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정대만 샘플
사망소재
1.
2002년 9월, 가을과 여름의 사이의 18시는 밤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이었다. 해는 졌지만 어둠이 깔리지 않은 미적지근한 하늘을 보며 대만이 건물을 빠져나왔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얼굴에는 피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인상이 좋아 보이는 낯빛은 아니었다. 머릿속에선 집에 가서 할 일의 우선순위와 시뮬레이션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며칠 미룬 청소부터 하고 세탁기 돌리고 내일이 목요일이니까 재활용 쓰레기도 미리 챙겨둬야지. 날짜를 가늠하던 대만이 톡 튀어나온 생각의 매듭을 잡았다, 아, 그래그래, 잊고 있었네. 아직 지하철역까지는 거리가 좀 있어서 대만은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어, 태섭아. 우리 다음 달 모임 때문에 전화했는데. 전에 갔던 그 가게 미리 예약해야 될 것 같아서. 근데 너 지금 어디냐? 왜 그렇게 시끄러워? 뭐? 누구? 아. 알지. 어? 아니, 됐어. 난 피곤해. 너 바쁘면 다음에 전화하고. 아, 아니 됐다니까. 야! 송태섭!”
다급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전화는 허무하게 끊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가게 이름과 주소가 짧게 적힌 메시지에 대만은 한숨을 푹 쉬었다. 웬만한 친분이었다면 무시했겠지만 태섭은 웬만한 친분 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아무래도 재활용 쓰레기는 다음 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았다.
태섭이 알려준 가게는 대만의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대만의 집과 반대라서 늘 타던 방향이 아닌 반대쪽 승차장에서 전철을 탔다. 이 시간엔 이쪽이나 저쪽이나 사람이 많은 건 마찬가지구나. 대만은 밀려드는 사람의 파도 속에서 제 자리를 지키고 섰다.
역의 출구에서 가까운 가게는 제법 비싸 보이는 외관이라 대만은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다가오는 직원에게 태섭의 이름을 말하자 안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문까지 열어주는 확실한 에스코트에 대만은 아직 펼쳐보지도 않은 메뉴판을 가늠한 뒤 이번 달 생활비의 여유자금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아, 선배. 왜 이렇게 늦었어요.”
“대만이형! 안녕하세요!”
작은 방 안에는 태섭과 명헌, 그리고 우성까지 함께 있었다. 대만은 비어있는 태섭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명헌 진짜 오랜만이네.”
“어. 그러게.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나야 뭐. 맨날 똑같지.”
대만과 명헌은 학교는 달랐지만 대학 리그에서 자주 만난 덕분에 제법 친분이 있었다. 두 사람은 4학년 때 각자 다른 팀에 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단했다. 대만의 프로 입단 첫해는 화려했다. 무려 90% 이상의 득표율로 팀 최초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듬해 대만은 급속도로 추락했다. 언론에서는 대만에게 소포모어 징크스를 덮어씌웠고 결국 2군을 전전하다 방출당했다. 한때 농구가 인생의 전부였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 대만은 농구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이야, 우리 리그 최고의 스타 정우성을 여기서 다 보네.”
“스타라뇨. 아이, 과찬이죠.”
“선배랑 정우성은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인가?”
“어어, 처음이지.”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던 정대만도 이미 옛날 일이었다. 태섭이 없었다면 절대로 나오지 않았을 자리였다. 그러나 이런 만남이 내키지 않을 뿐 과거에 어떻게 했는지 기억을 못하는 건 아니라 사람 좋게 웃으며 대화에 어울렸다. 거기에 티 내지 않게 대만을 이끌어준 태섭 덕분에 오랜만에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온갖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네 사람이 뛰었던 인터하이 경기가 튀어나온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 맞다. 대만 선배, 그거 알아요? 정우성 얘가 그때 우리랑 경기하기 전에….”
“아, 송태섭 그거 말하지 말라고!”
“아냐. 이제는 정대만한테 알려줘도 돼.”
“명헌이 형까지 왜 그래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우성이 태섭과 명헌을 향해 팔을 휘두르다 물이 들어있던 컵이 넘어졌다. 테이블 위로 물이 주르륵 흘렀지만 우성을 나무라는 사람은 없고 다들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는 데 열중했다.
