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미나] 악애 惡愛

아이나나|ŹOOĻ 미도 토라오 x 나츠메 미나미

포스타입에서 유료로 공개했던 내용을 펜슬로 이동하면서 무료로 공개합니다.

포트폴리오에 사용시 본문은 내려갑니다.

2024년 4월 어나스테에 본문을 실은 재록본이 판매될 예정이오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

2022년 4월 27일을 맞이하여 2021년 7월에 출간한 악애의 전문을 무료 공개합니다. 기존의 나나 웹온 분량 +@된 내용입니다.

악마 토라오 X 인간 미나미, '주술'에 대한 요소가 나옵니다. 설정상 캐붕이 나올 수 있으니 주의해주세요!

신애神愛의 후속작입니만, 신애의 내용을 몰라도 내용 이해엔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일종의 이스터에그를 이해하는 정도입니다.

악애 惡愛 アイドリッシュセブン ŹOOĻ

御堂虎於 x 棗巳波 15세 미만 구독 불가

 

발행일 2021년 7월 28일

웹발행일 2022년 4월 27일  

글쓴이 모람 @Moram_ym

ⓒ 2021. Moram All Rights Reserved

· 저작권 보호법에 따라 본문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Prologue

 

 

“결혼할 사람이 생겼어.”

“뭐?”

미도 토라오의 선언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다. 아이돌에게 있어 연애는 곧 타격이다. 그나마도 편견 덕에 안기고 싶은 남자 1위 답다며 어찌저찌 잘 비켜나가던 찰나에 갑자기 결혼이라니, 이누마루 토우마와 이스미 하루카는 얼이 빠져 입만 벌렸다.

“어머, 축하드려요.”

“고마워, 미나미.”

“잠깐, 잠깐만! 축하는 하겠는데―”

그럼 ŹOOĻ는? 토라오는 ŹOOĻ의 리더 이누마루 토우마의 물음에 고개를 기울였다.

“계속하는 게 당연하잖아. 팬들도 응원해줄 테고.”

“그렇게 쉽게 넘길 일이 아니야! 아, 이걸 어쩐다.”

팬들이 이해하기는 무슨, 당장 상대 여성 신상이 인터넷을 타는 건 기본일 테고 그룹 이미지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하물며 상승세를 타고 있는 지금 열애설도 아닌 결혼이라니!

“전에 만났던 그분인가요?”

“아, 넌 본 적 있지?”

“네, 머리색이 밝고 온화하게 생긴 분.”

“만나본 거야!?”

뭐야, 나만 못 봤어? 하루, 너도 몰랐던 거지? 그치!? 토우마의 물음에 하루카는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만 끄덕였다.

“미나미만 소개해주고.”

“후후, 그런 건 아니에요. 우연히 만났을 뿐이랍니다.”

“뭐, 아무튼 그래.”

결혼할 생각이야. 토라오의 담담한 말에 멤버들은 잠시 침묵했다.

 

*

 

“…저기, 미나미.”

하루카는 쭈뼛거리며 미나미의 곁에 앉아 물병을 건넸다. 고마워요, 미나미는 곧장 뚜껑을 따더니 입안에 들이부었다. 삽시간에 물은 절반이 넘게 비워진다.

미나미가 작곡한 노래. 네 사람의 목소리가 섞인 노래. 끼익, 끽, 운동화와 댄스 플로어가 내는 마찰음. 연습실 특유의 에어컨 냄새와 은은하게 올라오는 열기… 이곳은 분명 네 사람의 것이다. 이 시간과 공간에서 어우러지는 것은 ŹOOĻ로 이어진다. 그런데 하루카의 눈엔 한 사람이 그 세계에서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토우마와 합을 맞추고 있는 토라오는 한껏 밝았다. 변함없이 ŹOOĻ의 멋진 퍼포머였다. 문제는 제 곁에 앉은 이였다.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침울했다. 잔뜩 가라앉은 얼굴은 홀로 검었다.

하루카는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해 입만 달싹였다. 미나미의 옅은 눈동자는 미도 토라오의 등만 향할 뿐이었다. 딱히 하루카에게 왜 그러세요? 라든가, 무슨 일 있어요? 같은 물음도 건네지 않았다. 평소의 미나미라면 분명 그리 물었을 텐데.

또다시 물병이 입가에 가까워진다. 웃음기 없는 표정을 하루카는 내내 지켜보기만 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애석하게도 이 작은 아이는 위로에 서툴렀다.

텅 빈 물병의 입구가 꼭 잠겨진다. 미나미는 물병을 곁에 굴리더니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가면 하나 씌워지지 않은 미나미의 얼굴은 깜깜한 무채색이다. 공연히 하루카의 입안까지 바짝바짝 말라갔다.

“이스미 씨.”

“어!? 어, 응.”

“후후, 왜 그렇게 놀라세요.”

미나미의 눈매가 휘어진다. 평소와 같은 미소지만 하루카는 그것이 연기란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괜스레 제 가슴이 와그작 구겨지는 기분에 입술이 튀어나왔다.

“그냥, 뭐, 별로.”

“하루! 미나! LOOK AT 가자!”

스피커에서 음악이 멈추자 토우마의 목소리가 높게 울린다. 넷이서 함께 부르는 노래, 포지션에 선 네 사람은 음악이 흘러나오자 진지하게 연습에 몰입했다.

연습실 안은 댄스 플로어를 밟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1

 

[ 결혼 발표는 하고 싶지 않대. ]

토라오는 슬픔을 꾹꾹 담은 메시지를 단체 래빗챗에 남겼다. 그거야 당연하지, 토우마가 거들자 하루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임금님 푸딩 이모티콘을 보냈다.

[ 일반인이라며, 당연히 피하고 싶을 거야. 무섭기도 하겠지. ]

[ 난 자랑하고 싶은데. ]

[ 정말 대단한 사랑이네요. ]

토라오의 당돌한 말에 미나미는 쿡쿡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답했다. 너희들도 좋은 사람 만나야지, 의기양양한 호랑이 이모티콘을 마지막으로 래빗챗은 조용해졌다.

미나미는 스마트폰을 베개 밑에 밀어 넣었다. 핑크색 분위기를 뿜고 다니던 두 사람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긴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걷던 여성은 웬만한 연예인보다 아름다웠다. 하긴 그만한 미모이니 천하의 미도 토라오가 반했겠지, 짙은 한숨은 길게 늘어졌다.

우우우우웅, 베개를 가득 울리는 진동음에 몸이 흠칫 들썩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다시금 스마트폰을 잡은 미나미는 액정에 뜬 이름에 반대 손을 꽉 쥐었다.

[ …어, 미나미. 잠시 통화돼? ]

[ 네, 무슨 일이세요? ]

애인 자랑만 아니라면 기꺼이, 배가 아파서요. 진심 어린 말이 농담스레 덧붙는다. 어설프게 웃던 토라오는 한참을 어물거리다 말을 이었다.

[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

잠시 내려올래? 차에서 얘기했으면 싶거든. 미나미는 오후 10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바라보다 어깨를 내렸다. 피곤하니 내일 말하자고 전화를 끊어버리기엔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 지금 갈게요. ]

 

*

 

“미나미.”

지하 주차장에서 토라오의 차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미나미는 가디건을 여민 채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인데 이 시간에 상담이에요? 너스레를 떨자 눈매도 올라간다.

“어… 네 도움이 필요해서.”

너, 점 보는 것도 할 줄 알잖아. 그렇지?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표정에 미나미의 고개가 기울어진다.

“네, 취미로 조금. 그런데 왜요?”

“운명의 붉은 실이라고… 믿어?”

토라오의 입에서 나올만한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더욱 의아해진 미나미는 팔짱을 끼웠다.

“이상하게 들릴 줄은 알아. 근데 내 애인이 그걸 믿거든. 나랑 자기는 운명의 붉은 실로 이어지지 않았으니 나하고는 결혼할 수 없다는 거야, 이게 말이 돼?”

애초에 붉은 실이 어떻게 보여? 헤어지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하던가, 하지만 헤어질 생각은 정말 요만큼도 없거든?

그가 열변을 토하며 터뜨리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 애인의 비위를 맞추지 못해 어쩔줄 몰라하는 미도 토라오라니. 진귀한 광경에 미나미는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거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아니면 막, 운명을 바꾸는 방법 뭐 그런 거.”

“정말 필사적이시네요.”

“놓치고 싶지 않아.”

부럽다. 뇌에 박힌 짧은 감탄사는 다행히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진 않았다. 혀 위를 맴도는 말을 애써 삼켜낸 미나미는 씁쓸한 패배감에 멍해진 가슴을 홀로 다독였다.

“찾아볼게요.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그리고 이건…”

“비밀로 해드릴게요.”

이건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마지막 끈이 되겠지. 내 시커먼 속을 알면 당신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작은 죄책감이 검은 눈발이 되어 흩날렸다.

 

*

 

카드 몇 장을 뒤집던 미나미는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 운명의 붉은 실을 본다거나 잘라서 붙인다거나, 그런 건 해낼 수 없는 일이라 여겼는데 카드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떡하면 되는 걸까, 물음이 이어질수록 카드는 뒤섞이고 엎어졌다. 서점, 서점? 어디에 있는 서점? 도쿄, 골목이 세 개 교차된 곳, 근처에 키가 작은 벚나무, 빨간색 간판, 4월 19일, あ열 15번째? 세부적으로 나오는 단서에 메모장 하나가 단숨에 채워진다.

자세한 정보 덕에 카드에서 말하는 서점은 금방 찾았다. あ열 15번째, 낡은 책이 하나 꽂혀있다. 검고 얇은 책은 잘못 만지면 부서질 것처럼 파삭거렸다. 조심스레 표지를 넘긴다. 알 수 없는 글자가 가득한 페이지 옆엔 반듯한 필체로 풀이가 적혀있어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 읽은 마녀가 나오는 동화책보다 몇 배는 더 심오하고 말도 안 되는 내용에 미나미는 희미하게 웃었다. 카드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는 자신도, 이 어처구니없는 책을 진지하게 읽고 있는 자신도 하나같이 우스웠다.

마음의 크기를 저울에 달아버린 기분이었다. 갑작스러운 비참함에 소리 없는 울음이 눈가를 긁었다.

[ 저녁에 시간 있어요? ]

[ 지금도 가능해. ]

칼같이 답장을 보내는 토라오의 속은 빤히도 읽혔다. 방법을 알아냈다는 의미로 해석했겠지, 드러나는 절실함에 코가 시큰하다. 미나미는 서점에서 찾은 수상한 책을 구매해―“이런 책이 있었나?” 점장은 의아해하며 200엔을 받았다―근처 카페로 가 토라오를 기다렸다.

 

운명은 붉은 실로 이어진다… 매듭은 새끼손가락에 지어지며 둘이서 한 쌍이 된다… …운명의 상대를 바꾸는 것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로 주술사는 이하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쯤 읽었을까, 인기척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너무 오픈된 공간 아니야?”

우리 집이나 네 집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은밀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미나미는 목소리를 낮추며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상대를 보는 방법은… …이다. 그 후 실을 자를 '가위'와 다시 묶을 '매듭'을 만들어… …끊어내고 싶은 상대와 이어지고 싶은 상대의 머리카락과 그가 사용한 물건…

 

미나미는 토라오에게 읽던 책을 넘겼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을 훑어보던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이마를 짚었다.

“…정말로 방법이 있었다니.”

“저도 놀랐어요.”

더 놀라운 건, 이걸 믿고 있는 당신과 저죠. 허무맹랑한 이야기 아닌가요? 미나미가 가만히 웃자 토라오는 끄덕였다. 나도 내가 멍청하다고 생각해, 자조적인 말에 아랫입술이 지그시 눌린다.

“그래서, 해보실래요?”

주술을 뒷받침하는 건 이 책과 이걸 찾게 한 제 점, 두 가지뿐이에요.

“필요한 준비물은 머리카락하고 쓰던 물건인가? 이것만 있으면 돼?”

“일단은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게요.”

“책에서 말하는 ‘대가’는 구체적으로 어떤 거야?”

“정확히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다 감당할 수 있다는 거죠? 미나미가 얼른 책을 덮으며 묻자 토라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는 했어, 또 다른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주고.”

“그럼 하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

전 오늘 당신의 운명의 상대가 누구인지 볼 거에요. 미나미는 의식에 필요하다며 그의 귀걸이와 머리카락을 요구했다. 토라오는 기꺼이 넘겼다.

 

*

 

미나미는 손수건에 포개어둔 토라오의 머리카락과 귀걸이를 검은 탁자 위에 올려놨다.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세모난 귀걸이를 오래도록 지켜보던 미나미는 눈을 감고 긴 주문을 발음했다. 어려운 발음이었지만, 각종 외국어를 공부한 덕인지 막힘 없이 술술 나왔다.

토라오의 머리카락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온다. 치직, 치직 소리 내며 타들어 가던 것은 빨간 재를 남겼다. 어디선가 바람이 휙 불어와 감긴 미나미의 눈꺼풀 위로 재를 흩뿌렸다. 이물질이 닿자 흠칫한 미나미는 한참 후에야 눈을 떴다.

“…!”

유체이탈? 아니, 아니다. 마치 절대자가 된 것마냥 붕 떠올라 세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드넓은 거리에서 익숙한 건물로 축약되던 시야는 이내 토라오의 모습을 잡아냈다. 미나미는 그의 새끼손가락에 묶인 빨간 매듭을 따라갔다.

길게 이어진 인연은 바깥으로 향하더니 다시금 좁아졌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시야는 머잖아 어떤 이의 뒷모습에서 멈췄다. 붉은 실의 끝자락은 그의 손가락에 걸려있었다.

미도 토라오의 운명의 상대는 정말로 그의 애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가까스로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미나미는 눈알이 빠질 것만 같은 고통에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 구했어, 미나미. ]

래빗챗 알림음에 어깨가 들썩인다.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미나미는 한참을 진정한 후에야 휴대폰을 집었다. 액정을 누르는 손가락은 심하게 파들거렸다.

[ 빨리 구하셨네요. ]

[ 그쪽 사용인에게 머리카락이랑 안 입는 옷이 있다면 달라고 부탁했거든. ]

[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겠어요. ]

[ 어쩔 수 없잖아. ]

지금은 만나주질 않아서. 미나미는 시야에서 점점 흐려지는 붉은 실을 보며 어깨를 내렸다.

충혈된 눈은 휴대폰에 띄워진 글자를 제대로 담아내질 못했다. 따가워, 너무 아파. 미나미는 미간을 좁힌 채 침대 위로 엎어졌다. 와중에 주술의 대가가 이 정도라면 제법 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토라오는 그 여자를 사랑한다. 운명을 바꾸는 행위가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라지만, 사람의 의지란 운명을 뛰어넘는 힘을 갖지 않던가. 세밀하게 살펴보면 다른 차원의 이야기겠지만, 미나미는 이 또한 운명의 한 획이라 이해하고 납득했다.

그러니 도울 수 있다면 끝까지 돕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해서는 안 될 일이라 해도, 해낼 수 있다면 해내고 싶었다.

“정말로 할 줄은 몰랐는데.”

누군가의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분명 아무도 없는 방이다. 잘못 들었나? 아니면 실 좀 봤다고 영혼을 느끼나? 미나미는 컴컴한 방안을 둘러보다 다시금 몰려오는 통증에 눈을 가리고 웅크렸다. 바늘 수십 개가 눈알을 찔러대는 듯했다. 입을 벌리자 앓는 소리만 나와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들리지?”

남자의 목소리는 귀에 익숙했다.

“…들, 려요.”

누구, 세요? 가까스로 짜내어 묻자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

 

 

2

“요즘 말야, 미나미랑 토라오 자주 붙어있지 않아?”

“원래 그러지 않았어?”

동선 많이 겹쳐서 안무 연습도 같이하잖아. 하루카의 물음에 토우마는 마시던 물을 내려놓곤 크게 기지개를 켰다.

차라리 잘 됐나? 하루카는 한층 밝아진 미나미를 보며 안도했다. 그가 토라오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건 일찍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굳이 아는 척하진 않았다. 딱히 눈치가 빨라서 알아차린 건 아니었다. 미나미의 시선은 언제나 토라오를 향하고 있었다. 그 절절한 눈빛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제 속이 다 먹먹했다. 차라리 고백이라도 하지, 하루카는 저와 마주칠 적마다 곱게 휘어지는 눈을 보면 숨이 막혔다. 그 미소 어딘가에 숨겨진 진심이 느껴질 적엔 제가 다 곤란했다.

“그런데 토라, 식은 언제 올려?”

“8월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꽤 빠르네.”

토라오는 태연하게 답했지만 당황한 것이 역력한 낯이다. 미나미는 토라오의 허리께를 토닥였다. 잘 될 것이란 의미가 담긴 손짓에 토라오는 굽은 어깨를 펴고 표정을 고쳤다. 고마워, 미나미. 입 모양은 확실히 전해졌다.

 

*

 

“잘하고 계시죠?”

“그럼.”

어제는 연락도 왔어, 토라오는 미나미가 시키는 일을 꼼꼼히 해냈다. 하루에 두 번씩 미나미와 손을 잡고 의미 모를 주문도 읊고 잠들기 전엔 하늘을 보고 기도했다. 매일 밤 미나미와 만났고 식사도 어울리며 앞으로 얼마나 걸리는지, 또 무얼 하면 좋은지 세세한 내용과 함께 언제나 하던 가벼운 잡담도 나눴다.

시한부 선고받은 환자가 하고 싶은 일을 몰아 하듯, 미나미는 곧 끊어질 관계를 앞두고 행복을 몰아받는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등을 밀어주는 애틋한 희생. 뜨거운 감정은 끝까지 감춰 그의 곁에 남을 자격으로 바꾸고 싶었다. 지금의 미나미는 주술의 대가보다 마음을 들키는 것이 더 무서웠다. 두 사람 사이에 수십 킬로미터짜리 두께의 벽이 세워질 것을 생각하면 무심코 호흡이 멎었다.

