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 바다와 마른 우물
시간이 지나야만 해결되는 것들이 있다.
“카쿄인, 널 좋아한다.”
“⋯?”
“너 말하는 거 맞다.”
“아…….”
감정의 대상을 확실히 해주자 카쿄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예스라고도 노라고도 볼 수 없는 모호함은 이내 안타까운 확실함으로 굳어졌다.
“미안해요. 조금 더 빨리 말해줬으면 좋았을걸…….”
“…무슨 뜻이지?”
“널 좋아했어요, 죠타로.”
“‘했다’는 건…….”
“지금은 아니에요.”
“…내가 여태 널 좋아해주지 않아서 마음을 접은 건가?”
카쿄인이 아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가 이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런 이유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 감정이 연애 감정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 우리는 아직 어리잖아. 죠타로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면 곧 그 감정이 조금 더 특별한 우정이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나는 막 실연당한 사람 치고 책이나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비참하진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나는 아직 어렸다.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웠지만 그게 스스로의 감정을 확신하게 만들만큼 나이먹게 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카쿄인이 면전에서 내 감정을 부정했을 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감정과 카쿄인의 발언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카쿄인을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는가? 지금으로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그렇다면 카쿄인의 말대로 ‘충분한 시간’과 경험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충분한 시간’이라는 건 얼마나 오랫동안을 말하는 거지? 내가 카쿄인에게 그렇게 물으려 했을 땐 이미 우리의 나이가 40대에 들어선 뒤였다.
“윽…….”
스타 플래티나가 머리에 주먹을 날리는 것 같은 고통에 뻑뻑한 눈꺼풀이 결국 열렸다. 정작 스타 플래티나는 무표정하게, 혹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날 내려다볼 뿐이었다. 오랫동안 연구와 실험을 거듭해온 머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의 배경을 찾고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어젠 오랜만에 카쿄인이 미국으로 놀러왔었다. 죠린의 신혼집 집들이를 꼭 하고 싶었다나. 겸사겸사 얼굴 좀 보자고 해서 만났는데 술을 좀 과하게 마셨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우리가 마신 술의 가격이었다가, 서로의 근황이었다가, 죠린의 결혼 소식으로 흘러갔다. 그래, 나는 딸이 결혼한다는 심란함 덕에 카쿄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술잔을 자꾸 채웠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취해서는 카쿄인에게…….
아직도 널 좋아한다고 고백해버린 것이다, 젠장. 게다가 그 뒤는 완전히 필름이 끊겨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스타 플래티나로 내 머리를 쳐서 그 기억을 싸그리 잊고 싶었다. 사람의 머리를 얼마나 강하게 치면 죽지는 않고 기억 상실만 오지? 그렇다고 다 잊으면 안 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상황에 맞지 않는 ‘논리적 사고’란 놈이 머리를 불쑥 들이민다. 누군가 기억을 잊어야 한다면 카쿄인의 기억을 잊게 하는 방법도 있잖아?
하겠냐. 그딴 생각을 떠올렸단 기억도 같이 잊어버리고 싶다, 제길. 다시는 카쿄인이 의식을 잃은 채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파리한 안색과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눈꺼풀, 푸석한 입술과 숨을 쉬긴 하는 건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가슴팍을……. 아, 토할 것 같아졌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비척비척 방문을 향했다. 물이라도 마시고 아예 토해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오늘은 카쿄인과 함께 죠린의 신혼집에 가야 하니까. 하루종일 비실대는 아버지의 모습을 행복만 가득해야 할 신혼집에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방을 나서자, 이번엔 다른 의미로 머리가 아파왔다.
“아, 죠타로. 좋은 아침.”
확실히 나이를 먹으면 지각 능력이 떨어진다. 왜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이 곳에 있는지 뇌가 받아들이는 속도가 느렸다. 그 자리에 멈춰서서 자기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는 내가 카쿄인에게 얼마나 바보 같아 보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머리속 상황을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미안해, 허락 없이 집에 들어와서. 그치만 네가 어제 만취해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나한테 기댄 채로 집에 돌아왔으니까 비긴 걸로 해요.”