“왜? 뭔데뭔데? 야, 정우성 나만 따돌리냐?”
“아니, 따돌리는 게 아니라요….”
“정우성, 내가 말할 테니까 조용히 해. 얘가 우리랑 경기하기 전에 무슨 신사에 소원 빌었대요.”
“엥? 소원?”
아아아아악! 정우성. 조용히 해. 우성이 고함을 꽥꽥 지르며 들리지 않는 척을 하자 명헌이 작게 핀잔을 줬다.
“네. 자기는 뭐, 고등학교 농구에서 해볼 거 다 해봤다고 새로운 경험 하게 해달라고.”
“뭐? 푸하하하하하! 진짜? 진짜야? 야, 우성아, 이거 진짜야?”
“아 몰라요….”
“완전 미친놈이죠. 뿅”
“으으, 놀리지 마세요. 그때는 진짜 진지했다구요.”
대만이 크게 웃다 우성이 흘린 물에 셔츠 소매를 적셨다. 앗 차거! 이것 좀 닦자. 대만이 휴지로 테이블을 닦는 사이 태섭이 그릇이 담긴 접시를 들어서 대만을 도왔다.
“근데 거기 진짜 용해. 정우성 소원 들어준 거 아냐.”
“아, 몰라요. 벌써 10년 전 일이라구요.”
…소원을 들어준다고? 여전히 웃음이 얼굴에 걸린 채로 테이블을 닦던 대만의 손이 멈췄다.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대만은 여전히 세 사람과 함께 작은 방 안에 있었지만 감각이 희미해지고 숨이 가빠왔다. 오랜만에 찾아온 헐떡임에 대만은 젖은 휴지를 꽉 쥐었다.
“거기 어딘데?”
“네?”
“정우성. 네가 소원 빌었다는 그 신사 어디냐고.”
“아키타현이죠! 근데 저희 학교에서도 엄청 멀어서….”
“아키타현 어디?”
“엥? 왜요? 형도 소원 빌고 싶어요?”
“어디냐고!”
좁은 방이 조용해지고 세 사람의 시선이 대만에게 쏠렸다. 젠장. 유난 떨지 마. 정대만. 유난 떨지 말라고. 이런 행동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질지는 뻔했다. 그러나 아무리 다독여도 한번 터져버린 호흡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대만은 이 상황을 무마시킬 방법을 안다. 도망치면 된다.
“미안. 나 취했나 보다. 먼저 갈게.”
작은 방을 나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대만은 돌아보지 않았다.
사고를 쳤으니 정신이 멀쩡할 리 없었다. 예정했던 집안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지도 않고 곧바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꿈이라도 꾸고 싶었지만 조금 마신 술 때문인지 아침까지 곯아떨어졌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확인한 휴대폰은 조용했다.
대만은 지구가 무너져도 출근은 멀쩡하게 해야 하는 3년 차 직장인이었다. 죽을 것 같은 날은 웃으면 된다. 지난 3년간 배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그래서 대만은 종일 웃고 다녔다. 그리고 지구가 반쪽이 나더라도 시간은 간다. 이건 대만이 3년 동안 배운 두 번째 사실이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소리를 백번쯤 들었을 때 퇴근 시간이 되었다.
어제와 다름없이 쏟아지는 사람들 사이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대만은 제 주위의 사람들이 묘하게 들뜬 걸 알아차렸다. 금요일 퇴근길도 아닌데 직장인이 들뜰 이유가 있나? 회사 건물을 나오자마자 그 이유가 보였다. 아, 송태섭. 무채색 일변인 정장 사이로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눈에 띄는 이유는 단순히 패션이 아니라 송태섭이라는 인물 그 자체였다. 대만은 태섭에게 싸인을 받기 위해 몰린 인파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태섭은 능숙하게 팬서비스를 한 뒤 회사 건물 앞의 의미 모를 조형물에 기대어 있던 대만에게 왔다.
“선배 회사에 프로농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네요.”
“뭔 소리야.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거겠지.”
“웬일로 사람을 띄워줘요. 무섭게.”
“올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하지.”
어깨를 으쓱거린 태섭은 종이가방을 하나 내밀었다.
“어제 두고 간 옷이요.”
“아, 그래. 내가 받으러 갔어야 하는데, 미안. 고맙다.”
