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록] 바치이사_8월의 허니문

24년 1월 대운동회 샘플.

“결혼하자, 이사기.”

뜬금없는 소리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사기는 코코아를 홀짝이고 있는 연인을 바라보았다. 바치라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이리저리 까딱이고 있었다. 요즘 잠이 부족했나, 허튼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잠은 잘 자고 있고 영양도 부족한 것 없이 챙기고 있다. 문제는 이게 환청이 아니라 프러포즈라는 점이었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도 아니고, 골을 넣은 직후도 아니다. 장소는 그렇다고 쳐도 데이트 하던 도중 잠시 들어온 카페에서, 그것도 코코아에 휘핑크림을 잔뜩 얹고 그 위에 초콜렛 조각과 마쉬멜로우, 카라멜 시럽을 듬뿍 뿌려 장식한 걸 먹으면서 갑작스럽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심지어 결혼해줘, 도 아니고 결혼하자, 라니. 이사기는 머리를 짚었다.

‘진심이냐, 이 녀석….’

그러나 상대는 바치라 메구루다. 궁금한 게 있으면 분위기를 살필 생각도 없이 아무렇게나 입 밖으로 내뱉고, 제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야 성이 차는 녀석이다. 저 말에 얼마만큼의 무게가 있는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이사기는 연인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날카롭게 상대의 본질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습관이 이사기를 스트라이커로 존재하게 했고, 연인의 앞이라고 해도 그런 면모는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사기에게는 바치라의 지적 사고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아니, 역으로 확고한 믿음이 있다. 바치라 메구루는 뭐든 즉흥적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저 발언 역시 깊게 생각했다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을 확률이 높았다.

“하아…. 바치라, 너 결혼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드라마나 영화에서 떠드는 결혼은 추상적이다. 두 사람이 영원히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소설의 끝맺음과 진배없다는 것을 이사기는 알았다. 그는 바치라가 말하는 결혼은 소꿉놀이나 연애의 연장선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이사기랑 내가 서로만 보도록 법으로 땅땅 정하는 거야!”

그러나 바치라의 말은 그의 생각보다 한 뼘 더 나아가 있었다. 바치라는 코끝에 휘핑크림을 묻힌 채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사기는 인기 많잖아? 나는 그런 이사기도 좋지만, 좀 더 독점하고 싶어. 결혼하면 우리를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도 우리가 파트너라고 말할 수 있잖아.”

간혹, 바치라는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독점욕을 내보이곤 했다. 이사기는 자신이 이런 순간에 현혹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괴물에게 홀린 것처럼 바치라가 대수롭지 않게 꺼내는 모든 말이 이사기의 심장을 옭아매는 것이다.

“내가 이사기의 유일한 파트너가 되고 싶으니까, 결혼하고 싶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바치라는 아마 이 말이 얼마나 달콤하고 끈적한지 모를 것이다. 그가 꺼내는 말은 모두 진심이다. 그래서 더 질이 나쁘다. 사람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도 자각이 없다니, 정말 악질 중의 악질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넉다운 되었을 테다. 이사기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 요망하고 귀여운 연인은 어디까지 저를 흔들 셈인지 몰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것 또한 잔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얼굴은 아니다. 그랬다면 좀 더 집요했을 것이다.

이사기는 이 연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했다.

바치라와 이사기가 만나게 된 곳은 블루록에서였다. 블루록은 최고의 스트라이커를 만들기 위한 육성 기관으로, 일본 축구 연맹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이사기와 바치라는 친구가 되었고, 서로의 마음이 통했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그게 벌써 사 년 전.

그렇지만 둘은 아직 스물 초반이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잔뜩 있다.

“결혼은 아직 일러.”

이사기는 붉어진 얼굴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우리는 아직 스물 초반이고.”

“에, 법으로는 열여덟만 되어도 결혼할 수 있는걸.”

“그건 또 언제 찾아본 거야.”

“나깃치가 말해줬어.”

이사기가 혀를 찼다.