“오늘 가위랑 매듭 만든다고 했지? 또 뭐 필요해?”

“당신과 연결된 상대의 정보요.”

“알아냈어?”

“그럼요.”

미나미가 느긋하게 웃으며 브이 자를 그려내자 토라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장난스러운 모습이 어울리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묘한 이질감마저 고마울 지경이었다.

“누군지 궁금하진 않아요?”

“전혀.”

어차피 내가 사랑하는 건 한 사람뿐이니까. 찌릿, 눈알이 콱 우그러지는 감각에 눈이 감긴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만 들어갈게요. 미나미는 얼른 눈을 깜박여 겨우 시야를 바로 했다.

다급히 집으로 돌아온 미나미는 실을 자를 가위를 만들었다. 눈을 감고 허상의 가위를 집어 토라오의 붉은 실에 걸었다. 손잡이를 잡아 누른 후 그의 약혼녀와 매듭을 지어주면 끝인데, 어째서인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어금니가 맞물리고 입술이 짓이겨졌다. 어서 잘라, 빨리 잘라야 해.

――찰칵, 쇠붙이가 맞붙자 미나미의 새끼손가락 끝에 걸린 붉은 실이 끊어졌다.

가만히 뒀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츠메 미나미는 그 길을 포기할 만큼 미도 토라오를 사랑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아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동안 연기한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이런 역할은 맡아본 적이 없었는데…

“전혀, 어차피 내가 사랑하는 건 한 사람뿐이니까.”

무심코 떠올린 말은 총탄이 되어 가슴에 처박혔다.

“미나미.”

“…….”

또 그 목소리다. 미나미는 두 사람의 실을 엮다 말곤 고개를 들어 눈앞에 나타난 새까만 형체의 인영人影을 올려다봤다. 박쥐의 것과 같은 커다란 검은 날개, 위로 치솟은 새까만 뿔, 입은건지 벗은건지 모르게 대충 휘감아진 검은 천… 남자는 허공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계속 모른 척 할 거야?”

“당신이 헛소리를 하니까 그렇잖아요.”

남자는 킬킬대며 미나미의 곁으로 내려왔다.

“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니까.”

“당신의 어디가 미도 씨라는 거에요.”

“맞다니까 그러네…”

미도 토라오를 쏙 빼닮은 얼굴, 아니, 그냥 미도 토라오 그 자체였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날개를 접고는 바닥에 털퍽 주저앉았다. 미나미는 의식을 치른 탁자 위를 정리했다. 짙은 머리카락과 밝은색의 머리카락이 종이에 고이 싸여 태워진다.

“호칭이 헷갈려서 그래? 그럼 난 이름으로 불러줘, 토라오 씨.”

전부터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는데 넌 꼭 성으로만 불러주더라. 의미심장한 말에 미나미의 미간이 좁아진다.

“악마 씨라고 할게요.”

“내가 악마인 줄은 알았구나?”

“생긴 게 그렇잖아요.”

“그리고 넌 그 악마에게 꼬박꼬박 말대꾸했고.”

내가 무섭지도 않아? 하긴, 넌 내가 황제였던 시절에도 꽤 대단했어. 물론 너도 그만한 직위에 있기야 했지만. 알 수 없는 소릴 늘어두자 미나미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나타난 이유가 있을 것 아니에요. 역시 대가인가요?”

“난 네가 치를 그 대가를 덜어주려 친히 강림한 거야.”

손가락 줘 봐. 악마는 미나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실을 나와 연결하면 적어도 영혼이 소멸하는 일은 막을 수 있어.”

“계약하자는 건가요.”

“비슷해, 난 네가 필요하거든.”

너를 찾아다녔어, 하지만 어느 세계를 가나 미도 토라오가 널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데리고 올 수가 없었지. 그런데 드디어 찾은 거야, 나의 미나미를. ……이상한 소리를 늘어두자 미나미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이 소멸한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책에는 술사가 억겁의 고통을 이고 지낼 것이라 적혀있었으니, 아마 그만한 레벨의 형벌이 맞을 것이다. 미나미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방금 잘려진 인연의 실은 끝부분부터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리 내라니까, 악마는 미나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가 막기도 전에 잘린 실의 끝이 악마의 손가락에 걸렸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왜? 너도 비슷한 짓 하고 있잖아.”

그 여자의 의사는 물어보고 하는 거야? 아니잖아. 이기적인 행동인 건 피차일반이니 조용히 넘어가. 악마가 손을 한번 흔들자 순식간에 엮어진 실은 존재를 감추었다.

“눈은 괜찮고?”

“아뇨.”

자주 흐려져요. 아예 안 보일 때도 있고. 인간이 신의 영역을 보려고 하니까 버티질 못하는 거야. 악마는 미나미의 허리를 끌어안고 침대로 가 눕히더니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폭신한 이불에 파묻히자 몇 차례의 주술로 피곤해진 몸뚱이는 그대로 늘어졌다.

“왜 하필 그 모습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재차 반복되는 물음에 악마는 머리를 짚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토라오라니까.”

다른 세계에서 온 미도 토라오라고. 그렇게 이해해. 그걸 어떻게 믿어요. 미나미가 눈을 반짝 뜨고 대꾸하자 악마는 미나미의 옆에 냅다 드러누웠다.

“운명에 손도 대고 악마를 직접 보고 있으면서 못 믿겠단 거야?”

“…….”

“됐다, 인간인 네가 뭘 알겠어. …잠이나 자, 푹 잠들도록 잡꿈은 내가 다 없애줄 테니까.”

잘 자, 미나미. 머리를 쓰다듬는 악마의 손은 아이러니하게도 따뜻했다.

 

*

 

토라오의 붉은 실은 단단히 묶이기 시작했다. 미나미는 매일 그 과정을 체크하며 검은 책을 뒤졌다. 고독한 시간이었다. 멀쩡한 운명을 제 손으로 헤집은 것이 자못 서러웠는지 입술을 물어뜯는 버릇도 생겼다. 피떡이 져서 엉망이 된 입술을 말아 물고 있으면 어디선가 악마가 나타나 손을 잡았다.

“너무 세게 잡지 마세요.”

“아파?”

“당신 손톱 길잖아요.”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이었다. 악마의 손톱 끝은 갈고리처럼 휘어져 있어 흡사 짐승의 것과 같았다. 미나미의 손등을 지그시 누르던 것은 힘이 풀리더니 슬며시 느슨해졌다.

[ 미나미, 나 결혼 날짜 잡았어. ]

다 네 덕분이야. 약혼녀에게 연락이 왔었다는 내용의 구구절절한 장문의 래빗챗이 휴대폰 액정을 빛냈다. 미나미는 곁눈질로만 보곤 눈을 돌려 악마의 붉은 눈을 바라봤다. 실이 엮여서일까, 아니면 반복되는 달콤한 말에 끌리게 된 걸까.

“……토라오 씨.”

이름이 불리자 악마는 활짝 웃었다. 응, 나야, 미나미. 거짓말이래도 상관없다. 이제는 눈앞의 그를 '진짜' 토라오라 생각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저쪽에 쏟은 애정을 몽땅 이쪽으로 끌어오고 싶었다. 토라오의 눈에서 사랑이 뚝뚝 떨어진다. 다정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울컥한 미나미는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악마에게 홀려 영혼이 찢어진대도 이만한 유혹이라면 얼마든지 어울릴 수 있다. '나의' 미도 토라오는 여기에 있다. 그렇게 믿어.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 이만한 착각 정도는 괜찮잖아…

[ 축하드려요, 미도 씨. ]

미나미는 아주 늦게 답신을 보내면서 실이 아직 완벽하게 묶인 것은 아니니 긴장을 풀면 안 된다고 일렀다. 토라오는 결혼식 전날까진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타인과 사랑에 빠진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날이 갈수록 버거워졌다.

 

*

 

“엇, 야, 미나!”

어디 아파? 토우마는 리허설 도중 넘어지려는 미나미를 얼른 잡아챘다. 근래 들어 현기증이 심해졌다. 눈은 뽑힐 것처럼 아팠고, 시야는 자주 까매졌다. 일어나, 일어나서 안무해. 겨우 이 정도로 무대를 망칠 작정이야? 거친 말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겨우 허리를 세웠다.

“괜찮아요.”

“미나미.”

토라오가 바짝 다가오자 미나미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지 그래? 머릿속으로 악마의 속삭임이 울렸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땐 조용히 있어요. 목소리 섞이면 헷갈리니까.’

악마는 입을 다물었다.

 

*

 

[ 정말 괜찮아? ]

미나미는 끝까지 대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만약 주술 때문에 아픈 거라고 한다면 그가 유쾌해 할까. 행복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의 마음을 조금도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래빗챗을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여기서 전화라도 한다면 그간 참아온 모든 말을 쏟아내고 싶을 테니까.

“미나미, 이리와.”

악마는 미나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얼굴로 손을 내밀고, 그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미나미는 뿌리치지 못하고 손을 잡고 이끄는 곳으로 걸었다. 악마는 그를 제 무릎 위에 앉히더니 앞머리를 쓸어 넘기곤 이마에 입술을 문질렀다.

“…뭐 하는 거예요?”

“고통을 좀 덜어주려고. 왜, 싫어?”

“싫진 않아요, 닮았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 토라오… …됐다, 어차피 너는 내꺼고 나는 네 거야. 악마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미나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미나미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신의 눈을 빌려 붉은 실을 보면… …에 대하며, 이는 불운한 대가로… …술사는 억겁의 고통을 이고 지낼 것이며…

“…술사가 억겁의 고통을 이고 지낸다는 부분 말이에요.”

제가 그저 아프고 힘들 거라는 의미로만 이해했거든요. 그런데 영혼 소멸이라니, 좀 비참했어요. 미나미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하고 계약은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대가를 피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알고 싶지 않은 부분을 묻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기에, 말과 말 사이에 공백이 늘어졌다.

“대가에 대해서 정확히 알려주세요.”

악마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서 말끔히 지워지는 거야.”

하필이면 네가 술사이자 대상자가 됐으니, 육체가 아닌 영혼까지도 영향이 미치겠지. 물론 나와 계약했으니 그렇게까진 안 될 거야. 악마는 제 새끼손가락을 펴 보이며 말했다.

“네 영혼은 내게 귀속될 거든.”

그럼 소멸할 일은 없어. 미나미는 미간을 좁혔다.

“결국 죽는다는 소리네요.”

“비슷하지만 달라. 하나의 네가 사라지는 거니까. 그렇게 되면 다른 세상의 나도 영향을 받거든. 그러니까, 짝없이 혼자가 된다 이거지.”

세상은 여러 가지야. 네가 아이돌인 세상이 있듯이 신관인 세상도 있지. 어딘가에선 혁명을 주도한 외교관이고 또 어딘가에선 드세고 총 잘 쏘는 군인이었어. 지금의 넌 남자지만 어떤 세계에서는 여자이기도 했고. 물론, 네 옆엔 언제나 내가 있었지. 악마는 그가 못 알아듣는 줄 뻔히 알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난 짝을 잃은 미도 토라오야.”

내 짝이 될 나츠메 미나미는 다른 세상으로 튕겨 나갔어. 난 널 찾으러 온 세상을 돌아다녔고. 오늘이 오기까지 한 200년 정도 걸렸을 거야. 그는 품에 미나미를 구겨 넣었다.

“그래서 전 언제 죽어요?”

또 안 들어주네, 악마는 제 말을 가볍게 무시하는 그를 보곤 한숨을 내뱉었다.

“6월 8일”

생일에 죽는다니, 야속하기도 해라. 미나미는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답답함에 호흡을 크게 뱉었다.

“저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뭔데.”

“미도 씨의 결혼식에 가고 싶어요.”

내 소원이었어요. 그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그 누구보다 제일 축하해주고 싶었거든요. 당연히 나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지낼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그야 그 사람 여자 좋아하니까. 미나미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웅얼거렸다.

“그렇게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미도 씨를 지켜보고 아이의 삼촌이 되어주고 싶었어요. 그와 함께 일하는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또 친구로서 곁에 계속 남고 싶었어요.”

제 손에 걸린 실이 미도 씨에게 이어져 있다는 걸 알았을 땐, 진심으로 믿고 싶지 않았어요. 눈꺼풀이 지그시 내려왔다.

“솔직히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요. 미도 씨가 어떻게 절 사랑하겠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

“말했잖아요, 그 사람 여자 좋아한다고.”

“난 널 좋아해.”

…고마워요. 미나미는 악마의 두꺼운 팔을 토닥였다.

“그런데 죽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고백이라도 하는 건 어때.”

“질투 안 할 자신 있어요?”

“할 거야. 지금도 하고 있고.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속이라도 시원하게…”

“내가 고백하고 죽어봐요, 상황이 어떻게 되겠어요.”

짝사랑한 상대가 결혼해서 자살했다? 딱 그렇게 보이지 않나요. 그에게 민폐에요. 목소리에 물기가 서리자 입이 다물린다. 악마는 제 머리를 몇 번 헝클이더니 한숨 끝에 말을 이었다.

“네가 겪을 소멸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야.”

 

*

 

“…임신이요?”

“응, 그래서 결혼식을 두 달 앞당겼어.”

매듭이 완전히 지어진 지 이틀 정도 지났을까, 놀라운 소식을 전한 미도 토라오는 머쓱한지 뒷목을 문질렀다. 하루카랑 토우마한텐 아직 말 안 했어. 미나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아 제 손가락을 내려다봤다.

“다행이네요. 그래서 언제로 잡혔어요?”

“6월 8일.”

…연기를 배워서 다행이지, 미나미는 활짝 웃으며 토라오가 건네는 청첩장을 받고 아낌없이 축하했다. 축하의 말은 온통 진심이었다. 결혼식을 보고 싶다고 빌었는데 혹시 악마가 앞당겨준 걸까, 미나미는 심하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근데 너 괜찮아?”

“뭐가요?”

미도 토라오의 시선이 땅으로 떨어졌다.

“꿈을 꿨거든, 네가 대가 때문에 아픈 거라고.”

그에 비해 난 멀쩡해. 네가 말한 대가가 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불안해하는 목소리에 미나미는 입을 다물었다. 악마의 짓일까? 두 주먹이 꽉 말렸다.

“…당신은 무언갈 잃게 될 뿐이에요.”

많은 것이 달라질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날 거고요. 당신이 그걸 자각할런지는 모르지만요.

“혹시 ŹOOĻ를 잃는다거나, 뭐 그런 거야?”

미나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ŹOOĻ는 무사할 거예요.”

“너도 무사한 거지?”

ŹOOĻ가 무사하다는 건, 너도 하루카도 토우마도 다 무사하다는 뜻이잖아. 순간 구겨지려던 얼굴이 얼른 풀어졌다.

“네, 무사해요.”

“그럼 됐어.”

이제 안심이다. 활짝 웃는 얼굴에 온몸에 힘이 죽 빠졌다.

그래, 이거면 됐어. 당신이 행복하다면 난…

 

3

 

“미도 씨의 꿈에 손댔어요?”

“들켰네.”

“결혼을 앞둔 사람이에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요.”

미나미의 질책에 악마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는 너도 끝까지 말 안 했잖아.”

“말해서 뭐해요. 어차피 내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다 잊을 거라면서.”

그러니까 말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거야. 악마는 답답하다는 듯 제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너는 걔 결혼이 먼저야? 그날은 그놈 결혼식이 아니라… 하려던 말은 미나미의 손에 막혔다. 피곤하니까 그만 해요, 악마는 제 입을 막은 손바닥에 입술을 꾹 문질렀다.

“…!”

움찔, 소름이 오소소 돋아 팔을 확 잡아뺐다. 미나미는 제 손바닥에 잔뜩 닿아오던 악마의 뽀뽀 세례에 귀까지 빨개져 뒤로 물러났다. 분명히 혀도 닿았던 것 같은데, 악마는 짓궂은 얼굴로 웃었다.

“네 생각 좀 해.”

“하고 있어요. 지극히 이기적이에요.”

“웃기는 소리.”

내가 아는 나츠메 미나미는 더 이기적이고 독하게 굴 줄 아는 사람인데 말이야. 물론 속은 여리지만. 여전히 능글거리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다.

“조용히 안 하면 정말 가만 안 둬요?”

“가만두지 마.”

좀 괴롭히고 예뻐해, 그놈 생각 그만하고 이젠 나 좀 보라고. 악마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미나미를 끌어안았다. 악마의 붉은 눈동자는 질투로 번들거렸다.

“미도 씨의 애인분, 임신했대요.”

혹시 그것도 당신이 한 일인가요? 임신 덕분에 결혼식이 앞당겨져 죽기 전에 볼 수 있게 됐으니, 당연히 그가 한 짓일 거라 여겼다. 내가 삼신 할매도 아니고 애를 어떻게 점지해? 퉁명스러운 어투에 미나미는 피식 웃었다.

“삐졌어요?”

“전혀.”

“삐졌으면서.”

“뽀뽀해줄 거 아니면 냅두지 그래?”

“아까는 괴롭히고 예뻐해 달라면서요.”

“…….”

귀엽기는. 미나미는 무심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변신한 거죠? 미도 씨 모습으로? 아니, 나 맞다고! 내 얼굴이라니까! 자, 봐! 미나미의 두 손에 악마의 얼굴이 쏙 들어온다. 말랑말랑한 살결, 오똑하고 높은 콧대와 잔뜩 비죽거리는 입술. 하나하나 쓸어내리던 그는 볼을 살짝 꼬집었다.

“원래 모습이 용이었으면 했는데.”

“그런 취향이야? 하드하네. 몇 분 정도는 용으로 변신할 수 있어.”

