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로지/우리장르 정상영업 합니다]

판여가-서로에 대하여

같이 들으시며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1.

하- 하고 입김을 내쉬자 새하얀 입김이 차가운 겨울하늘에 흩어졌다.

거리의 가게들마다 할로윈 분위기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아직 12월의 첫째 날 임에도 어느새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건물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자리하고 광장에는 트리 설치가 한창이다. 열려있는 가게들의 문틈으로 익숙한 캐럴 송이 간간히 들려왔다. 차가운 공기에 양 귀에 한 능력제어용 피어싱이 더 시린 느낌이 들었다. 처음 제어구를 찰 때에는 무게감과 족쇄 같은 느낌이 선명했는데, 그것도 시간이라고, 한참이 지난 지금에는 존재감만 간간히 느껴질 뿐이다.

 

온 몸을 아리게 할 것 같은 겨울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다. 새파랗지만 꽤 가까운 느낌이 드는 하늘도 맘에 든다. 본래 겨울에 대해 그리 큰 감상은 없었다. 겨울은 춥고, 외롭고, 움츠러들게 하니까. 오히려 싫어하는 편에 가까웠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좋아하는 쪽인 듯하다. 차가운 것이 누군가의 능력을 닮았고, 그러면서도 파란 하늘이 누군가의 머리색을 닮아서. 주머니에 넣고 있었지만 손이 꽤 차가워져 꼼지락거리고 있으니, 저 멀리서 판베가 손을 흔들면서 오고 있다. 마주 손을 작게 흔들어주자 헤실 거리던 표정이 더 풀어졌다. 발간 얼굴이 추위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추위를 크게 타지 않으니 아마 다른 이유 때문이겠지.

 

나를 볼 때 마다 풀어지는 저 얼굴이 좋다. 나른하게 내려오는 듯 하면서도 끝부분에선 유혹적으로 올라가는 눈매가, 나를 볼 때에는 순하게 휘어지는 게 좋다. 춥지는 않냐고 물으면서 양 손을 잡아 따뜻하게 해주려는 그런 모습이 좋다. 순전히 나만을 위해 본인의 손을 따뜻하게 준비해둔 노력이 좋다. 차가운 나의 손안에 미리 데워 둔 핫팩을 넣어주고 양손을 잡아 주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자 헤실 웃으며 왜? 라고 묻는다.

 

나는 네가 얼마나 냉정하고 무감각해 질 수 있는 지 안다. 너는 아름다우면서도 영악해서 남의 호감을 네 맘대로 휘두르곤 했지. 솔직하게, 나는 나에 대한 네 뜨거운 사랑이 식어, 언젠가는 나에게도 다시 냉정하고 무감각하며 영악해지진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내 운명에 맞게 유일했을 내 첫사랑은 뜨거워 녹을 듯 열정적이기 보다는, 늘 나의 가슴을 칼에 베인 듯 아프게 했다. 우리의 사랑은 늘 처절 했으며, 서로의 눈가를 아리게 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죽어 나를 가슴에 영원한 흔적을 남기고, 다 토해내지도 못할 고통에 대한 대가로 나에게 힘을 주었으니. 원래는 없었을 사랑이 나의 시간에 새겨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너의 사랑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우리의 생애는 우리의 본질에 충실하니, 처음에 나는 이것이 거짓이라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너는 나를 사랑했고, 생애의 일부에만 본질이 존재함이 증명되었을 때에도 너는 늘 변함이 없었다. 운명을 극복한 위대한 사랑 같은 거창한 표현은 너무 화려하다. 너는 그냥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변함없는 그런 말이 좋았던 것 같다. 어찌되었건 나의 생은 내 본질을 따라갔고, 나는 불안정함이 있을지언정 변함없는 것이 좋았으니까. 결국 나는 너의 다정이 좋았고, 다정 속에 스며드는 사랑을, 아프지 않을 사랑을 놓아주지 못한 것이다.

