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어린왕자 샘플
1.
알람도 없이 눈이 뜨인 건 아마도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 때문인 듯했다. 어제 잠들기 전 커튼을 잊은 모양인지 여느 때라면 캄캄했을 방이 환했다. 호열이 아직 멍한 정신으로 눈을 깜박거리는 동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방문 너머의 움직임을 상상하며 침대에 걸터앉아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온몸에 묻어있는 피로를 털어내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조금씩 시야가 밝아졌다. 그러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대신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자 호열은 잽싸게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양호열. 일어났냐?”
호열은 마음속으로 셋을 셌다. 하나 둘 그리고, …네. 다행히 막 잠에서 깬 듯한 꽉 막힌 목소리가 나왔다.
“들어간다.”
이번에는 호열의 대답도 듣기 전에 문이 열렸다. 방으로 들어온 대만은 침대에서 꾸물거리는 호열을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 몸을 돌리다 멈칫했다.
“어, 커튼 열려있네? 너 어제 커튼 열고 잤냐?”
“…그런가 봐요.”
“피곤하겠네. 나와서 밥 먹어라.”
대만은 호열의 침대 모서리를 발로 툭 치고 방을 나갔다. 그제야 이불 밖으로 나온 호열이 창문을 열고 이불을 대충 정리했다. 그리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칫솔을 입에 물고 양치를 했다. 화장실을 나와 거실로 나가자 테이블엔 이미 밥이 차려져 있었다. 호열이 앉은 자리에는 그릇 가득 밥이 담겨 있고 맞은편의 그릇에는 반만 차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오냐.”
대만의 젓가락이 반찬이 담긴 그릇 사이를 오가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움직임이었다. 반찬을 뒤적거리지도 않고 먹을 때 소리가 나지도 않았다. 대만의 젓가락질을 보던 호열은 평소보다 천천히 수저를 움직였다.
“이번에 뭐 사야 한다고 했지?”
“어, 휴지랑, 세제랑, 간장?”
“간장?”
대만이 고개를 뒤로 빼어내고 양념장이 나란히 줄지어 있는 찬장을 보았다.
“간장이 없었나?”
“없을걸요? 내가 마지막으로 쓰고 통 씻어뒀어요.”
“아, 그런가. 그럼 간장도 사고.”
그리고 대만은 비상열쇠를 하나 더 만들었다며 혹시 열쇠를 잃어버리면 우편함 천장을 만져보라고 알려주었다. 처음부터 밥을 적게 펐던 대만은 그 정도의 짧은 대화로도 그릇을 비우고 일어났다. 싱크대에 그릇이 담기며 잘그락거렸다.
“나 먼저 간다.”
“네.”
방으로 들어간 대만은 잠시 뒤 옷을 갈아입고 나와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한번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호열은 숨을 크게 뱉고 수저를 다시 들었다. 조금 전보다 빨라진 속도로 남은 반찬을 싹싹 긁어먹은 뒤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 앞에 섰다.
아침에 대만이 요리를 하며 썼던 냄비와 도구들, 밥그릇과 반찬을 덜어 먹었던 그릇 몇 개는 별로 손이 가지도 않았다. 물을 끄고 시계를 확인하자 슬슬 집을 나설 시간이었다. 호열은 수건과 교복을 챙겨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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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열과 정대만의 기묘한 동거는 아주 우연히 시작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만은 선배의 면을 세운다는 핑계로 농구부를 자주 방문했지만 아르바이트로 바빴던 호열은 백호를 통해 가끔 소식을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 몇 달 전, 후원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가게 된 태섭의 송별회에 대만은 당연한 듯 얼굴을 내밀었고 테이블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인사를 했다. 모임이 거의 끝날 때쯤 대만은 백호와 호열이 있는 테이블까지 왔다. 제법 비장한 얼굴로 없는 자리를 만들고 낑겨 앉더니 백호를 툭툭 쳤다.
“강백호, 안 선생님께 들었는데 너도 유학 그거 준비한다며?”
“어엉? 뭐, 준비는 하는데….”
“웬일이냐? 너답지 않게 자신 없는 대답?”
백호는 3학년이 되고 미국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건 지난 겨울 안 선생의 제의가 시발점이었다. 백호에게 미국 유학 프로그램을 알려주며 이걸 준비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이미 태섭이 그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간 걸 보았으니 백호에게도 익숙한 프로그램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백호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지만 영어며 면접이며 준비할 것이 많아 버거워하기도 했다.
“야, 천하의 강백호가 설마 떨어지겠냐?”
“으으, 대만군은 조용히 해.”
“너도 가고, 서태웅도 여름에 간댔나? 그러면 북산에서 세 명이나 미국을 가네. 이야, 우리 대 북산고등학교 최고다. 근데 그 백호야….”
“왜?”
“너 혹시, 나랑 같이 살 생각 없냐?”
엄지를 들며 최고, 최고 하던 대만은 별안간 몸을 숙여 백호와 얼굴을 좁혔다. 그리고 처음에 보았던 비장한 얼굴로 백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어엉? 갑자기 뭔 소리야?”
“나 기숙사 나오게 됐거든. 혼자 사는데 집이 넓어서. 너 어차피 1년 뒤에 미국 갈 거면 그전까지 나랑 살면 어떨까 해서.”
대만이 알려준 위치는 학교에서 전철로 30분 정도 걸리는 동네였다. 부모님 집이라서 월세는 안 내도 돼. 전기세랑 수도, 뭐 그런 것만 반반 해. 신축 맨션이라 방도 두 개고 꽤 좋아. 대만은 열심히 백호를 꼬셨지만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지내는 집의 월세를 1년 치 선납을 해서 안 된다는 이유였다. 단호한 거절에 대만은 미간을 구기며 젓가락을 놓았다. 아, 너 진짜 안 되냐? 큰일 났네. 나 너만 믿고 있었는데. 대만군, 미쳤어? 갑자기 같이 살자고 하면 그걸 누가 알았다고 하냐! 백호의 핀잔에도 대만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툴툴거렸다.
“아, 진짜 사람 구하기 쉽지 않네.”
“아무나 상관없으면 나도 괜찮아요?”
“어어?”
대만과 백호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호열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테이블의 시선이 호열에게 쏠리고 구식이 의아하게 물었다. 너 집 나오게? 응. 그러고 싶어서. 하지만 대만은 조금 전 백호를 꼬실 때와는 달리 선뜻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어…, 학교랑 거리가 좀 있는데 괜찮겠냐?”
“상관없어요.”
