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열 (단편)

[백호열] 다른 세상에서도 우리는

* 예에 오늘 03.10 미토데이라고 해서

백호열 연성

* 이전에 연성했던 인간 백호 x (문어)인어 호열

의 후속편

** 우태/명태 인어 시리즈와 같은 세계관


- 다른 세상으로 갔었다고요?

아라가 나른한 눈을 둥글게 뜨고 묻는다. 호열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어떻게?

- 힘을 좀 모을 필요가 있어서 바다가 모이는 곳에 갔다가, 뿅 하고.

- 그 세상에도 인어가 있었어요?

- 아라야. 혹시 모르니 다른 세상에 대해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렴.

카오루가 우려하는 목소리로 아라를 불렀다. 그런 것치곤 그 또한 놀라고, 흥미로워하는 기색이었지만. 카오루의 말에 호열이 우물거리다 말했다.

- 그렇게 얘기하시니 어디까지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 궁금해~

- 으음… 이런 일이 처음이라 나도 어찌해야하는지 잘 모르겠구나. 누군가를 특정하는 말이 아니면 되려나…. 각 세상이 독자적인 개체라면 괜찮겠지만 평행세계거나 하면 아무래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긴 어려울 테니.

- 그럼 이건 얘기할 수 있겠네요. 우리쪽 세상에서 인어였던 존재가 인간이었고, 인간이었던 존재가 인어가 되서 나오더라고요.

- 와 대박!! 너무 신기하다, 그쵸?

- …혹시 그 세상에서도 인어가 인간이 되려는 시도가 있었니?

카오루의 말에 셋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라가 입을 살짝 벌리고 호열이 검녹빛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 네.

인어들을 위한 두 신에게서 짧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호열이 그들을 보며 웃었다.

- 인어를 딱 둘 봤는데, 생존과 구조를 위한 행위라 어쩔 수 없었어요.

- …다른 세상에서 주술을 썼다고?

카오루와 아라의 시선이 빠르게 호열을 훑었다. 호열이 양손을 들어보였다.

- 바다가 모이는 곳의 힘이 넘쳐나는 상태였어서 그런지 저 자체가 가진 힘은 거의 쓰이지 않았어요. 그 세상에 저 같은 존재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 그 말은?

- 인어들이 인간이 되는 방법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인어는 인어답게 사는 세상. 호열이 다른 세상의 그들을 만나고, 돕고, 원래 세상에선 친우였고 다른 세상에선 인간인 그를 보살피며 틈틈히 바다로 나가 정보를 모았다.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보기 위함도 있었는데 조사하던 중 그 세상의 인어들은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을 알게됐다.

인간들의 욕심으로 인어든 희귀어종이 닥치는대로 잡히는 바람에 심해 깊은 곳에 숨어살고 있으니 인간과 마주치고 사랑에 빠질 일이 없었던 거겠지.

다른 세상에서 인간이었던 친우를 살리기 위해, 혹은 생존을 위해 인어로서의 모든 것을 댓가로 바친 인어들에게 들으니 친우의 형이 반인반어였고 반쪽치고 능력이 좋아 인어들의 영역까지 파고들면서 모든 게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 세상의 친우에게는 형이 존재하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이야기였다.

아무튼, 궁금해하는 아라와 우려하는 카오루를 안심시키고 무사귀환한 멀쩡한 몸을 확인시켜주고 나서야 바다 속 제 집으로 돌아온 호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호열이 그쪽 세상에서 두 인어를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주술을 사용했을 때 같은 힘을 가진 존재를 느끼지 못 했던 걸 생각하면 자신같은 존재가 없는 건 분명했다. 그들이 자신을 보고 종족이야 모를 수 있다쳐도 아는 기색이 전혀 없던 걸 보면 그들이 사는 동안 만난 인연 중에 자신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다들 나를 모르는데-태섭의 연인이 우성이 아니었던 건 진짜 놀랐지만(심지어 그 존재는 호열도 이 세상에서 만난적 없었다)- 혼자 그들을 알고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외부인이 맞는데 괜히 거리감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 또 하나.

그쪽 세상에 내가 없다면 백호는 있었을까? 있다면 여기와 같은 인간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처럼 종족이 바뀌었을까? 인어였다면 어떤 종족이었을까?

