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는 방
1987년의 어느 날
눈앞에 불쑥 디밀어진 주먹에 비토는 희미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표정이 좋지 않기로 따지자면 이 손의 주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잔뜩 찡그린 눈썹을 하고서, 마이크는 주먹 쥔 오른손 아래로 반대편 손바닥을 펼쳐 갖다 대더니 몇 번 소리 내 찍는 시늉을 했다. 졸지에 때아닌 비장함이 감돌기 시작한 작은 방의 한가운데에서, 두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굳게 닫힌 출입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ㅡ“더 이상은 안 되겠어.”
삼십 분 전, 소파에 앉은 어떤 이들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침묵을 견디다 못한 제임스가 기어코 소리 내 말했다. 어딘가 엄숙하게까지 들리는 제임스의 목소리에 그렉은 냉큼 TV의 볼륨을 줄이고 다른 두 사람을 흘끔거렸다. 기다란 소파의 양측 가장자리에 저마다의 작태로 구겨진 마이크와 비토를 바라보던 제임스가 다시금 말을 꺼냈다.
“싸운 거지?”
여태껏 직간접적으로 겪어온 아수라장의 기억을 근거로 한 추궁이 시작되었음에도 용의자들은 조용하기만 했다. 도대체가 변하지 않는 패턴에 제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이크와 비토는 작곡을 할 때를 포함한 매사 모든 부분에서 의견이 충돌하곤 했으나, 꼭 이럴 때만큼은 오랜 소꿉친구라도 되는 양 손발이 척척 맞았다. 무언의 시위야말로 이 상황을 타개하는 최선의 수단이라 판단하는 점까지ㅡ본인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좋든 싫든 서로를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가 됐든 같은 아파트에 발붙이고 사는 이상 규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이 이사를 결정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그해 겨울, 캘리포니아에 때아닌 폭우가 쏟아진 날이었다. 궂은 날씨에 계단을 오르며 짐을 구겨 넣는 데만 반나절이 넘게 걸린 아파트의 몰골은… 좋게 말하자면 고풍스러웠고, 나쁘게 말하자면 낡아빠졌었다. 오래된 환풍기에서는 박쥐가 우는 듯한 끽끽거리는 음산한 소리가 났고, 이전 세입자가 필터까지 싹 걷어간 수도꼭지에서는 탁한 흙물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그런 아파트를 몇 날 며칠이 지나 간신히 사람 사는 꼴로 바꿔놓는 데 성공하면서, 네 사람은 세 가지 규칙을 정했다. 이는 그간의 경험과ㅡ필시 앞으로도 벌어질 수많은 충돌에 앞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데 모두가 동의했기 때문이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첫 번째, 여자를 데려오지 말 것.
두 번째, 맥주는 항상 짝수로 맞춰서 살 것.
그리고…
“세 번째, 싸웠을 때는 이유를 불문하고 서로 화해할 것.”
“…그렇게 보이는 건 알겠는데, 우리 싸우지는 않았어.”
볼멘스런 목소리로 마이크가 한 박자 늦게 웅얼거렸다.
“그러면?”
하지만 그렉의 반문에 마이크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어째 오묘한 태도에 제임스와 그렉의 시선은 자연스레 비토에게로 옮겨갔다. 그러나 비토는 비토대로 인상을 쓴 채 그들을 쏘아볼 뿐, 딱히 대답을 들려줄 의향은 없는 듯했다. 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좀처럼 나아질 낌새가 없었기에, 제임스는 결국 그렉을 동반한 최후의 수단을 강행했다. 그 결과…
ㅡ“어쨌든 밖에서야 과정까지는 모를 것 아냐.”
가끔 보면 제임스도 대단하다니까, 마치 누군가가 문밖에서 숨죽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이크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 배고프거든? 이대로 있다간 그렉이 저녁으로 먹을 피자 토핑에 또 앤초비를 멋대로 추가할지도 몰라.”
비토는 어이가 없었다. 같은 과오를 저지르고 싶지 않다는 결연함의 출처가 고작해야 피자 토핑이라는 점에서도, 본인까지 덩달아 이 방에 떠밀려 갇히게 된 연유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구는 마이크의 뻔뻔함에 대해서도.
“어쩌자고?”
“지는 놈이 먼저 사과하고 그걸로 끝내는 거지. 이젠 내가 이런 것까지 알려줘야 해?”
“다른 건?”
때아닌 그의 시비에 마이크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하게 솟아올랐다.
“또 왜 그러는데.”
“언제 다른 건 선뜻 알려준 적이 있었냐는 소리야.”
이내 비토는 개켜진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침대 가로 다가가 빈 귀퉁이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마이크는 마이크대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드럼스틱을 피해 밟으며 그의 가까이에 섰다. 벌써 밴드를 같이한 지 몇 해가 흘렀건만 그의 속은 갈수록 오리무중이었다. 별것 아닌 일인가 하면 대차게 싸우고, 큰일 났다 싶은 일에는 거꾸로 무던한… 오늘 나누었던 대화 중에서 그의 심기가 불편했을 법한 지점을 찾으라면 차라리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까만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마이크는 문득 이 상황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본인보다 키가 큰 비토를 내려다보는 건 여간해서는 불가능한 일인 데다가, 항상 끼고 다니는 기타조차 없이 빈손으로 있는 모습인데도…
“…이걸로는 안 돼.”