이젠 정말로 스타 플래티나에게 머리를 맞고 싶어졌다. 모든 기억을 잊을 정도로 세게, 아니 이왕이면 그냥 영원히 잠들 정도로. 그렇게 취했으면 집 열쇠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을텐데 아마 하이어로팬트 그린으로 어떻게든 했겠지. 마흔 넘어서까지 좋아하는 상대에게 이런 추태를 보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제기랄.
“아직 술이 덜 깼어?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아침 들어요. 세상에, 냉장고에 물이랑 맥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데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지? 다 외식으로 해결하는 거야? 덕분에 아침 일찍 열면서 일본 된장을 파는 식료품점을 찾아 헤맸어요. 그래도 과음한 속을 달래는 데는 따뜻한 국이 좋을 것 같아서…….”
국? 일본 된장? 카쿄인이 하는 말이 한 발 늦게 귀에 들어왔다. 나이를 먹어도 흐려지는 일이 없는 보랏빛 눈동자에서 눈을 떼자 그제서야 식탁 위에 차려진 일본식 가정식이 보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이 동그랗게 밥그릇에 담겨 윤기를 뽐냈고 마찬가지로 따뜻해 보이는 된장국과 생선구이의 고소하고 짭짤한 냄새, 네모난 계란말이의 샛노란색이 식욕을 부추겼다. 단출하지만 애정을 담은, 이라는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캐치프레이즈가 머리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머뭇거리며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지만 솔직히 카쿄인이 정성스레 만들었을 아침밥의 맛보다는 어젯밤 일이 더 궁금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그저 고맙군, 이라는 세 글자 뿐이었다. 용기가 없는 게 아니라 아직 숙취에 쩔어 있어서일 뿐이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내가 젓가락을 들어 카쿄인의 애정을 천천히 씹는 동안 적막한 거실을 말소리로 채우는 건 카쿄인의 몫이었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천천히 먹어도 돼, 죠린을 보는 건 오랜만이네, 넌 재단 일로 몇 번 봤지만 죠린은 수감되어 있었으니까, 집들이 선물 때문에 한참을 고민했어……. 모두 내가 밥을 먹는 데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문장들이었다. 가끔은 카쿄인의 이런 섬세함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생각한다. 그러다가도 가끔 섬세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강인한 그를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넌 안 먹나?”
“아, 나는 아침을 먹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보다…….”
“?”
답지않게 뜸을 들이는 모습에 젓가락도 멈추고 빤히 쳐다보니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언젠가 본 적 있는 표정인데.
“어젯밤은… 기억이 나나요?”
아. 왜 그렇게 말을 고르고 골랐는지 알겠다. 순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카쿄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얼굴에선 어떠한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모든 복잡한 감정이 깃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보다 뻣뻣하게 굳은 입술과 혀를 움직여 애써 대답했다.
“아니.”
그리고 카쿄인의 표정은 또다른 미묘한 것으로 바뀌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의 감정을 읽어낼 수는 없었다. 그는 17년간 고독을 앓아와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주 능숙했다. 어쩌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도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고 있을지 몰랐다. 무언가를 가장 안전하게 숨기는 방법은 자신도 모르는 곳에 숨기는 것이니까. 그러나 이내 카쿄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나의 식사를 재촉했다. …내 표정은 어땠을까. 거짓말은 했지만 카쿄인의 직감과 경험은 무시 못할 수준이었다. 우린 17살에 만나 지금까지 우정을 이어왔으니 전투 시엔 서로가 어떤 눈짓을 주기만 해도 다음 주먹은 어디에 내질러야 할지 알았다. 카쿄인은 마치 내가 그의 인생에서 최우선인 양 나를 살폈기에 나의 조악한 거짓말 정도는 금방 알아챌 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우리는 다시 여상한 대화를 하며 아침 식사를 이어갔다.
“노리아키 삼촌! 오랜만에 봐서 너무 기뻐! …아, 그리고 쿠소오야지도 같이 왔네.”