호열의 하체가 거대한 문어의 몸으로 변했다. 의도하지 않게 다른 세상을 다녀왔더니 생각보다 집을 비운 시간이 길었다. 길게 뻗은 여러 개의 다리가 일사분란하게 집을 정리한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만난 백호가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호열의 시간은 큰 차이가 없었는데 눈물콧물로 백호가 말하길 무려 110일이 지나있었다고 했던가. 두 신도 오늘 만났을 땐 괜찮았지만 자신이 그쪽 세상에 가있는 동안 아예 존재 자체가 사라져있어서 무척 놀랐다고 했다.

그때 알았다. 호열은 그 세상에 무엇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럼 백호는 그쪽 세상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만나 사랑에 빠졌을까. 혼자였을까.

그가 그쪽 세상에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도 모르면서 호열은 백호가 그쪽 세상에 살아숨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없는 그 세상에

혼자 살아있을 그를 생각했다.

- …….

검푸르게 비치는 심해를 멍하게 보던 호열이 집정리하던 것을 멈추고 위로 헤엄쳐오르기 시작했다.


센터의 수면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호열이 공기중에 노출되면서 물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불꺼진 센터는 고요했다. 바람마저 불지 않는 바다 위에 호열만이 조용히 움직이는 파도에 일렁였다. 수면 아래로 비치는 호열의 검붉은 팔과 다리가 맥없이 춤춘다. 센터로 오르는 바닥까지 다가간 호열이 바다 밑 바위에 빨판으로 몸을 붙였다. 바닥 위로 흰 팔을 눕혀 그 위로 고개를 기댔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다. 호열의 검녹빛 눈이 파도에 반사된 흰 빛을 받아 밤중에도 빛났다.

- 그쪽 세상에서도 사랑받는 존재겠지.

그렇게 중얼거렸다. 백호를 처음 마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인간불신의 끝을 달리던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었던 인간. 인간이 되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정에 긍정하던 인간. 인어였던 태섭이 인간인 세상. 인간이었던 우성이 인어인 세상. 그 세상에 백호는 인간이든 인어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일 것이다.

그 옆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깜짝 놀랐지. 호열이 픽 웃었다. 카오루의 추측이지만 본인의 세상에 다른 세상의 자신이 나타나면 그게 어디든 또다른 존재에 대해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쪽 세상 말로는 도플갱어라고 했던가.

카오루의 말이 추측이 아닌 사실이라면, 호열은 그 세상에 무엇으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인어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누구로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세상에 발을 내딛던 순간부터 원래 세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으니까.

대체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 같으면서도 썩 기분이 좋진 않았다.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걸 느끼기도 전에 연인이 된 인간에 대한 것만 생각했으니까.

다른 세상에 내가 인간이었다면. 네가 이쪽 세상과 같이 인간이었다면 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었을까?

잔인하지. 다른 세상에 내가 없다는 게.

꿈조차 꾸지 말라는 것 같아서.

너와 내가 인간 대 인간으로, 혹은 인어 대 인어로 행복하게 살았겠지 하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하는 것 같아서. 호열은 그래서 슬펐다.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펐다.

다른 세상에서도 우리는 평범한 행복을 꿈꿀 수 없는 걸까. 내가 인어임을 버리지 않는한 이룰 수 없는 꿈조각에 불과한걸까.

호열의 뒤를 이을 대왕문어종은 여전히 태어나지 않고 있었다. 후계자라도 있었다면 인간으로 변하는 것에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봤을텐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호열이 고개를 저었다.

인어들이 목소리를, 기억을 댓가로 인간이 되고난 후를 잊었다. 사랑을 위해 종족도 버린 댓가가 버려짐과 죽음이 대부분인데. 호열이 하, 하고 숨을 흘려 웃었다.

- 네가 사랑을 하게 된다면 알게 될 거야.

태섭의 그 말이 떠올랐기에 웃었다. 와, 진짜. 이제 알겠어. 사랑 때문에 인어들이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이유를.

너무 좋아하니까.

같이 있는 순간이 너무 소중하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도 좋을만큼 사랑하니까.

호열은 깨닫는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짙은 밤바다같은 감정을 깨닫는다. 그걸 깨달았더니 연인이 너무나도 보고싶어졌다. 만나고 싶었다. 그 뺨을 어루만지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만날 수 없음에 더 사무치고 만다. 그래서 그랬다는 걸 이젠 안다.

