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제트 농구클럽 샘플

태웅대만

임시디디함 by 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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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건 사고가 아니었다.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을 벅벅 문지르던 대만이 차에 타자마자 춥다 추워를 연발하며 뒷자리에 아무렇게나 팽개쳐 있는 바람막이를 껴입었다. 작년에 구단에서 지급받았던 바람막이의 지퍼를 목 끝까지 잠그고 휴대폰을 차량용 거치대에 올렸지만 내비게이션이 연결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만이 휴대폰 액정을 톡톡 두드려 보았으나 까만 화면은 요지부동이었다.

 

“왜 이래?”

 

고개를 갸웃거리며 충전기를 연결하자 까만 액정에 충전 중이라는 아이콘이 켜졌고 숫자는 0%였다.

 

“뭐야. 겨울도 아닌데 벌써 배터리가 방전됐다고?”

 

한 시간 전쯤 눈을 떴을 때 60% 넘게 충전되어 있는 걸 보았으니 의아한 일이었다. 대만은 차에 시동을 거는 것도 잊고 휴대폰 전원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쌀쌀하던 차 안의 공기에 익숙해지고 목 끝까지 올린 지퍼가 답답해졌을 무렵에야 휴대폰 액정이 켜졌다. 그와 동시에 알림창이 초 간격으로 후두두두둑 떠오르며 요란을 떨었다.

 

“……뭐, 뭐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메시지가 쏟아지는 와중 전화도 끊임없이 들어왔다. 하나가 울리다 끊기면 곧바로 다음 전화가 떴다. 액정에 뜨는 이름은 알고 지내던 기자며 구단 직원, 같은 팀의 선배와 후배 가릴 것도 없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대만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 사고 쳤구나. 이토록 연락이 쏟아진다면 대형 사고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짐작 가는 것이 없어 문제였다.

 

지난주의 컵대회는 잘 마무리되었고 이번 주 주말 정규 리그 개막전이 열린다. 대만은 개막전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중요한 시기였으니 매일 집과 체육관을 오가는 것 외에 특별한 일정도 잡지 않았다. 대체 뭐지? 뭐지? 뭐지? 그러는 사이 알림은 끊임없이 쏟아졌고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대만이 메시지를 읽어보기 위해 몸을 휴대폰 가까이 붙였을 때였다. 스포츠 주간지 기자의 전화가 끊기자마자 새로운 전화가 들어왔다.

최성현 감독님

대만이 속한 팀의 감독이었다. 이 전화만은 못 본 척할 수가 없어 대만은 냉큼 수화기 버튼을 눌렀다.

 

“네, 감독님!”

“정대만, 너 어디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대만은 수화기 너머의 감독에게 보일 리가 없는데도 괜히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저, 저 지금, 그, 클럽 가는 길입니다!”

 

아직 차에 시동도 걸지 않았지만 우선 그렇게 둘러댔다. 그러나 대만의 현재 행선지가 중요한 게 아닌 듯 최 감독은 대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야, 너 진짜 이따위로 할 거야?”

“네? 감독님, 그, 죄송한데 제가 아직 무슨 일인지 잘….”

 

대만의 머릿속이 전에 없던 속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최 감독의 반응으로 보아 보통 사고가 아닌 것은 확실한데…. 나 술 마시고 사고 쳤나? 아니, 최근에는 집 밖에서 술 마신 적 없다고! 마지막이 8월 아니었나? 그것도 영걸이랑 딱 한 잔 마시고 바로 집에 들어갔는데? 그럼 뭔데, 도박? 아니야, 도박장 근처에도 간 적이 없는데 무슨 도박이야! 그러니까 대체 뭐냐고!

 

“감독님, 제가 알아보고 다시 연락 드리겠….”

“너 서태웅이랑 결혼했다며.”

 

조용한 차 안에 최 감독의 말은 마치 사형 선고처럼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휴대폰을 향해 뻗었던 대만의 손이 허공을 맴돌다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갈무리하지 못한 시선이 계기판을 거쳐 핸들, 기어, 그리고 허벅지 위에 올라간 손으로 돌아왔다.

 

“정대만! 왜 대답이 없어? 오늘 아침에 너랑 서태웅이 결혼했다는 기사 떠서 난리 난 거 알아? 지금 너 때문에 구단 전화기 다 내려놨어, 이 새끼야! 빨리 상황 설명하라고!”

 

최 감독의 고함 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대만의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긴장한 탓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도 느슨해졌다. 시간을 확인하자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출근 시간도 지났으니 클럽하우스까지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았다.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30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뭐? 뭣, 야, 정대….”

“그리고 서태웅이랑은 결혼한 게 아니라 이혼했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 전원을 껐다. 통화 내내 쏟아지던 알림도 꺼지고 차도 조용해졌다. 대만은 거치대에서 휴대폰을 뽑아 조수석으로 던졌다.

 

“젠장….”

 

태웅과의 결혼은 고작 6개월 만에 파국을 맞았다. 27년 인생에서 6개월은 길지도 않은 시간이건만 그 짧은 순간들은 이따금 대만을 괴롭혔다. 목을 조이는 것 같은 지퍼를 반쯤 내리고 숨을 크게 뱉었다. 그리고 조수석 시트 위에 내팽개친 휴대폰을 힐끔거린 뒤, 차를 출발시켰다.

 

대만이 클럽하우스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감독에게 말했던 예상 시간보다 길어진 건 대만이 무사히 클럽하우스에 들어오기까지 가히 007작전급의 소란이 오갔기 때문이었다. 클럽하우스 정문에 몰려있는 기자들 때문에 차를 근처의 공영 주차장에 넣어두고 구단 직원의 픽업을 기다렸다. 그리고 클럽하우스 입구를 통과할 때 기자들과 마주치면 안 된다며 뒷좌석에 잔뜩 웅크린 채로 겨우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체육관엔 얼굴 한 번 비추지 못하고 곧장 감독실로 불려 갔다. 오며가며 복도에서 만난 사람들은 차마 어찌 된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감독실 앞에는 최 감독이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대만을 보자마자 얼굴을 향해 주먹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며 소리 없이 욕을 했다. 작전 타임마다 시원하게 성질을 부리는 모습으로 유명한 감독이 이제 와 선수에게 욕을 자제할 리 없어 대만은 퍽 의아했다. 그러나 감독실에 들어가자마자 상황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구단 단장이며 이사진, 팀을 후원하는 기업의 담당자까지 죄다 몰려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감독은 앉을 곳도 없었다. 대만은 최 감독과 선수 매니저인 박상철, 그리고 팀의 주장 김호근과 함께 공손히 양손을 모으고 섰다. 곧이어 홍보팀 팀장이 감독실로 들어와서 그들의 옆에 자리했다.

 

“대만아,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드려.”

 

호근이 대만의 옆구리를 꾸욱 눌렀다. 구단 직원의 차로 실려 오는 동안 그의 휴대폰으로 최초 발표된 기사를 보았다.

 

대전 레드암스의 서태웅(25)과 인천 원더스의 정대만(27)은 4년 전 미국 뉴욕시에서 약 2주에 걸쳐 혼인 신고를 진행했다. (중략)

 

“…기사에 적힌 건 전부 사실입니다.”

 

어이고…. 이게 무슨…. 대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탄식이 터졌다. 대만은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한차례 소란이 지나가고 조용해지자 대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류를 제출하고 6개월 뒤에 이혼했습니다.”

“허, 참….”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도 그즈음입니다. 나쁘게 헤어진 건 아니지만 서로 바쁘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만의 말을 듣고 있던 홍보팀 팀장이 감독실을 나갔다. 감독실을 맴도는 공기는 무거웠지만 대만은 짓눌리지 않았다. 결혼과 이혼은 온전히 선수의 사생활이었다. 대만의 팀에도, 다른 팀에도 부도덕한 사유로 이혼을 하거나 스캔들로 기사에 이름이 등장하는 선수가 많았다. 그들은 멋쩍게 웃으며 너무 열심히 놀았다며 반성도 하지 않았고 구단에서도 가벼운 주의만 주고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런 선수들보다 팀 입단 전에 정당한 절차로 진행했던 결혼과 이혼으로 더 많은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하는 것도, 그 이유가 고작 상대의 성별 때문이라는 것도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개막 전에 선수의 사생활 이슈로 팀 이름이 오르내리는 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으니 대만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 그러면 둘이 사귀다 결혼한 거야?”

“네.”

“서태웅이랑 정대만, 둘이, 뭐, 그런 사이였다고?”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따가웠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에게 결혼 절차까지 설명해줘야 하다니. 자꾸만 입안이 말랐다. 하지만 똑같은 일을 겪고 있을 태웅이 떠올라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대만의 팀이 난리가 난 만큼 태웅의 팀도 발칵 뒤집혔을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태웅은 지금 리그 최고의 스타였으니 이런 가십거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말주변도 없는 놈인데 어쩌고 있으려나. 잠시 걱정도 했지만 대만은 금세 머릿속에서 태웅을 지웠다. 방금 단언한 대로 둘은 이미 4년 전 이혼했으며 지금은 완전히 남이었으니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잠시 뒤 감독실을 나갔던 홍보팀 팀장이 다시 들어와 종이 몇 장을 사람들에게 돌렸다.