나를 향해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죠린의 시선을 제게로 돌려놓고 카쿄인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신혼집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2층집에 죠린의 취향이 듬뿍 들어간 인테리어를 했다. 카쿄인은 집이 정말 예쁘다거나 몰라보게 성숙해졌다는둥 죠린과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안나수이가 아직 채 정리가 안 된 이삿짐 상자를 허둥지둥 안 보이는 곳에 밀어넣고 있었다. 카쿄인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나는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오는 자동인형처럼 툭 감상을 뱉었다.
“작군.”
“그야, 쿠죠 저택에 비하면 뭐든 작아 보이겠지. 지금 네가 사는 집도 그렇게 큰 편은 아니라는 거 알고 말하는 거지?”
카쿄인은 신혼 부부에게 스탠드가 보인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하이어로팬트로 내 목을 조르기라도 할 것처럼 휘감았다. 죠린이 그걸 보고 킥킥 웃는 건 덤이었다. 확실히 작다. 그렇지만 넓은 집은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 채우기엔 조금 힘들 거다. 그러니 작고 아담한 집이 좋을 것이었다. 내 주변인들은 모두 내 말이 너무 짧다고 했다. 현실은 판타지나 메르헨이 아니니까 독심술을 가진 사람은 없고,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절대 알지 못할 것들이 있다고. 고치려고 노력은 해봤지만 결과는 모두 알다시피 잘 안 됐다. 카쿄인은 나의 실패를 위로했다.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어요. 자기 자신이란 어떻게 해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니까. 그는 그런 생각으로 17년을 버텨 왔을까.
카쿄인이 집들이 선물을 건네고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아직 요리 도구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서 배달 음식을 시키는 것을 미안해 하는 죠린에게 카쿄인은 신경쓰지 않는다며 웃어 보였다. 배달 음식은 기름지고 차가웠지만 식사 시간의 분위기는 따뜻했다. 디저트로 냉동 과일 파이까지 나눠먹고서 죠린은 카쿄인과 안나수이를 게임으로 맞붙였다. 죠린이 어렸을 때 카쿄인이 사준 오래된 게임기였는데 외동딸인 죠린의 상대 플레이어는 보통 카쿄인이 맡아주었다. 카쿄인은 ‘이 게임에서 날 이기지 못하면 두 사람의 결혼을 무를 겁니다.’라며 부러 악랄한 웃음을 지었고 흥미진진한 표정인 죠린에게 안나수이를 도와줄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안나수이가 죠린에게 정식으로 청혼하고 내게 결혼 허락을 받으러 왔을 때 당시 분위기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교도소에서 만난 놈과 내 딸이 결혼을?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엎고 죠린에게 ‘좋은 남자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문을 써서 보여주고 싶었다. 죠린은 내게서 들을 말은 아니라고 했겠지만……. 그 험악한 분위기에서 날 살살 꼬드겨 결국 결혼을 허락하게 만든 사람이 카쿄인이었다. 뭐, 반은 협박에 가까웠지만. 안나수이는 그 뒤로 비교적 비실해 보이는 카쿄인을 무슨 무협소설 속 무술달인이라도 되는 양 대접했다. 아무리 카쿄인이 결혼을 무른다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해도 이렇게 큰 빚을 진 상황에서 안나수이가 카쿄인에게 진심으로 덤비기는 좀…….
“좋습니다, 카-코인 씨! 내가 죠린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드리죠!”
…아무래도 카쿄인의 도발이 꽤나 잘 먹힌 모양이다. 아직 카쿄인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도 못하는 안나수이는 냉큼 컨트롤러를 집어들어 카쿄인의 옆에 앉았다. 카쿄인 또한 오랜만에 다른 사람과 게임을 한다고 흥분했는지 뺨이 발그레하게 붉어졌다. 이거야 원, 죠린. 게임의 결과는 오직 하나일텐데도.
