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FATE ZERO 드림, 6000자.
이 성배를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이 흘린 핏물은, 분명 성배가 담을 수 있는 양의 액체보다 더 많을 테다. 그것을 티 내기라도 하는 것 같다. 오늘은 하늘에 달도 별도 없는데, 먹구름으로 그것들을 가둬 잠근 심야에도 성배의 빛은 기묘하게 뭉그러졌다. 그것이 과연 영광된 승리에서 기인하는 빛이라고 하기엔 사특했고, 부정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찬란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성배라는 것의 본질은 아무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류리는 몰랐기 때문에 그 앞에서 머뭇거리고 말았다. 미지에 대한 공포는 이 마술사를 망설이게 했다. 성배가 류리가 간절히 원한 것이었다면 뭔가 달랐을까. 오롯이 그녀의 의지로 선택한 길은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인 걸까.
빈틈, 허점, 망설임.
성배 전쟁에 허락되지 않을 단어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왜냐면 그녀가 승리자이므로. 살아남은 것이 류리 밖에 없으니 얼마든지 망설여도 괜찮다.
…아니다. 류리는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적어도 그 남자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선에서 허락되는 일이었다.
반인반신, 우르크를 다스렸던 인류 최고의 영웅. 길가메쉬.
그 이름 아래 류리의 승리가 세워졌다.
류리가 초반부터 승리를 점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본인조차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전쟁이라고 하는 말이 맞을 터였다.
소환을 한 것까지는 좋았다. 길가메쉬는 아주 좋은 패 같아 보였고 실제로 엄청난 서번트였으니까.
문제는 단 하나, 간단하고 치명적이었다. 류리는 길가메쉬를 제어할 수 없었다. 길가메쉬가 이런 시시한 놀음에 어울려 줄 이유가 없다고 비웃으며 뒤돌아 나갔을 때도, 그 후에 영체화 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을 때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령주로 명령하기엔 류리는 지나치게 제 분수를 잘 알았다.
그래서 류리는 혼자 살아남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숨고, 숨고, 달아나고, 숨었다. 철저하게 숨어서 목숨줄을 부여잡으려고 짧은 인생에서 나름 손에 꼽히게 노력했었다.
그리고 갑자기 길가메쉬가 마음을 바꿨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길가메쉬는 성격이 나쁜 것만큼이나 강했다. 길가메쉬 앞에서 다른 서번트의 저항은, 그야말로 산들바람 같았다. 그 무엇도 소용 없었다. 쏟아지는 창, 칼, 도끼 따위에서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서번트는 많지 않았다. 모두가 한 줌 핏물이 되어 산화했을 뿐이었다.
…솔직히 류리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 왜 길가메쉬가 마음을 바꿨는지, 왜 류리를 도와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배에는 관심하나 보이지 않는지.
지뢰를 밟을 이유는 없지. 류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궁금해지는 것까지 참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숨을 죽여도 터져 나오는 재채기처럼. 역시 그날에 관련된 것 같은데. 류리는 떠올렸다. 박장대소를 하며 류리를 바라보던 길가메쉬. 그러다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었었다. 어떠한 무관심으로, 짜증과 미약한 흥미로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붉은 눈동자. 볼을 스쳐 지나가던 칼날의 서늘함.
…아니, 그런 걸 생각할 때는 지금이 아니다.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다. 류리는 자신을 채근했다. 서둘러야 한다. 그런 감이 서늘하게 뒷덜미를 찌른다. 그래서 류리는 성급하게 손을 뻗었다.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
“...헉!”
류리는 입 안을 잘근 씹었다. 무언가 모를 껄끄러움이 성배의 끝에 닿은 손가락을 타고 올라온다. 이건 바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인가. 당장이라도 손을 떼고 싶었다. 그만두고 싶었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손을 뻗는다. 그것은 의식할 필요도 없이 행해지는 근육의 간결한 연작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어렵고 두렵게만 느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류리가 -
성배를 잡았다.
성배는 보기보다 묵직했다. 류리의 안에 기묘한 허탈함과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이 소용돌이쳤다. 이걸 얻기 위해, 겨우… 아니다. 겨우가 아니다. 류리는 머릿속에 무심코 떠올린 단어를 재빠르게 지워내린다.
류리가 불안한 얼굴로 두리번거린다. 등 뒤에 있는 길가메쉬를 찾아 고개를 돌리는 게 일견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일련의 행위를 길가메쉬는 감흥 없이 바라본다.
“흥.”
길가메쉬가 눈을 감는다. 끼어들 의지가 없다는 의사 표명. 눈을 감아도 어찌 될지 쉬이 짐작이 가니, 그만큼의 지루함이 몰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자리를 버티고 있는 것은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인간이란 어찌나 이렇게 우둔하고 멍청한지… 제 분수를 넘는 것을 탐하고 있음에도 그걸 모른다.