혹시 본체가 용이 아닌 게 감점 요인이야? 나 참, 운명을 엮어도 꼬시기 힘드네. 하긴 넌 그게 매력이지. 악마는 툴툴거리며 미나미의 어깨 위에 턱을 올렸다.

“……그렇게 슬퍼하지 마.”

슬퍼하지 않아도 돼. 넌 분명 행복할 거니까. 이곳의 너도, 지금의 너도 내가 곁에 있으니까. 뜻 모를 말이지만 진중해진 목소리에 무심코 눈가가 붉어졌다.

만약 죽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까? 아니, 알더라도 주술은 썼을거고 대가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히 숨겼을 테다. 이쪽으로 가고 저쪽으로 가도 결국은 여기로 도달한다.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어쩌면 이 모든 것도 ‘정해진 운명’일지 모르겠다 싶었다.

…분명 날 찾아다녔다고 했지, 미나미는 악마가 하던 뜻 모를 말들을 다시금 곱씹었다.

 

*

 

6월의 하늘은 참 맑았다. 해가 쨍쨍 빛나고 바람이 부드러운 계절은 온통 싱그러웠다. 미도 토라오는 참 좋은 날에 장가를 간다며 갖은 축하를 받았다. 하얀 턱시도가 제법 잘 어울린다. 윤기가 나는 얼굴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이 찬란하다. 그리 좋을까,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미나미는 함께 온 하루카와 토우마에게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하필이면 미나미 생일에 결혼이냐고, 바보 토라오! 하루카는 목덜미를 꽉꽉 누르며 인상을 구겼다. 토우마가 어디 불편하냐고 묻자 하루카는 얼른 표정을 바꿨다.

“저녁에 미나미 생일 파티 말야, 토라오도 올 수 있대?”

“아~ 글쎄, 피곤해하지 않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속 편했을 텐데. 하루카는 저도 모르게 불퉁해져선 마구 발을 굴렀다.

“이스미 씨? 무슨 일이에요?”

“아~ 아니, 구두에 뭐가 묻어서!”

뒤에서 미나미가 불쑥 나타나자 두 사람은 흠칫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설마 들은 거 아니겠지? 생일 파티는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었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너희들 언제 왔어!”

뒤늦게 세 사람의 존재를 알아챈 토라오의 만면엔 웃음이 가득했다. 곧 식 시작하니까 들어가, ŹOOĻ의 자리는 특별하다고. 아, 그래? 뭘 어떻게 했길래. 토우마가 묻자 그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내 모습이 제일 잘 보이는 쪽으로 잡아놨어.”

디저트도 특별히 신경 썼고. 토라오는 하루카를 툭 치며 말했다.

“왜, 왜?”

“왜냐니, 너 좋아하잖아.”

“아, 아니거든?! 어쩌다 기분 전환하러 먹는 거라구!”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셋이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눈에 담고만 있던 미나미는 조용히 웃었다. 참 좋은 세상에 다녀가는구나.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 죽음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감정이 없었다. 슬프지도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아쉬웠다. 그의 아이에겐 인사하고 싶었는데. 좋은 삼촌도 되어주고, 아이를 위한 자장가도 써주고 싶었는데.

 

계속, ŹOOĻ로 남아있고 싶었는데…

 

“아, 저기 미나미.”

끝나고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미나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화로운 예식장, 밝은 조명 아래에서 빛나는 두 남녀는 실로 아름다웠다. 박수갈채와 더불어 환호가 잔뜩 쏟아진다. 대중에게 섞여 박수를 치던 미나미는 응어리진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곤 낮은 숨을 내뱉었다. 한을 풀었다고 해야 할까, 투명한 웃음이 샜다.

돌연 몸이 붕 뜨는 감각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위를 본 미나미는 토라오와 똑같이 생긴 악마, 아니, 토라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미나미의 손을 깍지 껴―뾰족하던 손톱 끝은 짧았다―잡았다.

“…당신은 ‘이곳의 너도, 지금의 너도 내가 곁에 있다’고 하셨죠.”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아요. 미나미는 신랑과 신부의 이름이 적힌 전광판을 가리켰다.

신랑 御堂 虎於

신부 南 夏目

 

 

“왜 너희 둘뿐이야?”

“아? 료 씨나 매니저라도 찾는 거야?”

“아니, 그 사람들 말고 또 누구 안 왔어?”

“누구?”

토우마와 하루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토라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식이 끝나면 꼭 만나야 하는 중요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누구였지. 끝나고 보자고 했는데. 분명 할 말이… …근데 나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아니, 그… 왜 생각이 안 나냐.”

“웬 헛소리래, 부인께서 기다리신다. 빨리 가 봐.”

“어, 어어.”

누구지, 누구였더라.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따로 선물도 사뒀는데. 선물… …선물은 왜 샀지? 토라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부에게 돌아갔다. 곱게 땋아 묶은 머리에 장식한 꽃들을 하나둘 떼어내던 그는 토라오를 보곤 빙긋 웃었다.

“누구 만나고 온다면서요?”

“아… 나중에 해결하려고.”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 토라오는 남은 꽃을 거들어 떼주며 물었다.

“드레스요, 배가 답답해서. 빨리 벗고 싶어요.”

“지금 갈아입자, 도와줄게.”

우리 아기랑 여보 많이 힘들었지? 토라오가 배에 손을 얹자 여자는 후후 웃었다.

“여보라니, 낯간지러워요.”

“여보를 여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불러.”

가자, 나츠메. 토라오는 그의 어깨를 감싸고 걸었다.

 

*

 

“미도 씨는 제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요.”

“고맙다는 말이었겠지. 그리고…”

생일 축하한다고. 토라오의 말에 미나미는 피식 웃었다. 고맙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요. 워낙 다정한 사람이니까. 칭찬 고마워. 당신 말고 저 사람이요. 알아, 알아.

“원래 있어야 할 곳에서 튕겨져나간 바람에, 하나의 세계에 내가 둘이었던 거군요.”

왜 몰랐을까요, 여자분의 이름을 알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알고 싶지 않았겠지, 네가 바란 건 토라오의 행복이지 그 여자의 행복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미나미의 손을 꼭 잡았다.

“이만 가자.”

“어디로요?”

토라오는 빙긋 웃었다. 그 얼굴이, 마치 결혼을 앞둔 새신랑 같았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

 

 

사랑하는 사람을 꼭 닮은 악마는

내게 두 번째 생을 선물했다.

 

1

 

  

손을 잡자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가슴팍에 코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워지자 미나미는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어디선가 얇은 천이 내려와 감싸는 통에 움직이지 못했다.

“이게 뭐예요?”

“꽉 잡고 있어.”

몸이 아래로 훅 꺼지는 느낌에 놀란 미나미는 그를 마주 안을 수밖에 없었다. 놓치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았다. 옅은 두려움과 함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자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발밑에서부터 날카로운 바람이 스멀스멀 올라와 피부를 긁었다. 마치 잘 벼려진 칼날이 껍질을 얇게 거둬가듯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어깨가 바짝 굳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와르르 웅성거리는 소리가 쏟아지자 미나미는 고개를 들었다.

“웬일로 인간을 데려왔대?”

“항상 그 자리에서 잡아먹는다더니.”

“얼굴도 반반한데 부리려고 데려왔나 보지 뭐.”

미나미는 그들이 악마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몇몇은 인간의 외형에 머리 위에 뿔이 나 있었고, 몇몇은 되다 만 짐승의 형태로 그릉거렸다.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낄낄거렸고 누군가는 긴 혀를 빼고 날름거렸다. 언젠가 찍어본 아포칼립스 영화 촬영장이 떠오른 탓일까, 미나미는 남아있는 어지러움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기만 할 뿐 상황에 대해서는 담담한 눈치였다.

“헛소리 그만하고 좀 비켜.”

토라오는 짜증스럽게 악마들을 밀치며 지나갔다. 혓바닥을 내밀고 꿍얼거리는 놈들의 눈에서 식탐이 흐른다. 오래 있으면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더 많은 악마가 미나미를 보기 전에 자리를 떠야 했다.

“잡아먹는다니 무슨 뜻이에요?”

“미나미.”

당황한 토라오가 이름을 불렀지만, 미나미는 사자의 갈기가 달린 악마에게 재차 물었다. 인간과 눈을 마주한 그는 씩 웃으며 뾰족한 손톱으로 제 털을 쓸어내렸다.

“궁금해~?”

거칠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새된 목소리를 낸 악마는 호호 웃었다.

“인간의 영혼만큼 맛있고 영양가 높은 것도 없거든~ 마력의 근본이나 마찬가지고 말이야. 너도 뭐 먹히거나~ 다른, 흐흥! 다른 의미로 먹히거나 하지 않을까~? 토라오 님은 아스모데우스 님과 견줄만한…!!”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은 왜 난 거야? 아스모데우스는 7대 죄악 중 색욕의 악마였다. 처녀들을 겁탈하고 신을 희롱하는 행위를 밥 먹듯이 저질렀다고 했는데… 미나미의 경멸에 찬 눈이 사자의 갈기를 잡아당기고 있는 토라오를 쏘아봤다.

“악마는 악마다 이건가요.”

“아니야.”

나 그런 짓 안 해. 이래 보여도 인간 기본 윤리 정도는 다 알고 있단 말야. 그래서 내 행동이, 아이씨. 그러다 보니까 이놈들이 날 편하게 막 대하는 거고. 미나미는 절절매는 토라오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런 식으로 막 대한다…?”

“일단은 왕족이거든.”

그는 멋쩍은 듯 목덜미를 쓸더니 으리으리한 성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제 키의 5배는 더 되어 보이는 철창의 열 배는 더 크게 솟은 건물은 거인이 사는 곳이라 해도 믿을 만큼 컸다.

“왕자님인가요?”

“푸학!!”

토라오가 고개를 확 돌리자 몇몇이 입을 가리고 딴청을 부린다. 목소리가 여러 개 겹친다 싶더니, 범인은 한둘이 아닌 모양이다.

“마왕이 낳은 자식일 뿐이야.”

강한 악마를 낳아 후사를 이어야 하기 때문에 마왕은 내로라하는 마력을 지닌 가문의 악마들과 아이를 많이 낳았다. 언제 어디서 강한 악마가 태어날지 모르니 번식 능력이 다할 때까지 아이는 부지런히 가져야 했다. 이 또한 마왕이 소화해야 할 업무 중 하나였다.

토라오는 그런 악마의 생태에 대해 찔막하게 설명하며 미나미를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섰다.

“악마의 마력은 업보에 비례해. 그만큼 나는 형제들에 비하면 좀 모자란 편이고.”

아, 그렇다고 하급 악마 수준은 아니니까 걱정 마. 웬만한 놈들은 처리할 수 있어, 타고나기로 마력통 자체가 컸거든. 토라오는 업보를 쌓았으나 네가 싫어할 만한 ‘더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는 어필도 잊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운이 나쁘면 다른 악마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단 생각에 등골이 오싹하다. 그의 말마따나 업보가 적은 왕족이라면 여기서는 약한 쪽에 속할 테니, 위험한 순간은 분명히 찾아올 것이란 꺼림칙한 확신이 들었다.

“전 안전한가요?”

“걱정 마.”

그들이 인간인 미나미를 본다면 어떤 시비를 걸진 안 봐도 뻔했다. 당장 삼켜버리거나 종으로 쓰거나 하겠지. 위험한 상황이 없을 수 없기에, 토라오는 그와 쓸 공간을 따로 마련해두었더랬다.

“이래 봬도 마력 구사 능력은 상위 1%에 드는 남자야.”

그러니까 안심해. 그의 결연한 눈빛에 가슴이 울렁였다. 참 많이도 보아온 눈동자다. 응원해주고 걱정해주던 눈빛. 미나미는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이 참 좋았다.

‘다른 사람 비춰보는 건 실례잖아.’

스스로를 향해 작은 질책이 쏟아진다. 아주 잠깐이지만 일그러진 표정을 본 토라오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

 

새까만 벽면엔 금색 도료를 섞은 붉은 장식이 잔뜩이다. 얼핏 보면 핏자국을 퍼뜨린 듯한 모양새에 깜짝 놀랐지만, 자세히 보니 아는 꽃―피안화―이였다. 인간 세계와는 전혀 다른 식물들이 살지 않을까 싶었는데, 같은 종도 있구나… 마치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머리 위가 높고 광활한 길을 한참 걷던 미나미는 이내 백금으로 장식된 긴 복도에 도달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리에 아득해진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렸다.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복장을 신경 쓴 탓에 몸은 불편했고, 발바닥은 오래전에 짓무른 듯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새 구두 말고 늘 신던 거로 골랐을 텐데. 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

한참 미나미를 살펴보던 토라오는 그를 번쩍 안아 올렸다. 아프면 말을 하지 그랬어, 핀잔 섞인 목소리에 미나미는 눈만 깜빡였다. 평소라면 괜찮다며 내려갔겠지만, 진심으로 걷기 싫었기에 잠자코 매달렸다.

“날아서 가면 편하지 않아요?”

“그랬다간 위치를 들킬 것 같길래.”

날개를 펴는 것도 마력이 들어, 악마들의 청력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마력을 쓰면 다 감지해내거든. 그런 존재들이야.

“그럼 저는…”

인간이 마력의 근원이란 소리를 들었더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마계로 이동하면서 인간의 육신을 전부 도려낸 상태였기에 미나미는 실체 없는 영혼, 즉 마력 그 자체였다.

“괜찮아.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저도 이걸 다룰 수 있나요?”

“응, 너 이미 인간계에서도 썼는데?”

마력도 쓸 줄 모르는 인간하고 ‘그런 계약’은 불가능해. 전적으로 모든 의식 절차에서 비롯되는 당연한 반응인 줄 알았는데, 이마저도 마력을 사용할 줄 모르면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사용법은 익히는 편이 좋겠다. 미나미가 제 손을 내려다보며 말하자 토라오는 그를 고쳐 안으며 대답했다.

“물론 가르칠 거야. 이곳에서 사는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줄 거고.”

이윽고 도달한 커다란 문은 금장식으로 뒤덮여 휘황찬란했다. 누가 봐도 ‘귀한 것이 있습니다’하고 알리는 듯했다. 미나미는 문과 토라오를 번갈아 봤다.

“왜?”

“정말 여기서 지낸다고요?”

“응.”

우리가 아니면 이 문은 다른 곳으로 연결되니까 걱정 마. 토라오는 씩 웃으며 문을 열었다.

침착한 색깔의 벽지와 검붉은 카페트, 엔티크한 분위기의 가구와 커튼이 드리워진 침대… 중세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디자인의 물건이 가득하자 마치 촬영장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미나미는 토라오의 품에서 내리자마자 구두를 벗었다.

“발 봐봐.”

“됐어요.”

미나미는 얼른 뒤로 빠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구두에 오래 갇힌 발을 그의 앞에 보일 수 있겠나. 민망해진 그는 욕실로 보이는 새하얀 문을 턱짓했다.

“좀 쓸게요.”

“얼마든지.”

구두를 내려놓고 들어가자 푸른 타일이 깔린 공간이 드러난다. 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욕탕 안에는 분수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웬만한 재벌 집에도 이런 욕실은 없지 않나, 발만 씻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온몸이 탕에 들어가자고 아우성쳤다.

“목욕하고 나와.”

옷은 준비해줄게. 미나미는 제 뒤에 선 토라오의 옷차림을 슬쩍 훑었다.

“같은 거로 주시나요?”

“이런 거 말고.”

누구 미치게 할 일 있어? 토라오는 안심하라며 문을 닫아주었다.

찝찝해진 정장을 전부 벗어 던진 미나미는 샤워 후 탕에 들어갔다. 적당한 온도의 물은 별가루라도 부수어 넣은 듯 자잘하게 반짝였다. 마치 오팔의 표면처럼 알록달록 빛나는 수면을 오래 보고 있자 어쩐지 눈이 맑아지는 듯했다.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동안의 일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던 그는 물로 얼굴을 적셨다. 이제 다 끝났구나, 작곡가로서의 나도 아이돌로서의 나도 모두 끝이구나… 허탈함과 뒤섞긴 피로는 하품이 되어 쏟아졌다.

 

*

 

얼마나 지났을까, 미나미는 폭신한 감각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그러게요.”

거기서 잠들다니. 와중에 온몸이 가볍고 개운해 표정은 밝았다.

“많이 좋아졌지?”

토라오는 비척이며 일어나는 미나미의 어깨를 감싸 부축했다.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과도한 친절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자 토라오도 따라 웃었다.

“마력 순환을 돕는 물이야. 넌 이제 막 육체와 분리된 상태라 자주 들어가는 게 좋아. 그래야 좀 정제되고 익숙해져서 덜 피곤할 거야.”

그래서 그렇게 피곤했나, 좀 과하다는 생각은 했는데. 미나미는 제 몸을 감싸고 있는 하얀 의복을 보곤 잠시 침묵했다.

“당신이 입혔어요?”

“눈 감고 했어, 진짜.”

“뭘 굳이 감고 해요, 남자끼린데.”

“뭐?”

장난기 가득한 말에 토라오는 피식거렸다. 너 지금 나 도발해? 다시 벗겼다가 입혀줄까? 그건 정말 변태 같아서 싫어요. 웃음이 섞인 목소리는 예쁘게도 흩어졌다.

보드라운 옷은 실크와 같은 촉감이었다. 피부를 감싼 느낌도 좋고 과하지 않은 레이스 장식도 꽤 마음에 들었다. 중세 귀족이 입을 법한 디자인의 의상은 화려한 모양새와 달리 아주 편했다.

“더 잘래?”

“잠들면 뭐 하시려고요.”

“나쁜 짓”

“안돼요.”

장단 맞는 장난에 토라오는 큭큭대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피부 없는 영혼에서는 맑고 시원한 냄새가 났다. 파도의 차가운 물보라, 내리쬐는 태양, 두껍고 보송한 구름의 부유… 생각나는 것들을 곱씹던 토라오는 천천히 그에게서 벗어났다.