게임은 당연하게도 안나수이의 승리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카쿄인이 안나수이를 농락하며 월등하게 앞서 나가고 있었지만 게임 오버 직전에 뽑은 행운 카드가 승패를 뒤집었다. 안나수이가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는 동안 카쿄인은 웃으며 그를 축하해주었다. 안나수이는 죠린을 얼싸안고 빙빙 도느라 못 본 모양이지만, 게임기와 연결된 텔레비전의 화면에서 오르는 최고기록 순위표엔 카쿄인의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친절했고 어린 죠린과 게임을 하면서도 마지막엔 아이에게 져주는 사람이었다. 죠린도 나이를 먹으면서는 카쿄인의 그런 술수를 알아챘지만 카쿄인과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안나수이가 그걸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카쿄인이 어떤 수를 써서 상대가 이기게 해주는지 잘 모르겠다. 언젠가 한 번, 카쿄인에게 져주기만 하는 게임은 재미없지 않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 때 ‘두 번째 컨트롤러를 쥐어줄 사람이 있다면 게임 자체가 즐거워진다.’고 대답했었다. 이상하지, 대답하는 본인은 웃고 있었는데도 나는 입맛이 썼다. 내가 채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할 깊은 우물에 조약돌을 자꾸만 던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돌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우물을 어째선지 두려워 하지도 않고 물로 채워갔다. 여전히 우물이 얼마나 차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따금씩 조약돌을 던지면 퐁당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나를 안심시켰다.
“진짜 미안! 그래도 노리아키 삼촌한테 더러운 꼴을 보여줄 순 없단 말이야!”
그냥 부탁만 해도 순순히 들어줄 카쿄인에게 아주 쐐기를 박을 수 있도록 죠린은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중이었다. 2층 집에 손님 두 명 재울 방이야 없겠냐만은, 안방과 손님방 하나만 빼면 모두 이삿짐으로 난장판이 된 상태라나. 안방과 가장 거리가 먼 1층 현관 바로 옆방이 우리가 배정받은 방이었다. 카쿄인은 우는 소리를 하는 죠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곤 보드게임과 술병을 치우기 시작했다. (맹세컨대 나는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정리는 나랑 안나수이가 할테니 죠타로는 먼저 씻어도 좋아요. 죠린도 먼저 씻도록 해. 여자는 자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게 많지?”
…뭐, 안나수이로서도 장인과 함께 뒷정리하는 것은 꽤나 불편할 것이다. 죽고 못 사는 죠린의 손에 물 묻히는 일은 아예 생각도 않을테지. 고개를 끄덕이곤 앞으로 죠린이 살 집의 수도 시설은 잘 되어 있는지 점검해 보기로 했다.
새 집의 새 침대 냄새는 숱한 호텔을 드나들며 많이 맡아보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카쿄인과 함께 자야 하는 방의 침대가 더블 침대 하나 뿐이었으니까. 카쿄인과 한 침대에서 자는 일은 그 50일간의 여행이 끝난 뒤에도 가끔 있었긴 했다. 대부분 한 쪽이 너무 취해서 급하게 근처에 있던 숙소를 잡았는데 방이 하나 밖에 안 남았을 경우 뿐이었지만. 아, 취한다고 하니까 또 머리가…….
“죠타로, 불 끌까?”
예상치 못한 소리에 나잇값도 못하고 화들짝 놀라 보면 카쿄인이 머리카락에 물기를 머금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착실하게 파자마를 챙겨입어놓고는 가슴께까지 단추를 열어놓은 것이나,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앞머리를 배배 꼬는 것이 선정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죠린, 방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꾸며낸 거였구나.
그러나 나는 또 도망쳤다. 카쿄인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잠자코 누워 눈을 감을 뿐이었다. 곧 불이 꺼지고 그가 침대 안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따스한 온기가 몇 겹의 천 너머로 전해져서 피로한 몸을 녹여냈다.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지는데 옆자리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같이 자는 건 오랜만이네. 그 여행 때도 그랬는데, 기억 나?”
그 여행. 어머니의 목숨을 구하고 스스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여행. 50일에 걸쳐 이집트까지 가선 하룻밤만에 모든 걸 끝냈다. 점점 밝아오는 아침 해, 물이 쏟아져 나오는 급수탑,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죠타로?”
“아아, 기억 난다.”
