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르반스웨인] 호칭정리
시작은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야기였다. 어디부터 시작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자르반은 관계를 가지면서까지 날 선 명령조의 말투를 듣기 싫어졌다는 곳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놈, 네녀석, 개자식 등등. 원래부터 (유독 자신에게만) 언사가 거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세상에는 자신을 깔보거나 천대하는 말을 들으면 흥분하는 사람도 있으나 자르반은 지극히 정상이고 평범한 취향을 가진 건실한 데마시아의 남자였다.
그러니, 호칭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고. 그정도의 가벼운 말을 꺼냈다. 이에 스웨인은 별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다 들어본다는 듯이 혀를 찼다.
"우리가 그럴 정도의 관계인가?"
"아닌 건 나도 안다. 그저 분위기의 문제라고 생각해다오."
"나는 여태 네놈이 매도당하며 바짝 세우는 취미가 있는 줄 알았는데. 그동안 잘 즐겼잖나? 이제 와서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별 것 아닌 부탁이니 맞춰주지 못할 이유도 없지만."
"네놈 머릿속의 나는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거냐. 네녀석의 더러운 성벽을 남에게 투사하는 버릇은 고치지 그래."
그동안 스웨인을 겪으며 깨닫은 바로는, 승낙의 표현이다. 스웨인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고개를 들어 천장을 응시하다 이내 자르반에게로 눈을 돌린다. 어젯밤의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그의 눈가 밑에는 파리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곧 스웨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당히 충격적인 단어였다.
"자기야."
스웨인의 목소리로 낮고 정확하게 발음된 단어는, 그의 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이라도 발음해 본 역사가 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자르반은 엉겁결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온 몸에 오한이 확 끼친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나. 구겨지다 못해 얼굴 근육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르반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대답을 꺼낼 수 있었다.
"......부탁인데, 다시는, 내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도록.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경험이었어."
"네녀석이 원한 것 아닌가?"
"아니, 맞는데, 아니, 아니야. 절대로. 젠장, 말까지 꼬이는군. 그- 조금 평범한 걸로 없나?"
'자기야'라는 낯간지러운 호칭보다 평범하지 않는 호칭도 없겠지만. 충격으로 잔뜩 구겨진 자르반의 얼굴을 마주한 스웨인은, 어쩐지 조금 즐거워보였다.
"그러면, 달링."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내 사랑."
"드디어 미친건가?"
"원하는 바를 명확히 말해.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상대가 일일이 네놈의 스무고개 놀음에 어울려주길 원하는 건가? 오만하기는."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여서 상대의 심기를 건드리는 스웨인의 화법에는 이미 익숙했다. 평소라면 개소리로 치부하고 대꾸도 하지 않았겠지만, 이번에는 의외로 그의 말이 본질을 찌른 것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자르반은 앉은 채로 눈살을 찌푸리며 스웨인을 바라보았다. 스웨인은 턱을 비뚜름하게 괸 채로 자르반과 정확히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스웨인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자르반은 떨떠름하게, 그러면서도 최대한 차분해보이려 애쓰는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그냥, 이름을 부르는 정도로 무난한 호칭을 원했는데. 그정도라면 네놈, 아니, 제리코 스웨인. 너도 만족할 수 있지 않나."
"네 입으로 들으니 기분 나쁘군. 이곳이 전장이었다면 네 혓바닥을 찢어 놓았을 거다."
"아까 전 네녀석의 발언보다 더 기분 나쁜 말도 없어."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스웨인의 스위치가 눌린 건지, 자르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 입으로 '내 사랑'이나 '달링'같은 굉장한 호칭을 내뱉은 주제에 이름은 싫다는 건가. 어쩌면 쓸 데 없이 친한 척 하지 말라는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휘젓고 나서 자르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으니 여기까지 하지. 진지하게 이야기 할 생각도 없어보이니 말이다. 애초에 '이런 관계'에서 이따위 이야기를 꺼낸 내 잘못이지."
제대로 된 적도, 친구도, 하물며 연인은 더더욱 아닌 모호한 관계. 전장에서 만난다면 서로의 목숨이 스러질 때까지 서로의 목을 물어 뜯겠지만 침대에서는 애욕이 담긴 작은 잇자국이나 남기는 사이. 언젠가 죽여야 할 상대와 몸을 섞으며 연인 놀음이나 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환멸을 느꼈던 적이 몇 번이나 있던가. 그리고, 그를 안는 순간에는 그런 감정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더러움을 느꼈던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자르반은 스웨인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을지가 언제나 궁금했다. 다리뼈를 꺾어 비틀어도 무표정할 것 같은 저 얼굴 밑에는 어떤 번민이 있을까. 늘 추측 뿐이었다. 이런 관계에선 무언가를 물어본다는 행위 자체가 끔찍이도 낯설게 느껴졌다.
"나름 네놈을 생각해 정한 호칭이었는데, 라이트실드. 이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군."
"몰랐을 리가 있나."
놀릴 건수가 잡혔으니 그걸로 괴롭히는 거겠지. 굳이 생각을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쩐지 스웨인과 똑같은 인간이 되어가는 기분이었으니까.
스웨인은 몸을 기울여 자르반과 가까이, 아주 가까이 얼굴을 마주댔다. 이 거리에서는 서로의 숨결조차 강하게 느껴진다.
"사실은 그런 호칭으로 불리고 싶은 거지. 정확히는 그게 자연스러울 정도의 관계를 원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우리 사이에는 불가능하겠군."
"절대로 아니다. 이제 그만두지 그래."
속내를 들켰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자르반은 제 한쪽 뺨 위에 손을 올린다. 그것으로 열기가 가라앉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스웨인에게서 표정을 가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다른 쪽 손으로는 스웨인의 어깨를 쭉 밀어냈다. 약간의 저항이라도 있을 법 했는데, 의외로 스웨인은 버티지 않고 옆으로 조금 물러섰다. 그제서야 보이는 스웨인의 입가엔, 웃음일지 비웃음일지 모를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자기야."
"제발."
"역시 좋아하는군."
"...말도 섞기 싫으니, 내가 나가도록 하지."
자르반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 걸쳤다. 거의 도망치듯이 방을 나가는 그의 모습을, 스웨인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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