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남긴 궤적
로젠바움 브레히트. 사바툰을 적극적으로 도와, 사바툰이 오시리스의 몸에 안전하게 숨어있게 하고, 사건을 악화하게 두고 본 사람. 그러나 이에 대해서 마라 소프가 “괜찮은 장기말이었다” 는 발언을 했다. 누군가는 사바툰의 뜻을 도와야했단 것이다. 그 역할은 하필 로젠바움이 맡게 된 것이고. 로젠은 은신자들과 몇 가지 질의응답을 했다. 마지막에는 아이코라와 짧은 면담을 가졌다. 그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필요한 악역이었다. 그러나 악으로 지냈다면 벌은 받아야했다. 리프 측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서 로젠은 형식적인 수준의 가택연금형을 받았다. 사바툰과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끝날 때 까지는 조용히 운신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리즈가 빽 소리를 질렀다.
또 음식을 밖에다 내놨잖아, 로젠은 먹고 안 죽어도 난 먹고 죽을 수 있다고!
요 며칠간 리즈는 예민했다. 지나칠 정도로 예민했다. 듣자하니 밥을 주던 길고양이를 누가 죽였다는 모양이다. 로젠은 그래서 참아주려고 했다. 바깥에 내놓은 나물을 안에다 들여놓으려고 번쩍 들어올렸다. 리즈가 그걸 보고도 속이 풀리지 않았는지 비아냥거렸다.
밖이 28도인데 연금형 때문에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몰랐나보다, 그치. 새벽제비라면 이렇게 음식 안 둘텐데.
새벽제비의 이름이 나오자 리즈는 통을 쾅 내려놓았다. 유리라 깨질지도 몰랐지만 로젠이 신경 쓸 것이 아니었다. 리즈는 입을 비죽 내밀어보이곤 대문을 소리나게 닫고 사라졌다. 로젠은 한 마디도 못 꺼내고 울화통이 부글부글 끓는 속만 삭혀야했다. 나물, 이라는 음식도 새벽제비가 알려준 것이었다. 샐러드를 흐물흐물하게 만들어서 양념을 강하게 친 것인데, 적당히 짭조름한 것이 빵이나 면과 같이 먹기에 좋아서 새벽제비가 사라진 이후에도 종종 해먹곤 했다. 그가 왜 사라졌는지는 모른다. 리즈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처럼 자신을 돌봐준 새벽제비에게 큰 애정을 느끼지만 로젠은 아니었다.
엄마?
리즈가 덤불 숲 속에서 눈을 비비며 떴다. 입가와 손에는 빨간 물이 잔뜩 들어있었다. 산딸기 물인데, 로젠은 피인 줄 알고 리즈를 껴안고 울었다. 리즈는 보통의 인간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선봉대는 최선을 다해 리즈를 “죽이고” 싶어했다.
엄마. 새벽제비가 산딸기 숲으로 데려가줬어.
그 때 리즈는 10살이었다. 새벽제비는 로젠의 아이인 리즈를 납치해 깊은 숲 속 덤불들 사이에 던져놓고 갔다. 리즈는 깔깔거리며, 새벽제비가 자신을 깨웠을 때 부터, 숲으로 가면서 얼마나 재미있는 노래를 불러줬는지, 산딸기를 고르는 법을 어떻게 알려줬는지 다 말했다. 새벽제비는 연구대상을 납치한 혐의로 긴급 수배가 걸렸지만 그의 고스트 트로이메라이가 부서진채 산딸기 덤불 근처에 나뒹구는 것만 발견했다.
죽었잖아.
로젠이 대문을 붙잡고 말했다.
그 때, 멜과 함께 죽었잖아.
안 죽었어.
새벽제비가 말했다. 10년이 지났다. 새벽제비는 돌아오지 않았고, 벌을 받지도 않았다. 5년 정도에 수배는 풀렸다. 그의 수배가 풀리자마자 로젠은 그의 동굴을 불태우고 그의 오두막집을 부랑자에게 양도하였다. 그가 그리던 지도만 남아 선봉대의 손에 들어갔고, 그걸 대가로 리즈는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선봉대는 리즈를 “죽이고” 싶어했지만, 날것의 악의는 거두었다.