집을 나갈 수만 있다면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호열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고민하던 대만은 이미 그곳에서 지내고 있으니 언제든지 들어오라고 했다. 근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네, 뭔데요? 아침은 꼭 같이 먹어야 해. 나 농구부 아침 훈련 때문에 매일 일찍 나가야 하거든? 그래도 같이 먹어줘. 이게 내 조건이야. 이것만 지켜주면 다른 건 너 편한 대로 해. 친구들 데리고 오는 것도 괜찮고 밤늦게 들어와도 상관없어. 나랑 아침만 같이 먹어. 아침밥 같이 먹기? 그런 건 조건 축에도 들지 않았다. 심지어 아침밥은 자신이 준비하겠단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근데, 시간이 좀 빨라. 우리 아침 연습이 7시까지 집합이거든. 그러니까 음…, 6시, 늦어도 6시 10분에는 밥을 먹어야 해. 괜찮겠냐?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하지만 매일 비구름이 끼인 것 같은 우중충한 집구석을 떠올리자 아침에 일어나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고 대만에겐 아침잠이 없으니 괜찮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이틀 뒤 호열이 대만의 집에 교복 한 벌과 속옷 몇 개를 챙겨오면서 두 사람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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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아, 일찍 왔네?”
“안녕. 어제는 잘 들어갔어? 늦게 들어갔다고 혼나지는 않았고?”
“으응. 괜찮았어. 나도 자취하고 싶다. 그러면 너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매일 놀러 갈 텐데.”
“내가 아르바이트를 너무 많은 게 문제지. 줄여보려고 해도 쉽지 않네. 미안.”
세영은 호열이 네 번째로 사귄 여자친구였다. 2학년 때부터 호열은 여자들에게 고백을 받는 일이 생겼다. 처음엔 신발장 앞에서 만난 3학년 선배에게 잠시 비상계단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고백을 받았다. 안타깝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두 달 뒤 호열은 자판기 근처에서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겨울 방학이 시작하기 전 도서관 앞에서, 세영은 3학년이 되고 같은 반에 배정되어 처음 얼굴을 익힌 사이였다. 그리고 호열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편의점에서 고백했다.
호열은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가 줄줄이 있었으며 주말에도 각종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여자친구를 위해 시간을 따로 만들기가 힘들긴 했다. 그러나 사귀기 전 분명 그 점을 알리고 시작했는데도 왜 번번이 그 이유로 차이게 되는지는 의문이었다.
“아, 잠깐만. 나 삐삐왔어. 확인 좀 하고 올게.”
“지금? 곧 수업 시작 종 칠 텐데?”
“아르바이트하는 주유소인데, 급한 것 같아서.”
따라 갈까? 순진한 얼굴로 묻는 세영을 보고 호열은 잠시 웃었다. 아니야, 금방 갔다 올게. 보통 사귀는 사이라면 이럴 때 같이 가는 걸까. 호열은 교실 밖으로 나가며 머릿속으로 ‘보통’을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리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학교에서 유일하게 공중전화가 있는 매점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삐삐 사서함에는 주유소의 주임이 남겨둔 메시지가 있었다.
[호열아, 오늘 우리 정산 기계 고장 나서 영업 접었거든? 내일쯤이나 수리 된다니까 오늘은 안 와도 될 것 같다. 이거 확인하면 나한테 메시지 하나 남겨줘.]
호열은 수화기를 내려놓기 전 주임의 삐삐 번호로 486을 찍었다. 지난 겨울부터 일을 시작한 주유소는 아르바이트치고는 조건이 괜찮았다. 매일 나가지 않아도 되고 근무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은 데다 식대까지 나왔다. 그러니 이곳에서 오래 일하고 싶다며 아양을 떨 때도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주임이나 사장의 삐삐에 메시지를 남길 땐 486이나 0404로 충성을 외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읽었다고 연락까지 남겼으니 호열은 다시 뛰어서 교실로 돌아갔다. 막 출석을 부르던 중이었고 운 좋게도 호열은 자신의 이름이 들리기 전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뭐래?]
숨을 고르던 호열의 책상 위로 쪽지가 떨어졌다. 발신인의 이름이 없어도 단정한 글씨만으로 쪽지의 주인이 보였다. 호열은 잠시 망설였다. 오랜만에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었고 거기에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쉬게 되었다고 알리면 세영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할 것 같았다. 세영은 어제도 호열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찾아와서 같이 야식을 먹었으니 싫은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긴 했다.
오늘 내 앞사람 갑자기 빠진다고 좀 빨리 와줄 수 있냐고 물어보시더라.
최대한 단정하게 글씨를 쓰고 다시 쪽지를 접어서 보냈다. 얼마 뒤 다시 날아온 쪽지에는 우는 얼굴의 강아지가 그려져 있었다. 실망한 감정이 고스란히 보이는 쪽지에 죄책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대신 이번 연애는 얼마나 갈지 머릿속으로 가늠해보기는 했다. 방학, 빠르면 기말고사….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호열이 세영과의 저녁을 거절하고 향한 곳은 대만의 대학이었다. 북산 고등학교에서 대만의 대학까진 그리 가깝지 않았다. 등록되지 않은 호열의 바이크는 대만의 대학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대학 입구 근처에 주차 시켜 두고 걸어서 들어갔다. 옷차림이 교복인 덕분에 간간이 시선이 느껴졌지만 몇 번 와본 덕분에 그것도 익숙했다. 농구팀이 쓰는 체육관은 정문에서 제법 거리가 있었고 한참을 걸어 체육관에 도착한 호열은 입구 대신 관중석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으로 들어갔다. 매주 목요일은 연습경기가 있는 날이었고 관중석엔 이미 꽤 많은 사람이 자리를 잡고 농구를 보고 있었다.
호열이 빈자리에 앉아 코트 위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훑었지만 익숙한 얼굴은 없었다. 벤치로 눈을 돌리자 얌전히 앉아 있는 대만이 보였다. 숨을 헐떡이지도 않고 학교 이름이 적힌 트레이닝복 상의까지 걸친 모습으로 보아 오늘은 더 이상 경기에 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고작 3쿼터 초반인데 벌써 빠진다고? 거기에 맞은편 관중석에는 퍽 수상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매주 있는 대학팀 연습 경기에서 볼만한 차림은 아니라 호열의 주위에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했다.
“저 사람들 프로팀 스카우터래.”
“요즘 거의 매주 오는 것 같던데.”
“지난주에는 다른 팀 아니었어?”
호열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보다 벤치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대만이 더 신경 쓰였다. 거기에 지금 연습경기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대만의 팀은 원맨팀이 아니었으니 선수 한 명 빠졌다고 전술이 흔들리거나 공격에 큰 구멍이 생기진 않았다. 그러니 초조한 건 팀이 아니라 대만일 것이 분명했다.