 

“언론사에 보낼 보도자료 초안입니다. 대만아, 너도 읽어보고 고칠 거 있으면 말해라.”

 

오늘 특정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인천 원더스 소속 정대만의 기사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는 대전 레드암스의 서태웅과 이혼을 하였으며 좋은 선후배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략) 이번 일로 농구를 사랑하는 팬들과 농구협회 관계자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인천 원더스의 임직원과 선수 일동은 죄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정대만은 현재 개막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려 리그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므로 부디 억측이 확산되지 않도록 도움 주시면 감사하겠다.

 

켜켜이 쌓인 문장마다 숨겨진 가시를 읽을 수 있었다. 노골적인 적대와 비난에 찔려도 아프기는커녕 허탈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대만은 마지막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3일 뒤 리그가 시작된다. 개막전 엔트리뿐만 아니라 선발 출장까지도 확정되어 있었다. 대만은 지금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다.

 

“…저는 수정할 부분 없습니다.”

 

그러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났다. 다 읽은 종이를 홍보팀 팀장에게 던지다시피 돌려주며 정대만이가 고칠 게 없다는데 우리가 입 댈 부분은 없다며 비아냥거렸다. 남자 새끼들끼리 무슨 결혼을 하겠다고 이 난리를 쳐서는…. 주인 잃은 말에 대만이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하나둘씩 감독실을 나서자 연신 허리를 숙이던 최 감독도 따라 나갔다. 방에는 성철과 호근만 남았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성철이었다.

 

“얌전하던 정대만이 사고를 거하게 쳤네.”

“…….”

“하필 타이밍이 이러냐. 팀 분위기 최악일 때….”

 

호근이 성철의 눈치를 보다 대만의 어깨를 툭 쳤다.

 

“아, 형. 됐어, 어떡하냐, 그럼. 이미 이혼했다는데. 근데 결혼도 아니고 이혼은 대단하긴 하다, 그치? 그것도 그 서태웅이랑.”

“아니, 서태웅이 게이였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 서태웅이 게이라니.”

“그러게. 둘이 결혼했다는 건 서태웅이 게이라는 소리네. 그, 뭐냐, 형 걔 알죠. 호크스에 해영이, 해영이가 전에 좋아하던 아이돌, 이름 뭐지? 예솔? 어쨌든 걔가 서태웅 좋아한다고 그래서 해영이 울고불고 난리 났었잖아. 그래서 호크스에서 서태웅 만나면 복수할 거라고 난리 치던데. 오늘은 예솔이랑 해영이 둘 다 울겠네.”

“…….”

“야, 정대만. 농담이야. 고작 이런 말로 죽을상 하지 마. 얼굴 펴고 체육관이나 가자. 운동은 해야지.”

“…네.”

 

호근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지구가 두 쪽이 나더라도 농구는 해야 했다. 호근을 따라 체육관으로 향하던 대만이 휴대폰을 힐끔거렸다. 무음으로 바꿔둔 덕분에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알람은 끊임없이 떴다. 결국 대만은 호근을 먼저 보내고 인적이 드문 비품 창고로 들어왔다. 불도 켜지 않은 깜깜한 방에서 휴대폰을 들자 번쩍거림에 눈이 부셨다. 대만은 모든 알람을 무시하고 태섭의 이름을 찾았다. 통화버튼을 누르고 신호가 가는 사이에도 휴대폰은 알람을 뱉어냈다. 대만이 벽을 더듬거리며 전등 스위치를 찾는 사이 전화를 받은 태섭이 대만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야이…, 놀랬잖아. 왜 소리를 지르냐?”

[내가 지금 소리를 안 지르게 생겼어요! 내 메시지는 봤어요?]

“몰라, 나 지금 메시지 천 개 정도 와서 네 메시지 못 찾아.”

 

평소에는 그렇게 쉽게 보이던 스위치가 오늘따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대만은 불을 켜는 것을 포기하고 벽에 등을 기댔다.

 

[진짜 서태웅이랑 결혼했어요? 아니, 진짜야? 무슨 우리한테도 한마디 입도 뻥긋 안 하고….]

“더 놀라운 거 얘기해주리? 결혼이 아니고 이혼이다.”

[……뭐? 뭐요? 이, 이혼?]

 

예상대로의 반응에 대만은 피식 웃었고 그걸 들은 태섭은 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노발대발 고함을 질렀다.

 

“좀 있다 기사 나갈 거니까 그거 읽어. 근데 송태섭아, 너 서태웅한테 연락 좀 해 봐라. 그거 나랑 서태웅밖에 모르는 일인데 누가 그렇게 자세하게 기사를 낸 건지 좀 알아야겠다.”

 

아침에 뜬 기사에는 두 사람이 혼인 신고를 했던 시기와 장소가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나도 아무한테도 말 안 했고, 서태웅도, 뭐 뻔하잖아. 걔가 어디 가서 그런 일 떠벌릴 애도 아닌데. 이게 대체 어디서 흘러나온 소식인지.”

 

아이러니하게도 결혼과 이혼을 선택한 이유는 같았다. 둘의 관계를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어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두 사람의 관계를 세상에 드러내게 될 줄이야.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어. 4년 전 일인데. 됐으니까 서태웅 한 번 찔러봐. 걔 아는 거 있는지.”

 

이후로 태섭과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 전화를 끊은 대만이 휴대폰을 꽉 쥐었다. 어둡고 조용한 창고에 심장 뛰는 소리가 쿵쿵 울렸다. 태섭에게 큰소리치긴 했지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서태웅이 게이였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 서태웅이 게이라니. 그러게. 둘이 결혼했다는 건 서태웅이 게이라는 소리네. 조금 전 성철과 호근이 나눈 대화가 맴돌았다. 대만의 앞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데 바깥에선 무슨 말이 떠돌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만 지금은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숨을 크게 내쉰 대만이 창고를 나와 체육관으로 향했다.

 

지금 원더스는 벼랑 끝에 몰려있었다. 지난주의 컵대회에서 주전 가드와 포워드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그러니까 컵대회에서 힘 빼지 말랬잖아! 감독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가드인 형섭은 팔꿈치 부상, 포워드인 준영은 발등 부상으로 각각 6주와 8주 동안 결장이 확정되었다.

 

우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웃는 사람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바로 인천 원더스의 라이벌 팀인 대전 레드암스가 그랬다. 그러나 레드암스만큼이나 대만에게도 틀림없는 호사였다. 대만은 입단 이후 줄곧 발군의 실력을 뽐냈지만 대만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재작년 이적 시장에서 비싼 돈을 주고 데려온 형섭을 메인 가드에서 내리긴 힘들었다. 3일 뒤의 개막전에 대만은 선발로 출전할 예정이었고 이건 형섭이 다치지 않았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대만에겐 다시 없을 기회였다. 남의 부상으로 잡게 된 기회가 뭐가 떳떳하냐 말하는 사람은 스포츠를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뭣도 모르고 농구공만 잡을 수 있으면 그저 좋았던 고등학교 시절과는 달랐다. 프로에선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지 않으면 코트에 설 수 없었다. 감독 앞에서 뒷구르기를 하며 재롱을 떨어서라도 기회를 잡아야 했다. 옷을 갈아입고 체육관에 들어서자 대만에게 시선이 꽂혔다. 이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으니 대만은 당황하지 않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콱 씨!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빨리빨리 다녀라. 엉?”

“넵, 죄송합니다.”

 

호근의 너스레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풀리고 대만과 친하게 지내던 선수 두어 명이 다가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 묻길래 애매하게 웃으며 그렇게 됐다고 말하자 대만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대만은 농구공을 들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농구공만 잡을 수 있다면, 농구 코트 위에 설 수만 있다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질 작정이었다.

 

몇 시간 뒤, 원더스의 홍보팀에서 보도자료를 돌리자 포털 사이트에 수십 개의 기사가 올라갔다. 대만의 휴대폰은 한시도 쉴 틈이 없이 전화가 쏟아졌지만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태웅의 구단인 대전 레드암스에서 원더스와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보도자료를 돌린 건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서였다.

 

*

 

다음날 백호와 태섭, 대만 세 사람은 태섭의 집에 모였다. 정규 리그가 시작되면 한동안은 일정을 맞추기가 어려우니 개막 전에 얼굴이나 보자는 태섭과 백호의 권유였다. 그리고 대만은 그들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못 이기는 척 태섭의 집으로 왔다. 아니나 다를까 치킨이며 피자, 돈까스에 아이스크림까지 잔뜩 시켜서 먹은 뒤 화제는 자연스럽게 대만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내가 서태웅한테 전화를 세 번이나 했다고요. 근데 절대 말 안 해주던데?”

“대만군, 어떻게 우리한테까지 말을 안 할 수가 있어? 나 진짜 섭섭해!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어!”

 

이미 다 식어서 눅눅해진 돈까스를 뒤집으며 대만이 백호를 흘겼다. 너 소연이랑 사귀기 시작했을 때 나한테 말했냐 안 했냐? 그러자 백호가 윽, 하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한나와 사귀기 시작한 첫날, 북산 단체 메시지방에 공지로 올린 태섭은 그런 면에선 찔릴 것이 없었기에 백호의 지원 사격에 나섰다.