왜 우리 집으로 온거지? 난 너를 환영하지 않는다.
새벽제비는 가늘게 웃었다. 그리고 허공을 더듬어 로젠을 찾았다. 로젠은 그제야 새벽제비를 꼼꼼히 보았다. 왼쪽 눈은 흰 반점으로 완전히 뒤덮혔고, 흰 반점은 오른쪽 눈도 서서히 좀먹고 있었다. 그 동안 새벽제비의 손은 로젠의 정수리를 찾아냈다. 자신의 정수리를 토닥이는 커다란 손에 로젠은 작게 놀랐으나 곧 매정하게 치워버렸다. 눈은 시작이겠지.
그 동안 어디서 뭘 한거지?
네가 우리 집을 태워버렸잖아. 여기로 올 수 밖에 없었어.
내 집에서……. 자고 가려고?
로젠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래, 자고 간다면 방 한 켠은 내어줄 수 있다. 어차피 새벽제비의 집을 불태운건 자신이니까. 하지만 불쾌했다. 정말로 불쾌했다. 10년간 우리를 버리고, 특히 리즈를 버리고 어디로 도망간 부랑자 새끼를 내 집에 들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숨겨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로젠은 당당하게 섰다. 새벽제비의 눈으로는 일부만 보이겠지만. 그리고 말하려고 했다. 하룻밤 정도는 재워줄 수 있다고. 그런데 현관이 크게 기울었다. 로젠은 미끄러져 새벽제비와 부딛혔고, 새벽제비는 휘청이며 로젠을 안고 뒤로 자빠졌다.
에휴.
한숨이었다. 명백히 한숨이었다! 로젠은 새벽제비를 바닥 삼아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았다. 자신의 집은 공중에서 1m 남짓 떠있었고, 대문은 입처럼 오물오물 움직이더니 또 다시 “에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집은 발도 없이 낮게 떠서 둥둥 사라졌다. 로젠과 새벽제비는 멍청하게 집이 떠난 자리를 쳐다보았다. 수도관이나 전선같은건 깔끔하게 처리되어있었다. 집이 돌아오면 연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동안 어디서 뭘 했냐면…….
새벽제비가 중얼거렸다. 로젠은 듣지 않았다. 자신의 집터를 자세히 살피고 선봉대에 연락을 해야했다. 연금이라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다. 여기서 어긋나면 더 큰 일이 일어날 것이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로젠은 아이들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었다. 이제 다들 성인이 되었지만, 성인이 된다고, 로젠이,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빨을 깨물었다.
로젠.
새벽제비가 로젠을 벌컥 들어 안았다. 로젠은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반항했다. 로젠이 뭘 하던 간에, 새벽제비는 자기가 잘 하는 것을 했다. 달리는 것. 어딘가로 도망가는 것. 빛이 없어도 새벽제비는 빨랐다. 로젠은 어쩔 수 없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새벽제비의 목을 꽉 껴안았다. 집은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오래 달릴 수 없었다. 새벽제비는 나뒹굴었다. 그는 로젠이 다치지 않도록 부드러운 풀 위로 던졌다. 덕분에 타박상만 입었다. 새벽제비는 까마득하게 떨어졌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선봉대에서 조용히 덮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젠은 대범하게 절벽에 가까운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어디에서는 과감하게 뛰어내리고, 어디에서는 흙을 이용해 미끄러졌다. 점차 새벽제비가 보였다.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차라리 죽지. 로젠은 화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했다.
넌 멋대로지, 항상. 마치 책임은 다른 사람들이 져 줄 것 처럼.
로젠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리고 새벽제비의 상태를 살폈다.
일어설 수 있나?
아무래도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
새벽제비도 담담히 말했다. 로젠은 자신을 비아냥거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그러려고 무덤덤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새벽제비는 두 다리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전령이었기에…….