“머리 정도는 쓰다듬어주지 그래.”

“서운해요?”

“어.”

퉁명스러운 말투에 미나미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장은 밀어내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조급한 마음은 가눠지지 못하고 휘청였다.

미나미는 그의 표정을 가만히 살폈다. 붉은 눈동자는 침잠하고 입술은 불퉁하다. 아이처럼 투명한 질투는 이곳에 없는 존재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미나미는 가만히 입술만 달싹였다. 미안해요. 그 한 마디를 해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솔직히 진심을 담을 자신은 없었다.

“기다려줘요.”

그래서 다른 말을 꺼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끝난 일이다. 접을 수 없어 내버려 둔 마음을 누군가가 탐낼 줄은 몰랐다. 미나미는 미도 토라오가 자신의 마지막 사랑으로 영원할 줄 알았으니까. 그렇게 조용히 퇴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계의 존재가 그를 또 다른 무대에 올렸다. 배경도 등장인물도 장르도 달라진 무대에서 ‘미도 토라오’ 역할을 맡은 배우 ‘악마 토라오’가 등장했다. ‘내 역할 보이지? 그러니까 너는 나를 사랑하면 돼.’ 곡해된 마음은 그의 외침을 일종의 강요로 해석했다.

당장 그를 사랑하는 ‘연기’는 할 수 있었지만, 미나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던 사람과 똑같은 얼굴―물론 두 사람이 하나란 사실을 숙지하고 있음에도 별개의 존재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을 한 악마에게 몰입하는 일은 분명 쉽겠지만, 결국은 상처받을 거란 확신이 마음을 차갑게 굳혀냈다.

“손은 잡을 거야.”

“네.”

“내 마음대로 껴안을거고.”

토라오는 미나미의 손을 깍지 껴 잡으며 말을 이었다. 시선은 그가 덮은 이불 위로 떨어졌다.

“뽀뽀도―”

“입은 안돼요.”

“알았어.”

다 안된다고 해야 하는데… 정염으로 이글거리는 눈과 마주치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하여간 저 얼굴이 문제다. 저 얼굴 너머에 담겨버린 감정이 자꾸만 그를 약하게 만들었다.

“당신은 얼굴이 무기네요.”

“나도 알아.”

토라오는 툴툴대면서도 미나미의 손을 부지런히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마디, 관절, 손톱까지 꼼꼼히도 조물거린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손을 빼내려고 하자 토라오는 얼른 깍지를 껴 잡았다.

“제대로 붙었나 확인했어.”

“뭐가요?”

“여기로 올 때 너한테 ‘장막’을 씌웠거든.”

그게 있어야 영혼이 흩어지지 않고 모여있게 돼. 물론 육신이 소멸할 때의 고통도 없고… 이미 존재에서 지워진 시점에서 몸은 사라진 줄 알았는데, 미나미는 잘 모르겠다는 눈으로 토라오를 바라보았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겠지.”

아무튼, 지금은 아까 말한 대로 자주 목욕하고 푹 쉬어. 일주일이면 제대로 안정될 거야. 그러니까 대충… 인공 피부? 정도로 알고 있으면 돼. 미나미는 잠자코 끄덕였다.

인간일 때와 달라진 게 있나? 토라오에게 잡힌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해도 미나미는 그 어떤 위화감도 발견하지 못했다. 방법이 없다. 그냥 그런 상태라고 하니 그런 줄로 알아야지, 이어지던 생각은 토라오가 손을 놓자 끊어졌다.

“잠깐 나갔다 올게.”

필요한 건 없어? 토라오는 커다란 옷장에서 붉은 브로치가 달린 와이셔츠와 정장 바지를 꺼내 입으며 물었다.

“이곳에 관한 책이 있다면 하나 구해주세요.”

“그러지. 다른 건?”

“……빨리 오세요.”

아무래도 혼자 있기 불안해서 한 소리지만, 토라오의 귀엔 다르게 들린 모양이다. 단추도 잠그다 말고 가슴팍을 훤히 드러내고 다가온 그는 미나미를 있는 힘껏 끌어안더니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럴게.”

미나미는 벌어진 옷을 제대로 여며주곤 비뚤어진 브로치도 바로 채워줬다. 보아하니 어디 높으신 분이라도 만나러 가는 행색이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애써 말을 삼켰다.

“다녀와요.”

 

 

2

 

참석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왕이 마련한 자리이기에 그럴 수 없었다. 시끌벅적한 연회장에 들어간 토라오는 출구와 최대한 가까운 자리를 골라 앉았다. 어림잡아도 이백은 더 되는 인원에 뒤섞인 마기魔氣의 흐름은 상당히 불쾌했다.

“토라오, 너 인간 데려왔다고 들었는데.”

옆 의자를 빼며 앉는 악마는 그의 서른여덟 번째 형이었다.

“마음에 들었나 봐?”

건너편에 앉은 악마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세 번째 누나 우발은 끝이 풍성한 꼬리를 흔들며 놀리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한테 관심이 참 많네.”

“그럼~ 우리 중에 인간 노예 안 부리는 악마가 너 말고 또 있니? 오세 좀 봐, 태어난 지 고작 10년 된 애도 인간을 데려와서 키우고 있다는데.”

어느 나라 대통령이래. 말소리가 들렸는지 작은 악마는 제 키보다 두 배는 더 큰 꼬리를 위아래로 통통 휘둘렀다. 한껏 들뜬 표정으로 이쪽을 힐끗거리자 우발은 킥킥대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언제 보여줄 거야? 아까 광장 놈들이 예쁘다고 그러던데.”

역시 밤시중이냐? 서른여덟 번째 형은 음흉한 얼굴을 대뜸 들이밀었다.

“얼굴 치워, 살로스.”

“그~렇게 밤놀이 좋아하던 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걸 다 관둬버리니까 내가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살로스의 말에 우발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 그때 얘 고자 된 줄 알고 물어봤잖아!”

우발은 시시덕대며 코앞에 놓인 육포를 들고 흔들었다.

“너무 놀리는 거 아냐?”

“안 보여주니까 궁금해서 그러지!”

나 너무 기대돼, 토라오. 네가 왜 기대해? 그는 세로로 찢어진 노란 동공을 바지런히 움직였다. 입술 사이로 낙타처럼 크고 두꺼운 혀가 흉하게 늘어졌다.

“핥아보고 싶엉.”

“개수작 부리네.”

살로스의 말이 맞았다. 세 번째 누나 우발, 그는 이곳에서 악마들이 데려온 인간을 가장 많이 빼앗은 악마였다. 아직 마력이 안정되지 않은 인간만 골라 지겹게 따라다니고 핥아대다 그대로 삼켜버린 전적만 수두룩하다. 살로스 또한 우발에게 인간을 빼앗긴 적이 있었기에 인상을 와그작 구겼다.

사실 ‘인간 뺏기’란 그리 흔한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모두가 악마인데 당한 놈이 머저리고 바보지, 먹은 놈은 잘못이 없다. 토라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마력의 색깔과 파형波形. 분명 상위 마족인 형제들이라면 그걸 알아차리고 탐낼 테니까.

문득 혼자 내버려 둔 미나미가 걱정이다. 그가 부탁한 책이니 되도록 제 손으로 골라가고 싶었지만 급한 마음이 먼저였다. 그는 제 뒤를 서성이던 님프를 불러 마계에 온 인간이 읽기 좋은 책을 골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부우우우우우―

여러 개의 나팔 소리에 장내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깐족거리던 우발도, 그런 우발을 죽어라 쏘아보던 살로스도 서로에게 향하던 적의를 얼른 거두었다.

마계 주인의 행차였다. 거구의 몸을 이끌며 들어온 마왕은 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의자에 앉았다. 얼굴은 검은 면포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 아래서 희번뜩한 눈동자는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내 그의 곁으로 수십 명의 상급 악마들이 줄을 지어 섰고, 엄숙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지금부터 차기 마왕을 선출하는 경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조만간 경연이 있을 거란 소문이 분분했기에 무작정 시작된 경연에 당황하는 이는 없었다. 연회장에 모인 모든 악마는 상급 악마가 거대한 두루마리를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형제들의 이름이 들리고 그 뒤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가문의 이름이 붙었다. 토라오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상입니다.”

상급 악마가 두루마리를 닫자 마왕은 제 자식들을 한번 훑어보곤 말없이 퇴장했다. 괴기스러운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고 누군가는 화를 내며 잔을 집어던졌다.

“왜 하필 체페 가문이야!”

“내가 그 테이즈랑 약혼이라니!”

“이건 불공평해!!”

토라오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발치에 무언가가 걸렸다. 발라당 나동그라진 님프는 헥헥대며 책더미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하나만 가져와도 괜찮은데. 눈치를 많이 보는 놈인 줄 알았으면 좀 더 정확히 알려줄 걸 그랬다.

[ 악마와 인간의 역사 ]

[ 최고급 식재료 ]

[ 인간과 악마가 ♡♡하기 위한 최고의 ♡♡법 ]

“…….”

님프는 똘망한 눈으로 토라오를 올려보았다. 제 딴엔 고르고 골라 가져온 책일 테지, 만연한 편견을 상기한 그는 역사책을 제외한 나머지 두 권을 내밀었다.

“이건 됐어.”

님프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책을 쥐더니 뒤로 물러났다.

“잠깐만.”

……아까 그 책. 아니, 그거 말고. 어, 그거. 그건 다시 줘. 토라오는 머쓱하게 웃으며 책 하나를 돌려받았다. 수고했어. 님프는 얼른 인사를 올리더니 호다닥 사라졌다.

“뭐야 그건?”

“관심 꺼.”

우발은 묘한 표정을 하고 있는 토라오를 보곤 턱을 괴고 웃었다.

“토라오, 난 네가 부러워.”

“왜.”

“그야 레테잖아?”

뭘 되묻냐는 양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다. 어휴, 재수 없어. 차라리 내가 그 집 아가씨랑 이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우발은 툴툴거리며 붉은 와인이 담긴 잔에 손가락을 넣고 휘휘 저었다.

“어차피 기권할 거야.”

여기에 더 있어봤자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릴 뿐이다. 토라오는 무어라 더 떠드는 우발의 말을 무시한 채 시끄러운 연회장을 떠났다.

 

*

 

미나미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방 높이가 엄청나서 그런지 홀로 거대한 저택에 갇힌 것 같았다. 이대로 다른 악마를 만나지만 않으면 쭉 인간계로 착각하고 살지 않을까? 여차하면 드라마 촬영지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특이하게 생긴 새가 지나갔다. 막대기처럼 얇은 몸통 아래로 공작의 것과 닮은 꼬리가 달린 새는 깃이 새카맸다. 짧은 부리가 크게 열리면서 악을 썼는데, 머리가 다 울릴 정도의 소음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불편한 것투성이였다. 마음은 불편했고 어째서인지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이렇게까지 부지해야 할 목숨이었나, 계약 덕분에 무사한 영혼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허탈함은 토라오가 듣는다면 몹시 서운해할 말로 변해 울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당장 사랑하는 사람의 결혼식을 지켜보고 오는 길이다. 남 좋을 짓만 골라서 해주고, 정작 본인은 그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희생의 보상은 ‘그의 행복’이었다. 인과를 뒤집어 생각하면서까지 자신을 다독이려고 했지만, 혼자 남았기 때문일까. 올라온 설움에 눈시울이 붉어지려던 찰나―

“―!”

거대한 새, 아니, 박쥐의 날개가 창문을 가득 채웠다. 머리는 독수리에 염소의 뿔을 하고 네 개의 발이 달린 짐승이 콧김을 뿜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마어마한 기세로 뿜어지는 중압감에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렸다.

“아, 미안. 깜빡했네.”

창문을 뚫고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는 날개로 제 몸을 감싸 가리더니 곧 인간의 형태로 나타났다. 피부가 새하얗고 검은 머리카락이 발목까지 길게 내려온 곱상한 인상의 사내였다. 미나미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남자의 빨간 눈동자가 창문을 훑었다. 조심스레 두드려보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한참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곧 짧게 탄식했다.

“다른 공간으로 가는 마법이구나.”

어쩐지 기척이 너무 흐리다 싶더니만. 남자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누구세요?”

미나미는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에게 말을 걸었다.

“토라오의 형.”

형제들에게 들키지 않겠다고 일부러 그 긴 복도를 걸어서 왔건만 대체 여길 어떻게, 미나미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를 만나러 왔나요.”

“아니, 너한테 알려줄 게 있어서.”

남자는 킥킥대며 창가에 가까이 붙었다.

“손님인데, 문 안 열어줄 거야?”

네가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남자는 창문을 만지며 말을 이었다. 열어줬다가 무슨 일을 당하려고? 미나미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노려봤다.

“표정 재밌네. 너 이름이 뭐야?”

“글쎄요.”

“나는 나자르.”

나자르. 기억했다. 미나미는 토라오가 돌아오면 곧장 그에 대해 물을 생각이었다.

“여기 안 무서워?”

“무섭죠.”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분도 계시고. 살짝 삐딱하게 기울어진 고개는 심기가 불편하단 걸 여과 없이 드러냈다. 나자르는 뻔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악마에게 귀속이라…”

나자르는 미나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장막 아래로 미세한 마력의 흐름이 보인다. 알록달록한 파형은 정적으로 흐르다가도 꼭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너 속았어.”

“네?”

“말 그대로야.”

잠자코 있었으면 넌 네가 사랑하던 남자랑 이어질 운명이었어. 붉은실 봤지? 그게 너랑 이어져 있었잖아. …맞는 말이다. 자를 적에도 망설였으니까. 하지만 미나미는 ‘자신이 자르게 되는 것’마저도 하나의 운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지금의 미도 토라오의 곁엔 다른 여자가 있고, 나츠메 미나미는 없던 인물이 되어버렸으니까.

“참, 그놈의 운명. ‘이럴 운명이었다’고 퉁치면 뭐든지 말이 다 되는 마법의 단어지.”

토라오가 말한 멍청한 운명론에 속아 여기까지 온 인간이 몇 명인지 알아? 너도 똑같아, 결국 버려질 거야. 나자르는 눈썹을 내리며 미나미를 동정했다.

“버려지든 먹히든, 당신하곤 아무 상관없는 일이에요.”

“상관있는데? 내가 너한테 관심 있거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대체 언제 봤다고…”

“광장에서. 응, 릴리트가 내려온 줄 알았어.”

“저 남잔데요.”

“그게 왜?”

여기서 성별은 의미 없는 개념이야. 나자르는 창문에 바짝 붙어 미나미를 바라보았다. 표정엔 황홀이 가득하다. 마치 귀한 보석이라

도 발견한 것마냥 들뜬 눈은 상대의 기분도 모르고 헤죽헤죽 휘어졌다.

* 릴리트: 서큐버스의 기원. 밤의 여왕이라고도 불린다.

미도 토라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좋아한다는 악마를 따라 마계로 간 남자. 그는 여태 그 악마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좋아한다고 들이대는 악마가 나타났다.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저 귀찮고 꺼림칙하고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토라오가 너 데리고 있기는, 참 힘들겠다.”

파형이 제멋대로네. 알 수 없는 말에 미나미는 되물었다.

“파형?”

“네 마력.”

흐름이 너무 커. 최상급 마법이라지만 이대로면 우리 막내도 눈치챌 것 같은데? 나자르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가 싶더니 아, 하며 머리카락에 듬성듬성 돋아난 까만 깃털을 뽑았다.

“자, 받아.”

나자르는 창문 아래로 깃털을 끼웠지만, 끝은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지금 깃털 끝은 아마 다른 방 창문 아래로 갔을 테지, 미나미는 절반이 뚝 잘린 채 끼워진 깃털이 어쩐지 징그럽게 느껴졌다.

“빨리 가져가, 다른 놈이 집으면 안 돼.”

호들갑을 떠는 통에 미나미는 창문을 밀어 떨어지려는 깃털을 집었다. 나자르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그게 네 기척을 숨겨줄 거야.”

그럼 너도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고, 이 결계도 더 튼튼해지겠지. 사실 이공간으로 가는 마법을 걸어놨다고 해도 공략법이 아주 없진 않거든. 그러니까 그거 가지고 있어, 도움이 될 거야. 미나미는 윤기가 흐르는 까만 깃털을 가만히 살폈다.

“너한테 점수 따려고 주는 거다?”

싫으면 버려도 돼, 근데 이왕이면 써보고 버려.

안 그래도 이것저것 다 불안하던 찰나였다. 미나미는 잠시 고민하다 깃털을 옷 안 주머니에 넣었다.

“효력은 그렇게 길지 않아, 그러니 그 전에 마법을 좀 배워둬.”

아, 참고로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해야 효과가 있어. 나야 물건의 주인이니 상관없지만, 미나미 넌 보유자니까 이 이상 존재가 알려지면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지니까 명심해.

“제 이름 알고 계셨네요.”

“어이쿠, 미안. 가야겠네.”

나자르는 얼른 창문에서 멀어지며 웃었다. 다음에 또 봐, 목소리는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

 

“응? 마법?”

나자르가 떠나고 10분 정도 지났을까, 토라오가 오자마자 미나미는 인사도 생략하고 그에게 마법을 가르쳐달라 부탁했다.

“기척을 지우는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바꿔 말하면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일까, 내가 강했다면 미나미를 데리고 밖을 돌아다니는 일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위신을 세우려면 그만한 업보를 쌓아야 했기에 토라오는 미나미의 존재를 인식한 후론 악행을 포기했더랬다. 이왕 만나는 거, 차라리 대 악마가 되어서 나타날 걸 그랬나. 손바닥만 한 후회가 입에 걸린다.

“저도 절 지킬 능력은 있어야죠.”

나츠메 미나미는 누군가에게 기대기보단 스스로 해결하는 쪽에 몸이 익어있었다. 그걸 잘 알기에 토라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일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빨리하는 게 좋잖아요.”