 

“아니, 백호 말이 맞죠! 어떻게 우리한테도 비밀로 해요? 진짜 독한 양반일세.”

“너희도 기사 봤을 거 아냐, 6개월 뒤에 바로 이혼했다고. 그거 진짜야. 근데 뭐 잘한 일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겠냐….”

 

대만이 얼버무리며 돈까스를 꿀꺽 삼키자 태섭이 대만의 손에서 젓가락을 빼앗았다.

 

“우리는 서태웅이랑 정대만이 사귀는 줄도 몰랐다고! 대체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된 건데요?”

“야, 됐어. 옛날 일이라니까?”

“그러니까 언제부터냐고!”

 

백호가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그러자 태섭이 동조하며 젓가락을 붕붕 휘둘렀다. 이제는 피할 곳이 없음을 직감한 대만이 한숨을 푹 쉬었다.

 

“…사귄 건 나 졸업식 때부터고, 그 전부터….”

“조, 졸업식? 북산?”

 

대만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섭이 들고 있던 젓가락과 백호가 들고 있던 숟가락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두 사람이 떨어진 수저를 줍기 위해 몸을 숙인 사이 대만이 멋쩍게 미간을 문질렀다. 먼저 고백한 건 태웅이었다. 윈터컵 개막을 일주일 앞두고 있던 어느 저녁 태웅은 숨을 고르며 바닥에 누워있던 대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요즘 선배가 꿈에 자주 나온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마음조차 자각하지 못한 태웅은 그렇게 서투른 방식으로 대만을 붙잡았다. 대만은 태웅보다도 먼저 태웅의 감정을 눈치챘다. 그래서 내 꿈에는 너 안 나오는데? 한 마디로 태웅을 거절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으니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다. 그 뒤로 태웅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끝날 뻔했던 두 사람은 대만의 졸업식 날 다시 불이 붙었다. 결국 태웅을 찾아간 대만이 네가 너무 좋다며 그동안 받은 꽃다발을 전부 태웅의 품에 안겨주었다. 하지만 시간은 많이 흘러 알록달록하던 꽃다발의 색도 전부 바래었고 그때를 회상하는 것조차 달갑지 않게 되었으니 모든 건 과거에 불과했다.

 

“설마, 대만군 아직도 좋아해?”

“뭐?”

“여우놈을….”

 

조심스러운 백호의 말에 당황한 대만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대만을 보는 백호와 태섭의 얼굴이 떨떠름했다. 대만이 둘을 다그쳤지만 말은 오가지 않고 눈빛만 주고받았다. 추궁을 견디다 못한 백호가 한참 뒤에야 사실을 실토했다.

 

“지금 대만군 완전 사랑하는 사람 떠올리는 눈빛이라고….”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먼저 이혼하자고 한 거 나야.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사랑 타령을 해.”

 

대만은 백호의 말에 한 번 웃고 말았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입안에서 어색하게 굴러다녔다. 둘 중 먼저 이별을 고한 건 대만이었다. 대만에겐 벅찬 관계였다. 이별 통보는 전화로 했고 묵묵히 대만의 말을 듣고만 있던 태웅은 알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도 오가지 않았다.

 

“영원할 거라 확신했으니까 시작한 관계였는데, 영원하지 않더라. 근데 뭐, 어쩔 수 없지. 나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과자는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매점에서 맨날 사 먹던 옥수수빵은 그 빵 만든 회사 전화번호까지 다 외우고 다녔는데 이제는 빵이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 다 그런 거 아니겠냐?”

“…….”

 

대만의 말에 태섭과 백호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고 들고 있던 수저도 내려놓았다. 굳어버린 분위기에 머쓱해진 대만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도 너희는 영원한 사랑할 거잖냐. 너는 한나랑, 너는 소연이랑. 그치?”

“아, 당연하지!”

“그니까 나중에 너희가 가르쳐주라. 영원한 사랑이 뭔지.”

 

태섭이 빼앗아 갔던 젓가락을 다시 쥐고 대만이 피클 하나를 입으로 옮겼다. 달고 시큼한 맛이 입안에 확 퍼졌다. 태섭과 백호는 앞다투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자신들의 인생 계획 속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한나와 소연의 존재를 주장했다. 대만은 킥킥 웃으며 둘을 관전하다 여느 때라면 가장 먼저 사라졌을 치킨의 다리 부위를 발견하고 냉큼 집었다.

 

이후로 세 사람은 농구 얘기도 조금 했다. 시즌 개막이 코앞이었으니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서로의 고민을 주고받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고 다음에는 코트에서 만나자며 백호와 대만은 태섭의 집을 나왔다.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난 인연은 아직 끈끈하게 이어졌지만 그때와는 달리 각자 지켜야 할 팀이 있었고 책임이 무거워졌으며 걱정도 많아졌다. 그것을 반증하듯 백호와 대만은 고등학교 때는 꿈도 꾸지 못했을 각자의 차를 직접 운전을 하며 집으로 향했다.

 

태섭의 집에서 대만의 집까지는 차로도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대충 씻고 나와 휴대폰을 확인하자 구단의 단체 메시지 방에 내일 있을 미디어데이에 감독과 주장이 나간다는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미디어데이에서 태웅과 대만의 일은 언급하지 않기로 협회 차원에서 기자들에게 부탁해두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만은 물론이고 태웅도 리그에서 슈퍼루키로 꽤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으니 괜한 스캔들로 스타를 잃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태웅의 유명세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며 대만이 피식 웃었다.

 

대답 대신 체크 표시를 하나 찍어두고 휴대폰을 내려두려던 찰나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선배, 저 태웅이에요. 지금 전화해도 괜찮아요? 대만은 저도 모르는 사이 아주 천천히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하루 동안 대만의 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많은 장난 전화와 메시지가 왔다. 대만은 받는 족족 스팸함에 처넣어버리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것도 이전에 받은 메시지들과 비슷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온 태웅의 이름. 하지만 이건 누군가의 장난이 아니었다. 태웅이 처음 휴대폰을 사고 대만에게 번호를 가르쳐주었을 때부터 변하지 않는 문장이었다. 너 사실 이거 어디 복사해뒀다가 맨날 붙여넣기 하는 거지? 매일 똑같은 메시지만 받던 대만이 휴대폰을 가리키며 낄낄거리자 태웅은 드물게 눈썹을 치켜떴다. 선배한테 보내는 건 전부 내가 써요. 뾰로통한 얼굴이 귀여워 대만은 태웅을 붙잡고 한참을 쪽쪽거렸다. 그런 날도 있었다. 다시 오지 않을 날들이었다.

 

이 메시지를 받은 게 몇 년 만이더라. 대만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소파에 앉았다. 이대로 답을 하지 않는다면 태웅은 절대로 전화를 하지 않을 것이다. 정대만이 아는 서태웅은 그런 사람이었다. 대만은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휴대폰을 들었다.

 

 

 

 

 

 

2. 기적을 만드는 남자

 

만약 대만에게 22살의 봄을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진절머리를 칠 것이 분명했다. 대신 22살의 가을을 말하자면 대만의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나날이었다. 고작 몇 개월 차이로 이렇게 감상이 바뀌는 이유는 간단했다. 태웅을 향한 사랑이 너무 깊었던 나머지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은 한계가 있어서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었다. 대만은 22살의 봄을 모두 책상에 꼴아버린 덕분에 22살의 가을, 4개월 동안 태웅과 같이 살 수 있었다.

 

3학년 1학기가 시작하자마자 학과 게시판에서 홍보 포스터를 발견한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단기 어학연수 지원> 각 학과마다 성적 우수생 한 명을 뽑아 결연을 맺은 학교에서 단기 어학연수를 시켜준다는 내용이었다. 자신과는 연이 없어 보이는 내용을 심드렁하게 읽다 익숙한 학교의 이름을 발견한 대만은 당장 학교 본관 2층의 서점으로 달려가 전공책을 구입했다. 그렇게 대만은 3학년 1학기를 농구하고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 전부 공부에 쏟아부었다.

 

농구부에선 정대만이 드디어 미쳤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지독하게 공부했다. 체육 특기생으로 입학한 탓에 일반 전형인 학생들과는 어쩔 수 없는 학력 차이가 있었다. 그걸 뛰어넘기 위해서는 어떠한 요령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열심히 해야만 했다. 그렇게 지옥 같았던 한 학기가 지나가고 여름방학이 시작했다. 훈련이 끝나고 락커룸으로 돌아온 대만은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찍힌 것을 보았다. 지도 교수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아자! 락커룸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냐 묻는 사람들을 헤치고 학과 사무실로 달려간 대만은 정확히 두 달 후 뉴욕행 비행기에 탔다.