고작 정장 자켓 하나 무게가 그렇게 무거울 리도 없는데 태섭에게 건네받은 것은 그리도 묵직했다. 이 무게는 태섭과 자신의 마음이었다. 태섭은 대만을 위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대만은 그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냥 응석을 부릴 수만도 없어서 대만은 잘 손질해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을 열었다.
“어제는 그, 미안. 내가….”
“새삼스럽게 사과는 무슨. 됐어요. 선배가 취해서 행패 부리는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아…, 그래, 그건 그렇지.”
“그리고 이건 정우성이 주는 선물.”
태섭이 내민 손가락 사이에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끼어있었다. 보지 않아도 뭐가 적혀있는지 알 것 같았다. 대만은 조금 망설이다 메모지를 뽑았다. 가만히 종이를 내려다보자 또박또박 힘주어 쓴 주소가 적혀있었다.
“거기 길이 별로 안 좋고 계단도 많아서 힘들 거래요. 내가 시간만 많았어도 같이 가줬을 텐데. 아쉽네.”
“됐어. 나도 직장인인데 아키타까지 어떻게 가냐. 소원 들어준다길래 혹해서 그냥 물어나 본 거지.”
“왜요? 나도 시간만 되면 진짜 가고 싶은데? 용하다잖아요.”
태섭의 능청스러운 말에 대만이 피식 웃었다. 안 그럴 것 같은 놈이 뭔 소원 타령이냐.
“너도 빌고 싶은 소원이 있냐?”
“바라는 거 없이 사는 사람도 있어요?”
당연하다는 듯 되물어서 대만은 말을 잃었다.
“소원 하나 비는 게 뭐라고 남 눈치를 봐요.”
“…….”
“하고 싶은 대로 살자구요. 선배나 나나. 인생 짧은데.”
좋은 말이었지만 대만에겐 와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만은 웃었다. 태섭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말했지만 바쁘다며 손을 흔들고 가버렸다. 대만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
그리고 이틀 뒤의 토요일 아침, 대만은 우성이 알려준 신사의 300계단 앞에 서 있었다. 금요일 저녁 퇴근하자마자 신칸센을 타고 아키타로 와서 역 근처의 비지니스 호텔에서 하루를 보냈다. 해가 뜨자마자 렌터카 회사에서 차를 빌려 신사까지 달려온 건 좋았지만 계단 300개를 두고 대만은 아연실색했다. 우성아. 계단이 많단 뜻이 이런 거였냐. 그래도 명색이 리그 신인왕까지 받은 선출인데 이깟 계단에 질 순 없지. 대만은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의 상쾌한 공기 덕분인지 하나둘 오르다 보니 점점 속도가 붙었다.
아키타까지 오는 내내 대만은 신사에 빌 소원을 생각했다. 무엇을 빌어야 할까. 고민할 것도 없이 대만이 빌고 싶은 소원은 정해져 있었다. 다만 그 소원을 빌기에는 너무 늦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연봉을 올려달라고 해볼까, 아니면 다른 회사로 이직? 이것저것 떠오르는 소원은 많았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마음들은 금세 흩어졌다. 어느새 중간까지 올라온 대만은 뒤를 돌아보았다. 반만 올라왔는데도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은 아찔했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대만은 눈을 꽉 감고 몸에 힘을 풀었다.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풍경은 조금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건장한 남성을 아래로 밀어 떨어뜨릴 정도는 아니었고 계단 아래 까마득한 곳으로 몸을 던질 용기도 없었다. 대만은 다시 계단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태웅아. 이제 아무도 네 얘기를 하지 않아. 아무도 널 찾지 않아. 너 그거 아냐? 나도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어. 멀쩡하게 회사도 다니고 술자리에도 참석하고 너랑 같이 봤던 만화책도 읽고 네가 좋아하던 식당도 혼자서 가. 태웅아. 넌 억울하지도 않냐? 같이 죽자고 날 밀었어야지. 왜 그런 것도 못해. 바보야.
대만은 얼굴에 손을 대었다. 바람을 맞은 얼굴은 파삭했다. 이제는 태웅을 떠올려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다.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러니까 죽은 사람만 억울하다는 거다.