“…그래, 그럼 해보자. 씻을 시간은 줄 거지?”

아, 그리고 구해달라고 부탁한 거. 토라오는 님프에게 받은 책―악마와 인간의 역사―을 미나미에게 건넸다. 알 수 없는 재질의 가죽으로 된 검은 책은 수상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기다리는 동안 읽어볼까, 첫 장을 펼치자 알 수 없는 활자가 쏟아졌다. 그림처럼 생긴 글자는 내용 파악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미나미는 수록된 삽화를 보며 내용을 유추했다. 악마에게 손이 묶여 끌려가는 인간, 불에 태워지고 있는 인간, 처참하게 조각난 채 악마에게 먹히고 있는 인간…

‘취급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건 노예 이하잖아.’

어쩌면 영혼을 먹히는 편이 나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마계는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그런 정갈한 공간이 아니었다. 무법지대, 같은 악마도 다른 악마를 견제하고 두려워하며 사는 불안의 공간… 생각의 꼬리가 길어지자 시야가 뿌옇다. 책을 넘기는 손이 멈춘 지 얼마나 지났을까, 목욕을 마친 토라오가 머리를 털며 나왔다.

허리에 수건 하나만 두르고 나온 그의 입꼬리는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훤한 상체야 많이 봐왔지만, 젖은 몸은 또 처음이었다. 미나미는 제 반응을 바라는 노골적인 행동에 그에게서―일부러―시선을 떼지 않았다.

“뭘 그렇게 쳐다봐.”

“보기 좋아서요.”

한껏 들뜬 목소리가 티 나게 묻자 미나미는 짧게 웃었다. 갓 스물이 된 청년이 누구 하나 꼬셔보겠다고 어쭙잖게 구는 것만 같아 우스웠다만 어쨌거나 효과는 아주 없지 않았다.

살짝, 아주 살짝 설렜다. 탄탄하게 잡힌 근육, 넓은 어깨와 가슴… 만져보고 싶다는 욕구가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토라오는 맨몸 그대로 미나미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왕위 계승 일로 복잡했던 머릿속도, 무거웠던 마음도 차분해진다.

토라오의 시선이 미나미의 손 아래에 깔린 책으로 내려간다. 책은 읽어봤어? 미나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림만 봤어요. 글자를 못 읽겠어서.”

“아.”

잠시만, 이걸 준다는 걸 깜빡했네. 토라오는 허공에 대고 손짓하더니 알이 동그란 안경을 소환했다.

“써봐, 이제 읽어질 거야.”

이대로 책을 읽다가 잠들려나, 그럼 종일 허리 끌어안고 있어야지. 그런 낙관적인 생각으로 히죽거리고 있는데―

“고마워요.”

미나미는 책을 덮었다.

“안 읽어?”

“내일 읽을게요.”

책과 안경은 침대 옆 협탁에 올라갔다. 책이야 나중에 읽어도 그만이다. 지금 당장은 자신을 보호할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가르쳐 주세요.”

“뭐를?”

“마법이요.”

야릇한 농담이라도 던지려던 찰나 얄짤없이 말을 막아버리는 미나미의 단호함에 멋쩍은 웃음이 샌다. 빨리 뭐라도 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막 마계로 넘어와 불안정한 상태에서 마법을 공부하는 건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지만, 상대는 나츠메 미나미였다.

“미나미, 내일 하자. 지금 네 파형으로는 컨트롤이 힘들 거야.”

“그럼 아주 쉬운 것도 안 될까요?”

그래야 당신 없을 시간에 연습하면서 시간을 보낼 거 아니에요. 미나미는 그가 내일도 나갈 것이란 걸 상정하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토라오는 내일도 경연에 참석해야 했으니까. 그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그가 허공에 대고 무언갈 그리자 이번엔 새하얀 카드 뭉치가 나타났다. 얼핏 보기엔 아주 평범한 카드였다.

“인간계에서 매개체로 카드를 썼으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해보자고.”

확실히 친숙한 소재였다. 미나미는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카드를 이리저리 돌려봤다.

“가볍게 ‘오늘의 운세’로 시작해볼까.”

토라오가 선택한 마법은 마법진을 그려 발동하는 ‘마법진법’이였다. 술사가 마력을 방출해 마법진을 그리고 주문을 외우면 되는 간단한 마법이지만, 형태가 복잡할수록 상위 마법에 속했다. 그리고 그 마법진법 중에서 가장 쉬운 기초 마법진이 바로 ‘오늘의 운세’였다.

미나미는 손끝으로 마력을 방출하며 그가 알려주는 대로 카드 위에 그림을 그렸다. 제 입으로 가볍다고는 했다만, 이 정도로 잘 따라올 줄은 몰랐다. 미나미는 한 시간 만에 마력을 출력했고, 30분 만에 마법진까지 그렸다.

“이다음엔 어떻게 하면 돼요?”

“주문을 외우면 돼.”

하지만 발동한 순간엔 스파크가 튀니까 카드에 손은 대지 말고. 미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가 알려준 주문을 외웠다.

 

[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질 거에요. ]

 

겨우 이만한 글자를 내는데 땀이 이렇게… 그는 벅찬 숨을 고르며 이마에 맺힌 땀을 쓸었다. 어느덧 보라색으로 변한 카드에 적힌 ‘오늘의 운세’는 너무도 뻔한 문구였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쭉 그러겠지, 처음 해봐서 그런 걸까. 조금 멋쩍었지만 당장은 뿌듯한 게 더 컸다.

“잘했어, 갈고 닦으면 내용은 더 좋아질 거야.”

“기척을 지우는 마법은요?”

“그건 상위 마법이야, 지금 배우면 너 이틀은 못 일어날걸.”

그럼 나 외로워서 어떡해? 토라오는 장난스럽게 말하며 미나미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빼앗았다.

“내일은 배울 수 있어요?”

“대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목욕해.”

“그럴게요.”

토라오는 그의 몸 안을 요동치는 마력을 경이롭게 훑었다. 작은 몸을 제 품에 끼워 넣자 미나미는 또 잠자코 있었다. 밀어내지 않았고, 그렇다고 마주 안지도 않았다. 심술을 내는 대신 토라오는 그를 더 꼭 끌어안았다. 좋아해. 좋아해, 미나미. 달큰한 말은 순수한 욕망이었다.

미나미로서는 곤란했다. 밀어내고 거부하는 게 맞지만 막상 그러고 싶진 않았다. 이대로 쭉 사랑받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이기적인 마음은 눈을 감게 했고, 그에게 기대게 했다. 참 나빴다. 참 못됐다. 악마는 내가 아닐까. 소란스럽게 머리를 굴리던 그는 한참을 달싹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응, 말해봐.”

“단순히 제가 당신의 운명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운명이기 때문에.’ 토라오는 자신이 보아왔던 수많은 인연을 떠올렸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시간선의 파편 속에서 나츠메 미나미라는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게 짝이 될 미나미가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는 운명의 여신의 말 때문에 모든 시간선을 뒤졌고, 끝내 그를 찾아냈다.

‘당신은 ‘지금’의 나를 잘 모를 텐데 어떻게 사랑한다는 거예요?’ 토라오가 파악한 질문의 본질은 그러했다. 그의 마음을 얻는 일이 생각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일임을 깨달은 토라오는 입을 다물었다.

나츠메 미나미가 사랑했던 토라오는 이곳에 없다. 아무리 그가 저와 같은 존재라 해도, 시선은 엇나가기만 할 것이다.

토라오는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3

나름 ‘첫날밤’이니 이렇다 할 일은 없더라도 불이 붙어 야단일 줄 알았다. 적어도 같이 투닥거리고 놀다가 잠들겠지,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토라오는 피로감을 느꼈다.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눈을 감은 채 고민하던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장 확실한 것 하나를 꼽았다.

미나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문장은 가시가 되어 심장에 박혔다. 신중해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직 ‘그곳’에 남겨둔 사랑이 생각나겠지.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너 또한 ‘나’를 사랑하느라 아직 힘이 들겠지.

토라오는 잠든 미나미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운명을 믿고 사랑했다고 하기에도, 그게 아니라고 답하기에도 애매한 구석은 있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쥐어 짜낸 대답이 행여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웠다.

“……나는 그냥 네가 좋아.”

더 가까워지고 싶어.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어. 더 많이 만지고 싶고 더 많이 안고 싶어. 그게 다야. 포장할 줄 몰라 조용히 흘려보낸 진심은 쏟아지는 달빛에 부서졌다.

 

*

 

다음 날, 미나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땐 토라오는 없었다. 바빠서 그런 건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려고 그런 건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지만, 미나미는 잠자코 그가 시키는 대로 목욕을 하고 책을 읽었으며 자잘하게 마법을 연습했다.

실은 그가 어떤 대답을 해도 상관없었다. 그 사랑의 형태와 원천이 궁금했을 뿐이다. 당장 미나미도 미도 토라오가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과 닮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다. 처음엔 취향의 용모에 마음이 동했지만, 알면 알수록 ‘그’라는 사람 자체에 빠져들었다. 필요한 곳을 정확히 찌르는 목소리. 곧잘 내밀던 손. 자각하지 못하고 나오는 배려… 그저 늘어둘 뿐인데 망가뜨리지 못한 감정이 가슴을 찢는다. 울렁거리는 감각에 문득 비참해지자 또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졌다.

미나미는 하얀 카드 위에 호랑이를 그렸다. 선이 굵고 삐뚤삐뚤한 그림의 호랑이는 추상화에 가까웠다. 이런 와중에도 센베에 매실액으로 호랑이를 그려주던 미도 토라오가 떠올라 곤란했다. 자신이 마계로 올 적에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잊혀진 것처럼 제 기억도 도려내고 싶었다. 자신을 추억하지도 않을 사람을 계속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기엔, 스스로가 너무 불쌍했다.

미나미는 품에 넣어두었던 나자르의 깃털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다면 창문을 열어놔도 문제없지 않을까. 차마 복도로 나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가장 작은 창문―제 키의 반만한 크기였다―을 살짝 밀었다.

달큰한 공기가 확 불어온다. 조용한 바깥을 내려다보면서도 긴장을 지울 수 없었다. 30초 정도 지났을까, 미나미는 견디지 못하고 얼른 문을 닫아버렸다.

“열어놔도 괜찮은데.”

“!”

언제 왔어요? 좀 전에. 나자르는 미나미가 열었던 창문을 아쉽다는 듯 바라봤다.

“기척을 지워준다더니 당신에겐 효과가 없나 보네요.”

“당연하지, 그걸 만든 사람이 나니까.”

산책이라도 가지 그래? 여차하면 내가 동행해줄까? 나자르는 방싯방싯 웃으며 태평하게 말했다.

“됐어요, 마법을 배우고 나면 그때 나갈래요.”

“토라오랑?”

“네.”

대답은 한숨에 가까웠다. 나자르는 그걸 놓치지 않고 창문에 바짝 붙었다.

“반응 보니 얘기 들었나 보네.”

“무슨 얘기요.”

“말했잖아.”

넌 속은 거라고. 간밤에 그가 침묵했던 일이 겹치자 입이 다물렸다.

“걔 내일 약혼해.”

약혼이라니? 일순 커져 버린 눈동자에 나자르는 쯧쯧 혀를 찼다.

“왕위 계승식이 시작됐거든.”

우리 형제들은 모두 특정 가문의 짝과 이어져. 물론 몇 명은 자율권을 갖고 자기 마음대로 짝을 고를 수 있게 하지만, 대부분은 그래. 나자르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가문과 약혼해야만 계승식에 참가할 자격을 얻게 되는 거지.”

마왕이 될 자격을 갖추고 나면, 아버지의 심장을 우리가 갖게 되는 거야. 어찌 보면 그 심장을 견딜 자격이 있는 악마를 고르기 위해서 이런 경연을 여신 거고. ―왕위 계승식이라니, 처음 듣는 내용에 미나미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마왕이 되기 위해서 누군가랑 약혼한다, 그거죠?”

“응.”

“그런 거면…”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사랑해서도 아니고 계승식에 참석할 자격 때문인 거면, 아마도. 침착한 머릿속과 달리 기분은 엉망이었다. 말이라도 해주지,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 간밤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한 토라오가 떠오르자 말이 끊겼다.

“그럼 당신도 지금 경연에 참석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아~ 응, 그래야 돼.”

나자르는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경연이라기보단 교육이 있었거든, 지루해서 몰래 나왔지.”

“이러다 들키면 큰일 나지 않아요?”

“내 걱정 해주는 거야?”

창문이 야속하네, 안아주고 싶은데. 됐어요. 미나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와 그분의 사이를 어떻게든 갈라내고 싶으신가 봐요.”

그런 치사한 짓을 하지 않아도 사랑은 쟁취할 수 있어요. 제 입으로 하기엔 참 민망한 말이었다만 미나미는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제 마음에 들고 싶으면 그만한 행동을 하셔야죠.”

나자르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내가 인간에게 설교를 듣게 될 줄이야, 그는 제 이마를 탁탁 치더니 곧 아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 짓 않고도 쟁취할 수 있지, 당연히. 나자르는 내내 방싯거렸다.

“곧 쟁취하게 될 거야.”

“자신감 하나는 인정할게요.”

“그럼 나한테 오는 거야?”

“아니요.”

미나미는 그만 가라는 듯 창문을 툭툭 두드렸다. 귀찮기도 했지만, 그와는 더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두려움도 한몫했다. 표정엔 드러나지 않은 감정이 장막 아래를 유유히 배회했다.

 

*

 

미나미는 더더욱 마법 공부에 매진했고 토라오는 말없이 그가 원하는 책을 갖다 주거나 마법을 가르쳤다. 마법진을 카드에 옮기고 구체화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던 미나미는 머잖아 보랏빛 불꽃까지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게 네가 가진 마력의 기본 형태야.”

미나미는 온도 없는 불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기본 형상을 갖추기까지 3일이 걸렸고 침묵 또한 그만큼 지속되었다. 불편한 기류는 부자연스러운 이음새를 가진 경첩처럼 삐걱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생각인 거지?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미나미는 어깨를 내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왜 말을 안 해요?”

그는 대뜸 토라오의 손목을 잡아챘다. 한 손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두꺼운 손목을 쥐는 손가락엔 아무런 힘도 없었다.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본다. 미나미는 잠시 주저하다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기댔다.

“……무슨 말.”

“이것저것 다요.”

당신 약혼한다면서요. 아니, 이미 했겠군요. 미나미의 발설에 토라오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 그걸 어떻게…”

“…그게.”

나자르가 알려줬어요. 나자르? 토라오는 미나미의 어깨를 잡아떼며 그와 눈을 맞췄다.

“언제 만났어? 너 나 없을 때 설마 밖에…”

“밖에 나간 적 없어요, 나자르가 먼저 창문으로 찾아왔어요.”

“……하.”

미나미는 창문을 노려보는 토라오를 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있잖아, 미나미. 약혼, 그거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하던걸요. 괜찮아요. 그리고 당신이 제 눈치 볼 필요가 뭐가 있어요.”

“괜찮다고?”

토라오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괜찮다, 라니. 너는 그게 괜찮을 수 있는 거야? 화내고 싶고 떼를 쓰고 싶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신경 쓸까 봐 말하지 않았는데.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여도, ‘그’와 닮은 내게 상처받진 않을까 봐 그런 건데.

“정말 괜찮아?”

걱정하느라 묻는 눈치는 아니었다. 한껏 풀죽은 기색이 역력한 물음에 미나미는 오래도록 말을 골랐다. 왜 당신이 상처받은 얼굴이에요, 그는 목구멍에 걸린 말을 억지로 삼켜냈다.

“그럼 뭘 어떡해요.”

“아니, 아니야. 미나미.”

토라오는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난 경연에 참가할 의향이 없어. 지금, 계속해서 불려 나가고 있는 건 우리 형제들 수가 너무 많으므로. 매번 지체되는 게 있어서 그래. 약혼을 선언할 때, 난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어.”

마왕이 되면 할 것도 많아, 자식도 계속 낳아야 하고 바쁘게 돌아다녀야 해. 힘을 지니는 건 분명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난 아니야. 나는, 난 너랑 살고 싶어. 너랑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돼… 토라오는 미나미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네 마음은 다르겠지만, 나는 그래.”

떨어지려는 시선을 간신히 붙잡아 사랑하는 이를 담아내는 눈동자는 안쓰러울 만큼 애달팠다.

입 맞추고 싶어, 반짝 떠오른 생각에 미나미는 입을 다물었다. 뺨을 만지고 싶었고, 안아주고 싶었다. 인연을 잊지 못했음에도 염치도 없이 그러자고 답하고 싶었다. 이기적이지만, 이대로 계속 그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자신 없어요.”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당신을 사랑할 자신이요. 마치 죄를 지었다는 것처럼 호흡이 드문거렸지만, 토라오는 마지막 문장에 꽂혀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어때? 나, 사랑… 해?”

“……잘 모르겠어요.”

좋아해요. 당신하고 있는 시간은 즐거우니까. 당신이 나를 구해줬으니까. 사랑해주니까. 그래서 좋아요. 미나미의 말에 토라오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고마워.”

사랑에 이유가 필요할까, 토라오는 조심스럽게 미나미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전에 네가 했던 말 있지.”

운명 때문에 널 찾으러 다닌 건 맞아, 기대도 했어. 내 마음대로 내 이상형에 널 맞춰서 생각하기도 했고. 그렇게 많은 시간선을 돌아다니면서 무수한 너를 만나왔어. 미나미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나는 그때 만난 모든 네가 좋았어.”

신관이었던 너도, 아이돌로서 무대에서 활약하는 너도, 군인이 되어 총을 잡은 너도… 난 그런 너를 모두 사랑했어. 그래서 더 헤맸지. 운명의 세 여신이 악착같이 따라다니면서 간섭했지만, 그래도 나는 멈출 수 없었어.