길가메쉬의 냉담한 반응을 류리는 시야 끝으로 흘끗거렸다. 입술이 달싹인다. 수 없이 되뇐 소원. 성배의 시작과 동시에 수없이 머릿속에서 읊어진 소원. 제 소원도 아니건만 이제는 소원이라고 하면 그것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당연했다. 가문의 비원이 제 비원이니, 그러니…
“나의 소원은…”
…
길가메쉬의 인내심은 천천히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저 녀석이 성배에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필부의 소원 같은 건 길가메쉬의 관심 밖이다.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 대신 길가메쉬는 오랜만에 ‘참는다.’라는 행위를 했다. 그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정말로.
저 계집은 모르겠지만 이건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아도 되는 일일 테다.
길가메쉬는 류리를 쳐다봤다.
터무니없이 더러운 오물을 담은 걸 잘도 만지는구나.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지만, 더 큰 여흥을 위해 길가메쉬는 침묵했다. 대신 길가메쉬는 기울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눈이 흥미로움으로 빛난다.
꿀렁, 꿀렁. 류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흙이 물처럼 차오른다. 성배의 꼭대기를 채우고 나서도 계속해서 차오른다. 류리의 손을 타고 흘러내린다. 무언가 저항을 해보기도 전에 팔을, 몸뚱아리를 집어 치우고도 계속해서 차오른다.
“도, 도와…”
숨을 헐떡이며 손을 위로 뻗어 올린다. 냉정하게 자기를 바라보는 길가메쉬를 응시한다. 류리는 희망을 버렸다. 기대를 걸기엔 저 남자의 눈이 지나치게 냉정했다. 만약, 불길에서 온기를 뺀다면…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마지막 소리를 담은 말이 나오기도 전에 다가오는 것은 완전한 침묵. 마침내 마지막 숨마저 진흙에 삼켜진다.
별 감흥 없는 최후다. 길가메쉬는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진흙을 피할 수 있음에도 피하지 않았다. 모든걸 집어삼키고 불태우면서 진흙이 다가온다. 그저 같은 자리에 서서, 순간을 죽이다가,
…
번쩍, 눈을 뜨면.
길가메쉬는 일종의 예감을 느꼈다. 천리안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 묶어놨던 기억이 풀렸으니 또다시 같은 일들을 반복하게 되리라는 경험에 근거한 확신이었다. 잔뜩 질린 표정으로 눈을 돌린다.
차라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두기라도 할까.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혀라도 깨물고 죽어버리는 게 아닌지. 참으로 유약하다. 어찌 그렇게 잘 으끄러지는지 모르겠다. 몸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정신마저 줏대가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툭 하면 허물어지길 반복한다. 의지 또한 나약해가지고… 길가메쉬는 혀를 찼다. 약을 먹여 일주일 동안 재워 둘까. 분별없이 나돌아다니는 걸 보느니 그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걸 고스란히 봐주기에는, 길가메쉬는 충분히 봐주지 않았던가. 그래, 충분하지.
길가메쉬의 마음이 슬슬 후자로 기울어지려고 할 때.
…’류리’가 눈앞에 있다. 지루하고 심심하다. 참신함이라고는 없다니. 심지어 볼품없기까지 하다. 그건 화를 불러 일으키기 보다는, 되려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하…”
탄식으로 시작하는 웃음. 길가메쉬는 정말로 비웃음을 마음껏 내뱉었다. 허리가 뒤로 꺾일 정도의 파안대소. 공간이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하지만 그것에도 불구하고 ‘류리’는 수줍게 웃었다. 제 손으로 머리카락을 꼬아 내리며 길가메쉬를 바라보는 게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고 무서움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으, 으하하하핫! 도가 넘지 않느냐! 네 놈은 나를 죽이기라도 할 셈이냐?”
“...아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살금 미소 짓는다. 왜 그렇게 웃는지 모르겠어요, 아처. 그렇게 속삭이며 그것은 표정을 꾸며낸다. 퍽 자연스럽게 흉내 내지 않느냐. 길가메쉬는 흥미로운 것을 바라보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왕 앞에서 아양을 떠는 솜씨가 제법이다. 암, 웃느라 이것이 어떻게 재롱떠는지 못 본다면, 그것 또한 아쉬운 일 아니겠느냐. 여흥을 즐기기 위해 웃음을 멈춘다. 그것은 천천히 길가메쉬에게 다가온다. 지나치게 창백하게 혈색이 빠진 피부에, 이유 없이 볼만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 몸을 웃게 하기 위한 노력이 가상하구나. 특별히 이 몸 앞에서 재롱을 떠는 것을 허락하마. 잠시나마 왕의 광대가 된 기분은 어떠느냐?”
