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장점

란무테

학생 시절의 란기리가 유학을 앞두고 무테이와 함께 양장점에 들립니다. 별 내용은 없지만 급전개.


“이건 어때?"

“글쎄.”

“이건? 아, 기장이 좀 크긴 하네. 그래도 따로 맞출 거니까 별로 상관은 없겠지. 이 원단은 어떠려나?”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아, 정말, 조금만 더 성의 있게 골라줘!”

“그래서 내가 별로 도움이 되진 않을 거라고 했잖아…….”

하라다 무테이는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기도 벌써 십여 분 째였다. 저 멀리서 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그의 친우, 우츠기 란기리는 머지 않은 유학에 대비해 새로 정장을 맞춰야겠다며 오늘치의 강의가 끝나자마자 무테이를 반쯤 떠밀다시피 이 양장점으로 데려와 소파에 앉혀두고는 그동안 이 원단 저 원단에 가봉된 옷까지 이리저리 대어 보며 틈틈이 벗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희생된 샘플 원단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들고 왔을 텐데, 매일같이 가방 속에 들고 다니던 책들이 꼭 이런 날에만 없었다. 양장점의 환경─옷감의 냄새와 안쪽에서 들려오는 재봉틀의 소리, 아늑한 내부의 구조는 불쾌하다기보단 오히려 안정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역시 별달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행위를 십여 분째 관조하기에는 좀이 쑤셨다. 무테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뒤쪽의 재단사를 바라보았다. 과연 단골집이라더니 이런 광경도 익숙한 건지 그 노년의 남성은 멀찍이 떨어져서는 미소를 지은 채 제 벗이 던지는 질문들에 답할 때 외에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무테이는 란기리가 여기서 대체 얼마나 많은 양복을 해치웠을지 머릿속으로 잠시 가늠해보려다 그만두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저를 쳐다보는 란기리의 얼굴이 보였다.

“드레스코드든, 미학적인 부분이든 네가 나보다 훨씬 잘 알 것 아냐. 애초에 난 옷에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편도 아닌 데다, 너와 달리 양장이 취향도 아니고.”

“그런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니까. 내 말은, 자네가 보기에 어떻느냐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왜 중요한 건데?”

“그야 함께 유학 가는 처지인 만큼 하루 종일 붙어 다닐 것 아닌가. 기왕이면 둘 다 눈이 편하고 조화로운 쪽이 좋지 않겠어?”

그러더니 란기리는 손에 든 원단들을 다시 테이블 위에 올려두더니 소파에 팔을 걸친 채 무테이 쪽으로 몸을 기댔다. 말은 아주 청산유수지. 빤히 바라본 맞은편의 얼굴은 언제나와 같이 웃는 낯이었다.

“이왕 온 김에 자네도 양장 하나 더 맞추는 건 어때? 여기, 꽤 실력이 좋거든. 물론 품질도! 옷이든 뭐든 선택지는 많을수록 좋다, 가 내 지론이란 말씀이야.”

“지론이라. 그렇다면 내 지론은 ‘뭐든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야. 나는 이미 있는 양복들로도 충분해. 그리고 네 양복은 네 취향껏 알아서 골라. 끝.”

“매정해!”

그게 아무 말 없이 이런 데로 끌고 온 사람이 할 말인가. 무테이는 코웃음으로 답하며 성의 없이 아무 곳이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 고르기 어려우면 저거라도 입든가.”

“응?”

란기리는 홱 고개를 돌리더니 잠시간 말이 없었다. 아니, 조금 길게. 양장점에 있는 옷이라봐야 그게 그거지 않겠는가 하는 ─저 뒤에 있는 재단사가 들으면 기함할 법한─ 생각에 대수롭잖게 아무거나 가리킨 것이었으나 직감상 지금의 정적은 대수로운 것에서 비롯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테이는 슬며시 제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양복 하나가 덩그러니 진열되어 있었는데,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몹시 정교하게 재봉된(여기까진 괜찮았다) 제법 큰 기장의(여기까지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옅은 분홍색(이 부분이 그다지 괜찮지 못했다) 양복이 있었다.