당장 보고싶어도 볼 수 없으니.

달려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안아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같은 존재가 되는 수 밖에.

인어들의 사랑은 역시 바보같다. 호열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제야 생각한다. 항상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은 백호였다는 것을. 자신은 백호가 센터에 찾아오지 않으면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한다는 사실을.

- 하하…….

센터 바닥위로 고개를 기댄 호열에게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고싶은데 만나러 갈 수 없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구나. 입술을 꾹 깨물고 참아보려 해도 참을 수 없었다. 중증이다. 정말로 결국은.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거구나. 얽히는 손끝이 닿기 전부터.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거구나.

호열의 눈가를 타고 흐른 눈물이 바닥에 닿으면서 데굴데굴 굴렀다. 인어의 눈물이 진주가 되어 바닥을 굴렀다. 타닥 타닥 눈물 방울들이 바닥에 닫는 족족 진주가 되어 바닥을 울려댔다.

- 양호열?

- …….

눈물로 얼룩진 흐린 시야 속에서도 사랑하는 붉음이 두드러졌다. 눈을 깜빡이자 진주 구르는 소리가 났다. 놀란 얼굴의 백호가 호열의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길고 단단한 팔을 뻗어 호열의 고개를 바로 세웠다.

- 네가 어떻게 여기에…….

- 왜 우는 거야. 응? 어디 아파?

호열의 중얼거림에 대한 어떤 답도 하지 않은 백호가 호열의 눈가를 투박하지만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호열이 멍하게 그를 보며 말했다.

- 다른 세상에 갔을 때… 너를 만나지 못 했어. 태섭이도, 그의 연인도 만났는데. 너를 만나지 못 했어.

- …….

- 그 세상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어. 그 세상에서 내가 너와 같은 인간이었다면, 너를 만나서 평범하게 사랑할 수 있었을텐데. 나는 그 세상에 없었어. 백호야.

- …….

- 그랬더니 네가 너무 보고싶어져서 올라왔는데, 너무 늦은 밤이고… 너는 언제든 나를 만나러 올 수 있는데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어…….

- …….

- 다른 인어들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나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게 슬펐어. 인어들이 인간이 되기 위해 모든 걸 바칠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는 이유를 이젠 알아.

- …….

- 백호야.

- …….

난 어째서 너와 같은 존재가 아닌걸까.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를 너무 사랑하게 되어버렸어. 백호야. 너를 사랑해. 그래서 너무 슬퍼. 가슴이 너무 아파.

그 세상에서라도 너와 같은 존재이고 싶었는데… 그 곳에 나는 없었어, 백호야.

네 곁에

내가 없어.

- 이 바보같은 게!

호열의 옆으로 거대하게 바닷물이 솟았다. 풍덩 하는 소리가 뒤늦게서야 들렸다. 눈물로 흐려졌던 암녹색 눈에 빛이 돌았다.

- 백-!!!

- 이 세상에 너와 내가 좋아하는 게 중요하지 다른 세상 생각을 왜 해!

물에 잔뜩 젖은 손으로 호열의 양 얼굴을 강하게 움켜쥔 백호의 인상이 사납다. 호열이 멍하게 그를 올려다 보았다.

- 잘 들어, 양호열.

백호의 입술이 또렷하게 움직인다. 호열의 눈이 그 움직임을 하나하나 읽는다.

- 이 세상에 너와 내가 만나 사랑을 하는 것처럼, 다른 세상에서의 우리는,

- …….

- 다른 세상에서도 우리는!

언제가 됐든 분명 만나서 사랑하고 행복할 거야.

너와 내가 그렇듯.

- 그 세상의 강백호는 분명 양호열이 어떤 존재로 나타나든 사랑할 거라고. 네가 없으면, 네가 태어날 때까지. 너를 만날 때까지. 너와 사랑할 때까지 몇 번이고 기다릴테니까.

그러니 다른 세상의 우리는 신경쓰지마.

- 지금 세상의 나에게만 집중해, 양호열!

다른 세상 따위가 아닌, 같은 세상의 강백호가 너를 사랑한다는 게 중요하니까.

호열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뺨을 타고 흘러 진주가 된다. 바닷물에 퐁퐁 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린다.

- 응.

호열이 웃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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