 

대만은 3학년 2학기를 미국 뉴욕시의 대학에서 보냈다. 몇 개월 전 태웅이 입학한 학교였다. 두 사람은 학년은 달랐지만 같은 캠퍼스에서 생활했다. 대만은 그곳에서 수업도 들었고 시험도 쳤다. 물론 작은 문제도 있었다. 그곳의 대학 농구부에서 단기 교환학생은 받아주지 않았다. 소속 부원인 태웅과 대만의 한국 학교 교수들까지 동원되어 대만도 농구부에서 운동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과연 NBA 선수를 몇 명이나 배출한 명문 팀은 규율도 까다로웠다. 결국 대만은 혼자서 꾸준히 근력 운동을 하며 길거리 농구로 눈을 돌렸다. 취미로 농구하는 사람들 상대였으니 말할 것도 없이 백전백승이었다. 실컷 농구하다 해가 어둑해지면 태웅이 지내는 학교 근처의 작은 스튜디오로 돌아갔다. 열쇠를 돌리고 들어가면 자기보다 먼저 도착한 신발이 있을 때도 있었고 대만이 먼저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갈 때도 있었다.

 

“왔어요?”

 

그날따라 일찍 도착한 태웅이 빨래를 개며 맞아주었다. 대만은 사랑스러운 연인의 볼에 뽀뽀를 쪽 날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터는 정도로만 대충 씻고 나왔을 때도 태웅은 빨래를 개고 있었고 대만은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태웅아, 저녁 메뉴는 어제 먹던 거, 고기 조림 이걸로 한다?”

“네.”

 

대만이 반찬 그릇을 통째로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는 동안 빨래를 정리한 태웅이 다가와서 밥을 펐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농구공을 들고 집을 나섰다. 태웅은 이미 대학의 농구팀에서 훈련을 마쳤고 대만도 하루치 운동을 끝냈지만 스튜디오 근처의 낡은 농구장에서 두어 시간을 더 뛰었다. 이건 하루도 빠진 적이 없는 둘만의 루틴이었다. 전적으로 태웅의 고집이었다.

 

프로지명을 앞둔 선수에게 3학년 2학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대만이 굳이 말하지 않았으나 태웅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중요한 시기에 태웅과 보내기 위해 미국까지 와준 대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프로지명을 목표로 코치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 동안 대만은 이곳에서 근력 운동과 길거리 농구밖에 하지 못했다. 태웅은 늘 미안해했지만 그런 티를 내면 대만이 버럭 화를 냈다. 너 지금 나 무시하냐? 내가 고작 한 학기 쉬었다고 지명도 못 받을 것 같아? 그러면 태웅은 대만을 와락 껴안고 애정 표현을 마구 쏟아부었다.

 

태웅은 자신의 훈련을 빼먹는 한이 있더라도 대만과 농구하는 시간은 전력을 다했다. 매번 1대1만 하는 건 아니었다. 서로를 상대로 기술 훈련도 하고 폼을 봐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시간이 맞는 날엔 학교 캠퍼스에서 만나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었고 상대적으로 영어가 약한 대만을 위해 태웅이 3학년 과제까지 들여다보기도 했다. 물론 태웅의 영어도 완벽하진 않았으니 답을 찾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두 사람에게 중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서로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였다.

 

날이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대만의 귀국을 떠올렸다. 겨울방학까지 뉴욕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방학이 시작되면 대만의 학교 농구부에선 곧바로 합숙 훈련을 시작했다. 코치와 동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미 한 학기를 날려 먹은 대만이 그것마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뉴욕에서 보낸 시간이 꿈같았기에 다시 시작될 장거리 연애가 더욱 겁이 났다. 태웅도 대만도 티를 내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둘 사이에 침묵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대만의 귀국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태웅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대만은 태웅이 들고 있던 잡지를 뒤적거렸다. 학교에서 발행하는 정보성 잡지였다. 이곳에서 생활하기 위해 속성으로 영어를 배웠지만 아직 잡지를 시원시원하게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단어만 읽으며 대충 넘기던 대만은 유독 눈에 띄는 페이지를 발견했다.

 

Same-Sex Marriage

 

“동, 동성 결혼? 그러고 보니 미국은 가능하다고 했던가….”

 

더듬더듬 기사를 읽어나가자 학교에 동성 결혼 커플이 탄생했으며 학교 차원에서 축하를 보낸다는 기사였다.

 

“……결혼이라.”

 

지난 3개월의 생활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함께 일어나 아침을 먹고 같은 학교로 가서 각자 공부를 하거나 운동을 하고 돌아오면 상대가 있다. 이따금 싸울 때도 있었다. 수건의 세탁 방법이나, 간밤의 소리에 이웃이 항의하자 누구의 목소리가 더 컸네, 이런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 싸움마저도 기꺼웠으니 22살의 봄을 통째로 책상 앞에 바친 것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차피 한국에선 못할 거니까. 어때?”

 

그래서 대만은 씻고 나온 태웅을 앉혀놓고 기사를 보여주었다. 기사를 물끄러미 보던 태웅이 대만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태웅은 한참 동안 기사를 읽고 또 대만을 보았다. 그리고 잡지를 두 사람 사이에 내려놓았다.

 

“진심이에요?”

“뭐? 너 나랑 결혼 안 할 거야?”

“아뇨! 할 건데….”

 

좋고 싫음이 확실한 태웅이 드물게 망설이자 대만은 그것대로 빈정이 상해 꽥 소리를 질렀다.

 

“아, 됐다, 됐어. 서태웅은 나랑 결혼하기 싫은가 보네.”

“아니에요! 해요, 누가 싫대요? 그럼 서류 알아볼게요. 여기는 결혼 절차가 좀 복잡하다던데 우선 내일 오피스에 가서….”

 

태웅이 휴대폰을 들어 이것저것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액정을 보는 모습이 드물게도 들뜬 얼굴이었다. 대만은 그런 태웅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내일 오피스에 간다고? 무슨 말이지? 대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멍청한 소리를 냈다.

 

“어엉?”

“네?”

“내일 하자고?”

“…그럼요?”

 

덜 마른 태웅의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만이 예쁘게 개어둔 수건을 가져와 젖은 머리를 말려주며 말했다.

 

“난, 우리 나이 좀 더 먹고 하자는 말이었는데…. 너도 학생이고 나도 학생인데? 벌써 결혼은 좀 이르지 않냐?”

“……아. 그렇죠….”

 

돌아오는 목소리가 작았다. 태웅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대만이 수건을 던지고 얼굴을 확인하자 눈썹과 입가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괜히 말을 꺼냈나. 대만이 멋쩍게 태웅의 눈치를 살폈다. 나이가 나이니만큼 대만은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너무나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결혼을 떠올린다면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10년 뒤 정대만을 상상할 때 확신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농구와 서태웅 두 개밖에 없었으니까.

 

“야, 걍 하자. 결혼.”

“네?”

“어차피 할 건데 미리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네? 아니, 무슨….”

 

기껏 태웅을 생각해서 큰 결심을 했건만 태웅은 기뻐하기는커녕 조금 전보다 얼굴이 굳었다.

 

“이 형님이 프러포즈하는데 표정이 왜 그러냐.”

“떠밀려서 하는 거 싫어요.”

“야! 결혼을 누가 떠밀려서 해? 어? 너는 이 형님이 고작 그 정도로 형편없는 남자로 보이냐? 이 잘난 서태웅, 내 거라고 찜꽁해두려고 그런다.”

 

대만이 태웅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제 것을 갖다 박았다.

 

“절차 오래 걸린다고? 나 한국 가기 전에 끝내야 하니까 당장 내일부터 하자.”

“……선배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알아요? 결혼이라니….”

“나 여기서 지내는 거 너무 좋았는데, 넌 아니냐?”

“저도 당연히…! 좋았어요.”

 

발끈하다시피 동의하는 태웅이 귀여워 대만은 한참이나 웃었다.

 

“거봐. 우리 잘 맞는다니까. 근데 다시 이렇게 지낼 수 있는 날이 언제일지 모르잖냐, 그러니까 미리 예약하는 셈 치자.”

“…….”

“나중에 우리 나이 먹고 같이 살 땐 여기서 살았던 것처럼 알콩달콩하게는 힘들겠지? 싸울 일도 많을 거고…. 그래도 알콩달콩한 것도 싸우는 것도 다 너랑 같이하고 싶어. 서태웅 너랑만 하고 싶다고.”

 

두 사람은 다음 날부터 수업이 마치면 틈틈이 관공서를 돌아다녔다. 한국과는 달리 결혼 절차에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모자란 영어로 서류를 꼼꼼하게 작성하고, 절차를 공부하느라 일주일이 쏜살같이 흘렀다. 가장 큰 문제는 증인이었다. 서류를 들고 난감한 표정을 짓자 결혼식의 주례를 담당했던 전문 주례자가 흔쾌히 증인이 되어주었다. 원래는 안 된다고 했지만 동양인 두 명이 복잡한 행정절차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친절을 베풀어준 거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작지만 확실한 결혼식도 했다. 주례를 따라 혼인서약문을 낭독했고 그날부터 서태웅과 정대만은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

 

*

 

전화를 걸기 전에 문자를 보내는 게 태웅이라면 그 문자를 보고 전화를 걸어주는 건 대만의 역할이었다. 대만은 짧은 메시지를 몇 번 읽어보다 곧장 통화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연결음이 몇 초 흐르기도 전에 여보세요 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태웅이었다.

 

“어…, 태웅아. 난데. 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대만은 조심조심 말을 이으면서 한편으론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어깨를 돌리기도 하고 오른쪽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왼쪽 귀로 옮기기도 했다. 대만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조용히 소란을 떠는 사이 수화기 너머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서태웅?”