“아처는 제가 싫은 건가요?”
입술을 꾹 깨문다. ‘류리’는 길가메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전 회차의 류리가 나를 저 표정으로 바라봤던가. 길가메쉬는 문득 류리를 집 안에 가둬놨을 때를 떠올렸다. 아니, 지금보다는 좀 더 악에 받친 표정이었던가. 아니다, 제 분수도 모르고 억울함에 가득 차 있던 그 표정.
“좋아해야 할 이유라도 있느냐?”
“이제 제가 싫어졌나요?”
“그걸 물을 주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저를 포기할 건가요?”
“하.”
“저를 포기하지 않으실 거잖아요.”
“아둔한 것아, 그 계집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하지만 아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절 봐주지 않을 거잖아요… “
‘류리’가 가볍게 손을 부딪친다.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웃는다.
“...그렇구나! 아처도 소원을 빌 차례라서 그런 거죠? 있죠, 아처. 아처는 소원이 뭐예요?”
속삭인다. 제가 아처에게 양보할게요. 무슨 소원을 이루고 싶은 거예요? 내가 도와줄게요. 길가메쉬는 언제나 제 든든한 아군이었잖아요. 제가 끝을 낼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저를 좋아해 줄 거죠?
광대라는 것들은 늘 이랬다. 관대하게 봐주면 끝을 모르고 기어오른다. 길가메쉬는 감히 제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내려다봤다. 주제넘게. 왕에게 저지른 무례는 그 목숨으로 사죄를 해야 하는 법이다. 어떻게 관대하게 볼 수 있겠는가. 그건 적어도 길가메쉬의 방식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자기가 키우던 개도 아닌데 자비를 베풀어 줄 이유 또한 없는 것이다.
‘류리’는 머뭇거리면서 길가메쉬에 다가온다. 앙 다물린 입, 축 내려간 눈꼬리.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인다. 길가메쉬를 올려다보는 꼴이, 어디서 맞고 온 강아지 같은 모양이었다. 애처로운 표정으로 길가메쉬의 갑옷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아니, 올리려 했다.
“...아?”
‘류리’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황금빛 선이 날아간다. 그 손이 길가메쉬의 갑옷에 닿기도 전에 날카롭게 벼려진 칼이 류리의 어깨를 가른다. 당연하다. 더러운 것이 팔에 닿는 것을 길가메쉬가 허락할 리 없지 않겠는가. 길가메쉬는 정당하게 청소를 한 것이다. 상처에서 검은 피가 쏟아져 내린다. 발치에 피가 고인다. 흐윽, ‘류리’가 팔을 감싸 안고 몸을 옹송그린다. 길가메쉬는 입을 열어 ‘류리’를 조롱했다.
“같은 영령이라 해도 격이 있는 법, 무지하고 몽매하구나.”
“길..가메쉬, 왜?”
“애초에 네가 그 모습을 한 것부터가 실수였다.”
길가메쉬가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비가 내린다. 무기 되어 있는 비가. ‘류리’가 곤죽이 되어간다. 배, 가슴, 팔, 다리, 몸을 관통하는 무기들 때문에 몸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점점 모습이 녹아내린다. 진흙더미가 무너지는 것처럼 서서히, 서서히…
‘류리’가 사라진다.
하핫, 하하하. 대신 남은 그것이 웃음 짓는다. 텅 빈 곳에서 웃음이 메아리친다.
“과연 그럴까.”
인간의 모든 원죄를 모아 만들어진 것이 미소 짓는다. 길가메쉬의 단호한 선언을 비웃으면서 그것은 부드럽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부디 이곳에서 재미를 충분히 봤길 바라, 길가메쉬 왕. 다음에 온다면… 부디 그때도 내 초대에 어울려 주길 바라겠어.”
…그리고 길가메쉬는 눈을 떴다.
참으로 익숙하지 않느냐. 무엇인지 모를 이유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것은 언제 생각해도 열받는다. 이 몸이야말로 모든 것의 기준일 텐데. 그러니 더욱 광대 놀음에 어울려줄 필요가 없었다. 하물며 재미마저 없었으니...
길가메쉬는 이 끝없이 이어지는 도돌이표를 제힘으로 끝낼 수 있다. 진심으로 나선다면 길가메쉬가 하지 못할 일은 없으니. 당연히 운치를 즐기는 것 또한 왕의 역할이니 참아주고 있는 것뿐인데.
길가메쉬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다. 익숙한 모습이 보인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여 있는 보라색 눈동자. 단어 하나하나를 짓씹듯 내뱉는다.
“네놈이 나를 소환한 마스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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