“내가 사랑해도 되는 너를 만나고 싶어서.”

“…….”

사랑해도 될까. 아니, 이미 실컷 해버렸지만. 미나미는 천천히 그의 등을 토닥였다.

“말리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자신 없어요. 토라오는 잠자코 목을 울려 대답했다.

“난 이기적인 사람이에요. 받기만 해서 당신이 지칠 거에요.”

“아니, 난 자신 있어.”

방금 가능성을 봤거든. 토라오는 미나미의 뺨을 매만졌다.

“너는 날 사랑하게 될 거야.”

꼭, 그렇게 만들 거야. 토라오는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미나미 특유의 체취는 육체가 없어도 여전했다. 오묘한 마력의 향기에 한참을 그러고 있던 토라오는 코에 걸리는 찡한 냄새에 미간을 좁혔다.

불쾌한 짐승의 냄새가 미약하게 섞여 있었다. 그동안 왜 몰랐지, 토라오는 미나미의 가슴팍까지 킁킁거리며 내려왔다. 간지러워요, 몸이 움츠러들자 토라오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혹시 나자르가 뭐 했어?”

“네? 뭘 하다니…”

순간 품에 넣어둔 그의 깃털이 떠올랐다. 미나미는 나자르의 조언도 제쳐두고 깃털을 꺼내 토라오에게 내밀었다.

“기척을 지울 수 있다고 줬어요.”

“……하.”

토라오는 욕을 씹으며 깃털을 빼앗듯이 가져갔다. 새까만 깃털에 담긴 나자르의 마력은 기척을 지우는 마법을 두르고 있었다. 그 덕에 존재조차 몰랐던 토라오는 깃털을 쥐고 태워버렸다. 검붉은 불꽃이 사납게 일렁였다.

“나쁜 물건이었나요?”

토라오는 대답 없이 미나미를 껴안았다. 간헐적으로 흠칫거리는 몸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미나미는 그가 진정될 때까지 토닥였다. 제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걸까, 몸이 아프거나 이상하진 않았는지 부지런히 생각하던 미나미는 전 괜찮아요. 하며 그를 달랬다.

“…신체의 일부.”

“네?”

“약혼, 말이야.”

어느 한 쪽의 신체의 일부를 선물하는 걸로 진행해. 이걸로 강제로 약탈해서 약혼 관계를 맺어버리는 경우도 있어. 물론 결혼보다 결속력은 약하지만, 여기서는 비일비재해.

 

“곧 쟁취하게 될 거야.”

 

“잠깐만요. 그 얘기는 제가……”

토라오는 말없이 미나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나자르는 어떻게 미나미의 위치를 알고 찾아왔던 걸까. 토라오는 조용히 숨을 고르다 품에서 떨어졌다.

“괜찮아, 미나미. 내가 잘 해결할게.”

“방법이 있는 거예요?”

“없어도 있게 해야지.”

탁해진 목소리는 짐승이 낼 법한 소리였다. 토라오는 방 전체에 마법을 두껍게 깔아두고는 커튼까지 쳐버렸다. 공간은 한층 더 답답해졌지만, 미나미는 그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한동안은 불편할 거야.”

이공간으로 가는 마법과 기척을 지우는 마법이 필요 이상으로 뒤섞이면 마력의 흐름이 억눌린다. 순수하게 마력으로만 이루어진 미나미는 이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많이 피곤하고 답답하겠지, 토라오는 조용히 방에 걸어둔 마법의 특징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때 되면 먼저 자.”

“언제 올건데요.”

“다 해결되면 올게.”

그러니까 자고 있어. 알았지? 꿀이 떨어질 듯 달콤한 음성이 미나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4

 

그가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처음엔 많이 늦는구나, 했으나 날이 넘어갈수록 숨이 막혔다. 사흘. 큰일 난 것 아닐까. 무슨 일이 생긴 거면 어쩌지. 나흘. 지금이라도 나가서 확인해볼까. 닷새. 이제는 고민으로 잠도 오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미나미는 결심한 듯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마계의 역사, 중급 마법진… 쌓아둔 몇 권의 책을 뒤지던 그는 ‘오늘의 운세’보다 상위 단계의 예언 마법진을 찾아냈다. 그가 대체 뭘 하고 있는지 대충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 테다. 복잡한 그림을 그리는 내내 머릿속은 토라오로 가득했다.

 

[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어요. ]

 

돌아올 수 없는 길? 그게 뭔데, 위험을 감지한 미나미는 카드 하나를 더 집었다.

 

[ 기다리지 말고 떠나세요. ]

 

메시지를 받은 미나미는 곧장 옷장을 열어 제 몸에 맞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얼굴을 다 가릴 수 있는 검은 로브까지 뒤집어썼다. 로브 안주머니엔 마법진을 잔뜩 그린 카드들이 몽땅 들어갔다. 전에 없던 이상한 용기가 온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망설임을 잊은 걸음은 두꺼운 문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 순간, 미나미는 제 몸을 휘감고 지나가는 마력에 고개를 쳐들었다.

“찾았다.”

역한 짐승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가르랑거리는 소리, 거칠게 돋아난 털… 미나미는 자신을 끌어안은 자가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나자르.”

인간은 전혀 겁먹은 눈치가 아니었다. 도리어 잘 만났다는 양 눈에 핏대를 세우고 달려들었다.

미리 마법진을 적어둔 카드 두 개가 빛났다. 보랏빛 불꽃이 미나미의 양손에 깃들었고 온도는 무서운 기세로 내려갔다. 주변 공기까지 오싹해지자 나자르는 그에게서 물러섰다.

“왜 그래, 자기야.”

자기야? 미나미의 차가운 불꽃이 나자르의 목을 그러쥐었다.

“난 당신하고 약혼할 생각 없어요.”

“이미 약혼은 인정됐어.”

“웃기지 말아요, 나는 이곳 사람도 아닌데 마왕이 당신 짝으로 나를 골랐다고?”

나자르는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말꼬리를 늘렸다.

“너를 고른 건 아버지가 아니라 나야.”

전에 말하지 않았어? 자율권이 있는 악마도 있다고.

“상위 서열은 짝을 정해주지 않아. 참 영광스러운 페널티지.”

다른 형제들은 좋은 가문과 이어질 때 우리는 순수 능력만 평가하게 되거든. 반려는 뭐, 적당히 잘만 데려오면 그만이고.

악마들은 마력과 업보의 총합산량을 따져 서열을 매겼다. 그리고 그 서열은 형제들 사이에도 적용되어 ‘태어난 순서’가 아닌 ‘서열’ 순으로 위치를 정했다.

“왜 하필 나예요?”

“ㅁ… 좋아해서.”

그보다 이거부터 놔, 너 손목 날아간다. 인상 하나 찡그리지 않고 또박또박 쏟아지는 말이 지닌 위압감은 실로 엄청났지만, 미나미는 굽히지 않고 더 강하게 조였다.

“토라오는요.”

나자르는 점차 생채기가 나는 목을 보곤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똑바로 대답해요!”

“떠났어.”

“어디ㄹ… …!”

“좋은 집안 악마랑 약혼하고 걔 방에서 같이 지내고 있어, 이 멍청한 인간아.”

커다란 손이 손목을 잡아채더니 어느덧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발끝까지 퍼지는 통증에 둔탁한 비명이 올라간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넌 내가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아버지 심장하고 같이 먹어치울 거니까 입 닥치고 얌전히 있어. 충격 때문일까,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웅웅댔다. 조용히 해, 머리 아파. 말은 혀 위를 배회할 뿐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해 신음으로 쪼개졌다.

“넌 걔가 날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놈은 절대 못 해. 타고난 재능이 있더라도 업보치가 낮은데 누가 누구한테 덤벼. 걔가 날 죽이려고 했을까? 아니, 무서울 테니 널 버리고 다른 가문에 숨었겠지. 아, 맞다. 내가 말 안 했나?

“나 장남이야.”

가장 마왕에 가까운… …이런.

“기절했네.”

너무 세게 쳤나. 나자르는 축 늘어진 미나미를 안아 들었다. 장막 아래로 비치는 마력의 흐름은 이전보다 더 강하고 거셌다. 군침이 절로 돌았다. 당장 삼켜버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

 

정신이 들었을 땐 처음 보는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윙윙 울리는 머리에 잠자코 상황을 파악하던 미나미는 곁에서 불쑥 들어오는 손에 화들짝 놀라 들썩였다.

“뭘 그렇게 놀래.”

나자르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미나미는 반사적으로 제 품을 뒤졌다. …없다. 미리 마법진을 그려둔 카드 뭉치가 전부 없어졌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빈 카드마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그는 죽일 기세로 나자르를 노려봤다.

“그렇게 당해놓고 또 덤비게? 내가 반려 하나는 제대로 골랐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이 망할 악마는 내가 필요한 건가. 미나미는 분을 삭이며 빈 주먹만 꽉 움켜쥐었다. 예언이 빗나간 걸까? 아니면 실력이 부족해서? 혹시 마법진을 잘못 그렸나. 기다리지 말고 떠나라는 말은 다른 의미였나.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던 목 언저리는 여전히 화끈거렸다.

“멍청하게 굴지 말고 옷이나 갈아입어.”

나랑 갈 데 있으니까. 그는 침대 옆에 걸어둔 화려한 옷을 가리켰다.

“싫어요.”

“싫기는.”

나자르는 허공에 손을 들더니 손가락을 하나둘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맞춰 미나미의 몸은 강제로 일으켜져 침대를 내려가 옷이 걸린 쪽으로 걸어갔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에요.”

“허튼짓 못 하게 하려고. 너 위험하잖아.”

카드도 다 빼앗아놓고 무슨! 미나미는 온몸에 실이 걸린 것만 같은 뻐근함에 이를 갈았다. 강제로 옷을 갈아입는 내내 그를 노려봤다.

그와 비슷한 디자인의 옷은 척 보기에도 왕족이 입을 법한 의상이었다. 검푸른 색 셔츠, 금실로 수놓아진 화려한 장식… 목까지 단추를 채운 미나미는 새까만 부츠와 장갑까지 끼웠다.

나자르는 마기가 가득 담긴 양의 뿔이 달린 모자를 그에게 씌우고는 까만 면포를 얹어 얼굴을 가렸다. 가면 입 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네가 인간이라는 걸 알면 그 자리에서 도륙이 날 테니까. 미나미는 제 의지와 다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짜증 나, 이 마법은 대체 언제까지 쓸 생각인 거야.

“그럼 가실까요.”

나자르는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고, 미나미는 그걸 잡았다. 피부에 닿는 느낌이 싫어 놔버리려고 힘을 줬지만, 나자르의 마법은 과하리만치 강했다. 반항하지마. 나자르가 여유롭게 깍지를 끼워 잡자 애꿎은 어금니만 갈렸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도착한 곳엔 수십 명 남짓 된 악마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홀로 있었고 또 누군가는 저처럼 비슷한 의상을 입은 짝과 함께 있었다.

“혹시 계승식인가요.”

“쉿.”

나자르는 미나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말하지 마. 기척 지우는 것도 한계가 있어.”

특히 너처럼 파형이 제멋대로인 인간은. 뒷말은 미나미의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그럼 왜 이렇게 위험한 곳에 나를 데리고 온 거지? 미나미는 책에서 본 삽화가 떠올랐다. 날 여기 있는 악마들이랑 찢어 먹을 생각인가…

“…안 먹어.”

누구 좋으라고 나눠 먹어? 그리고 그럴 거였으면 네가 들키든 말든 신경 안 썼어. 미나미는 그의 대답에 인상을 구겼다.

왜 멋대로 남의 생각을 읽고 그래요. 들리는 걸 어떡해? 미나미는 억지로 그의 손을 떼어내려 몸부림쳤다. 나자르는 입이라도 맞출 기세로 바짝 다가왔다. 아마 천이 없었다면 코끝이 닿았으리라, 역한 감정에 발이 뒤로 빠지자 그의 팔이 허리를 확 휘감았다.

“둘 사이 엄청 좋네. 허울뿐인 약혼인가 했더니.”

지나가던 악마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럼, 뜨거운 사이지.”

“이……!”

욕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나자르의 손이 미나미의 입을 막는 쪽이 빨랐다. 휘파람을 불던 악마는 키득거리며 제 파트너의 손을 잡고 멀어졌다.

“좀 참아.”

미나미는 부글거리는 속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여기엔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 거야, 그는 검은 천 너머로 수많은 악마를 훑었다.

누군가는 문란하리만치 딱 붙어 서로를 희롱했고, 또 누군가는 평범한 연인 사이처럼 보였다. 페어로 온 이들 중엔 건조해 보이는 관계는 단 하나도 없었다. 사이가 좋아 보여야 가산점이라도 주나? 미나미는 실로 단단히 얽혀 잡힌 손에서 힘을 빼려 애를 썼다. 그렇게 하나하나 훑어가던 시선은 어느 지점에서 멈추고 말았다.

…분명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약혼도 취소한다며. 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거야.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해결하고 오겠다면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인사하러 갈까.”

나자르는 이 상황을 실컷 즐기고 있는 낯이었다. 마리오네뜨처럼 연결된 탓에 미나미의 사고가 술술 들어오니 이만한 구경거리도 없다. 토라오는 곁에 선 미형의 악마와 웃으며 떠들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와 손을 잡거나 뺨을 만지는 모습이 마치 진짜 연인처럼 보여 속이 쓰렸다. 그때 광장 악마들이 아스모데우스라느니 했던 말이 사실이었나. 미나미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끄덕였다.

나자르가 손가락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미나미는 제 의지대로 그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토라오와 가까워질수록 심장, 아니, 마력이 크게 요동쳤다. 좀 진정해. 나자르의 목소리에 그는 속을 억누르려 애를 썼다.

“토라오, 오랜만이네.”

“……나자르.”

나자르의 인사에 토라오의 표정이 깜깜하게 굳어졌다. 그의 곁에 선 악마는 환하게 웃으며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나자르 님을 뵙습니다.”

“레테 아가씨는 여전하시군요.”

넌 운도 좋다, 이런 아가씨랑 이어지고. 토라오는 나자르의 곁에 선이를 불안한 눈으로 훑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미나미는 그 방에 있는데. 그의 눈은 양의 뿔에서 시작해 가려진 천으로 내려왔다. 그 너머로 눈을 마주친 미나미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곤 고개를 숙였다.

“이쪽 분은 혹시…”

“내 약혼자.”

“드디어 보여주시는군요.”

종족도 성별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셔서 내내 궁금했답니다. 레테는 후후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고 미나미는 고개만 까딱였다.

“멀리서 보니까, 둘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서 인사하러 와봤어.”

나자르가 미나미의 허리에 팔을 두르자 토라오의 시선이 그쪽으로 빠졌다.

“그럼요, 요 며칠 함께 지내면서 사이도 많이 좋아졌고.”

처음엔 파혼하자고 하더니, 밤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약혼해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대로 함께 지내고 있답니다. 어어? 이러다 후사 먼저 보는 거 아니야? 나자르는 큰 소리로 웃었다.

미나미는 당장이라도 토라오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악마는 악마다 이거야? 속이 끓자 머릿속이 희게 변했다. 정말 이깟 놈이 무서워서 도망친 거야? 기다리지 말라더니, 그게 이런 의미였어? 입술이 파들거리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그럼 이만. 우린 다시 자리로 돌아갈게.”

가자, 미나미. 나자르는 방긋 웃으며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나미는 반사적으로 토라오의 얼굴을 올려봤다. 벙찐 상태로 이쪽을 응시하는 눈동자. 무어라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입술… 가슴 한켠에서는 그럴 리 없다고,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당장 어지럽혀진 속으로는 이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 그럴 리 없다며 부정하는 듯한 얼굴에 무심코 이쪽이 더 다치고 만다. 차라리 마왕이 되고 싶었으면 그렇다고 하지. 이렇게 될 거면 그날 그런 소린 하지 말고 나가지. 솔직하게 겁나서 도망치겠다는 말이라도 하지…

*

 

“마지막 경연을 시작하겠다.”

마왕의 엄중한 목소리가 장내에 울린다. 수백이던 마왕의 자식들은 그간의 경연으로 갈무리되어 수십 정도만 남아있었다.

나자르는 풀 죽은 미나미를 경쾌하게 토닥였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인간의 모습이 어쩜 그리 재밌던지…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마왕은 말을 이었다.

“심장을 꺼내 씹어라, 가장 농도 짙은 자에겐 내 심장을 주마.”

단, 이 건물은 건드리지 말 것. 타자의 반려를 공격하는 행위 또한 금지된다.

악마의 심장은 마력의 원천이며 계승할 수 있는 부위였다. 아무리 악마라 해도 평소엔 금기시되어있는 ‘마력 먹기’는 바로 이곳, 마왕 계승 경연식에서만 허용되었다. 그만큼 다른 형제들의 마력을 집어먹고 더욱 강해진 이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뜻이다. 거기다가 ‘마력 운용’을 중시해 ‘건물은 건드리지 말라’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마왕은 거대한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제한시간 안에 누가 가장 많은 심장을 먹는가. 누구를 잡아 양질의 마력을 축적하는가. 경연 내용에 나자르는 씩 웃었다.

“이럴 줄 알았지.”

그는 미나미에게 걸어둔 마법을 거두었다. 경연이 있을 적엔 외부에 연결된 마법은 모두 끊어두어야만 참가할 수 있었다. 어떤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생긴 규칙이었다.

애피타이저로 몇 명 잡고 토라오는 나중에 잡을까… 그는 여전히 분노를 어쩌지 못하는 미나미를 꼭 안고는―토라오의 시선을 의식한 탓이었다―낮게 속삭였다.

“쟤 죽일 거야.”

“안돼요.”

“허, 그렇게 당하고도 죽는 건 싫어? 눈물 나는 사랑이네.”

“그런 거 아니에요.”