 

전화를 잘못 걸었나 싶어 액정을 보았지만 조금 전에 들렸던 목소리는 틀림없는 태웅이었다. 아무리 오랜만이라고 해도 그걸 헷갈리진 않았다. 대만이 다시 부르고도 한참 뒤에야 겨우 짧은 대답이 넘어왔다.

 

[네, 선배.]

“아, 안 들리는 줄 알고….”

[잘 들려요.]

“그럼 다행이고. 어, 음….”

 

어색하던 대화가 뚝 끊겨버렸다. 애초에 대만은 누구와 있어도 말이 헤매는 성격은 아니었다. 심지어 태웅에게 헤어짐을 고할 때도 대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생각했던 말을 모두 뱉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먼저 메시지를 보낸 쪽은 태웅이었지만 대만은 이 대화를 잘 이끌어야 할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수화기를 가리고 큼큼, 헛기침을 한 뒤 다시 휴대폰을 얼굴 가까이에 댔다.

 

“어, 그…, 혹시 송태섭한테 들었어? 우리 기사가 났던데, 음…, 그거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는 문장을 말할 때 대만의 목소리가 높게 튀었다. 제풀에 놀란 대만이 목을 붙잡고 또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혹시 너 아는 거 있나 해서….”

[제 탓이에요.]

“어?”

 

대만이 눈을 깜박였다. 제 탓? 지금 제 탓이라고 했나? 분명 들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대만이 되물었다.

 

[미국에 지낼 때 절 따라다니던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제 사진도 몰래 찍었거든요. 그중에 선배랑 같이 찍힌 사진도 있었나 봐요. 그쪽에서 그 사진을 빌미로 요구하는 게 있었는데 무시했더니 기자한테 제보를 한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뭐? 잠깐만, 따라다니던 사람? 파, 파파라치 같은 거야?”

[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머릿속이 엉망이 된 대만과 반대로 태웅은 태연했다. 태연하다 못해 차분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대만이 더욱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니 잠깐, 너 괜찮아?”

[네. 그거 말고 별다른 건 없었어요.]

“뭐가 별다른 게 없어! 요구는 또 뭐야? 무슨 요구를 했는데?”

[별것 아니에요.]

“별것 아니라니, 그거 협박이야! 당장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대만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태웅의 대답은 짧아졌다. 그걸 눈치챈 대만이 말을 멈추자 수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미안하다, 순간 흥분해서.”

[저 때문에 기사가 나서 죄송해요.]

“…이미 나간 기사는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어떻게 된 일인진 알았으니 다행이다.”

[네.]

 

딱딱한 말투, 짧게 끊기는 대답. 의도는 명확했다. 태웅의 용건은 끝이 났다. 이제 공은 대만에게 넘어왔다. 대만은 얼마든지 통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팀에서 혼나진 않았냐? 몸 상태는 어때? 개막전에 나와? 태웅은 올해로 프로 2년 차였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1년 차보다 2년 차를 더 힘들어했고 대만은 그 시기를 거쳐봤으니 해주고 싶은 말도 많았다. 하지만 그중 태웅이 원하는 말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대만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럼 끊을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어, 그래. 너도 잘….”

 

대만의 마지막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대만은 조용해진 휴대폰을 들고 몸을 소파에 기댔다.

 

“매정한 자식, 말도 안 끝났는데 전화를 끊어버리냐.”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스스로 내린 선택의 결과였으니 누구에게도 불평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시답잖은 얘기로 몇 시간이나 통화를 하기도 했고 서로 잠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전화 끊기 싫으니 한마디만 더 해달라고 칭얼거리던 때가 있었다. 대만은 주먹을 쥐어 제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이제 와선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흘러내린 미련으로 질척질척하게 굴고 싶지도 않았다. 대만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그렇지만 짧았던 대화가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아서 잠에 빠진 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

 

인천 원더스는 홈 개막전을 접전 끝에 극적으로 승리한 이후 내리 2연패를 했다. 설상가상으로 주전 가드인 형섭의 부상이 6주에서 10주로 늘어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번 시즌 새로 데려온 용병이 팀과 호흡이 잘 맞지 않아 매일이 살얼음판이었다. 서울 피닉스와의 경기를 앞둔 미팅룸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보는 듯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니네 다 힘든 거 알아. 근데 시즌 시작한 지 이제 겨우 일주일 지났는데 벌써 그렇게 뒤처지면 어떡하냐? 어? 제발 수비 좀 잘 따라붙으라고, 내가 맨날 하는 말 있잖냐. 제발, 우리 기본만 좀 하자.”

“네!”

“쟤네 개뿔도 없어, 피닉스에 점수 낼 애가 누가 있냐? 어? 채치수 하나뿐이야. 채치수만 막으면 된다고. 알겠지? 이상한 데 힘 빼지 말고, 채치수만 잘 막고. 그리고 이형우 걔도 요즘 슛 잘 들어가니까 걔도 그거 해. 어? 정대만 알겠냐?”

“네. 알겠습니다!”

 

최근 최 감독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대만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후로도 작전 지시를 빙자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미팅룸에서 여유로운 건 용병인 딜런 뿐이었다. 이곳의 분위기를 모르지 않을 텐데 일부러 저러는 것도 참 대단하다 싶어 대만은 괜히 딜런을 힐끔거렸다. 한참 동안 이어진 미팅을 끝낸 최 감독이 선수 대기실을 나가자 이번에는 주장인 호근에게 시선이 쏠렸다.

 

“자자, 다들 감독님 말씀 잘 들었지? 오늘 피닉스만 잡으면 또 3일 쉬잖냐. 그니까 다들 열심히 하자?”

 

호섭의 전달 사항은 짧았고 선수단은 다 같이 박수를 몇 번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시간 뒤의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제각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만은 조금 일찍 코트에 들어갈 생각으로 미팅룸을 나왔다. 원정팀인 원더스의 미팅룸에서 코트 입구까지는 거리가 있었다.

 

“정대만!”

 

복도를 걷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자 피닉스의 주전 가드 영호였다. 영호는 손을 흔들며 대만에게 다가와 가볍게 어깨동무를 했다. 영호는 대만이 존경하는 선수였다. 현재 리그에서 손꼽히는 선수였고 대만이 대학 시절 그의 플레이를 몇 번이나 따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농구 외적으론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영호가 다가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대만은 티를 내지 않고 꾸벅 인사를 했다.

 

“이야, 정대만. 너 아주 리그를 뒤집어놨더라?”

“아, 형. 그게 언제 적 얘기인데요. 형 소식 업데이트 너무 느린 거 아니에요?”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이야기에 대만은 웃으며 영호를 흘겼다. 같은 리그의 선배가 사생활 좀 간섭한다고 하나하나 정색을 하거나 따지고 들 수도 없었다. 대만은 개막전 이후 매 경기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리그에는 총 아홉 개의 팀이 있었으니 앞으로 최소 네 번은 더 겪어야 할 일이었다.

 

“근데 대만아, 너 서태웅이랑 왜 헤어진 거냐? 기사에는 성격 차이라던데, 걔 성격을 네가 모르고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잖냐. 들어보니까 걔 초등학생 때부터 그랬었다며. 말 없고 지 생각만 하고.”

 

서태웅이 말 없고 지 생각만 한다고? 전부 틀렸다. 하지만 대만은 정정할 기운도 없었다. 아니라고 한들 제대로 들어줄 사람도 아니었다. 가십처럼 소비되는 이야기에 힘을 빼고 싶진 않았다.

 

“제가 힘들 때여서 관계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래서 이미 수십 번은 말했던 이유를 또 말했다. 똑같은 대답을 하도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더니 이제는 아침 메뉴보다 더 덤덤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게 언젠데?”

“저 4학년 때요.”

“4학년? 아, 너 그때 1년 꿇었다 그랬나?”

“네.”

 

대만은 태웅에게 이별을 고하고 1년 동안 휴학을 했다. 태웅과의 이별이 원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보다 1년 어린 후배들과 같이 드래프트에 참여했다. 대만의 동기 중엔 뛰어난 가드가 많았고 1년 후배 중엔 가드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대만은 제법 높은 순위로 지명을 받았으니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어? 이 자식, 형님보다 먼저 결혼하고 이혼까지 해? 아주 건방져!”

 

영호가 팔을 뻗어 대만을 끌어안고 뺨을 꼬집었다. 굳이 가십을 물어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얼마 전에 만난 선수는 태웅과의 섹스 포지션까지 궁금해했으니 영호 정도면 양반이었다. 그래서 영호가 헤드록을 걸고 얼굴을 마구 문질러도 대만은 속도 없이 웃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가다 영호가 돌연 대만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머리를 긁었다. 대만이 의아한 듯 앞을 보자 지나가던 사람이 둘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의 목에 걸고 있는 출입증은 미디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니 출입 기자는 아닌 듯했지만 방송국 사람인 건 분명했다. 그는 대만과 영호를 번갈아 가며 살피다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그러자 영호가 슬그머니 다가와 대만의 눈치를 살폈다.

 

“야야야, 이해하지? 나 어제도 주희한테 혼났다고. 나는 진짜 이상한 기사 뜨면 안 돼.”

