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 횃불
본편 4챕~5챕(엔딩포함) 전반적인 스포일러
좋아하는 곡임과 동시에 이번 글은 가사 내용을 차용해서 작성했습니다. 비록 원형은 남지 않은 것 같지만(…) 딱히 들으면서 읽으실 필요는 없고 언젠가 재생 한번만 눌러주십쇼. thx.
“일 할 시간이다, 621.”
수면모드에서 깨어나 눈을 뜬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명령을 수용한다. 그가 어느 전선에 밀어넣는다고 한들 그는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모든 감각을 오로지 AC를 조종하는 데에만 투자한 악취미적인 수술. 그로 인해 감정조차 흐릿한 강화 인간. 그것이 C4-621로서의 현 상태였다. 루비콘에서 적들을 살해하고 임무를 완수하며 그의 인간성은 갉아먹히고 있는지, 오히려 그 반대였는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전쟁이 민중의 구경거리에 불과한 중세시대가 아니었다. 행성 단위의 이익 전쟁에서 개처럼 죽는 것은 민간인이었다. 폭격에 무너진 도시는 무수한 사상자를 낳았다.
핸들러 월터, 그가 621에게 제공하는 것은 과연 바깥으로부터의 안전한 단절인가, 아니면 단지 사냥개를 향한 세뇌인가. 에어는 그의 태도를 두고 가스라이팅, 그리고 보상을 통한 세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한들 어찌할 것인가. 한번 쌓인 신뢰는 무너지지 않았다.
루비콘-3의 지상은 이미 ‘아이비스의 불’의 재앙으로 크게 타올라 재만 남게 된 망가져버린 폐성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살아있고, 투쟁하였으며, 기업과의 전투에서 이겨나가 그들의 존재를 여실히 피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인간 뿐만이 아니었다.
악을 지르며 구슬피 우는 전사를 지나친다. 생명신호가 잡히지 않는 AC를 짓밟고서, 그는 나아간다. 아이비스의 불 이후로도 살아남아 삶을 이어나가던 그들. 여전히 그들은 이 세상에 살아있었다.
“아직, 부족해. 전우… 네가 방아쇠를 당기는 이유는 뭐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621은 마침내 오버시어로부터 사명을 이어받게 되는 것을 긍정했다. 핸들러의 ‘부탁’을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애정으로 그를 길들였고, 폐기 처분의 위험에서 그를 사 왔으며, 자신의 안위보다 그를 먼저 생각했고, 마지막에선 기어코 선택지마저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넘겨 버렸다. 621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게 되었기에, 오히려 그를 돕는 것을 스스로 택했다.
핸들러가 사라지고서야 621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의 손에 걸려있던 수많은 목줄은, 사실은 목줄이 아니라 수많은 인과를 거친 희생의 결과물이었다고. 진실로 줄에 매여있는 것은 사냥개가 아닌 핸들러 자신이었다고.
루비콘-3에는 죄 없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코랄을 불태우기 위해 희생시켜야 하는 행성, 그리고 행성민들.
“불을 붙여라, 타고 남은 모든 것에.”
그럼에도 그는 기꺼이 횃불을 넘겨받는다. 모든 것을 불태우기를 긍정한다.
자일렘을 바다 위로 일으킨다. 행성의 대기권 너머로 세워진 마천루, 바스큘러 플랜트를 향해 발진한다.
성층권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621은 루비코니언들의 군가가 들려오던 때를 떠올린다. 외성 기업에 맞서던 그들을 지나친다. 외성 기업도, 루비콘의 원주민도. 이제 그에게 있어서 아군은 없었다. 이제는 루비콘의 모든 이들을 적으로 돌린 이후였다.
아르카부스가 지하에서 뽑아내어 다시금 세운 마천루의 플랜트, 루비코니언의 피 위에 지어진 세상.
지하에서의 결투가 무색하게도 러스티는 다시금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스틸 헤이즈 오르투스. 그가 몸 담았던 기업인 슈나이더의 기술력, 펄롱의 협력, 그리고 루비콘의 토착 기업인 엘카노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AC. 대기권과 우주의 경계, 그 한 가운데서 두 기체는 서로를 부딪히는 것으로 결전의 막을 열었다.
대파된 오르투스의 코어 안에서, 러스티는 루비콘의 붉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끝에 끝까지, 그는 까마귀에게 닿을 수 없었다. 더 높이 날아오르는 것은, 새였다. 땅에 발을 딛은 네 발 짐승은 하늘을 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거대한 도시함 한가운데 우뚝 선 포대가 굉음을 내며 부서져 내렸다.
“레이븐, …지정하는 봉쇄 스테이션으로 와 주세요.”
621을 떠났던 그녀는 마침내 답을 찾은 듯 했다.
에어가 조종하는 SOL 기체, 그 등 뒤로 비치는 코랄 특유의 적색광이 태양처럼 빛났다.
621과 에어는 서로를 마주본다. 서로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마지막 전투가 될 것임을 깨닫는다. 루비콘과 함께 산 채로 불타게 될 것인가, 루비콘의 미래를 위해 제거될 것인가. 그들 서로는 서로의 목표를 위한 산제물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직후, 에어는 코랄 무장 특유의 광범위하고 재빠른 공격 통해 621을 압도하는 듯 하였으나, 이내 공격 패턴을 이해했다는 듯이 움직임을 바꾸어 에어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그는, 마침내 파일벙커를 SOL 기체의 코어 깊숙히 찔러넣는데 성공했다.
꽂혀있던 파일벙커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무릎을 꿇은 기체는, 제너레이터의 파손으로 인해 균열 사이로 핏빛의 연료를 흘려내고 있었다.
621은 이제 코앞에 놓인 바스큘러 플랜트를 올려다보았다. 죽지 않기 위해 죽여나간 싸움들, 그는 문득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으로 자신은 영영 루비콘을 불태운 주범이자 레이븐으로서 ‘살아가야 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강화인간 판매소에서, 월벽에서, 아이스웜에서, 코랄 집적지에서, 그리고 카르만선에서. 그는 수없이 많은 죽을 기회를 놓쳐왔다.
이젠 정말로 끝이었다. 위협이 사라진 지금, 칼라는 멈춰뒀던 자일렘을 다시금 기동시켰다. 자일렘이 바스큘러 플랜트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그는 로더 4의 전면 카메라 너머로 지켜보았다.
‘코랄과 인간의, 공생을…’
마지막으로 흐릿히 들려오는 음성을, 그는 마저 무시한다. 이미 때늦은 후다.
이번 불꽃은 진실로 모든 것을 태워 루비콘 지상의 모든 것을 멸절시킬 터였다.
끝내 자일렘과 바스큘러 플랜트가 맞닿고, 세상은 섬광으로 눈을 덮고서 붉은 빛으로 명멸한다. 코랄의 파동으로 인해 이미 끊겼을 터인 칼라로부터의 통신. 그럼에도 그는 칼라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살아있다면, 마지막까지 웃어라.’
루비콘의 지상, 자일렘에서 떨어져내려 황무지에 처박힌 알바 코어의 붕괴된 틈 사이로 러스티는 힘겹게 눈을 떴다. 루비콘의 하늘 저 너머에서부터,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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