이는 언젠가 비토가 지금과 같은 침묵에서 내뱉었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그때도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이었었지. 지금처럼.”
비토가 기억하는 그날 리무진 안의 풍경은 한낱 빗줄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눅눅했다. 매일 수많은 밴드가 생기고, 매일 수많은 밴드가 해산하는… 하루가 멀다고 명과 암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이 설령 밴드의 첫 앨범을 내놓는 자리라 할지라도.
그 자리의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고, 비토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믿고 있다. 다른 멤버들의 생각이 어떨지언정 비단 자신만큼은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안 된다고, 이걸 곧이곧대로 내놓을 수는 없다고. 그들이 해야 할 것은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첫 앨범은 분명 실패작까지는 아니었다. 허나 완벽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노력을 가장 가까이서 봐온 당사자 또한 그들이었기 때문에, 도리어 감정에 호소해서는 안 됐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이 얇은 플라스틱 한 장에 들어간 피와 땀은 두 번 다시 돌려받을 수 없으니까. 공항에서부터 한참을 달려온 차가 스태튼 아일랜드의 주차장에 들어선 순간 비토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걸로는 안 돼, 그리고 그때 유일하게 눈이 마주쳤던 사람은…
“도통 널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러나 마이크의 목소리에 묻어난 것은 체념의 기색이 아니었다.
“아마 평생 못 하겠지. 우린 너무… 다르니까. 출신도, 특기도, 하물며 다른 사소한 것들도.”
비토는 이어지는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는 처음 봤을 때에 비하면 제법 그럴싸한 뉴욕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 같았다. 당시의 마이크가 말하기로는 자기 억양이 네덜란드와 스페인 여자들 사이에서는 꽤 먹어줬다는데, 지금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끔씩… 네가 어떤 부분을 불안해하는지는 알 것 같아.”
“가끔이라고?”
“하는 게 어디야.”
제풀에 끄덕거리는 그를 보며 비토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또 우리가 같은 짓을 하게 될까봐 그런 거지. 빈 세션 자리를 채우느라 뛰어다니고, 일이 꼬일까 봐 매번 전전긍긍하고…”
“아니, 전적으로 네 탓이야.”
제발 분위기 좀 깨지 말자, 과장되게 다물어진 잇새로 그가 아는 익숙한 투덜거림이 삐져나왔다. 어느덧 비토는 자연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미 같은 배에 탄 이상 두 사람이 싸우지 않는 날 같은 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얼굴을 붉히는 건 당연지사에, 소리를 지르고 드잡이를 하는 날이 더 많을 게 뻔했다. 하지만 비토는 그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럴 수 없을까 봐, 같은 목표를 위해 기꺼이 서로를 윽박지를 수 있는 상대가 사라지는 쪽이 훨씬 더 싫었다. 계란을 깨지 않고서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 무엇보다 밴드에 요리사는 고사하고 샌드위치 이상의 무엇인가를 만들 줄 아는 놈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ㅡ 필시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줄기차게 깨지고… 부딪힐 거라고, 비토는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대로의 방식을 통해서만 지속될 수 있는 관계였다.
결국 멋쩍게 내민 마이크의 오른손을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비토, ‘이대로 문을 걷어차면 제임스나 그렉이 같이 쓰러진다.‘ 에 얼마나 걸래?”
“보증금은 네가 메꾼다는 쪽에 걸게.”
바지를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비토를 보던 마이크가 가볍게 빈정거렸다.
“…진짜 치사하다. 내가 너한테 준 기름값만 해도 이 문짝 값보다 훨씬 더 나갈 텐데.”
“없을걸.”
“응?”
“없을 거라니까.”
마치 훤히 들여다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마이크는 냅다 문가로 달려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비토가 말한 그대로 문 앞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 이전에…
“…둘 다 어디 갔어?”
ㅡ저녁을 틈타 쏟아진 거리의 인파를 비집고 그렉과 제임스가 향한 곳은, 그들을 캘리포니아로 데려온 마이클 와그너가 추천한 어느 터키 요릿집이었다. 그러면 터키 사람들은 터키 요리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내 말은, 터키식 터키 요리라는 게 그 사람들한테는 여러 가지 뜻이 되니까 헷갈리잖아… 이제는 익숙해진 장광설을 들으며 제임스는 그렉의 몫까지 대신 메뉴판을 살폈다. 그렉의 방에 들어간 두 사람이 나올 때쯤이면 드럭스토어조차 문을 닫을 시간이 될 거라는 추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는 사실을 제임스가 알게 되는 것은, 아마도 머지않은 뒤의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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