 

영호는 유명 아이돌인 주희와 공개 연애를 하는 중이었다. 대만에게 중요한 건 주희가 아니었다. 이상한 기사. 이상한 기사가 뜨면 안 되는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대만은 이미 게이로 낙인찍혔으니 괜찮다는 소리인 걸까? 게이인 정대만의 목에 헤드록 좀 걸었다고 피닉스의 주전 가드 최영호를 게이라고 기사를 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영호도 대만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언급하진 않았다.

 

“아직도 바람피워요? 주희 누나가 아까워요.”

“쓰읍, 바람이라니! 그냥 밥만 먹은 거뿐이라고.”

“그게 그거죠.”

“그게 그거라니? 이야, 정대만 무슨 조선시대…. 아니, 게이들은 문란하다더니 아닌가 봐? 뭔 밥 한번 먹은 걸로….”

“…….”

“아, 실수실수. 방금은 내 실수. 미안.”

 

결혼과 이혼 기사가 나오고 사람들은 연일 서태웅과 정대만의 성적 취향에 대해 떠들어댔다. 대학리그 최고의 슈터, 인천 원더스, 정대만을 설명하던 그 많던 단어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게이라는 수식어로 정대만을 불러대고 있었다. 대만은 그게 의아했다. 내가 게이라고? 서태웅이랑 결혼 한번 했다고 게이가 되는 거야? 대만은 실제로 게이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자신이 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게이들이 실제로 문란한지 어쩐지 알 길이 없었고 대만은 영호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야, 대만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소고기가 아무리 맛있어도 맨날 소고기만 먹으면 질리는데 어떻게 맨날 똑같은 여자랑 밥을 먹냐? 내가 마음을 준 것도 아니고, 야, 나 주희 사랑해. 근데 맨날 MBC만 보면 질리니까 가끔 SBS도 보는 거지. 세상에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 평생 한 여자랑만 밥 먹고 놀라는 건 너무 잔인한 얘기야.”

“…….”

“그렇지 않냐?”

“글쎄요….”

 

대만이 어깨를 까딱거리자 영호가 대만의 머리 쪽으로 손을 뻗다 멈칫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은 많았고 경기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다들 자신의 업무를 하느라 분주했다.

 

“너는 아직 어려서 그래, 너도 나중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거다.”

 

영호는 대만보다 꼴랑 세 살이 많았다. 대만은 아무리 생각해도 3년 뒤의 자신이 저렇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영호가 말하는 세상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둘 사이의 화제는 이번 시즌 영호가 협찬받은 농구화로 옮겨갔다. 농구화의 쿠션감을 이야기하며 체육관으로 나오자 코트 위엔 연습하는 선수들로 북적였다. 영호도 자신의 팀 벤치로 떠났고 혼자 남은 대만의 곁으로 원더스의 유튜브 담당 pd가 다가왔다. 대만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컨디션 어때요?”

“아주 좋습니다.”

“저번 경기 아깝게 졌어요.”

“그러게요. 그래서 오늘은 꼭 이기려구요.”

“개막전에 정대만 선수 3점 슛 숏츠 조회수 벌써 이십만 넘은 거 아셨어요?”

“진짜? 헛, 참. 역시 이놈의 인기란.”

 

대만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웃었다. 대만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얘기를 모를 리 없었고 거슬리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대만이 원하든 원치 않든 서태웅과 정대만은 화제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결혼과 이혼, 지금은 상대와 같은 리그에서 뛰고 있기까지 하니 온갖 자극적인 소재는 다 모아둔 꼴이었다. 이미 지난 시즌 태웅과 대만이 맞붙었던 경기 영상 중 오백만 조회수까지 찍은 것도 몇 개나 있었다. 한국에서 프로농구의 인기를 생각한다면 가히 놀라운 숫자였다. 그러니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랐다. 이번 일로 농구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만 있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었다.

 

유튜브 촬영이 끝나고 대만은 상대 팀의 치수에게 손을 들었다. 치수도 대만을 알아보고 눈짓을 했다. 그사이 다가온 호근이 대만의 옆에 앉아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방금 채치수랑 뭐냐?”

“네? 그냥 인사요. 저놈이랑은 뭐 가서 얘기하고 이럴 것도 아니고….”

“친해?”

“친한 편이죠? 쟤도 저랑 같은 북산이잖아요.”

 

북산 얘기를 꺼내자마자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근이 대만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북산끼리는 참 사이도 좋아. 그러니까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고.”

“아이고, 그만하시죠. 그 얘기 일주일째인데 슬슬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뭔 소리? 앞으로 10년 더 해도 안 질릴걸?”

“……인정.”

 

어쨌든 좁고 좁은 농구판에서 오랜만에 터진 흥미진진한 소식이긴 했다. 그게 자신의 일이라서 문제였지만. 대만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다리를 죽죽 늘이자 호근도 대만을 따라 허리를 굽혔다.

 

“야, 대만아. 근데 협회에서 너랑 서태웅 관계 이미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

“갑자기 뭔 소리를 하려고? 협회에서 그걸 어떻게 알아요.”

 

대만이 핀잔 섞어 말을 던지자 호근이 히죽거렸다. 대만은 이를 다 드러내고 낄낄거리는 호근을 본 순간 뒷골이 당겼다. 싸늘한 예감이 온몸을 덮쳤다.

 

“농구영신(*12월 31일 밤 10시 경기를 편성해 농구장에서 새해 카운트다운을 맞이하는 이벤트) 어느 팀이랑 하는지 안 봤어?”

“올해 농구영신 우리 팀이에요?”

“누구랑 하는지 네가 직접 봐라.”

 

호근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벤치에 돌아가 휴대폰을 찾는 손이 조금 떨렸다. 타올 밑에 깔려있던 휴대폰을 겨우 찾아낸 대만이 벤치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뒤, 제 몸으로 액정을 가리고 농구협회 어플을 열었다. 12월 페이지를 켜서 스크롤을 아래로 죽죽 내리며 눈을 굴리는 동안 예상이 빗나가길 빌고 또 빌었다.

 

12월 31일 22:00 대전시립체육관 대전 레드암스 : 인천 원더스

 

두 사람은 태웅의 생일을 같이 보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태웅이 고등학생일 때는 가족들과 새해 첫날을 보내야 한다는 태웅의 집 가훈 때문에 그랬고 태웅이 미국에 간 이후로는 물리적인 거리가 문제였다. 모든 것이 정리된 지금에서야 태웅의 생일을 잠시나마 함께 보낼 수 있게 되다니, 운명의 장난이라면 참으로 지독하다고 생각하며 대만은 쓰게 웃었다.

 

3. 1월 1일 00시 48분

 

원더스의 홈인 인천학생체육관은 평소보다 많은 관중이 들어왔다. 그들은 카메라나 휴대폰을 들고 있었으며 코트 위의 대만을 분주히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들을 보는 대만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체육관 상단에는 인천 원더스와 상대 팀인 대전 레드암스의 깃발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오늘은 대만이 그리도 피하고 싶었던 레드암스와의 경기였다

 

대만은 3일 전, 블랙호크스와의 경기부터 반쯤 정신이 나가 있긴 했다. 태웅과의 맞대결이라면 이미 지난 시즌에도 몇 번이나 했으니 유난을 떨 것도 없었다. 거기에 기사가 터진 순간부터 언젠가 한번은 닥칠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기 시작 전 다가온 송태섭이 다음 경기 레드암스던데 재밌겠네요? 한마디를 던지고 가버리는 바람에 대만의 머릿속에 노란불이 켜졌다. 이후로 시작된 경기에서 블랙호크스의 에이스인 황태산이 다가와 다음에 서태웅 만나겠네? 라며 대만을 긁어버리는 바람에 노란불은 빨간불로 바뀌어버렸다. 대만을 자극하기 위한 멘트인 걸 알면서도 홀딱 넘어간 것이다. 그날 대만은 자유투 다섯 개 중 세 개를 실패했지만 다행히 팀의 승패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대만은 오늘 아침 평소보다 몇 시간은 일찍 눈을 떴다. 사실 밤을 꼬박 새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전부 기사 때문이었다. 서태웅과의 매치라면 작년에 이미 여섯 번이나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건만 새삼스럽게 의식을 해버리다니 어디 쥐구멍으로라도 숨고 싶었다. 지금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릴 때가 아니었다. 개막전 이후 이미 7경기를 치렀다. 대만은 원더스에 입단한 지 3년 만에 처음 스타팅 멤버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매번 주전으로 경기를 나가는 것만으로도 많은 체력이 필요했고 온갖 가십에 파묻혀 평소보다 많은 인터뷰를 하느라 말 그대로 파김치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오늘은 원더스의 홈 경기였다. 원정이었다면 꼼짝없이 락커룸에 처박혀 있어야 할 텐데 익숙한 체육관엔 숨을 곳이 많았다.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숨어있다 코트에 나갈 생각이었지만 세상은 또 한 번 대만을 배신했다. 하필이면 오늘이 시즌 중에 몇 번 있지도 않은 스폰서데이였다. 스폰서 기업에서 단체 관람을 와서 미리 코트에 나가 유튜브 동영상도 찍어야 하고 기업 팻말과 함께 단체 사진도 찍어야 했다. 특별히 제작된 기업 이름이 크게 박힌 유니폼을 들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

 

오늘의 스폰서는 건강식품 기업이라 대만은 그 회사에서 출시한 건강음료 하나를 들고 코트로 나왔다. 감독 미팅이 끝나고 어수선한 락커룸에 등장한 홍보팀 팀장이 오늘 경기장 출입 기자가 원더스 창단 이후로 제일 많다는 소식을 전하자 대만은 딱 하늘로 솟아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었고 코트에 나오자마자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유난히 많은 것 같은 카메라는 착각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만을 따라다니는 카메라만큼이나 많은 숫자가 반대편 코트에 있는 태웅을 찍고 있었다.