죽도록 패고 싶거든요. 저 잘난 얼굴이 다 망가질 정도로. 그리고 저, 사랑하는 거 아니에요. 나자르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렇지. 넌 그런 성격이지. 그는 마왕이 지정한 경연장의 라인 안으로 들어섰다.

 

[ 건물의 원형을 붕괴하는 행위를 금합니다. ]

[ 타자의 반려를 해쳐서는 안 됩니다. ]

[ 모든 반려는 경연에 참가한 반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

[ 위 사항을 어길 시 자격이 박탈됩니다. ]

 

규칙들이 허공에 떠오르기가 무섭게 연회장 안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솜씨 좋은 이들은 제 형제들의 심장을 쉽게 가로챘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인사를 나누고 웃고 떠들던 이들은 권능을 탐하며 무너졌다. 따지고 보면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악마였으니까.

눈 앞에 펼쳐진 살육의 현장에 미나미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에 앉아 느릿하게 나자르의 뒤만 쫓았다. 강하긴 정말 강하구나, 그의 손짓 하나로 목이 날아가고 가슴에 구멍이 뚫린다. 연회장을 누비는 나자르는 지극히 독보적인 존재였다.

“인간.”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아. 들켰으니 죽으려나. 미나미의 흐리멍덩한 눈에 레테의 모습이 잡혔다.

“날 아는군요.”

“그럼요. 토라오가 많이 얘기했으니까.”

내 얘기를 뭐하러. 미나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토라오 말로는 당신을 숨겨놨다고 하던데,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예요?”

“찾으러 나갔다가 나자르에게 잡혔어요.”

미나미의 눈은 휘어져 있었지만, 목소리는 건조했다. 아, 혹시 연기했어야 했나. 반려를 데려온 악마들이 떠오른 그는 뒤늦게 중얼거렸다.

“후후, 비밀로 해드릴게요.”

저희도 연기 중인 건 마찬가지니까.

“연기 중이요?”

“임시적인 동맹이에요.”

레테는 피를 뒤집어쓴 채 싸움을 이어가는 토라오를 보며 담담하게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레테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미나미의 입은 점점 다물렸다. 격해진 감정은 더욱 격해져 속에서 시끄럽게 부딪쳤다. 피부를 감싼 장막이 찢어져 흘러내린 마력이 셔츠를 적셨다.

“인간이다.”

누군가의 말을 시작으로 모든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검은 천으로 가려진 나자르의 반려. 그에게서 진하게 쏟아지는 인간 특유의 순수한 마력은 보랏빛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반려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조항 때문에 공격하는 이는 없었다. 이를 드러내고 침을 뚝뚝 흘리는 짐승들의 시선을 받는 중에도, 미나미의 어깨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나자르는 혀를 차며 미나미에게 손을 뻗으려는 악마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나자르. 인간을 반려로 삼겠다니 진심이야?”

“사랑하는데 어떡해.”

“네가?”

저렇게 맛있는 마력을 흘리고 있는데, 천하의 나자르가 안 먹고 사랑을 하겠다~? 악마는 깔깔대며 잘린 손목을 흔들었다.

“나 한 입만. 핥아보는 건 괜찮지?”

“―우발!”

낙타의 혀가 죽 늘어지자 토라오가 그의 머리를 잡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 너라면 마왕 자리도 포기하고 삼키겠지. 어머, 역시 눈치가 빠르다니까. 시시덕대던 우발은 어라, 하며 토라오와 나자르를 번갈아 보았다.

“왜 토라오가 반응해?”

나자르의 반려잖아. 왜? …아! 아~ 그래. 그렇게 된 거구나? 뭐야~ 안 보여준다더니 나자르는 보여줬어? 그랬더니 둘이 눈 맞아서 도망갔구나? 우발은 실실 웃으며 토라오를 자극했다.

“도망은 저쪽이 쳤어요.”

“응~?”

“도망간 건, 제가 아니라고요.”

악에 받친 목소리에 토라오가 다급히 나섰다. 아니야, 미나미. 그런 게 아니야. 뭐가 아니에요? 그러고 싶었으면 그냥 말을 하던가! 미나미가 벌컥 소리 지르자 나자르는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슬쩍 다가왔다.

“토라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알아.”

미나미, 끝나고 다 말할게. 레테의 재촉에 토라오는 제 발치를 향해 우르르 몰려오는 날카로운 가시들을 피해 날개를 폈다. 우발은 섬뜩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 먹고 싶어. 너무 먹고 싶어. 바닥을 기면서 미나미에게 가까워진 우발의 앞을 토라오가 막았다.

끼기기기기기긱, 손톱은 바닥을 긁어대고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가 무시무시하게 울려 퍼졌다. 이성을 잃고 바닥을 구르던 우발의 등으로 흉측한 봉우리가 올라가고, 다리는 휘어지고 얇아져 간신히 바닥을 지탱할만한 형태로 변했다. 허리가 굽어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미세한 진동이 바닥을 울렸다.

“쟤는 본체가 너무 징그러워.”

나자르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자 미나미는 그의 등 뒤로 숨었다. 그가 제 뒤에 딱 붙어있자 나자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드디어 상황 파악이 됐구나?”

“잡아먹히기 싫으니까 저거나 빨리 잡아요.”

“죽이라고?”

“못해요?”

“음~ 할 수는 있는데, 좀 힘들지.”

나자르는 미나미의 검푸른 옷에서 배어 나오는 보랏빛 마력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5

우발은 서열이 높은 만큼 그만한 마력을 지녔다. 평소 집어삼킨 인간의 수도 따지면 마력의 양은 물론이요, 농도 또한 인증된 셈이었다. 이성을 잃은 그는 단숨에 표적이 됐다. 상급 악마의 심장 10개 분량은 톡톡히 하는 하나의 심장이 무방비하게 까뒤집힌 상태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토라오는 그의 두꺼운 목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포효와도 같은 단말마에 악마들이 침을 흘리며 둘러싼다. 와중에 우발에게 정신이 팔려 수비가 허술해진 쪽을 노리고 달려드는 이도 있었다.

그럼에도 우발은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전신에 새까만 가시를 두른 그는 여기저기를 굴러다니며 악마들을 휩쓸었고, 나뒹구는 시체를 쓸어 먹으며 이성을 차렸다. 저러니까 그동안 죽지 않고 버텼지, 나자르는 꾸물럭거리는 우발을 보며 입가를 닦았다.

“…역시 맛있네.”

미나미는 왼쪽 어깨를 잡고 작게 신음했다. 육체가 없으니 괜찮을 줄 알았건만, 팔 하나를 산채로 뜯어먹힌 감각은 끔찍하리만치 또렷했다. 나자르의 잇자국이 남은 어깨에서 마력이 줄줄 쏟아진다.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은 미나미의 주변은 온통 보랏빛이었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레테는 이성을 잡으려 벽에 머리를 박아대는 미나미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장막이 이만큼 찢어지면 형태도 유지하지 못하고 부서질 거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어요! 너덜거리는 어깨 아래로 레테의 마법이 들어간다.

“ㅈ… 죽지, 않… …괜찮…”

“……정신 차려요.”

레테의 손이 지나간 자리엔 하얀 파도가 부글거렸다. 장막과 비교하면 조잡했지만, 당장은 이만한 응급 처치가 최선이었다.

 

*

 

“네 마력을 줘.”

나자르의 제안은 그랬다. 곱게 정제된 인간의 마력을 먹으면, 곧장 힘으로 바꿔 사용할 수 있으니 그것만 있으면 본체를 내고 기어 다니는 우발을 막을 수 있었다.

인간의 영혼을 먹어 강해진 악마에겐 같은 마력을 지닌 악마가 대항하는 것이 기본 법칙이다. 나자르 또한 먹어치운 인간의 양은 꽤 됐지만, 우발에 비하면 모자랐다.

“왼팔 하나면 돼.”

미나미는 제 팔을 꽉 잡았다. 나자르는 당장이라도 먹고 싶다는 듯 들뜬 목소리로 재촉했다. 우발을 죽이면 너도 마왕의 권능을 업고 살 수 있어. 세상에서 제일 편하게 마계를 통치하면서 지낼 수 있다고. 욕망으로 점철된 목소리는 맹독이었다.

“…알았어요.”

미나미는 한참 동안 팔을 주무르다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우발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심장을 적출당했고, 나자르는 과할 정도로 흘러내리는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렀다.

토라오의 멍한 눈이 팔을 잃은 미나미에게 향한다. 왜, 어째서. 내가, 끝나면 얘기해준다고 했는데… 까마득해진 이성은 온통 눈물이었다. 저 검은 천이 야속했다. 표정 하나 알아볼 수 없게 하는 저 천 아래로 미나미는 울고 있을까, 아니면 웃고 있을까. 어쩌면 자신을 경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후회와 미안함, 그리고 원망과 분노가 섞인 감정은 곧 두려움으로 변했다.

보고 싶어, 미나미. 오늘만 넘기면 네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토라오!”

레테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 토라오는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뇌격을 피했다. 가까스로 날개를 접은 덕에 큰 화는 면했지만,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주저앉은 미나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쪽을, 바라봐주지도 않았다. 텅 빈 왼쪽 어깨를 오래도록 바라보던 토라오는 어금니를 물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상황을 정리하고 나면 미나미의 팔을 고쳐주고, 그리고, 오해도 전부 풀고 싶었다. 토라오는 새까만 검을 뽑았다. 마력이 응축되어 있는 검기는 오싹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의 마력에 반응한 검은 검붉은 색으로 변하며 검은 안개를 내뿜었다.

아주 약간의 흠집도 좋다, 나자르의 몸에 파고들기만 한다면 승산은 있다. 토라오는 아직 건실한 성벽을 보며 자세를 잡았다.

악마들의 시체가 너저분하게 흩어진 경연장 안은 어느덧 두 개의 그림자만 남았다. 마왕이 되지 못하더라도 필요한 마력을 충당하기 좋은 이벤트였기에, 몇몇 악마들은 형제들의 심장을 만족스럽게 먹었는지 자진해서 포기했고, 또 몇몇은 나자르에게 항복 의사를 표하며 라인 밖으로 사라졌다.

“규정만 아니었어도 다 먹는 건데.”

“이곳이 무너지면 자격은 박탈된다.”

나자르가 입맛을 다시자 마왕의 엄중한 목소리가 내려온다. 나자르는 몸을 돌려 허리를 굽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이대로 시간만 죽이면 압도적인 차이로 나자르가 승리하고 마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미나미는 명실상부한 그의 짝이 되고 만다. 아니, 차라리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자르는 그를 먹을 생각뿐이었다.

“너무 강해져도 문제네.”

한 발이라도 떼면 온통 무너질 기세의 마력이 똘똘 뭉치자 나자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 상태로 어떻게 싸울까. 그는 마력을 미세하게 조절해 제 주변으로 작은 뇌격을 만들었다.

“네 심장도 먹고는 싶은데, 좀 참으려고.”

미나미가 그랬어, 너를 죽이는 건 자기라고. 그 말에 미나미의 고개가 설핏 올라갔다.

“미나미가 죽으라고 한다면 죽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토라오의 검이 나자르의 어깻죽지를 그었다. 노련한 솜씨와 달리, 나자르의 몸엔 긁힌 상처도 남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나자르가 가지고 있는 진짜 마력 자체는 아마 지금의 몇 배는 더 높을 것이다. 우발의 심장에 미나미의 팔까지 가진 몸은 마왕이 정한 규칙 때문에 그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마 이 규칙이 없었다면, 그가 방출하는 마력만으로 이미…

‘집중하자.’

토라오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눈앞의 악마를 죽이면 약혼은 없던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는 마력의 흐름에 발걸음은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했다.

 

*

 

“다 해결되면 올게.”

그러니까 자고 있어. 알았지? 미나미를 방에 두고 떠난 그는 무작정 나자르의 방으로 향했다. 분노는 검은 안개가 되어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형제들을 다 도발할 생각인가요.”

“레테.”

토라오의 앞길을 가로막고 선 악마는 그의 약혼 상대였던 레테였다.

“지금 당신 살기를 읽은 악마가 몇 명인지 알아요?”

주변을 살피며 다급히 묻는데도 토라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비켜.”

“보는 눈이 많아요.”

살기라도 거둬봐요. 토라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 정말!”

이러다 나까지 휘말리겠다고요! 레테는 자신을 뿌리치고 지나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새하얀 물방울이 일렁이며 검은 안개를 누그러뜨린다. 강제로 살기가 억눌린 토라오는 불쾌감에 인상을 구겼다.

“나자르를 죽일 거야.”

“네?”

당신이 어떻게 나자르 님을 죽인다는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나자르는 장남이고, 자신은 그보다 몇십 계단 더 아래였다. 그 새끼가 미나미를 빼앗았어!! 울분으로 포효하는 그를, 레테는 가까스로 막아냈다.

“미나미, 라면, 그 인간이요?”

인간 하나 때문에 이런 살기를 보인다고? 레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근사한 작전을 세운 것도 아니고 무작정 죽이려고 했다니, 나라 하나 정돈 쉽게 부숴버릴 파괴력을 가진 악마를? 말도 안 된다. 오래 침묵하던 레테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나자르 님을 죽이고 싶다면 제가 돕겠어요.”

그러니까 힘 좀 빼봐요! 토라오의 눈이 레테에게 꽂힌다. 나를 돕겠다고? 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뭘 어떡할 건데.”

토라오의 살기가 누그러지자 한층 수월해진다. 레테는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경연에 참가하세요.”

“너랑 약혼하라고?”

“네. 그… 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세요!”

당신 실력으로 이길 수 있겠어요!? 당신 마력과 업보만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약혼 얘기에 다시 올라간 살기를 억누르며 레테는 비명에 가깝게 소리쳤다.

“경연 자체는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페널티가 있을 거예요.”

그걸 이용해서 공략하면 승산은 있어요. 난 마왕이 될 생각이 없어. 말 좀 끝까지 들어, 이 얼간아! 레테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당신이 마왕이 되면, 마왕의 권한으로 다시 빼앗아오면 되잖아!”

마왕은 그런 존재였다. 반려가 있는 악마여도 제 권한으로 갈라서게 할 수 있었고, 그 짝을 빼앗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마왕이 된 자들은 모두 그런 짓을 행해왔다. 그가 말한 작전에 귀가 트였는지 토라오의 살기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내가 도울게요.”

방출된 마력을 다스리느라 숨을 고른 그는 두 손을 내밀었다.

“레테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엘뤼시온, 왼쪽으로 가면 타르타로스에요.”

어떡하시겠어요?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넌 망령은 낙원과 지옥 둘 중 하나를 골라 저승으로 향한다. 그가 비유한 바를 알아챈 토라오는 낮게 침음했다.

그의 말이 맞다. 지금 상태로는 나자르를 죽일 수 없었다. 그가 작정하고 싸운다면 아마 이쪽은 단 하나의 상처, 아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소멸할 것이 뻔했다. 잠깐만 버티자. 이것만 통하면 미나미를 되찾을 수 있어. 토라오는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사이가 좋을수록 약혼자와의 결속이 올라가 부수적으로 받는 마력이 증가한다. 레테의 속성은 새하얀 물로 토라오의 검붉은 불꽃과는 정반대의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놓고 보면 합이 좋지 않았지만, 그의 주특기는 역逆마법 이었다. 그러니 레테가 역을 취해 마력을 보내면, 토라오의 힘에 부합하는 속성이 되어 위력을 올릴 수 있었다.

마력을 강화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충분한 지원을 받으려면 최대한 함께 지내야 했다. 이제 와서 다시 약혼을 선언하고, 뒤늦게 합류한 페널티로 지나간 단계를 마지막 경연 전에 모두 소화하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토라오는 미나미를 찾아가지 못하고 레테의 방에 머무르며 경연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마지막 경연 전날, 레테는 그에게 새하얀 검을 선물하며 나자르를 공략할 방법을 설명했다. 납득할만한 내용에 토라오는 동의했고, 검의 사용법을 숙지하고 연습했다.

하지만 나자르의 위압은 상상 이상이었다. 거센 파도처럼 거칠게 튀어대는 마력의 흐름에 토라오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10분 남았네.”

더 공격 안 해? 나자르는 비아냥거리며 턱짓으로 미나미를 가리켰다.

“나 오늘 쟤 먹을 거야.”

이렇게도, 저렇게도. 말꼬리 뒤로 더러운 욕망이 필터링 없이 쏟아진다. 분노로 이마가 구겨진 토라오는 검을 고쳐 쥐곤 고함을 지르며 그에게 돌진했다. 그 순간, 미나미가 나자르와 토라오의 사이를 막고 섰다.

“미나미!?”

그는 환부를 붙잡은 채 후들거렸다. 미나미가 고개를 마구 가로젓자 양의 뿔이 달린 모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반려가 손을 대는 건 상관없겠죠.”

살의가 담긴 목소리에 나자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연에 악마들은 야단법석을 떨었다.

보라색이 된 미나미의 오른손이 토라오의 목을 졸랐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악마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인간이 내지르는 가냘픈 살기에 맥없이 무너지는 형제’란 충분한 놀림거리였다. 나자르는 보라색으로 얼룩덜룩해진 인간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핥았다.

토라오는 앓는 소릴 내면서도 미나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울었는지 눈가는 붉었고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고통을 참느라 앙 다물린 입술이, 살짝 보이는 치아가 이 와중에 귀엽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이 졸린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구해줘요.’

입 모양을 읽은 토라오는 반사적으로 미나미의 허리를 끌어안고 날개를 폈다. 마왕은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았다.

“8분 남았어.”

나자르의 손끝에 흩뿌려 든 뇌격이 모여든다. 이내 총알만 한 크기의 검은 구체로 굳어진 마력이 토라오를 향해 겨눠졌다.

“가만히 있어도 이기겠지만”

파지지지직― 마력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너무 재수가 없ㅇ… …?”