남은 계단을 올라 도착한 신사는 매우 작아서 금방 둘러볼 수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도 없고 고요했다. 대만은 조금 망설이다 본당 앞에 섰다.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서태웅이 보고 싶으니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할까? 거기까지 생각한 대만은 피식 웃었다. 그런 소원은 이제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안다. 대만은 눈을 감고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 ---... ---...
단정한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그사이 맞닿은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고 얼굴이 축축해졌다. 한껏 젖어 무거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려도 여전히 대만은 혼자였다.
*
300개의 계단은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근처에 주차해 둔 차를 몰아 아키타역으로 가던 도중 돈까스라는 간판을 보고 무작정 들어갔다. 어디서 왔냐는 주인의 질문에 도쿄라고 대답하며 용한 신사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그러자 늙은 주인이 이렇게 젊은 사람이 벌써 신을 찾으면 안 된다며 호통을 쳤고 대만은 멋쩍게 웃었다.
대만은 주변을 조금 더 둘러보다가 렌터카를 반납하고 신칸센에 탔다. 도쿄에 도착한 뒤엔 곧장 집으로 갔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고 잠들기 전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고생한 무릎을 마사지했다.
그런 노력도 소용없이 다음 날 아침 대만은 무릎이 아파서 눈을 떴다. 알람보다 먼저 눈이 뜨일 정도로 무릎이 아픈 적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프로팀 지명을 위해 제법 무리했던 대학리그 마지막 시즌에서도 이런 적은 없었다. 분명 마사지까지 꼼꼼하게 하고 잤는데도 고작 계단 좀 오르내렸다고 무릎이 아프다고? 대만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찜질이라도 할 생각으로 무릎을 만지작거리다 베개 주위를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그러나 휴대폰은 보이지 않고 기묘한 위화감이 정수리부터 천천히 내려왔다. 분명 익숙하긴 한데 어제 누웠던 방이 아니었다. 대만이 덮고 있던 이불을 팽개치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익숙한 방인데. 익숙하긴 한데. 빙글빙글 돌며 방을 살피던 대만의 눈에 책상 위 달력이 들어왔다.
“…1992년 9월.”
1992년? 2002년이 아니라? 1992년이면? 뒷걸음질 치던 대만은 벽에 가지런히 걸려있는 교복을 발견했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에서 긴장이 풀렸다. 대만이 고등학교 3년 동안 입고 다녔던 교복이었다. 그제야 익숙하지만 낯선 방의 정체도 알아챘다. 지금 대만은 고등학교 때 쓰던 방에 서 있었다. 꿈인가? 눈을 깜박거리던 대만이 시간을 확인하자 6시였다. 다시 침대에 걸터앉은 대만이 왼쪽 무릎을 문질렀다. 무슨 꿈이 이렇게 생생해. 기분 나빠.
한참이나 교복을 바라보던 대만이 별안간 일어났다. 방을 나와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자 기억 속의 얼굴보다 앳된 모습이었다. 늘 입고 다니는 정장에 맞춰 어느 정도 길이감이 있게 기르던 머리카락도 온데간데없이 짧아졌다. 대만이 제 얼굴을 만져보았다. 손바닥에 닿는 뺨이, 뺨에 닿는 손바닥이 생생했다. 1992년이라고? 대만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거울 속의 어린 얼굴도 같이 움직였다. 이렇게 생생한 꿈은 깨고 나면 기분이 나쁜데, 왜 하필 10년 전이야. 곰곰이 생각하던 대만이 퍼뜩 떠오른 가설 하나에 후다닥 샤워기를 들었다. 정대만의 10년 전이라고 한다면…! 이제 1분 1초가 아까웠다. 대충 씻고 나와 교복까지 갖춰 입었다. 거실로 나가자 보이는 엄마의 얼굴도 지금 대만과 마찬가지로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보다 젊었다.
“너 벌써 나가?”
“네! 늦었어요!”