 

높으신 분들과 악수를 하고 양손에 건강식품을 들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동영상을 찍으면서도 대만의 머릿속엔 서태웅이 가득했다. 먼저 인사를 해? 아니야, 평소에는 연락도 안 하면서 기자들 앞에서 인사하는 건 생색내기밖에 안 되지. 작년에는 어떻게 했더라, 인사를 했나? 안 했던 것 같은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풀어오른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때 누군가 대만의 어깨를 툭 쳤다.

 

“정대만.”

“어, 씨. 놀랐잖아!”

 

명헌이 더 놀란 얼굴로 대만을 보고 있었다. 심장 부근을 몇 번 쓸어내린 뒤 손에 들고 있던 건강음료를 명헌에게 안겼다.

 

“이거나 먹어라….”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그럴 일이 있다.”

“그럴 일이라고 하면 역시….”

 

명헌의 얼굴이 뒤로 돌아가기 전 대만이 명헌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수십 대의 카메라를 의식하며 시선 처리에도 신경을 쓰고 있던 터였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냐? 서태웅 쪽 보지 말라고.”

 

대만이 이를 꽉 깨물고 얘기하자 명헌이 피식 웃으며 건강음료를 땄다. 대만은 자칫 방심한 사이 눈을 돌리지 않도록 퍽 노력을 했다. 사람들에게 괜한 먹잇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명헌은 텅텅 비어버린 음료팩만 대만의 손에 남기고 고생하라는 말과 함께 본인의 팀 벤치로 떠났다. 대만은 곧이어 팀 동료들과 함께 관중 몇 명을 뽑아 건강식품을 전달하는 이벤트에도 참가했다. 좌석번호를 뽑고, 당첨된 관중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사진을 찍는 동안 몇 번이나 고개가 돌아갈 뻔했고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카메라를 향해 실없이 웃었다.

 

서태웅을 보지 않기 위한 대만의 노력도 경기 전까지만이었다. 경기가 시작되면 대만은 코트 위의 모든 선수를 예의주시해야만 했다. 같은 포지션은 아니었으니 매치업이 많지는 않았지만 또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1쿼터가 반 정도 지났을 때 대만의 앞에 태웅이 있었다. 태웅은 대만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경기 초반이지만 역전과 재역전이 반복되고 있어서 한눈을 팔 여유는 없었다. 대만이 드리블을 하며 선수들을 재배치시키는 동안 용병인 딜런이 와서 태웅을 막아주었다. 딜런의 스크린 덕분에 잠깐의 틈이 생긴 사이 대만이 한 발 뒤로 물러섰고 라인을 확인하고 무릎을 굽히며 슛 동작을 잡았다. 그리고 명헌이 팔을 뻗은 순간 대만은 재빨리 라인 안으로 들어가서 골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근에게 패스했다.

 

절묘한 팀플레이로 관중들의 환성이 터졌지만 대만은 곧바로 백코트를 하며 레드암스의 진영을 향해 달렸다. 그 이후로도 태웅과 대만은 몇 번이나 맞붙었지만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식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대만을 보는 태웅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기에 딴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건 대만의 착각은 아닌 듯 경기가 끝나고 인터넷이 또다시 떠들썩했다. 레드암스와 원더스의 경기 결과보다는 서태웅과 정대만의 매치업이 더욱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중에서도 대만을 보는 태웅의 싸늘한 얼굴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마디씩 보태고 싶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정대만이 먼저 이혼을 통보했다는 사실에 서태웅의 냉정한 태도가 합쳐져 가십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서태웅의 반응으로 보아 정대만이 유책배우자가 아니겠냐는 소문에 힘이 실렸고 대만은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입을 열지 않았다.

 

*

 

“대만군, 봤어?”

“봤다.”

“아, 좀 자세히 봐!”

“보고 있잖냐! 대애단하신 서울 위너즈의 강백호 선수께서 올스타 팬투표 1위인 거 잘 알겠으니까 휴대폰 좀 저리 치워! 정신 사납게!”

“우하하, 역시 사람들이 이 천재를 알아본다니까!”

 

서울 위너즈와의 경기는 여러 가지 이유로 피곤했다. 리그 1위를 달리는 강팀인 데다 선수들의 평균 신장도 상위권이라 한번 경기할 때마다 두 배의 피로도가 몰려왔다. 거기에 시즌 시작한 지 두 달쯤 지났더니 고질적인 체력 문제가 대만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상으로 이탈 중이었던 원더스의 메인 가드인 형섭의 복귀도 다다음주로 정해졌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만이 벤치에서 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할 때 백호가 성큼성큼 다가와 휴대폰을 내밀었다. 대만은 액정을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2주 전 시작된 올스타 투표에서 강백호는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시즌 초 좋은 퍼포먼스로 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덕분이었다. 대만은 1위인 강백호의 사진을 보다 2위에도 시선을 힐끔 주었다. 2위는 서태웅이었다. 1위와 차이가 크지는 않았지만 투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뒤집기는 힘들어 보이는 표차였다. 그 밑으로도 황태산, 신현철, 김호근 등 익숙한 이름이 줄줄 이어졌다. 대만은 10위였다. 작년에는 아슬아슬한 순위로 올스타에 가지 못했지만 올해는 시즌 초부터 주전으로 나왔던 덕분에 순위가 대폭 올라갔다.

 

“대만이형, 컨디션 괜찮아?”

“아니, 죽겠다, 진짜….”

 

오른쪽을 백호에게 점령당한 대만의 비어있던 왼쪽에 대협이 앉았다. 대만은 냉큼 대협의 어깨에 기댔다. 노곤하게 늘어져 있던 대만이 관중석 쪽에서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오자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대만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대협과 백호가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

“아니, 대협이 너 사진 찍힐까 봐….”

“나? 상관없는데? 형 더 쉬어도 돼. 얼굴 완전 썩었어.”

“아이씨, 아무리 그래도 사람 얼굴을 보고 썩었다니….”

 

대만은 다 죽어가는 자신의 얼굴에 손짓하는 대협의 팔을 쳐냈다. 그리고 대협을 천천히 살폈다. 이미 태웅과의 기사가 뜬 지도 2개월이나 지났으니 표면적으로는 잠잠해졌지만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까지 없어진 건 아니었다. 대만이 한참을 망설이자 백호가 손을 뻗어 대만의 머리통을 제 어깨로 끌고 왔다.

 

“그럼 이 1위의 어깨에 기대라고.”

“백호 너도 이상한 기사 떠도 모른다?”

“그래봤자 내가 1위인 건 변하지 않지.”

 

대만이 어중간하게 백호에게 기댄 채 느리게 눈을 깜박이자 대협이 이온음료 통을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들어 마시는 동안 대협은 손부채질을 하며 대만을 챙겼다.

 

“형 요즘 매일 풀타임 뛰던데?”

“어. 근데 빠지긴 싫어. 형섭이 형도 곧 돌아오니까 그때까진….”

“그 선배 돌아오든 말든 형이 말뚝 박아버려.”

“그게 말이 되냐고….”

 

대협과 대만은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다. 대만은 4학년 1학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학계를 제출했다. 그리고 꼬박 1년을 쉬었다. 복학을 했을 땐 같이 다니던 동기들은 전부 졸업한 뒤였다. 그래서 나머지 학기는 한 살 어린 대협과 함께 다녔다. 선후배로 지낼 때도 잘 맞는다 생각했지만 같은 학년을 보내면서 부쩍 친해졌다. 그해 여름, 대만은 인천 원더스, 대협은 서울 위너즈에 지명받은 이후로도 친분은 계속 이어졌다.

 

“보자, 윤대협은 몇 위냐…. 8위? 나보다 높다고?”

 

백호의 휴대폰을 뺏아 순위를 확인하자 대협은 대만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 놀란 대만이 흘겨보자 대협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 팀 순위 덕분인가?”

“이거 부정투표 아냐? 윤대협이 8위라니 진짜 말도 안 되는데?”

 

핀잔을 날리는 대만과 옆에서 거드는 백호도, 민망한 듯 손사래 치는 대협까지도 사실은 그 순위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대협은 이미 1라운드 MVP를 차지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렇게 세 명은 경기장 주변의 맛집과 다음 경기 일정을 이야기하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뒤 경기가 시작했다. 그러나 대만은 직전의 경기에서 1초도 쉬지 못하고 풀타임을 뛰었던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은 탓에 1쿼터부터 몸이 매끄럽지 못했다. 결국 3쿼터 중반 손에서 힘이 빠져 자신의 팀이 아닌 상대 팀인 대협에게 패스를 했다. 곧바로 휘슬이 불렸고 작전타임과 함께 대만은 벤치 멤버와 교체당했다.

