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르반스웨인] 영구상해
무엇이라고 차마 이름 붙이지 못할 이 관계에 네 흔적을 남겨줘.
어떻게?
우리 사이에 오갈 수 있는 것이라면 아주 뻔하지 않나?
그것밖에 없지, 라고 말하는 스웨인의 입가에 음산한 웃음이 서린다.
꽤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추잡한 욕망으로 지저분한 관계를 못 박아 두는 것은. 자르반은 눈이 아프지도 않은 것처럼 일렁이는 촛불의 한가운데를 응시한다. 심지부터 파랗게 번져나가던 불은 제 색을 잃고 백열의 빛으로 화하고 말았다.
가련하기 그지없는 불꽃에 그는 바늘을 쑤셔 넣었다. 곧바로 제 형태를 잃고 촛불은 위태롭게 몸부림친다. 심지를 둥글게 감싸던 푸름도 제 갈피를 잃고 바늘에 엉겨붙다 사그라들다 하였다. 그것을 지켜보는 행위는 어딘가 사람을 진한 슬픔에 밀어넣는 구석이 있었다.
다 끝났나.
진한 피로감이 묻어 갈라진 목소리다. 스웨인은 가슴께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모아서 잡아올린다. 찢어진 베일처럼 흩날린 백발이 거둬지자 그 아래로는 머리카락 만큼이나 새하얀 목덜미와 어깨선이 드러난다. 양 어깨 아래로 남자다운 굴곡을 그리며 이어진 등허리에는 그가 겪어온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었으나 여전히 당당하게 펴진 것이 그의 성정을 보여주는 듯 하였다. 그것에 홀려있던 탓에, 바늘이 불에 달궈지는 것도 잊고 말았다. 자르반은 빨갛게 물집이 올라오는 손 끝을 잔뜩 찡그린 눈으로 내려다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스웨인이 어느새 자르반 쪽으로 몸을 돌려놓았다. 그림자의 균열로 촛불의 반사광이 스며들어 그는 전에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불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오로지 자르반만을 굳은 시선으로 응시한다. 그 자리엔 자신과 왕자 단 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고, 핏기없는 입술이 갈라진다. 새빨간 입안과 유린당하던 불꽃의 상이 겹친다. 손이 떨린다. 결코 두려움이나 긴장같은 감정이 아니다. 이것은 희열이다. 그를 상처입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뿐이다. 어떤 상처든 재생해내는 괴물같은 몸뚱아리에 정복의 증표를 박아넣을 것이다. 생물의 가장 연약한 부위에,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기어코 의식되고 마는 쐐기를.
무섭나? 이제 와서?
가당치도 않은 도발이다. 자르반은 작게 실소를 흘렸다.
그럴리가. 수십차례도 넘게 해본 일인데.
혀 끝을 잡아당기자 읏, 하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올라온다. 볼성사납게 혀를 쭉 내뺀 채로 턱을 잡혀있는 꼴이라니, 인간의 손에 굴복당한 맹수와 모습이 다르지 않다. 스웨인의 뜨거운 숨결이 손가락에 와닿는다. 자르반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구멍을 낼 부위의 살점을 천천히 어루만진다. 손에는 온통 타액이 묻어 쉽게 미끄러졌기에, 혀를 놓치지 않으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했다. 혓바닥을 누르는 압력의 강도가 세지자 스웨인은 헐떡임과 함께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제 허벅지에 손톱을 박아넣으며 눈동자만을 굴려 자르반의 오른손에 들린 바늘을 바라본다. 은빛의 섬뜩한 반사광이 눈가를 어지럽힌다.
창을 꽂아넣는 일에 비하면 바늘을 꽂아넣는 일은 아주 쉬운 것이다. 굵은 철침이 살을 파고듦과 동시에 스웨인의 손톱도 허벅지 살을 찢어 놓는다. 얇은 살덩이 하나를 뚫는 일, 분명 찰나의 순간에 불과할테지만 어느 쪽에게도 그것은 아주 기나긴 가학과 피학의 시간처럼 여겨졌다. 꽉 붙잡은 턱이 덜덜 떨려온다. 손에 와닿는 숨결도 한층 거세게, 자신의 동요를 숨김없이 드러내었다. 바늘을 빼어낸 자리에선 선홍색의 피가 번져 치아를, 입술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늘보다도 더 굵은 기둥이 구멍을 파고들자 스웨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는 소리를 내었다. 고통은 익숙했지만, 자르반이 그에게 가하는 것들 중에는 어느 하나 생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잃어버린 것. 스스로 버린 것. 혹은 잊어버리고 만 것. 끝없는 갈증을 거짓으로 덧칠해 이름붙인 것. 다른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오직 증오와 폭력의 형태로만 허락되었다.
사랑스레 연인의 몸을 더듬는 대신 원수의 살을 찢어 삼킨다. 달콤한 입맞춤 대신 숨통이 끊어지도록 목을 조른다. 이 관계를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느 경우에는, 해답 대신 확실한 확인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딸각, 하고 경쾌하게 맞물리는 진동이 전해진다. 혓바닥 안에는 전에 없던 묵직함이 있다. 혀 끝으로 그것을 굴려보자, 작고 동그란 구체가 느껴졌다. 상처에 쇳덩이를 채워넣은 뒤로 피는 얼마 흐르지 않았기에, 스웨인은 입안에 고인 타액과 피를 함께 삼킨다. 침을 삼킨다는 일상적인 행위조차 부자연스럽게도 고통스러웠다.
상처가 아물면, 하고 자르반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스웨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의 말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그때는 새로운 상처로 덧씌워주겠다.
늘 잊지 못하도록 말이지. 왕자도 상당히 자신을 닮아가고 있는게 틀림없다고 스웨인은 생각했다.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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