 맑아지는 정신과 뚜렷해지는 시야 속에서 꿈이 남긴 모호하고 확실한 흔적을 생각한다. 여울은 자주 과거에 머무르는 습관을 고쳐야했다. 결국 여울은 샤워기를 들고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끝까지 밀었다. 정수리를 따라 온몸을 휘감는 냉기는 잡념을 떨쳐내는데 탁월하다. 쏟아지는 물줄기가 시야를 덮었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물이 감각을 앗아갔다. 이대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수도꼭지를 닫고 욕실을 나섰다.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버스에서 여울은 가방끈을 만지작 거리며 안에 들어있는 과제에 대해 생각하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울은 유독 무언가를 만드는 데 취약했다. 지금 갖고 가고 있는 이것만 봐도 그랬다. 과정이 이런데 결과물이 좋게 나올 리 없었다. 유교과에 들어오는데 손재주는 필수는 아니었지만 분명 필요한 재능이었고 여울은 그게 없었다. 차라리 레포트를 하나 더 작성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여울은 제 손을 원망하며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어 연락처를 뒤적이던 손가락이 ㅇ에서 멈칫했다. 여울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타자를 두드렸다. [있잖아 오늘 수업 마치고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첫 수업이 전공이라 교수님께 피드백을 받기 위해 가져왔던 거였는데,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까 더 비참한 결과였다.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은데...' 검사받은 과제를 갖고 돌아와 자리를 정리했다. 별 차이는 없겠지만 망가지지 않게 조심스레 가방에 넣고 다음 수업을 위해 이동했다. 오늘은 시간표가 빡빡해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집에 가는 길에 사야 할 재료들을 생각하며 교양 강의실을 찾았다.
눈이 마주칠 때 숨이 멎는다. 내가 멍청하게 아무것도 못 하고 굳어있으면 이내 네가 시선을 돌리고 나는 숨통을 죄어오는 압박감에 숨쉬기가 버거워져서 심장을 부여잡았다. 너도 그랬을까. 너도 돌아오지 않는 애정에 숨이 막혀 허우적거렸을까. 당장에라도 과거의 내 멱살을 붙들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서.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해. 그러나 내 발은 여전히 지면에 붙어 떨어지질 않았고 그저 시선만으로 너를 뒤쫓을 뿐이었다. 그때와 똑같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 사랑은 드라마라 하기엔 큰 굴곡과 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랑 이야기를 시나 드라마, 영화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아마 단역의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역시 삶은 드라마가 아니므로 관계에 극적인 변화는 없었고 여느 사랑 이야기처럼 마침표가 붙었다. 단역의 이별은 큰 의미를 가지지도 못한다. 시시한 이야기가 막을 내렸다. 완전히, 깔끔하게. 누구도 단역의 사랑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므로. 그래야만 했는데,
드라마는 끝이 났는데 감정이 남았다. 내게 주어진 배역은 끝이 났는데 심장 언저리에 무언가 얹힌 듯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역할이 끝난 배우는 감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라는 역할을 끝내야만 했고 감정을 버려야만 함이 틀림없는데도 이 작은 사랑 이야기를 놓을 수가 없었다. 흩어진 잔해를 모아 끌어안았다. 그것이 내게 남은 전부인 양 미련하게 구는 내 모습을 보면 꼴사납다고 느낄지도 몰랐다.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겐 나랑 함께하던 순간들이 최악이었다면.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었다면. 그렇게 버텨야 하는 날들이었다면. 그렇다면 이별은 분명 우리의 최선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현실을 외면하고.
자주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눈물 젖은 얼굴로 하루를 시작하는 일이 많아졌다. 눈물샘을 뜯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울면 안 돼. 슬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몫이었다. 눈을 감으면 네가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그러나 끝내 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나는 그런 네 앞에서 당연하게도 죄인이 되는 기분을 느낀다. 울음을 참는 얼굴, 포기와 체념의 표정. 그러면 나는 또 다시 네 앞에서 도망을 치고 만다.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내 침묵은 도망이었다.
여울은 스스로를 후회한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너를 상처입힌 순간들. 울며 이별을 고하던 밤. 목구멍을 짓누르는 침묵. 눈물. 멀어지는 등. 무너지는 기억의 파편. 여울은 어떤 사람이든 누구에게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을 테지만 제 손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흉터를 남기고 말았다. 고의가 아닌 척, 실수인 척, 모르겠단 듯 외면하려 할수록 선명히 새겨지는 사실은 결국 상처를 입힌 건 나고 상처를 입은 건 너란 것. 우리 관계는 네 고통과 인내 위에 유지되고 있었다. 방조는 죄가 아닌가. 그것은 분명 나로 인한 결과이기 때문에 내겐 관계를 논할 자격이 없다. 관계의 잘못은 온전히 내 탓임이 분명하다.
연애는 사랑의 상호작용이라고 했는데 나는 받기만 할 줄 알았지 돌려주는 걸 못했다. 이기적이었다. 두 팔 가득 안겨진 애정을 보답하지 못한 결과는 현재다. 어리고 서툴렀다는 변명만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안다. 나는 당신의 다정이 영원할 것만 같았고 내 안일함은 무심이 되었고. 사람의 감정은 마르지 않는 우물이 아니라는 걸 어째서 조금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누군가의 빈자리가 이렇게 공허하리라 생각하지 못 했다. 여울은 자유분방한 부모와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동생 덕에 일찍이 철이 들어 무엇이든 스스로 하는 일이 많았고 혼자가 익숙했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여울은, 기대거나 의존하는 법을 잘 몰랐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살을 에는 찬 바람이 볼을 스쳤다. 여울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가는 하얀 입김을 멍하니 쳐다봤다. 곧 겨울이었나. 버석하게 갈라진 입술을 꾹 앙다물며 생각했다. 날이 추웠다. 교정의 나뭇가지들이 앙상했다. 더 이상 온기에 기댈 수 없으며 오롯이 혼자서 견뎌내야만 하는 계절이다. 여울은 언젠가의 이때쯤을 떠올리려다 이내 떨쳐내었다. 염치가 있다면, 이번 겨울은 온전히 제 몫이어야만 했다. 겨울이 유독 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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