그래, 분홍색……. 분홍색 양장이 왜?

아니, 있을 수야 있지만 통념상 이런 곳에, 그것도 대놓고 진열되어 있는 건 역시 이상하지 않나?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그걸 바라보자 싱글벙글 웃고 있던 재단사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와서는 옆에 있던 흰 천으로 양복을 덮었다. “주문제작품입니다.” 아, 그렇군요. “저, 이것에 대해서는…….” 예, 못 본 것으로 하겠습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안도하는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과연.”

그리고 이어서 노인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한 크기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과연, 과연. 그랬던 거군. 이 우츠기 란기리, 또다시 자네에게 탄복하지 않을 수 없네……! 분홍색이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그대는 내가 사회의 통념이나 선입견을 벗어나기를 바랐던 거지. 그것이 자네의 생각이라면 나 또한 기꺼이…….”

“그만.”

“넵.”

란기리는 입을 합 다물곤 거기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하더니 실실 웃으며 다시 뒤돌아섰다.

“그럼 원단은 알아서 고를게. 아아, 영 아쉽네. 자네가 골라주는 옷을 한번쯤은 입어보고 싶었는데.”

“내가 고르면 검은 조끼에 녹색 재킷에 갈색 바지가 될 걸.”

“그건 그냥 자네잖아.”

“잘 아네.”

“그렇다면 설마 나에게 그대와 같은 옷을 입히겠다는 그런 욕망이?!”

“나가도 되나?”

“아아아안돼!”

란기리는 소파에서 일어서려는 무테이를 붙잡았다. 와중에 역시 매정하다느니 하는 앓는 소릴 냈지만 무테이의 입장에서는 뭐 어쩌라고…….

그 상태로 일관하니 란기리도 결국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터덜터덜 돌아가 다시 원단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꼴이 꼭 디스크 환자 같군……. 무테이는 생각했다. 그럼 그동안은 또 무얼 하고 있는담. 원단을 골라도 실측하고 재단사와 이야기를 나누면 또 한참이 걸릴 텐데. 그때 옆쪽에서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무테이의 눈에 들어왔다.

"아하." 

심심풀이용은 되겠군. 무테이는 란기리가 옷을 고르는 사이 그것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소동을 피웠는데 한 시간 정도면 일찍 끝났네.”

“뭐어, 단골이니까. 모호하게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서는 그대로 만들어주시거든. 이번에는 그렇다 쳐도, 나중에 자네도 한 번 이용해봐.”

“기억은 해 두지. 그보다도 정말 무슨 속셈이야? 날 데려온 건.”

“속셈이라니, 말이 너무 음험해 보이지 않나? 나는 정말 순수하게 그대의 식견이 궁금했을 뿐이야. 실은, 당연히 책을 가져왔을 줄 알고 따분하면 어련히 그걸 읽으려니 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심심한 사과를…….”

“됐어. 무료하긴 하지만 그 정도 방치되는 건 이골이 났으니. 학교에서 두어 시간 동안 대기하고 있는 것보다야.”

“아, 그건 확실히 그럴지도.”

란기리가 이를 드러내며 싱글 웃었다. 무테이는 슬쩍 그 낯을 쳐다보더니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가방을 뒤지며 무언가를 꺼내 란기리에게 건넸다. 벨벳색의 자그만 상자였다.

“이게 뭐야?” 란기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직접 열어서 확인해.”

눈을 끔뻑이던 란기리가 상자를 건네받고는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안에는 두툼한 시트 위에 자그만 장신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란기리는 가만히 그걸 바라보더니 보석함째로 이리저리 돌리며 세세한 모습을 확인했다. 

“카메오……브로치?”