오랜만에 뛰는 모습 좀 보려고 일부러 왔건만 호열은 퍽 김이 샜다. 결국 경기가 끝날 때까지 대만은 한번도 코트를 밟지 못했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정렬하는 동안 우르르 빠져나가는 관중들 사이로 호열도 1층으로 내려왔다. 대만에게 인사를 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오늘은 모른 척 돌아가는 것이 대만을 도와주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사이 체육관 입구로 대만이 나왔다. 굳이 찾아갈 마음은 없었으나 이렇게 마주친다면 무시할 수도 없었다. 호열이 대만의 이름을 부르려던 순간 체육관에서 한 명이 더 나왔다. 호열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체육관을 돌아 뒤쪽으로 돌아갔다. 혹시 들킨다면 대만에게 인사하러 왔다고 하면 되니까. 호열은 겁도 없이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체육관 뒤의 창고로 보이는 곳에서 멈췄다.
“정대만, 괜찮냐?”
“응.”
어떤 걸 묻는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대만의 대답은 단조로웠다. 목소리만으로 대만의 표정까지 보이는 듯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럴 텐데, 어쩌려고?”
대만의 대답 대신 신발이 지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인 간격으로 들려왔다.
“지금이라도 기숙사 들어와.”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 학기 중에 어떻게 들어가.”
“절차가 중요한 거 아니고 보여주는 게 중요하니까. 나랑 동오 방에 끼어서 자. 이불 하나는 내줄 테니까.”
또 대만은 답이 없었다.
“정대만.”
“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지랄 작작 하고 들어와. 삐뇽.”
“아오씨, 됐어. 나도 이젠 모르겠다, 들어가자. 나 없어졌다고 또 난리 났겠다.”
대화는 애매하게 끝났다. 인기척이 가까워지자 호열은 두 사람과 마주치기 전 빠르게 걸어 나왔다. 곧장 교문을 통과해서 바이크를 세워둔 곳까지 갔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건물들에 막혀 체육관은 보이지 않았다. 괜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 입맛이 썼다.
대만의 대학에서 두 사람의 집까지는 바이크로 30분 정도 걸렸다. 호열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아침에 말했던 휴지와 세제, 간장을 담았다. 원래라면 대만이 사 올 것들이지만 아마도 까맣게 잊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호열은 정육 코너에서 닭다리살도 샀다.
호열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휴지와 세제를 정리하고 부엌에 섰다. 튀김가루를 대충 물에 풀고 마트에서 사 온 닭다리살을 던졌다. 그 사이 베란다에서 캔맥주 몇 개를 들고 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튀김 냄새가 온 집에 퍼질 무렵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양호열?”
대만은 곧장 부엌으로 왔다. 이거 뭐야? 닭튀김이요. 오, 좋아. 호열의 곁을 서성거리며 들뜬 목소리를 숨기지도 않았다.
“너 아르바이트는 어쩌고 집에 있냐?”
“갑자기 연락 와서 오늘 쉬래요. 기계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영업 못한다고.”
“어엉. 뭔 일이래.”
“씻고 와요. 같이 먹게.”
대만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보기 좋게 색이 올라온 닭튀김을 접시에 담아 식탁으로 옮겼다. 부엌을 정리하는 동안 욕실을 나온 대만이 냉큼 수저를 깔고 식탁 앞에 앉아 호열에게 빨리 오라며 손짓했다. 호열은 냉장고에서 캔맥주 하나를 가지고 와 대만의 맞은편에 앉았다.
“야, 미성년자. 어디 어른 앞에서 술을 마시면서 치사하게 네 것만 가져오냐?”
“마시게요? 대만군 술 잘 안 마시잖아요.”
“아, 오늘은 술 기분이야.”
대만은 고민도 하지 않고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었다. 와, 차가워. 즐거워하는 대만의 목소리를 듣자 미리 넣어둔 보람이 있었다. 캔을 따는 소리가 경쾌했고 두 사람은 가볍게 캔을 맞부딪혔다. 대만은 냉큼 튀김을 집어 후후 불며 열기를 식혔다.
“맛있다. 양호열, 너 은근 요리 잘해.”
“이건 그냥 가루 풀어서 튀기기만 하면 되는데요.”
“야, 그게 말이 쉽지. 맛있어. 역시 안주가 맛있어서 술도 잘 들어가네.”
대만이 환하게 웃었다. 호열은 몇 시간 전의 대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대만은 그런 일이 있었던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대만은 자신의 기분을 능숙하게 숨길 줄 아는 사람이 된 모양이었다. 마치 어른 같았다.
“요리는 어디서 배웠냐?”
“따로 배운 건 아니고요. 그냥 애들이랑 같이 지낼 때, 없는 돈으로 조금이라도 맛있게 먹어보려고 궁리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어요.”
“진짜 실전 요리네.”
대만은 벌떡 일어나 두 번째 캔을 가지고 왔다. 애초에 호열은 더 마실 생각이 없어서 캔을 건드리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역시 너랑 살길 잘했어. 난 사람 보는 눈은 틀림없다니까.”
“아니, 닭 튀김 하나 먹고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진짜라니까? 너 정도면 최고지. 깔끔하고 사고 안 치고….”
어느덧 대만의 앞에는 맥주캔이 늘어섰다. 흥이 오른 모양인지 대만은 기어이 호열이 찬장에 놔두었던 사케병까지 들고 왔다. 마셔도 되냐? 네, 안주 더 만들어요? 뭐 만들 수 있는데? 대만이 눈을 반짝거렸다. 오뎅이나 좀 끓일까요? 와, 오뎅 최고지. 호열은 냄비에 물을 받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오뎅을 꺼냈다.
맹물에 간장 조금 넣어 만든 오뎅탕이 맛있을 리 없는데 대만은 잘도 먹었다. 그 사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대만은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대만과 함께 살게 되고 가끔 맥주 한두 캔을 마신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술을 마신 건 처음이었다. 백호 군단이 집에 찾아와도 대만은 음료수를 들고 어울렸었다. 역시 내색하지 않아도 오후에 있었던 일이 신경이 쓰였던 것이 분명했다. 몰래 엿들었던 대화도 아직 호열의 어딘가에 의문스럽게 남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불리한 상황인데 대만은 왜 기숙사를 나온 걸까. 그동안 가져본 적 없던 의문이 한번 자리를 잡자 끝도 없이 커졌다. 마침 대만은 술에 꼴았으니 타이밍도 좋았다.
“대만군.”
“엉?”
“나랑 같이 살아서 좋아요?”
“응. 양호열 최고.”
“근데 학교 다니려면 기숙사가 편하지 않아요? 왜 기숙사를 나와서 따로 살아요?”대만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한참 뒤에 고개를 들자 얼굴이 새빨갰다. 으음…. 대만의 말이 느려졌다.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대답을 기피하는 낌새였다. 기민한 호열은 타인의 감정을 쉽게 알아챘다. 타인이 내보이는 선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원래의 양호열이라면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도망칠 구석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건 같이 사는 입장에서 알아둬야 할 일이니까. 호열은 구차한 변명도 갖다 붙였다. 고개를 까딱거리던 대만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나 남자 좋아하거든.”
“…네?”