뭐야. 나자르는 몸속에서 마력이 요동치는 감각에 인상을 찡그렸다. 순수하게 정제된 마력들이 삼켜낸 심장과 뒤섞여 휘몰아쳤다. 인간의 형태로 감내할 수 없는 고동에 본체를 드러내려던 나자르는 제 피부 틈에서 새어 나오는 활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게서 멀리 떨어진 토라오는 아까부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는 미나미를 내려다보았다.

“미나미?”

“……먹히기 전에, 팔에 마법진을 그렸어요.”

오늘의 운세. 발동한 순간엔 스파크가 튀니까 카드에 손대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마법이 중첩되면 그게 커지지 않을까 싶어서 여러 개 그려봤는데…

찰나에 그런 생각을 했다고? 나자르의 몸체 곳곳이 찢어지며 검푸른 피가 섞인 활자가 뿜어져 나왔다. 바닥에 뿌려지는 인간의 문자를 본 나자르의 머리에서 염소의 뿔이 불툭하게 치솟았다.

“감히 인간 따위가―!!”

찢어져 너덜거리는 몸이지만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완연한 본체가 갖춰지자 마력이 돌풍처럼 휘몰아치고 성벽엔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왕은 5분도 채 남지 않은 모래시계를 응시했다.

칼춤을 추는 마력의 틈을 비집고 뛰어든 토라오의 칼이 활자가 쏟아지는 나자르의 옆구리에 쑤셔박힌다. 본체로 변하며 재생 마법까지 사용했는지, 칼은 반절도 들어가지 못했다.

“토라오! 칼을 두고 물러나요!!”

레테의 외침에 칼에 새겨진 역逆이 빛나며 새하얀 물결이 일었다. 새까만 칼은 점차 희게 변하는가 싶더니 이번엔 뜨겁게 타올랐다. 하나의 속성으로 묶어두었던 두 개의 마력이 칼을 매개체로 거칠게 맞부딪쳤다.

“크아아아악!!”

씨발, 씨발! 죽여버리겠어!! 나자르의 옆구리가 깨지듯 무너지며 살점이 튀었다.

잠시후, 굉음과 함께 나자르의 몸체 절반이 폭발했다. 성벽이 무너지고 바닥은 엉망으로 꺼졌다. 여전히 쏟아지는 활자에도 나자르는 비틀거리며 날개를 퍼덕였다.

“미나미.”

주문을 더 외워봐. 미나미는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히 읊조렸다.

―나자르의 커다란 붉은 눈에 검은 글씨가 새겨진다. 미처 띄워지지 못한 글자가 그의 온몸을 도배하다 못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살점과 살점을 잇던 근육의 결속력이 흐려지더니 심장 또한 으깨진다. 이제는 날개로 바닥을 지탱하던 나자르는 휘청이더니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미나미가 발동한 마법은 하위 마법일 뿐이다. 그나마의 사용처도 중첩되어 스파크를 일으킨 게 전부였지만, 아무리 오늘의 운세가 발현하여 글자가 떠올랐다 치더라도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토라오는 주문을 수십 번 외우던 미나미를 떠올렸다. 아마 중첩된 주문에 모든 마법진이 그 모든 부름에 응했을 것이다. 보통의 마법진이라면 1회에 그쳤겠지만, 나자르의 몸은 마력으로 가득했으니 모자란 마력을 끌어와 재발동을 반복했으리라.

토라오는 조심히 내려가 꿀럭거리는 나자르의 몸체를 발로 찼다. 온통 새카매진 몸 사이로 활자에 긁힌 심장이 굴러떨어졌다. 형태는 망가졌지만, 잔존한 마력은 여전했다.

토라오가 나자르의 심장을 줍자 모래시계가 멈추고 바닥에 그어진 라인도 사라졌다. 거칠어진 숨이 천천히 잦아든다. 도망쳤던 악마들이 조용해진 연회장 안으로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었다.

“미나미, 괜찮아?”

“……아마도요.”

아무리 하위 마법이라지만 마력 소모는 그도 만만치 않았다. 미나미는 아득해질 것 같은 정신을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 작전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을 했어야죠.”

“그, 미안…”

“미안할 짓을 왜 해요?”

물꼬가 트인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당신 약혼자한테 아까 다 들었어요.”

그래요. 작전. 작전인 거 알겠어요, 그래도, 어떻게 정말 말도 없이 약혼할 수가 있어요? 알아요, 아는데! 근데 나는 지금 그게 너무 화가 나요! 토라오는 앓는 소릴 내며 고개를 떨궜다.

“난 당신이 마왕이 되는 것도 싫어.”

마왕의 심장을 먹고 마왕이 된다면, 당신도 언젠간 심장을 내줘야 하는 거잖아요. 약혼 상대랑은 무조건 결혼해야 하고. 그럼 나는요? 나는 뭐, 당신 첩살이라도 해야 해요? 다른 악마들은요? 마왕이 되면 애도 많이 낳아야 한다면서! 누구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런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어요?! 미나미가 따박따박 따지고 들수록 토라오의 표정은 미묘하게 풀어졌다.

“그러니까 너는, 내가… 너 말고 다른 놈이랑 결혼하는 게 싫은 거지?”

“싫어요.”

단호한 눈동자에 웃음이 비죽비죽 샌다. 미나미는 아차 싶었는지 말을 어물거리다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냥 화가 나서 지껄인 거예요. 민망함에 시선은 옆으로 빠졌다.

경연장은 쑥대밭이 됐다. 성을 무너뜨린 토라오가 실격 대상이 되면서 경연은 무효 처리됐다.

“끝난 건가요.”

“조만간 상황을 수습하고 다시 하게 될 거야.”

그리고 나는 레테랑 약속한 게 있어서 또 해야 할 것 같고. 토라오는 둘의 눈치를 보며 말을 어물거렸다.

“무슨 약속이요?”

“절 마왕비로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미나미의 표정이 사납게 굳자 레테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검을 구해오는 것도 그렇고, 출혈이 컸어요. 그래도 이 정도로 마왕비가 될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장사였지만 문제는 도박이었단 거죠.”

애초에 저희 목적은 마왕 자리였고, 약혼 상대량 결혼까지 가는 시스템이니 거래 내용은 자연스러운 거예요.

“…….”

“…저 정말 무섭거든요? 얘기는 끝까지 들어주세요.”

레테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지금 토라오가 실격 처리되면서 마지막 경연이 무효가 됐어요. 이러면 상급 악마들도 자율권을 갖고 참전할 기회를 얻게 돼요.”

보시다시피 형제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그러니 모자란 인원을 더 끌어오는 거죠. 레테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토라오는 실격됐으니 따로 자격을 얻기 위해 추가 경연을 치러야 해요. 하지만 저도 이제 지쳐서 새로운 신랑감을 찾아볼까 하는데.”

당신 어차피 기권할 거잖아요? 토라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한 소동에 같이 있었으니 이름도 알려질 테고, 잘하면 제게 결혼해달라는 악마가 줄을 설 수도 있죠. 아무튼 순순히 물러나겠다는 뜻이에요. 그는 나자르였던 파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대신 저걸 제게 주세요.”

우발의 심장을 비롯해 수십 개의 심장, 그리고 미나미의 왼팔까지 먹은 마력을 가진 조각난 몸체는 여러 색채가 뒤섞여 꿈틀거렸다.

“저걸 다 달라고?”

“심장의 절반 정도는 드릴까요.”

홀랑 다 가져가는 건 좀 많이 아니지 않나? 토라오가 눈썹을 치켜뜨자 레테는 농담이라며 손을 흔들었다.

“절반만 가져갈게요. 대신, 필요할 땐 저 좀 도와주세요.”

그는 어느새 진정한 미나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반려는 적당히 부리기 쉬운 쪽으로 고를 생각이죠?”

“그럼요. 아, 누굴 사랑하고 있는 악마는 피할 생각이에요.”

눈이 마주치자 토라오는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질렀다.

“아무튼 도와주실거죠?”

“뜯어먹히는 것만 아니면요.”

그건 절대 안 돼! 토라오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마력을 제공 받는 정도일 거에요.”

“그런거면 괜찮은…”

“싫어.”

너는 마력 그 자체야, 그 새끼가 널 먹었을 때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아? 토라오는 텅 빈 왼팔을 보며 눈썹을 구겼다. 어린애 같아요. 미나미는 토라오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눈이 휘게 웃었다.

“잠시만요.”

레테가 손을 움직이자 나자르의 파편 위로 하얀 거품이 일었다. 여러 가지 색깔로 반짝이던 것은 이내 보라색 마력만 골라냈다. 몽글몽글하게 솟아오른 마력은 불꽃의 형태로 바뀌더니 미나미의 왼쪽 어깨에 머물렀다.

“돌아가면 장막부터 바꾸세요.”

울퉁불퉁하게 일렁이는 마력 위로 얇은 막이 씌워진다. 조금씩 팔의 형태를 갖춘 마력은 미나미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

 

레테는 나자르의 파편 전부를 챙기더니 심장의 절반을 떼어 토라오에게 넘겼다. 반이라고는 해도 이만한 양과 업보를 계승한다면 웬만한 안전은 보장될 테다. 나자르의 마력이라 떨떠름했지만, 토라오는 그걸 받을 수밖에 없었다.

“…토라오.”

배경도 등장인물도 장르도 달라진 새로운 무대에서 만난 인물은 ‘미도 토라오’의 역할을 맡은 배우 ‘악마 토라오’가 아니었다. 그는 ‘악마 토라오’의 역할을 맡은 ‘미나미의 운명’이었다.

더는 그 이름에서 다른 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주저하던 이유도, 막연한 두려움도 모두 흐려졌다. 이곳에 온 후로 단 한 번도 불리지 못한 이름을 신경 쓰던 그는 감동을 숨기지 않고 미나미를 끌어안았다.

“사랑해.”

“……저도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을 올린 입술이 예쁘다. 고운 얼굴을 두 손에 감싸 쥔 그는 조심스레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매만졌다. 어느덧 눈이 감기고 숨결이 가까워졌다. 가벼운 입맞춤에서 그치려고 했지만, 토라오의 손은 미나미를 놓아주지 않았다.

멈추고 싶지 않아. 낮은 속삭임의 끝은 입술로 연결된다. 조금 더 오래 있고 싶다고,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보채는 듯하다. 잠깐의 간극을 미나미의 웃음소리가 채웠다.

“침대로 갈까.”

달큰한 목소리에 그는 대답 대신 악마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

 

그로부터 한 달 후, 재개된 경연에서 마왕 계승권을 획득한 악마가 마왕의 심장을 삼켰다. 새로운 마왕의 곁엔 레테가 있었다. 과묵한 그를 대신해 레테는 마왕비로서 많은 일에 나섰고, 무법천지였던 마계의 규칙을 다시 세웠다. 나자르의 파편을 소유한 탓일까, 그는 역대 최고라 불리며 칭송받았다.

덕분에 인간들의 처우가 좋아졌고, 미나미 또한 쉽게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토라오의 반려가 된 후론 그와 비슷한 향의 마력을 품게 되어 무시당하는 법이 없었다.

 

[ 기다리지 말고 떠나세요. ]

 

만약 그때 방을 떠나지 않았다면 토라오는 죽었을까. 어쩌면 무사히 마왕이 되어 레테와 혼인했을지도 모른다. 미나미는 과거로 떠난 일들을 회상하며 주문을 외웠다. 상급 마법이 적힌 마법진이 보랏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글자를 남겼다.

 

[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

 

두루뭉술한 내용이 담긴 카드를 본 토라오는 미나미를 가만히 살피더니 대뜸 그의 배를 만졌다. 만지작거리는 손길을 가만히 내버려 둔 미나미는 그 의도를 알아채곤 실소를 터뜨렸다.

“그럴 리 없잖아요.”

한심하게 바라보자 토라오는 피식 웃으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사내끼리라도 마땅히 생긴다고 하던데.”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혹시 그 책에 쓰여있나요? 미나미는 아침에 방을 정리하다 발견한 빨간책을 가리켰다.

 

[ 인간과 악마가 ♡♡하기 위한 최고의 ♡♡법 ]

 

“…그건 아니지만, 읽어주면 고맙지.”

토라오의 눈이 반짝였다.

“후후, 정말 솔직하시네요.”

“그래서 싫어?”

“그럴 리가요.”

미나미는 카드 뭉치를 정리했다. 그래서 어떡하면 되는데요? 정말 그 방법밖에 없어요? 내심 싫어하는 듯한 기색이 비치자 토라오는 얼른 말을 이었다.

“악마가 후사를 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그, 우리가 매일 하는 그거고… 성별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했으니 정말 그런가. 미나미는 작게 감탄하더니 말을 잘랐다.

“그런데 제가 낳고 싶진 않아요.”

“어?”

“정 갖고 싶으면 당신이 낳아요.”

“아니, 아니. 잠깐만. 끝까지 들어봐, 다른 방법은 아예 달라. 알에서 태어나니까.”

잠깐만. 토라오는 재빨리 튀어 나가더니 작은 바구니를 가져왔다. 바구니 안엔 폭신한 이불이 깔려있었다.

“너와 내 마력을 섞어서 여기다 알을 만드는 거야.”

……후사가 그렇게 보고 싶었구나. 미리 준비한 티가 나자 미나미는 벌겋게 상기된 토라오의 얼굴을 보곤 쿡쿡 웃었다.

“그다음에는요?”

“품으면 돼.”

내가 매일 품을게. 그러니까 우리 아이 갖자. 토라오의 말에 미나미는 차분히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다 키워요.”

“알았어.”

내가 다 키울게. 이름은 뭐로 짓지? 아직 알도 만들지 않았잖아요. 토라오는 무척이나 기대하는 눈치였다. 인간과 악마의 마력을 섞어 알을 만들면 그 안에서 무엇이 태어날까. 미나미는 토라오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당신 닮았으면 좋겠네요.”

“성격은 널 닮았으면 좋겠어.”

설마 이런 대화까지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미나미가 푸스스 웃자 토라오는 그의 뺨에 짧게 입 맞췄다.

“당신하고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꿈꿔왔던 날인데.”

너랑 이렇게 웃고 사랑하고 가족으로 묶이는 거. 토라오의 코끝이 미나미의 코끝에 부딪힌다. 간지러워요. 쿡쿡 웃던 그는 토라오의 양 뺨을 붙잡곤 가볍게 입 맞췄다.

“앞으로 계속될 거에요.”

“매일.”

“네, 매일.”

당신도 나도, 서로를 원했기에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거겠지. 무수한 시간선을 건너며 나를 찾은 당신이 나는 너무 사랑스럽다. 미나미는 토라오의 얼굴을 가만히 매만졌다.

강하고 아름다운 너에게 내가 반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지. 기어이 찾아낸 나만의 반려, 나는 너를 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다. 토라오는 그런 미나미의 손길을 받으며 눈을 감았다.

두 개의 불꽃이 하나가 된다. 제각각의 온도를 가지고 있던 것들은, 같은 온도로 불타올랐다. 거세고, 화려하게.

 

- END

 

 

 

 후기 (2021년 발행일 당시 후기입니다)

 끝냈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지금 너무 감격해서 좌로 굴러 우로 굴러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야단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완성이 됐네요 정말!!! 신난다~~~~~~!!!!!!!!!!!

사실 처음에 기획한 악애는 굉장히 어려운 스토리였습니다. 운명을 개척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일종의 회귀물이 될 예정이었는데, 시간도 능력도 충분하지 않아 노선을 바꿨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판타지 로맨스가 나왔는데, 제가 잘 하고 있는건지 이게 무슨 내용인지 정녕 이 캐릭터가 토라오와 미나미가 맞는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원고를 수십번 넘게 엎었네요. 빨리 마감해서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이걸 어떻게 보여드리냐!!! 하는 마음에 많이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기다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판타지는 처음 써보는 장르인지라 걱정이 큽니다. 웅장한 노래도 골라 들으며 일종의 뽕(?)도 채우고 열심히 노력해봤는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인간이었을 적의 토라오와 이별한 미나미가 과연 새로운 토라오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쓰는데 감정선을 만지는게 꽤 어려웠어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넘어가고 있는 미나미를 종잡을 수 없어 중간 중간 막힌 부분을 잡고 오열했습니다. 여기선 토라오를 의심했으면 싶었는데 의심하지 않았고, 낙담했으면 했는데 그렇게 크게 낙담하진 않고! 너무 어려웠어요. 쓰면서 제일 재밌었던 부분은 두 사람이 서로 플러팅 대결을 펼치는 쪽이었습니다. 독갱 래빗티비의 텐션이 생각나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미나미와 토라오의 독갱 래빗티비를 꼬옥 읽어주세요! 센베에 호랑이 그려주는 토라오가 나옵니다!)

정말 사랑하고 좋아하는 커플링이에요. 찾아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저랑.. 저랑 놀아주실분..! 제가 열심히 착즙한 썰도 이야기하고 막 그럴게요ㅠㅠ!!!!!!!!!

계속 격려해주시고 응원해주신 소중한 트친분들께도 감사의 인사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기꺼이 축전도 작업해주시고 너무 너무 너무 감사해요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구매해주신 여러분, 정말 정말 정말 진심으로 너무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토라미나를 사랑해주세요!!

이후의 축전까지 예쁘게 보아주시길 바라며>.< 저는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하다는 말 밖에 나오질 않아요. 정말.. 정말 너무 감사한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하지.. 같컾해주셔서 너무 기뻐요.....ㅠㅠㅠㅠㅠ

토라미나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2021년 7월의 어느날 모람

웹발행 후기

벌써 한 해가 지났네요. 2022년 4월 27일 토라미나의 날입니다.

토라오와 미나미의 생일 중간일인데다가 마리메리 등판 날이라, 해외의 톨미러 분들과 이런 날을 만들었어요. 함께 즐길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한 날입니다...♡

기념하는 마음을 담아 전문을 무료로 공개합니다. 부디 이 글이 마음에 드셨음 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