그 여행의 끝은 그리 좋지 않았다. 팔과 다리를 잃은 압둘과 이기, 생사를 헤매는 카쿄인. 말 그대로 죽었다 살아난 조부. 그러나 그런 날들 속에서 분명히 존재했던 즐거운 날들. 담요 하나를 같이 둘러쓰고 킥킥대며 서로에게 속삭이고, 이국적인 음식을 나눠먹다 배탈이 나고, 물 한 모금만 마실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며 무거운 발을 이끌던 날들. 그런 날들 중에 같은 침대를 쓰며 왠지 모를 긴장 때문에 잠을 못 자던 날도 있었다. 카쿄인은 왜 갑자기 그걸 말하는 걸까.
“어제, 네가 아직도 날 좋아한다며 고백했어.”
“⋯⋯.”
“내가 거절한 날이 20년도 넘었을텐데. 그 오랜 시간동안 너는 네 감정을 곱씹으며 나를 생각했던 걸까.”
온몸의 근육이 긴장하며 잠이 날아갔다. 나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역시 안 되겠어.”
“카쿄인⋯⋯.”
“들어줘요, 죠타로. 나는 분명 그 여행 동안 너를 좋아했어. 틀림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너도 나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상하게 그 열정이 식어버리더라. 내 마음은 그 정도 밖에 안 됐던 걸까? 나는 ‘너를 짝사랑하는 나’를 좋아했던 게 아닐까? 평생을 함께한다면 네가 좋다고 생각해. 결혼을 한다면 너라고 생각해. 매일 일상을 보내도 될 거라는 확신이 드는 건 너뿐이야. 그렇지만 너의 마음은 열정적이겠지. 잔잔한 상태의 내 마음으로 너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건 내가 널 속이는 게 아닐까? 마음의 크기가 다른데 함께하게 된다면 너는 내게서 너만큼의 사랑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괴로워 할테고, 나는 네게서 오는 사랑의 크기를 갚아줘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울 거야. 서로 힘들어 할 뿐이라면 함께하지 않아도 되잖아. 지금처럼 지내면 되잖아. 육체적 관계를 원한다면 해줄 수 있어. 그렇지만 사랑이나 연인, 부부라는 이름은 내게 너무 무거워⋯⋯.”
“카쿄인.”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수분을 머금은 눈동자가 어느새 상체를 일으킨 나를 올려다보았다. 카쿄인에게 무엇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윽고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말을 꺼냈다.
“좋아한다.”
“⋯⋯.”
“확실히 네 말대로, 그 어린 시절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몰라.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 졸였겠지. 그리고 너와의 관계가 파탄났을지 몰라. 지금까지 관계를 이어오지도 못했을지도.”
그가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냥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서로를 좋아하며 함께하면 안 될까? 지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사랑의 크기와 형태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야. 안나수이와 죠린을 봐라. 누가 봐도 적극적인 쪽은 그 녀석 쪽이지. 그래도 그들은 가정을 이루며 살기로 했어. 서로가 사랑한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죠타로⋯⋯.”
“네게 부담을 줄 생각은 없어. 갑자기 사랑을 퍼부으면서 널 혼란스럽게 하지도 않을 거야. 우리도 이제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그저 서로가 가진 마음을 애써 숨기려 하거나 버리려 하지 말자고. 그것 또한 너와 나에 대한 배신 아닌가?”
이불 속에 숨겨진 카쿄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의 손을 꾹 쥐고서 들어올려 입을 맞췄다.
“어쨌든 너도, 내가 네 마음의 크기에 상처받을까봐 걱정할 만큼, 아직 나를 좋아하니까.”
“읏…! 죠타로, 너는 항상⋯!”
“그래, 너는 그런 내게 기꺼이 이끌려 와주고.”
“⋯내가 멈추자고 하면 멈추는 거야.”
“과연 나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예전만큼 무턱대고 돌진하진 못하겠더군.”
그 날 밤은 손만 잡고 잤다. 처음 만져본 그의 손은 조금 차갑고 가늘었다. 다음 날에 딸과 사위의 배웅을 받으며 그들의 집을 나설 때까지도 우리는 계속 손을 잡고 있었다. 언젠가 카쿄인이 내 손을 내치려 할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 속 우물을 채우는 것이 힘에 부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저 지금의 행복을 즐기기로 했다. 나이를 먹는 것의 가장 큰 축복은, 미래를 두려워 하지 않으면서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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