“남자 좋아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되물은 건 아니었다. 다만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엔 너무나 광범위하고 예상 밖이어서 되물은 것이었다.
“아. 음….”
호열은 멍청하게 탄식했다. 그게 기숙사를 나온 이유가 되려면…. 여러 가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남자를 좋아해서 남자들과 기숙사에 살기가 힘들어서 나왔다는 말인가? 호열은 또래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나름의 처세술을 익혔다. 그러니까 웬만해선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당황한 감정이 얼굴을 뚫고 나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어…, 근데, 아냐…. 그, 기숙사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불편하니까…, 그래서 나왔어.”
하하, 말하고 보니까 바보 같은 이유네. 대만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을 일인가. 따라서 웃어야 하나. 호열이 망설이는 사이 대만은 술이 찰랑거리는 잔을 만지작거렸다. 추가된 설명에도 호열은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정대만이 남자를 좋아하든 여자를 좋아하든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저 이유라면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 나도 남잔데요?”
호열이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남자와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기숙사를 나왔는데 지금 함께 사는 사람도 남자라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호열은 자신의 의문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만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식탁을 두드리며 웃기 시작했다. 술이 올라 시뻘건 얼굴로 낄낄거리는 모습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호열이 혀를 찼다. 아, 알겠으니까 그만 웃어요. 호열의 핀잔에 대만은 눈을 벅벅 부빈 뒤 말을 이었다.
“양호열아, 내가 양호열이 남자인 걸 모르겠냐? 근데 넌 내 추한 꼴 다 봤잖냐. 너한테 주먹으로 줘 터지고…, 어? 눈물콧물 다 흘리면서 질질 짜고…. 나 그날 생각하면 아직도…, 으휴…. 안 선생님, 진짜 죄송해요….”
대만은 말하는 사이사이 손바닥으로 제 이마를 툭툭 때리기도 했다. 술 취한 사람의 주정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그니까, 그런 거지 같은 꼴 다 봤는데 설마 네가 나를 좋아하겠냐?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너는 절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고, 어? 나도 언감생심 너한테 마음 품을 일 없고, 나도 상식이 있는 인간이니까. 감히 내 은인한테 그런 마음 안 품지.”
“은인은 무슨…. 그 얘기 지겹지도 않아요?”
2년이나 지났지만 대만이 말하는 그날의 거지 같은 꼴은 호열에게도 생생하게 남아 있긴 했다. 그러나 기억이 남아 있는 것과는 별개로 은인이라 불릴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호열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3일짜리 근신은 돈까스 덮밥 5개면 퉁치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이었고 대만은 돈까스 덮밥에 차슈면 곱빼기까지 대령했으니 보답이라면 이미 넘치게 받았다. 그러나 호열이 있는 힘껏 비죽거려도 술과 함께 자신의 세계에 빠져버린 대만에겐 들리지도 않는지 대꾸도 없었다.
“어쨌든 도저히 거기선 못 살겠어서 기숙사 나왔는데, 아, 아부지한테 그런 얘길 어떻게 하냐. 맞아 죽을 일 있냐, 씨이…. 그냥 부모님한테는 북산 후배랑 같이 살게 됐다고 말하니까 집 얻어주신 건데, 아니 강백호 그놈이 거절할 줄이야. 근데 딱, 네가 그때! 같이 살겠다고 해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히히. 말끝에 따라붙는 웃음이 얄미웠다. 저건 거짓말이었다. 호열은 자신이 그 집에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을 때 대만의 얼굴에 퍼졌던 당황과 한참이나 뜸을 들인 뒤 겨우 받아낸 승낙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가 나를 두 번 구한 거다. 양호열. 진짜. 완전 은인.”
정대만은 죽어도 모른다. 제아무리 고급 맨션이 살기에 편하다고 해도 한 시간 거리의 통학은 쉽지 않았다. 거기에 매일 아르바이트로 밤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새벽 6시에 아침 먹기?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그걸 전부 감수하고 여기에 들어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걸 물어보지 않는 건 고마웠지만 남의 사정 따윈 어찌 되었든 자신의 입장만을 내세우며 은인이니 뭐니 말을 갖다 붙이는 게 제법 배알이 꼴렸다.
대만이 술이 찰랑거리는 잔을 들었다. 이제 그만 마셔요. 호열이 손을 뻗어 잔을 다시 내려놓자 대만은 호열의 손을 꽉 쥐었다.
“고맙다 양호열, 진짜 고마워….”
대만이 웃었고 호열은 대만을 따라서 웃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으니 은인이라고 치켜세워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호열은 2년 전, 체육관에서 대만을 도와준 일을 처음으로 조금 후회했다.
2.
오늘도 호열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방문 너머로 어김없이 아침을 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느 때라면 대만이 깨우러 올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오늘은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방을 나간 호열이 양치만 후다닥 끝내고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부엌에 얼굴을 내밀었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대만이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 일찍 일어났네.”
“네, 뭐…. 도와줄 거 있어요?”
“아냐, 없어없어. 앉아.”
평소라면 밥이라도 퍼 나르라고 주걱을 던졌을 대만이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호열은 눈치껏 대만의 옆에 섰다.
“아, 나 오늘 좀 늦잠 자서, 진짜 뭐가 없어.”
“이것만 옮기면 되죠?”
호열은 접시를 들고 와서 불이 꺼진 후라이팬 위에 있는 계란 후라이 두 개와 비엔나소시지를 옮겨 담고 식탁으로 날랐다. 그 사이 대만이 밥을 펐고 두 사람은 약 6시간 만에 다시 식탁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누구도 먼저 수저를 들지 않았고 어색한 침묵이 점점 목을 조였다.
“…그.”
“네.”
호열은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대만은 아니었다. 오늘도 농구부 연습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먼저 입을 연 것도 당연히 대만이었다.
“물론 네가 여기저기 얘기하고 다닐 사람이 아닌 건 알지만….”
“…….”
“음, 어제 우리가 했던, 아니, 내가 했던 말들은 비밀로 해주면…….”
좋겠다. 호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대만군. 내가 그런 얘길 어디 가서 떠벌릴 사람으로 보여요? 하고 허풍이라도 치며 대만을 안심시킬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대만이 먼저 고개를 푹 숙이고 수저를 들었고 머쓱해진 호열이 따라서 밥을 크게 펐다.
어수선했던 어젯밤의 일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흐르는 분위기까지 수습이 된 건 아니라 여느 때와 달리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그날따라 대만은 계란 후라이에 소금을 잊어서 아무 맛도 나지 않았고 비엔나소시지를 찍어 먹을 케첩은 냉장고에 처박혀 빛을 보지도 못했다. 엉망인 식사가 끝나고 대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집을 나섰다. 남은 호열은 젓가락으로 소시지를 찍어 입으로 날랐다.