오랜만에 보는 풍경에도 전혀 눈을 주지 않고 대만은 전력으로 뛰었다. 집에서 전철역까지, 전철역에서 또 학교까지 뛰고 또 뛰었다. 그 사이 왼쪽 무릎에서 은근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한눈팔 때가 아니었다. 학교에 도착한 대만은 주위를 둘러볼 새도 없이 곧장 체육관으로 향했다. 닫힌 문을 힘껏 열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그리고 대만은 체육관 한가운데 서 있는 태웅을 발견했다. 유난스러운 인기척에 태웅이 돌아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서태웅이다. 머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뛰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오느라 헐떡이는 숨은 이미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긴장을 풀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대만은 눈을 부릅떴다. 대만을 보던 태웅의 입이 열리고 입술이 짧게 움직였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대만은 알 수 있었다. 선배.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정대만의 서태웅이었다. 대만이 체육관 안으로 달려가 태웅을 껴안았다. 눈앞의 태웅은 기억 속의 태웅보다 작았고 어렸지만 틀림없이 정대만이 기억하는 서태웅이었다.
“태웅아…. 서태웅. 너 맞지. 진짜 태웅이지.”
태웅이 들고 있던 농구공 때문에 꽉 껴안지도 못하고 어깨만 조금 끌어안은 자세였지만 대만은 아무래도 좋았다. 신문에서, 비행기 사고가, 태웅이, 농구 유망주가. 4년 전 대만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은 대만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대만은 죽지 않고 살아서 지난 4년을 꾸역꾸역 버텼다. 그런데 서태웅, 너는 어떻게 꿈에도 한 번 나오질 않냐. 내가 그렇게 미웠냐.
이게 꿈이든 환상이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겨우 숨이 진정된 대만이 찌릿거리며 올라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쏟아 내려던 찰나 퍽 소리와 함께 등에 큰 통증이 내리꽂혔다. 악! 누구야? 눈물도 쏙 들어간 대만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치자 태섭이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아니, 저 선배가 미쳤나. 아침부터 애 붙잡고 뭐해요? 빨리 신발부터 벗어요!”
“어? 어, 태섭아. 아니, 그게…. 신발, 그래, 신발은 벗어야지.”
태섭이 대만의 발밑에 굴러다니는 농구공을 들고 삐딱하게 섰다. 태웅이 품에서 빠져나가는 게 아쉬워 대만은 태웅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신고 있던 단화를 벗었다. 양말 아래로 체육관 바닥의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고 손에 든 신발 탓에 태웅을 다시 껴안을 수도 없었다. 어찌할 줄 모르고 민망해하는 대만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걸렸다.
“정대만. 체육관에 오지 말라고 했잖냐.”
치수였다. 엥. 채치수가 왜 있어? 너 은퇴했잖아. 아니, 다시 돌아오긴 했는데 이 시기는 아니지 않나? 대만이 조금 전 벅차오르던 눈물 탓에 아직 얼얼한 코를 훌쩍거리며 인상을 썼다. 팔짱을 낀 채로 대만을 내려다보는 치수는 잠시 들린 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는 옷차림이었다. 심지어 아침 도보를 같이 하자며 치수를 데리러 온 사람은 준호였다. 아니, 권준호? 내가 그렇게 다시 오라고 할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두 사람이 운동장을 달리기 위해 체육관 밖으로 나갈 동안 대만은 자신의 가슴을 토닥거리며 연신 놀라지 않은 척을 했다. 여전히 체육관 한복판에서 두리번거리는 대만을 제지한 건 태섭이었다.
“선배, 이제 슬슬 나가시죠? 우리 연습 계속해야 하는데.”
“왜 나를 쫓아내! 나도 아침 훈련할 거야!”
“무슨 아침 훈련을 해요? 미쳤어요?”
“뭐가?”
“무릎 안 아파요? 다 나았어요? 무릎 아프대서 쉬게 해줬더니 뭔 소리야.”
그러고 보니 아침에 눈을 뜬 것도 무릎이 아파서였다.
“…무릎? 아파.”
“지금 나랑 장난쳐요?”
“어, 근데 태섭아, 나 무릎이 왜 아프냐?”
아무리 선수 생활할 때보다 관리를 덜 했다고 한들 고작 계단 300개 오르내린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니 몸도 그때의 몸이라고 가정해도 대만은 농구부에 복귀 후 졸업할 때까지 무릎이 아팠던 적이 없다.
“나, 무릎…, 무릎이 왜 아프지?”
뭐 이딴 꿈이 다 있어. 서태웅 보려면 무릎 정도는 아파봐라 이 뜻이냐. 그런 거라면 무릎 두세 개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었다. 태웅만 있다면. 은근하게 올라오는 통증을 느끼며 다시 돌아보자 태웅은 어느새 등을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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