“그리고 우리 구단은 너무 멀고. 한창 바쁠 때잖아.”

시작하고 나니 결혼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수도 없이 쏟아졌다. 우리는 아직 어리고, 서로의 직장이 너무 멀고, 축구 선수의 수명은 생각보다 짧고, 아직 집을 마련하지 못했고, 부모님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 것이며, 블루록 동기들과 친구들이 언제 시간이 될지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고….

그러나 이것은 전부 핑계에 불과했다.

이사기는 아직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그건 바치라도 마찬가지다. 순서를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이사기가 그려놓은 미래 계획에서 결혼은 월드컵 우승보다 순위가 낮다.

그걸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이유는 분명했다. 바치라가 상처받지 않을까? 내 꿈이 너보다 소중하다고 말하다니, 그거 연인 실격이잖아. 아무리 무딘 녀석이라도 상처받고 말 것이다. 이사기는 필드에서라면 몰라도 평소에는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남자다. 그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바치라가 목을 울려 웃었다.

“이사기는 생각이 너무 많아~.”

“네가 할 말이냐. 넌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빠르잖아.”

“그런가? 그럼 우리 둘이 합쳐서 딱 적당할지도.”

눈이 갸름하게 접혀 휘어졌다. 입꼬리가 위로 한껏 말려 올라갔다.

“있지, 이사기. 나는 지금 당장 결혼하고 싶지만, 이사기는 아닌 거지?”

“...지금은 이르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거짓말. 월드컵 우승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윽. 너 알고 있었냐.”

제 마음을 읽힌 것 같아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이사기는 입술 안쪽을 가볍게 깨물었다.

“이사기는 축구 생각을 하고 있을 때는 표정이 이~렇게 되거든.”

바치라가 검지로 눈꼬리를 누르고 표정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이사기는 이자식이,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가, 제 표정이 그와 똑같다는 걸 알아차렸다. 바치라는 묘한 곳에서 관찰력이 좋다.

“그러니까 우승한 다음에 또 말할게. 지금은 예고편! 골 넣자마자 프로포즈 할 테니까!”

바치라가 활짝 웃었다. 이사기는 손을 뻗어 바치라의 코끝에 묻은 휘핑크림을 닦아주었다. 흰 거품이 엄지손가락으로 옮겨간다. 이사기는 제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다가 낼름 혀로 거품을 핥았다. 혀끝에 단맛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웃기지 마.”

바치라의 표정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사기의 행동 때문일까, 아니라면 그의 말 때문일까. 이사기는 입을 끌어올려 웃었다. 호쾌한 웃음이었다.

“우승 골은 내가 넣는다. 프로포즈도 내가 할 거야. 넌 목이나 닦고 기다려. 알았어?”

승부라면 지고 싶지 않았다. 바치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응!”

 

*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지만, 그런 세계도 있는 모양이었다. 치열한 공방 끝, 1:1의 동점의 순간, 이사기가 마지막 골을 넣음과 동시에 휘슬이 울렸다. 그야말로 짜릿한 승부였다.

이사기는 포효했고, 동료들이 마구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관중석에서 온갖 소리가 튀어나왔다. 환성과 노랫소리, 북소리가 섞여 필드 위를 어지럽혔다. 바닥을 뒹굴면서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사기는 제게 내민 바치라의 손을 잡고 간신히 일어섰다.

“바치라, 우리 우승이야!”

“응!”

이사기는 와락 바치라를 끌어안았다. 방금까지 필드를 뛰어다니느라 따끈해진 몸이 기꺼웠다. 아,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행복했다. 이사기는 바치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웃었다.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바치라의 얼굴에 홀린 것 같….

쪽.

바치라의 얼굴에 홀린 것 같다고 생각한 직후, 입술에 뜨거운 것이 닿는 게 느껴졌다. 바치라의 동그란 눈동자가 너무 가까이 보였다. 상황을 판단할 순간도 없이 바치라의 얼굴이 떨어졌다. 몸도 함께 떨어졌다. 바치라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사기. 결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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