대만의 태도를 보니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꿈이 아니었구나. 꿈이길 바라지도 않았고 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얼렁뚱땅 넘겨받은 타인의 묵직한 비밀은 부담스럽긴 했다. 남자를 좋아한다고? 아주 낯선 얘기는 아니었다. 학교에도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떠돌아다니곤 했다. 그렇지만 정대만이? 심지어 그것 때문에 기숙사를 나왔다니. 그건 놀랍다기보다 의아함에 가까웠다. 애초에 그런 욕구를 조절하지 못할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호열은 자신의 상황으로 애매하게 대입했다. 여자들과 같은 기숙사를 쓴다면? 상황이 닥쳐야 알겠지만 딱히 마음이 동할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호열은 지난 4명의 여자친구 중 누구와도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호열은 몇 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정대만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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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스키인데 이건 왜 다이브지?”
“…….”
“같은 i인데 이건 이로 읽고 이건 아이로 읽지? 호열아, 너 아냐?”
ski와 dive를 두고 씨름을 하는 백호의 앞에서 호열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국으로 보내준다는 프로그램은 분명 솔깃한 제안이었지만 거기에 선정되기까지 고난은 많았다. 기본적인 영어 테스트며 면접, 도미 후의 구체적인 계획서까지 제출해야 했다. 그중 백호를 제일 괴롭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어였다. 그건 백호가 그 프로그램을 준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섭이 제일 먼저 조언한 일이기도 했다. 영어부터 공부해라. 그쪽에서 요구하는 수준이 높진 않은데, 어쨌든 기본 테스트는 통과해야 해. 한나와 달재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테스트에 통과한 태섭은 의기양양했다. 송태섭이 하면 나도 한다! 그러나 백호는 영어책을 보자마자 머리를 싸맸다.
호열은 백호의 미국행을 응원했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생각도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도저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과목도 아니라 영어라면 더더욱 그랬다. 수업 시간에 적당히 주워들은 걸로 낙제는 면할 정도의 점수를 받고 있었지만 남을 가르칠 수준은 아니었다. 호열이 그렇다는 건 대남과 용팔, 구식의 상황도 비슷하다는 뜻이었다.
“소연이한테 물어보는 건? 소연이가 모르는 건 뭐든 물어보라고 했잖아!”
구식은 적절한 조언을 건넸다. 그러나 백호는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절대 안 돼! 소연이한테 이것도 모른다는 걸 들킬 순 없어!”
“…….”
소연이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묘한 시선이 오갔다. 하지만 노력하는 백호에게 찬물을 뒤집어씌울 만큼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전히 교과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백호 앞에는 사람이 넷이나 있었지만 누구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나선 건 호열이었다.
“그럼 내가 소연이한테 물어봐 줄게.”
“헛!”
“그거 말고 또 궁금한 거 없어?”
백호는 허겁지겁 교과서의 페이지를 넘기며 여기도, 여기도, 아, 이것도! 질문을 추가했다. 표시가 늘어난 교과서를 들고 호열이 교실을 나왔다. 점심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진학반인 소연의 교실은 점심시간에도 조용했다. 호열은 조심스럽게 교실로 들어가 소연을 찾았다.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소연의 뒤에서 잠시 지켜보다 놀라지 않도록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앗, 호열아. 어쩐 일이야?”
“물어볼 게 좀 있어서. 지금 시간 괜찮아?”
“당연하지! 뭔데?”
호열이 비어있는 소연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소연은 쓰고 있던 노트를 덮었다. 농구부 일지였다.
“농구부 일지 쓰는 거야?”
“응. 매일매일 써두지 않으면 자꾸 밀려서 쓰기 힘들더라구.”
헤헤, 소연이 부끄러운 듯 웃었다. 호열은 농구부 매니저의 일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소연이 바쁜 시간을 쪼개 많은 일을 도맡아 하는 것은 알았다.
“물어본다는 거 혹시 그거?”
소연이 호열이 들고 있던 영어 교과서를 가리켰고 호열은 소연이 보기 편하도록 교과서를 돌려서 펼쳤다.
“아, 응. 영어인데 잘 모르겠어서. 이거 발음이 왜 바뀌는지….”
“아아, 이건 말이지….”
허튼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지만 호열은 자꾸만 정신이 다른 곳으로 빠져서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이곳에 앉아 소연에게 설명을 듣는 상황이 머쓱했다. 백호도 소연도 시간을 쪼개가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데 호열은 아니었다. 백호를 돕는 것은 싫지 않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혼자 뒤처진 기분이 들기는 했다. 먼저 돕겠다고 나선 주제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꼴사나웠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 거야. 나 설명을 잘했는지 모르겠네. 조금 이해가 돼?”
“아, 응. 고마워.”
“정말? 후후. 그럼 다음에는 백호한테 직접 오라고 해줄래?”
“…어, 들켰어?”
“교과서에 백호 이름이 쓰여 있는걸.”
소연이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킨 곳엔 강백호라고 크게 쓰여있었다. 놀란 호열이 손을 뻗어 이름을 가렸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혔고 그대로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소연은 참고하면 좋을 거라며 교과서의 모퉁이에 설명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비어있던 여백에 단정한 글씨가 채워지는 걸 보고 있던 호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연아.”
“응?”
“넌 졸업하면 어디로 가고 싶어? 대학이나, 뭐 그런 것….”
“음…, 지난달에 진로상담 했을 때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거든. 그런데 사실은 협회에 들어가고 싶어.”
“협회?”
“응. 농구협회. 협회에서 유소년 농구 지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
“우와. 소연아 너 대단하다.”
호열의 감탄에도 소연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오히려 쥐고 있던 샤프를 내려두더니 팔을 올려 턱을 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잘 모르겠어. 혹시 하진 기자님 알아? 전에 우리 오빠 인터뷰하러 오셨을 때 잠시 얘기해 봤는데 협회에선 여자를 잘 안 뽑는대. 그래서 걱정이야.”
“아….”
“그치만 날 뽑지 않을 수 없게 엄청 열심히 해보려구.”
“소연아, 너라면 가능할 거야. 응원할게.”
잠시 보였던 쓸쓸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소연이 활짝 웃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면서 비어있던 교실로 학생들이 하나둘 돌아왔고 호열이 앉아있던 자리도 주인이 나타났다. 소연은 교실을 나가려는 호열을 붙잡았다.
“잠깐씩이라도 괜찮다면 부 활동 끝나고 영어 공부 같이 해줄 수 있다고 백호한테 전해줄래?”
“어…, 괜찮겠어?”
“당연하지. 뭐든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주고 싶어.”