 

그날 대만의 패스는 유튜브에도 올라올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대만의 손에서 공이 미끄러져 대협에게 가는 모습이 웃기긴 했으나 시즌 초부터 대체 자원 없이 거의 매 경기 풀타임을 뛴 대만의 사정은 유명했으니 그런 실수에도 여론이 나쁘진 않았다. 거기에 불같은 성격의 최 감독마저도 고생 많았다며 대만을 다독였다. 심지어 다음날 운동하러 오지 않아도 좋으니 푹 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형섭의 복귀가 코앞이라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차라리 푹 쉬고 컨디션을 회복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대만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고 오랜만에 배달 음식까지 시켜 먹었다.

 

그날 저녁 대만은 소파에 드러누워 블랙호크스와 레드암스의 경기를 보았다. 이날 태웅은 말 그대로 날아다녔다. 1쿼터 시작하자마자 드리블하는 모습만 보아도 쟤 오늘 미쳤는데?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과연 태웅은 경기 내내 엄청난 활약을 했다. 심지어 4쿼터 막판 무려 네 명의 수비를 달고도 돌파에 성공하며 통쾌한 덩크를 꽂아 넣었다. 그런 플레이를 보면 소파에 누운 채 티비를 보던 대만도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데일리 MVP는 말할 것도 없이 태웅이었다.

 

태웅의 활약은 9시 스포츠 뉴스에도 등장했으며 농구협회 유튜브와 레드암스 유튜브, 각종 농구 계정들이 앞다투어 태웅의 영상을 올렸다. 모두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태웅의 팬이 찍은 덩크 직캠은 유튜브 인기 동영상 순위에도 올랐다. 올스타 인기투표 득표수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오르며 1위와 차이를 좁히더니 기어이 투표 마지막 날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올스타 투표 최종 순위가 발표된 날 북산의 단체 메시지 방에는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백호의 메시지가 올라왔고 백호를 위로해주는 사람, 놀리는 사람,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

 

대만은 기다리지 않았으나 대만을 제외한 전원은 오매불망 기다렸던 농구영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농구 팬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원섭섭함과 함께 농구영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밤 10시 경기는 평소 루틴과 전혀 달라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힘든 선수들은 그렇게까지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심지어 홈도 아니고 원정이었으니 경기가 끝나고 인천까지 가면 새벽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팀에서는 대전에 하루 더 묵을 수 있게 호텔을 잡아 주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연말연시를 팀 동료와 보내고 싶어 하는 선수는 거의 없었다. 대만도 매니저가 돌아다니며 숙박 신청을 받을 때 손을 휘휘 내저었다.

 

12월 31일 대전시립체육관에서 열린 레드암스와 원더스의 경기는 매진이었다. 대부분이 레드암스의 팬이었지만 원더스를 응원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코트로 나온 대만은 몇 군데 언론사와 가볍게 인터뷰를 하고 공을 잡았다. 태웅과의 경기도 세 번째였다. 대만은 이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레드암스의 코트 쪽으론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형섭은 지난 경기부터 복귀를 해서 함께 뛰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제 컨디션이 돌아온 건 아니라 대만의 출전 시간이 많이 줄어들진 않았다. 그리고 최근 좋은 경기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대만을 빼고 부상에서 막 복귀한 선수를 돌릴 정도로 최 감독은 바보가 아니었다. 형섭의 복귀 이후로도 출전 시간을 보장받게 되자 대만은 조금씩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대만의 연관 검색어에도 농구와 관련된 단어가 뜨기 시작했다. 그건 태웅도 대만도 관련 질문에 좋은 감정으로 만난 건 사실이나 원만한 합의 하에 헤어졌고 지금은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는 대답만 반복해서 사람들이 흥미를 잃어버린 탓도 컸다.

 

원더스와 레드암스는 치열하게 순위 싸움을 하는 팀답게 경기가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역전과 재역전을 반복하며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그리고 4쿼터 중반, 시계가 밤 11시 45분을 가리키자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다. 선수들이 벤치에서 숨을 돌리는 동안 코트에는 새해 카운트다운 이벤트를 위해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정치인과 구단주 등 정장을 입은 높은 사람들이 우르르 등장해서 코트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진행 요원들이 부지런하게 이벤트를 준비하는 동안 대만은 멍하니 코트를 보았다. 이윽고 안내에 따라 양 팀 선수들도 조형물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섰다.

 

대만에겐 어수선했던 한 해였다. 예상치 못하게 태웅과의 기사가 떴고 또 갑작스럽게 주전으로 뛰기도 했다. 그 모든 일은 지난 시즌이 끝났던 늦봄에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고작 7개월 사이에 인생이 이렇게도 바뀔 수 있구나.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은 1년이었다.

 

“3, 2, 1! 해피 뉴이어!”

 

장내 아나운서의 안내를 따라 카운트다운을 마치자 경기장엔 새로운 한 해를 가리키는 숫자가 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관중석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고 대만은 원더스의 선수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박수를 쳤다.

 

“올해는 다들 건강하시고 원하시는 일 다 이루시길 바랍니다, 저희 레드암스도 많은 사랑 부탁드려요.”

 

레드암스의 주장인 명헌이 선수단 대표로 관중들에게 새해 인사를 했다. 명헌의 정갈한 인사를 들으며 대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나 코트 중앙에 놓아둔 커다란 조형물에 가려 명헌 외의 다른 레드암스의 선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대만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쉽다는 감정이었다. 그걸 자각하자마자 대만은 놀랐다. 왜 아쉬움을 느꼈던 거지? 그러나 대만의 생각이 길어지기 전에 코트가 정리되고 경기가 재개되었다.

 

시소게임 끝에 승리는 원더스의 차지가 되었다. 성공적으로 끝난 농구영신 이벤트 덕분에 경기가 끝난 뒤에도 선수들은 인터뷰를 하고 유튜브를 찍느라 바빴다. 그리고 락커룸에서 잠깐 미팅을 가진 뒤 원더스 선수단은 해산했다. 팀 버스는 숙박을 신청한 몇 명의 선수들을 호텔에 내려준 뒤 곧장 인천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대만은 숙박을 신청하지 않았으나 버스에도 타지 않았다. 오늘은 명헌의 집에서 하루 머물기로 약속을 했다. 명헌은 홈 팀이었으니 퇴근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고 의무실에서 기다리라고 메시지가 도착했다. 대만은 가방을 들고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의무실에 들어가 불을 켰다. 20분쯤 걸릴 것 같으니까 좀만 더 기다려 달라는 메시지에 ㅇㅇ 두 개를 보내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선배.”

 

길지 않은 기다림 끝에 의무실의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명헌이 아니라 태웅이었다.

 

“어, 어쩐 일이야? 혹시 어디가 아파서 온 거야? 다들 퇴근하셨는데….”

 

대만이 전화로 헤어짐을 통보한 이후 태웅은 한번도 대만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그건 대만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태웅이 프로에 입단한 이후로 몇 번의 매치업이 있었지만 그때도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기사가 터지고 한 번의 전화 통화가 헤어진 이후 주고받은 대화의 전부였다. 그러니 이곳에 태웅이 찾아올 이유는 의무실에 볼일이 있으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뇨, 저 이것 좀 지워주세요.”

 

그러나 태웅은 대만을 향해 불쑥 팔을 내밀었다. 아직 유니폼을 입고 있는 태웅은 양쪽 팔에 온통 새빨간 칠이 되어 있었다. 레드암스는 팀명을 따라 홈 경기에선 선수들의 팔을 새빨갛게 만들었다. 까만 유니폼에 빨간 팔은 레드암스의 시그니쳐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수는 붉은색 슬리브를 착용했고 일부러 색칠을 하는 선수는 드물었다.

 

“손에 힘이 잘 안 들어가서요.”

“…어, 어떻게 지워야 하는데?”

“여기 물티슈….”

 

대만은 태웅이 내민 물티슈를 받아 들고 태웅을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아 물티슈를 몇 장 뽑고 팔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태연하게 행동하려 했지만 대만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얘가 왜 나를 찾아와서 이런 걸 부탁하는 거지? 레드암스 선수들도 아직 남았을 텐데? 우리 이렇게 얼굴 보는 게 몇 년 만이더라? 아니, 왜 어제도 대화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를 찾아오는 건데? 그러면서 태웅의 팔을 힘주어 문질렀지만 빨간 칠은 지워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물끄러미 보던 태웅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형, 저 팔이 안 지워져서요. 이거 어떻게 지워야 해요? 아, 맞다…. 그거 전에 받았어요. 아니에요, 있어요. 그걸로 지워볼게요.”

 

전화를 끊은 태웅이 대만을 빤히 보았다.

 

“이거 무슨 약으로 지워야 한다는데 그게 저희 집에 있어서요.”

“……그래서?”

 

태웅의 대답을 기다리며 물티슈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손바닥 안에 질척하게 물이 고였다. 사실 대만은 태웅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그 말을 꺼내겠어? 지금? 여기서?

 

“집에 같이 가서 지워주시면 안 되나요.”

 

한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 식상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대만은 말도 안 되는 핑계인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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