잠시 뒤 란기리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중얼거리자 무테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무료해서 양장점을 둘러보니 장신구도 판매하고 있더라고. 품질도 꽤 좋아 보이던걸.”

확실히, 그랬던 것도 같다. 양복과 함께 장식할 만한 것들이 여럿 있었지. 란기리는 머릿속에서 기억을 되살렸다.

“거의 네가 떠밀다시피 했지만, 결국 양장은 못 골라줬으니까.”

그러니까, 그 대신 장신구를 골랐다는 걸까. 나름대로 제 말을 신경써줬다는 것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여튼 제 벗은 남에게 완전히 모질지는 못한 면이 있었다. 이러니까 자꾸 떠밀게 되는 것 아닌가. 본인은 알고 있을는지.

“아, 무테이…… 나 정말 감동했어! 아아, 그야말로 감개가 무량해. 음, 그래. 자네가 골라준 장신구란 말이지. 그 사실만으로도 이 얼마나 진귀한 것인가! 그런데 어째서 카메오지? 그대의 취향은 아닐 것 같은데, 따로 이유라도 있을까?”

무테이는 란기리의 과장된 언사에 슬쩍 질린 표정을 짓더니 덤덤하게 답했다.

“별 이유는 없어. 양장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쪽에 따로 조예가 없으니, 단순히 너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장신구를 골랐을 뿐이야.”

“나와 잘 어울리는 장신구라.”

  란기리는 다시 장신구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나무줄기처럼 보이는 타원형의 금빛 프레임 안에 고동색의 배경이 갇혀 있었고 그 위에는 새하얀 인물의 옆모습이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조각된 미형의 인물은 여인처럼 보이기도 했고, 소년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 쉽게 성별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전반적으로 조화로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각의 솜씨가 몹시도 정교한 것에 비해 약간은 이질적인 부분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기도 했다.

“흐음, 자네에게 나는 이런 이미지라는 건가?”

“그리 깊게 생각한 것도 아니니 뚫어져라 쳐다봐야 더 나올 것도 없을걸. 세세한 부분보다는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느낌의 영역이니까, 오히려 감상이 매몰될지도.”

“아하.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싫─어! 잔뜩 뚫어져라 쳐다보고 내 마음껏 의미를 덧붙여버릴 거야. 자네에게 이런 걸 언제 또 받아보겠나? 싫다면 내가 이런 선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덧붙이지 않도록 아주 질리게 만드는 건 어때? 나 스스로도 그런 날이 올지는 확신할 수 없다만!”

“헛수작…….”

무테이는 그리 말하면서도 피식 웃었다.

“잃어버리지나 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내 보관함 안에 소중하게 간직해둘 테니까. 그 중에서도 아주 좋은 자리에 말이야.”

“보관함에도 좋은 자리라는 게 있나?”

“그럼! 다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느낌의 영역이지.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이니까 당연하지 않겠어.”

“그런가.”

무테이는 나름대로 납득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옷에 조예가 없는 저를 양장점으로 데려와 괴롭힌 것도 바로 그 느낌의 문제라는 걸 납득했는지는 또 모를 일이다만.

“아, 그러고보니 그 카메오에 그려진 인물, 주인장이 이야기 해줬는데.”

“정말? 누군데, 누군데?”

무테이는 눈을 빛내며 물어오는 란기리를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말하지 않을래.”

라고 대답 하곤 혼자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어?!”

란기리는 한 박자 늦게 깨닫곤 걸음을 재촉했지만 그새 멀리까지 간 무테이를 따라잡기는 역부족이라 헐레벌떡 달려가기 시작했다.

“잠깐, 왜?! 누군데?! 그보다도 같이 가!”

"싫어. 알아서 찾아내."

"뭐어?!"

어째서?! 하지만 무테이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결국 그 상태로 잠시간 도주 아닌 도주와 추격 아닌 추격이 이어졌고, 가까운 커피하우스에서 란기리가 커피를 사는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카메오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무테이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란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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