백호에게 꼭 전달하겠다는 말을 인사 대신 남기고 호열은 자신의 교실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백호는 그 소식을 듣고 벌떡 일어나 책상을 빙빙 돌았다. 소연이가 진짜 그랬냐고 몇 번이나 되물은 뒤 나 따위가 소연이의 귀한 시간을 빼앗을 수 없다며 침울하다가 네 영어 실력을 생각하라는 용팔의 지적에 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백호를 진정시킨 건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유학 프로그램 신청 서류 중에는 학교 선생님의 추천서도 있었으니 백호는 최근 들어 수업 시간에도 성실하게 들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도리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건 호열이었다. 점심시간에 소연과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소연은 호열이 본 사람들 중 가장 똑똑하고 현명했다. 거기에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한편으론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소연의 입에서 원하는 직장이 남자들만 뽑는다는 소리를 듣고 걱정된다는 얘기를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열은 수업을 듣고 있는 같은 반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3년 동안 보았던 다른 남학생들도 떠올렸다. 지금 생각나는 사람들 중 소연보다 농구협회에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고작 성별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는 모습은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그렇지만 묘한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소연이 타고난 순간부터 부여받은 벽이 성별이라면 호열은 부모였다.
왜 하필이면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난 걸까. 호열은 그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고작 핏줄로 연결되었을 뿐인데 그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억압했고 호열은 스스로의 힘만으론 그 억압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 호열의 앞에 나타난 사람이 대만이었다. 이 집을 나갈 수만 있다면 대만이 내민 손이 썩은 동아줄일지라도 붙잡아야 했다. 이 아슬아슬한 동거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모르긴 몰라도 하루라도 더 오래갈 수 있도록 호열은 납작하게 엎드려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대만이 호열에게 은인이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거나 묻지도 않은 큰 비밀을 떠벌린 뒤 제 눈치를 보는 어이없는 행동을 해도 호열은 순순히 대만에게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호열이 배 위로 손을 올렸다. 몇 달 전 집을 나가겠다고 교복과 속옷 몇 벌을 챙길 때 어둠 속에서 날아온 것이 배를 강타했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집을 뛰쳐나왔다. 이미 지난 일이고 시퍼렇게 들었던 멍도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호열은 집을 떠올릴 때마다 이따금 배 위에 손을 올렸다.
얄팍한 기시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소연은 자신이 다짐한 대로 성별의 벽을 넘을 것이다. 그건 호열이 보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열은 죽었다 깨어나도 부모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성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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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아, 이거 5번 테이블!”
“넵!”
그런 상황에서 호열이 믿을 건 돈뿐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호열의 집에는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걸 모른 척할 수도 없었던 탓에 돈은 한시도 호열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도 남는 것 하나 없었던 세월은 너무나 길었다. 그러나 대만의 집에 들어가곤 상황이 달라졌다. 집에 있을 때보다 돈을 더 모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대만은 월세도 받지 않았고 둘이 먹는 식재료나 생활하는데 필요한 대부분의 물건을 자신이 사다 놓긴 했지만 호열의 성정상 가만히 얻어먹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거기에 호열은 대만의 집에서 생활한 뒤로 돈을 쓰는 방법이 조금 달라졌다.
호열이 처음 대만의 집에 들어오고 몇 주가 지났을 무렵 대만은 타 대학과 친선전이 있다며 집을 며칠 비웠다. 그때 대만은 호열에게 두루마리 휴지가 떨어졌으니 사다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호열은 아무 생각 없이 늘 그랬듯 마트에서 제일 싼 휴지를 사서 집으로 들고 왔고 며칠 뒤 집에 돌아온 대만이 그 두루마리 휴지를 던져 호열의 머리에 명중시켰다. 악, 소리와 함께 돌아보자 대만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야이씨, 이게 휴지냐? 이걸로 닦으면 똥꼬 다 헐겠다!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다음 날 대만이 다시 두루마리 휴지를 한 뭉텅이 사 들고 왔다. 휴지 외에 이것저것 같이 사 온 마트 봉투 안에는 영수증이 있었다. 슬쩍 엿본 영수증에 찍힌 휴지의 가격은 호열이 샀던 휴지의 두 배가 넘었다. 호열은 휴지 두 개를 비교하며 만지작거렸다. 대만이 사 온 휴지가 조금 더 부드러운 것 같긴 했다. 그런데 고작 휴지잖아. 휴지 따위에 얼마를 쓰는 거야? 호열은 대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얹혀사는 주제에 할 말은 없었다. 결국 호열은 제가 산 휴지를 학교에 가져갔다. 늘 휴지가 모자라 전쟁을 벌이는 곳이니 싸구려 휴지라도 금방 동이 났다.
그때부터 호열은 자신이 무언가 사야 할 때가 되면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대만의 기준을 생각하게 되었다. 휴지뿐만이 아니었다. 칫솔, 치약, 샴푸부터 간장, 계란, 마요네즈, 된장 등 먹는 것에 이르기까지 호열은 예전보다 조금 더 돈을 쓰게 되었다. 이제 호열은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가격보다 물건을 만든 회사명이나 성분을 먼저 본다. 심지어 호오도 생겼다. 칫솔은 너무 부드러운 것보다 적당히 뻣뻣한 것이 좋다던가 수건에서는 섬유유연제의 향기가 나지 않았으면 해서 수건용으로 무향 섬유유연제를 따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러니 대만의 집에서 지내면서도 돈을 모으기 힘든 건 비슷했지만 돈을 쓸 때의 기분이 달랐다. 자신의 돈이 어디로 쓰이는지도 모를 때에 느꼈던 절망은 없어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호열에겐 그런 안식이 필요했다.
“주문하신 토마토 파스타와 치킨 샐러드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금요일 저녁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정신없이 바빴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 들어오고 나갔다. 커플이 먹고 나간 자리를 치우자마자 다시 식당의 문이 열렸다. 한 분이세요? 안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등 뒤에서 매니저의 우렁찬 안내가 들렸고 호열은 마지막으로 테이블을 훑었다. 곧이어 호열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메뉴판 준비해…. 엥? 대만군?”
“이야, 너 여기서 보니까 완전 딴판이다?”
대만이 히죽히죽 웃으며 유니폼을 입은 호열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어떻게 왔어요?”
“너 전에 한번 가게 이름 말했었잖아. 기억하고 있었지.”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농구 할 시간 아니에요?”
대만의 농구부도 매일 늦게 끝이 났다. 설마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건가 싶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확인했지만 아직 한참 전이었다.
“아, 오늘 연습 없어. 그…, 넌 언제 끝나냐? 오래 걸리냐?”
“두 시간 정도 더 있어야 해요.”
“음, 그때까지 자리 차지하고 있으면 너무 눈치 보이나?”호열은 손님으로 꽉 찬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금요일 저녁의 패밀리 레스토랑은 만석이긴 했지만 오래 머무는 사람들이 적진 않았다. 특히 학생들은 얼마 없는 돈으로 시간을 보내기에 여기보다 나은 곳은 없었으니 꽤 많은 테이블에서 교복이 보였다.
“아뇨, 뭐, 괜찮아요.”