 

차가워진 뺨을 쓸어주는 손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살짝 기대었다. 순간 움찔 굳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네 얼굴은 새빨개져있겠지. 기댄 상태로 눈을 다시 떴다.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머리칼이 파란 겨울 하늘과 잘 어울린다. 파랗지만 낮은 겨울하늘처럼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파란색. 네가 능력을 쓰면 하얗게 물드는 머리칼은 눈, 얼음 그리고 겨울 햇살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다가오는 자수정 눈동자가 열망을 품어 언뜻 붉은색이 보이는 것도 같다. 나의 눈동자 색과 닮아 괜스레 더욱 맘에 들었다. 아무래도 나에겐 나도 몰랐던 집착욕이 있나보다. 나를 계속 열망하고 휘둘리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두고 죽지 않을 강함 또한 좋다. 또다시 새겨지는 상처는 원치 않으므로. 잡혀있던 손을 빼, 뺨을 어루만지며 파란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사르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감촉이, 가까워지는 거리가 무언가를 부추기는 듯하다. 마음속에 차오르는 어떤 충족감을 참을 수 없어 웃음이 나왔다. 입술에 닿는 온기가 따뜻하고 부드러워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나는 겨울이 꽤 마음에 들게 되었다.

 

 

 

 


2.

나는 천성이 가볍고, 모든 것이 쉬웠으며, 때문에 대부분의 것에 무감각했다. 당연하지. 모든 것이 얻기 쉬우니까. 우리의 본질은 노래라, 우리의 생애는 본질을 거스르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본질은 또한 노래라, 우리의 생애는 반영구적이니, 결국 그 긴 생애 동안 짧은 노랫말만큼의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삶의 절대적 명제가 틀렸음이 증명되기 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재수 없게 잘난 척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에 대한 자랑스러움 같은 일반적인 감정을 느끼기에 앞서 어떠한 기쁨을 느꼈다. 나는 너의 기쁨을 보았고 너의 절망 또한 보았으며, 너의 본질이 어떠한 형식으로 정의되어 있었는지 또한 알고 있다. 나는 그 절대적인 믿음에 파고들어 깨트릴 수 있는 틈이 있음을 알았기에 기뻤던 것이다. 나는 나의 천성에 맞게 사랑 또한 가볍게 여겼다. 나는 그 무게가 천근보다 무거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너는 사랑의 끝에 우리들의 적을 떠올리게 하는 강대한 능력을 얻었다. 너는 한동안 여러 검사와 감시를 받았으며, 나는 나의 능력 때문에 너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너는 말이 줄었었고, 밤에는 소리 없이 울며 잠들어있는 나날이 있었다. 나는 비겁하게 너의 곁에 더 가까이 있을 수 있었다. 그 애는 손이 작고 고왔다고 너는 말했었다. 나는 너의 손을 포개어 줄 수 있을 만큼 크다. 너는 그 애를 너의 품에 안고 있을 때 사랑의 안정감과 운명의 불안감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불안한 너를 뒤에서 껴안아 줄 수 있다. 그 아이와 나를 비교하며 너의 사랑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사랑이 있었듯 내가 해 줄 수 있는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것일 뿐. 아마 평생 그 아이는 너의 마음속에 박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내가 너의 첫사랑이 아니어도 괜찮고 유일한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다. 너는 다정한 사람이고 나는 영악한 사람이니. 나는 이제 너에 대한 일이면 무감각해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나에게 안겼을 때, 너의 온기가 좋다. 그게 좋아 꽉 껴안으면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손길이 좋다. 매서워 보이는 눈매지만 종종 풀어져 부드러워지는 게 좋다. 새빨간 루비 같은 눈동자에 부드러움이 섞일 때 심장의 두근거림을 더욱 느낀다. 아마 나의 얼굴은 더 붉어지고 있겠지.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가 어우러져 누군가는 퇴폐적이라고 얘기한다. 그 분위기가 나를 보고 풀어질 때 나는 더욱 큰 사랑을 느꼈다. 나는 사랑의 영원함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매일 매순간 다시 사랑하기로 했다. 나는 일순간의 쾌락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니, 매순간을 새로이 사랑하기로 했다. 순간이 이어져 영원이 된다면, 그런 영원함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천성이 가볍고, 모든 것이 쉽지만, 너에 관해서는 단 하나도 무감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너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쉽지 않게 되었고, 단 하나도 가볍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항상 너의 손길 하나에 가슴 떨려하고, 시선하나에 얼굴이 풀어지는 천하의 천치가 된다. 나는 그것이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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