넌 멜도, 내 딸도 위험에 빠뜨렸잖아. 무슨 낯짝으로 돌아온거야?
로젠의 목소리가 울렁거렸다.
딸을 납치하고 그대로 버릴 거였으면, 멜이랑 같이 행복하게 황무지에서나 살 것이지, 왜 트로이메라이는 죽인거야?
내가 죽이지 않았어. 로젠, 큰 위협이 오고 있었다.
아아, 그건가. 마라 소프의 큰 그림.
결국 로젠은 새벽제비를 한껏 비꼬았다. 그는 전령이라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말은 새벽제비는……. 현실성이 떨어진단 뜻이었다.
그보단 작지. 난 약하니까. 나는 연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어, 로젠, 어미새가 다친 척 연기하며 포식자를 유인하는 것 처럼-,
그러세요, 네. 우리 가족을 뒤덮을 어둠이 있어서 네가 비틀거리며 밖으로 도망갔다 이거지? 남겨진 사람들에게 경고 한번 안 해주고!
새벽제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진실이 뭐가 됐든 간에 로젠은 받아들이지 않을 셈이었다. 어차피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로젠이 진실을 말해도 “진실” 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사바툰.
새벽제비가 중얼거렸다.
넌 그를 사랑한게 맞잖아.
갑자기 그 말이 왜 나오는거지? 아, 그래, 선봉대를 피해 도망중에 도청이라도 했다, 이 말인가.
그걸 선봉대에게 말했나?
미쳤냐?
로젠은 자기가 새벽제비에게 진실을 말했음을 알게 되었다. 로젠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새벽제비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한 마디 덧붙였다.
사랑 얘기가 제일 재밌다니까.
로젠은 새벽제비를 밀어 넘어뜨렸다. 그는 힘없이 옆으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뒤이은 신음소리. 로젠은 새벽제비가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다쳤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에게는 멜이 없다……. 빛이 없다.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딘가를 다녀오면서 쇠약해진 상태라면. 로젠은 걱정하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 어차피 날 잡으러 올테니…….
로젠은 하늘을 보았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하늘에는 집 한 채가 날아가고 있었다. 집의 뒤를 따라 물먹은 궤적이 그려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창문을 문지른 것 처럼 축축한 궤적이. 로젠이 중얼거렸다.
아름다워.
마치 자신이 따라보고자 했던, 그 군체신처럼. 그러나 신은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다.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받아들여야했다. 새벽제비는 로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름답네.
그의 목소리는 신음처럼 가늘었지만, 눈빛은 오랜 그리움에 젖어있었다. 고대의 그리움을 안고 그는 어디서 무얼 했단 말인가.
돌아왔다는게 실감난다.
몸을 추스른 새벽제비가 큭큭 웃었다.
다리는.
괜찮을 리가. 이제 달리지는 못할 것 같네.
치료 받으면 돼.
새벽제비는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비밀에 잠겨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오늘은 새벽제비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난……. 버틸 만 했어. 넌?
로젠이 물었다. 새벽제비가 더듬거리며 로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희들이 있어서 괜찮았어.
“집“이 그려낸 아름다운 궤적은 로젠의 ”집”터로 향했다. 잠시 뒤 절벽 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선봉대 측에서 요원을 보낸 것이었다. 로젠은 요원들의 도움으로 스스로 절벽을 기어올랐고, 새벽제비는 다른 사람의 등을 빌려 빙 돌아 오는 수 밖에 없었다. 다시 하늘을 보았다. 궤적은 사라져있었다. 로젠은 이웃들이 “이상한 것을 봤다” 며 집의 가출을 증명해주었다. 로젠은 훈방조치 되었다. 리즈는 이상한 일을 겪고 겁에 질린 채 로젠에게 다가왔다. 로젠은 일단 새벽제비의 귀환을 감추기로 했다.
엄마, 로젠……. 날 두고 어디 가지 마.
리즈가 중얼거렸다. 로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즈를 꼭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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