“그럼 나 클럽 샌드위치 하나랑 커피…, 여기도 음료 바 무제한?”
“네.”
“그럼 샌드위치랑 음료 무제한 할게.”
호열은 대만이 불러주는 대로 주문지에 표시했다. 그리고 반을 찢어 테이블 가장자리에 끼웠다.
“지금 주문이 밀려있어서 샌드위치는 시간이 좀 걸려요. 음료 바는 지금부터 이용 가능하고 바 이용은 다른 곳이랑 방법 똑같으니까….”
“우와, 양호열 씨. 다른 손님들한테도 그렇게 말하십니까?”
“아, 알았어요. 저쪽 바에 컵 있고 탄산, 커피 무제한으로 이용 가능하시구요….”
호열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퍽 얄미웠다. 그러나 아침의 경직된 분위기는 보이지 않아서 한편으로는 안심이었다. 대만은 들고 왔던 가방을 안쪽으로 던지고 호열과 함께 테이블을 벗어났다. 대만은 음료 바로 향했고 호열은 주방으로 가서 대만의 주문을 전달했다.
호열이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동안 대만은 샌드위치와 커피를 옆에 두고 연신 책을 읽었다. 호열이 가끔 대만이 있는 테이블 옆을 지나가도 집중한 탓인지 전혀 이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흘깃거린 책은 호열이 모르는 글자가 잔뜩 쓰여있었다. 체육 특기생으로 입학하긴 했지만 성적 관리도 꽤나 중요하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같은 집에 살아도 각자의 방이 있었으니 이렇게 공부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 사이 근무 시간이 끝나고 호열이 옷을 갈아입고 대만의 테이블로 갔다. 비어있는 앞자리에 앉자 그제야 대만이 고개를 들었다.
“어, 끝났냐?”
“네.”
“수고했네. 그럼 뭐 좀 먹자. 다른 식당으로 옮기기도 좀 그렇고…. 그냥 여기서 시켜도 되지? 너 뭐 먹을래? 내가 살게.”
“아, 전 직원 식사 나오니까 대만군 먹고 싶은 걸로 시켜요.”
대만은 치즈가 들어간 베이컨 필라프를 주문했다. 주문지에 베이컨 필라프를 써서 주방에 전달하고 돌아오자 지나가던 매니저가 호열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이야, 양호열 또 손님? 인기 많네.”
“아, 아니에요. 이분은 저랑 같이 사는 선배.”
“안녕하세요.”
매니저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뜨자 대만이 호열에게 속닥거렸다.
“나 말고 또 누구 왔냐? 백호랑 애들?”
“그쵸, 뭐. 여기 싸고 괜찮으니까….”
이틀 전 세영이 이곳에 와서 호열의 근무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고 두 사람은 함께 나갔다. 그러나 그걸 굳이 대만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이 대만이 주문한 필라프가 나왔고 호열은 자신의 몫으로 준비된 직원 식사용 파스타와 함께 들고 왔다. 테이블에는 조금 전엔 없었던 탄산이 담긴 컵이 있었다.
“음료 바 1인 추가했어.”
호열의 시선을 눈치챈 듯 대만이 주문지를 팔랑거렸다. 몇 시간 전 호열이 주문지에 썼던 숫자 1 대신 2가 선명하게 보였다. 직원은 주방에서 음료를 가져다 먹을 수 있었지만 대만이 알 턱이 없었다. 그걸 알려주는 대신 호열은 대만의 호의를 꿀꺽 마셨다.
“여기까진 진짜 웬일이에요?”
“그냥, 뭐…. 우리 밖에서 같이 밥 먹은 적도 없고.”
“혹시 아침의 일이라면 정말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아니, 됐어. 그건. 아냐, 야, 나 너 믿어. 그래, 너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닐 애는 아니지.”
대만은 크게 손을 저었다. 그리고 샌드위치 그릇을 밀어내고 필라프를 가까이 당겼다. 숟가락으로 크게 한술 떠서 필라프를 먹더니 맛있다며 감탄했다.
“그리고 사실은…. 그거, 뭐, 어제는 술에 취해서 그렇게 말했지만 뭐…. 음, 정확히 말하자면, 으음….”
대만이 숟가락의 손잡이 부분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긁었고 그건 아침마다 항상 단정하게 밥을 먹던 모습과는 달라서 호열은 저도 모르는 사이 시선을 뺏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뭐요? 어제 했던 말 사실이 아니라구요?”
“아니…, 아닌 건 아닌 데에…. 아. 말하기가 애매하네. 어쨌든 좀 그래. 사정이 있어.”
대만은 눈을 데굴 굴렸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늘어지는 말이 영 거슬렸다. 모르긴 몰라도 사정이 있을 법한 이야기긴 했다. 그러나 호열은 더 캐묻는 걸 그만뒀다. 대신 포크에 파스타를 돌돌 감았다.
이후로 이어지는 대화는 두 사람이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하는 것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침에 볼 때와는 느낌이 달라서 굳이 대만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끔은 이런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릇을 싹싹 비우고 음료 바도 한 번 더 이용한 뒤에야 가게를 나왔다. 호열은 바이크 시트를 열어 헬멧을 하나 더 꺼내서 대만에게 건넸다.
“근데 오늘은 왜 농구부 연습이 없어요?”
“아, 어제 우리 연습게임 했는데 프로팀 스카우터들 왔거든. 그래서 다들 빡세게 뛰느라 고생했다고 하루 휴식.”
프로팀 스카우터 앞에서 제대로 뛰지도 못한 주제에 대만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했다. 그래서 호열도 덩달아 태연하게 대만의 헬멧을 살폈다. 같은 집에 산다고 해도 생활 반경이 완전 달랐으니 호열은 자신의 바이크에 대만을 태우는 것이 처음이었다. 대만은 가방을 꽉 끌어안고 뒷자리에 탔다. 대만이 비워둔 앞쪽에 앉자 등에 가방이 닿았다. 호열이 뒤를 돌아보자 대만이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왜, 거슬려? 뒤로 멜까?”
“아뇨. 괜찮아요.”
대만을 태운 바이크가 어둑해진 거리를 내달렸다. 별다른 대화는 오가지 않았고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아주 못 견딜 침묵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집 근처 사거리에서 신호대기를 위해 잠시 정차했을 때 대만이 호열의 허리를 찔렀다.
“양호열, 오늘 영화 한 편 볼래?”
“영화요?”
“어. 렌탈샵 들리자. 편의점 옆에 있는 거 알지? 거기로 가.”
갑자기 웬 영화? 하지만 호열은 순순히 기다리던 좌회전 신호 대신 직진 신호를 받고 렌탈샵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집엔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다. 대만은 그걸로 녹화된 농구 경기를 보곤 했다. 호열도 가끔 비디오 플레이어를 이용했다. 다만 대만이 원정 경기로 집을 비울 때 한정이었다. 동거를 시작할 때 대만은 집에 있는 모든 걸 편하게 써도 된다고 말했으니 일부러 그때만 비디오 플레이어를 이용하는 건 호열의 고집이었다.
호열은 영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평생 영화관에 간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학생 할인 요금이라도 학교 매점에서 두 끼는 채울 수 있는 금액이었으니 선뜻 발길이 닿지 않은 탓이었다. 대신 렌탈샵을 자주 드나들었다. 호열의 집엔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지만 도저히 볼 마음이 들지 않았고 대신 구식의 집으로 갔다. 구식의 방에 다섯 명이 모여 호열이 빌려온 비디오를 함께 보았다. 그러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는 네 명의 코 고는 소리 때문에 대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호열은 그 정도로 만족했다. 그러니 호열이 대만의 앞에서 비디오 플레이어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건 순전히 취향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너 영화 뭐 좋아해?”
“딱히? 다 봐요.”
대만은 렌탈샵에 들어서자마자 정중앙의 베스트코너로 갔다. 대만이 손으로 가리키는 영화는 전부 호열의 취향을 빗나간 것들이지만 굳이 입을 열진 않았다. 이건 어때? 헤에, 대만군 그런 취향? 나쁘지 않죠. 그럼 이건? 이것도 괜찮죠. 오, 이것도 있네. 양호열, 이건 어떠냐. 대만군 영화 고를 줄 아네요. 이거 좋죠. 대만은 세 번 묻고는 싸늘한 눈으로 호열을 돌아보았다.
“너 할 줄 아는 말이 좋다는 말밖에 없냐? 아니면, 영화 싫어해?”
“진짜 다 좋아서 좋다고 한 건데?”
대만이 고르는 것은 호열의 성에는 차지 않았지만 굳이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니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대만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호열의 종아리를 발로 찼다.
“아, 좀 진지하게 보라고.”
아까까지 계속 진지하게 좋다고 얘기했잖아요! 아, 됐어. 잘난 네가 골라라. 대만이 혀를 차며 삐딱하게 섰다. 결국 호열이 쪼그려 앉아 천천히 비디오를 살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영화가 있었다. 액션 장르의 시리즈물이었다. 마침 대만이 호열을 따라 옆에 앉았고 호열은 대만이 보기 좋게 골라둔 비디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재밌다는데 어때…, 우왓!”
“오, 그럼 그거…. 양호열, 뭐하냐.”
당연히 비디오에 시선이 팔린 줄 알았더니 대만은 눈을 반짝이며 호열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과하게 가까웠다.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빼던 호열이 팔을 뒤로 짚었지만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바닥을 짚었던 왼팔과 엉덩이가 욱신거렸지만 그것보다 한심한 듯 내려다보는 대만의 얼굴이 더욱 신경 쓰여서 호열은 벌떡 일어났다.
“고, 골랐으면 빨리 가요.”
“천하의 양호열이 뒤로 자빠지는 모습도 보고, 귀한 구경 했네.”
놀리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호열이 먼저 렌탈샵을 나왔다. 뒤이어 나온 대만이 헬멧을 쓰고 뒷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손목과 엉덩이가 홧홧해서 초여름의 밤바람에 식히기 위해 호열이 바이크의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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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에 빌려온 비디오를 꽂은 뒤 대만은 소파에 앉았다. 냉동고를 뒤져 언제 사뒀는지도 까마득한 하드 한 개를 입에 문 채였다.
“나 영화 진짜 오랜만에 본다.”
같은 종류의 하드를 물고 있던 호열이 심드렁하게 뒷목을 긁었다. 매일 농구부 연습에 공부에 청소나 빨래 같은 집안일까지 하고 있었으니 영화 볼 시간이 없을 것 같기는 했다. 집안일은 아침을 차리는 것 외에는 누가 뭘 하자고 딱히 나눈 건 아니었고 시간이 비는 사람이 하곤 했다.
영화는 무난했다. 조금 빈약한 스토리는 화려한 액션이 채웠다. 적당히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연기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호열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대만이 입을 쩍쩍 벌리며 하품을 해댔다. 쿠션을 껴안았다가, 소파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한쪽 무릎만 굽히기도 하며 요란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이럴 거면 왜 보자고 한 거지. 이윽고 반쯤 드러누워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기까지 했다. 지루하면 그만 들어가서 자라고 말하려던 찰나 티비 옆의 전화기가 울렸다. 시계를 보자 바늘은 밤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전화가 오기엔 늦어도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누구냐. 양호열, 전화 받아봐.”
대만이 발가락으로 호열의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허벅지를 짚으려다 아직 왼쪽 손목이 욱신거려서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일어났다. 설마 집은 아니겠지. 애초에 번호를 알려준 적도 없으니 그럴 일은 없었지만 이따금 덮쳐오는 불안감은 이미 호열의 통제 밖에 있었다.
“여보세요.”
야, 정대만! 너 당장…. 저 정대만 아닙니다. 전화 상대는 귓가가 얼얼할 정도로 소리를 꽥 질렀다. 그 탓에 호열도 제법 딱딱하게 말이 튀어 나갔다. 그제야 상대는 얌전해졌다.
“…아뇨. 같이 사는 동생입니다. 잠시만요, 바꿔드릴게요.”
대만은 여전히 반쯤 드러누워 이쪽을 보고 있었다. 호열은 송화기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대만군, 전화.”
“나?”
“네.”
“누군데?”
“모르겠어요. 근데.”
싸가지가…. 라고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대만이 아니라는 것을 전하자 금세 얌전해졌으니 사람을 평가할 만한 근거까진 되지 못했다. 막역한 사이에선 그런 전화 예절도 있는 법이었다. 대만은 설렁설렁 걸어 호열의 옆에 왔다. 전화기를 건네주고 호열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여보세요? 아, 어…. 어어…, 어. 어어. 알겠어.”
대만은 시계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금방 갈게, 한 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 나가야겠다. 영화는 너 혼자 봐라.”
호열이 붙잡기도 전에 방으로 들어간 대만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이 시간에요? 어디 가는데요?”
“학교, 농구부 집합이래.”
대만은 한마디를 남기고 현관문을 열었다. 한 명이 나갔지만 티비에선 여전히 영화가 흘러나왔다. 주인공 팀을 와해하려던 갈등이 해결되고 공통의 적을 향해 나아가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대만이 없다면 호열에게 이 영화는 의미가 없었다. 호열의 취향은 이런 쪽이 아니었다.
시간이 거꾸로 갈 리 없으니 시계의 바늘은 여전히 열한 시의 근처를 가리켰다. 호열은 벌떡 일어나 티비를 껐다. 그리고 조금 전 대만이 그랬던 것처럼 방으로 들어가 옷을 걸치고 나왔다. 바이크의 열쇠를 챙기고 현관문을 열자 아직 초여름이지만 뜨거운 공기가 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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