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나무

달팽이관

자글자글 내리는 소리를 로젠은 분해하고 있었다. 소리의 점 하나를 잡아 확대하고 확대하면 또 다른 점들로 나뉘어졌다. 쥐가 났을 때의 감각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게 가장 작은 소리의 입자를 잡아내면 로젠은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를 들어본 적 있나?

새벽제비가 물었다. 로젠은 그런 유희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인류는 기아에 지쳤고,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차츰 그만두고 있었다. 그 때 다시 시작된 것이 라디오 방송이었다.

처음은 강철군주들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한 방송이었지. 어디에 가지 마라, 어디로 대피해라, 이런 것 말이다.

송전탑은 불안정했고 라디오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때로는 자글거리는 소리만 내내 들렸을 뿐이다. 그 때 좋은 아이디어를 낸 청년이 있었다. 사람을 찾는 사연 등을 받아 난민들이 각자의 가족을 찾게 하는 방송을 하고, 그 방송 사이사이에 명령 사항을 집어넣는 것이다. 새벽제비는 로젠에게 작은 라디오를 건넸다. 곧 부서져내릴 것 같았다.

너도 한번 들어 봐. 재미있다고. 나도 사연을 보내봤어.

어린애 같기는.

로젠은 라디오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새벽제비가 보냈다는 사연을 들어보고 싶기도 하고, 폐품을 이리저리 기워 만든 라디오가 처연해보이기도 했고, 아무튼 로젠은 사소하고도 비이성적인 이유로 라디오를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 자글자글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그 소리를 타고 다른 소리가 들렸다. 두 청년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글거리는 소리에 묻혀 발음은 많이 뭉개져 들렸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틀어놓고 다른 일을 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사연은, 사람을 찾는 사연인데요.

왜인지 새벽제비가 보낸 것 같았다. 로젠은 살짝 귀를 기울여보았다.

나를 죽인 범인을 찾고 있습니…….

소리가 툭 툭 튀더니 자글거리는 소리에 한동안 묻혔다. 다시 청년들의 목소리가 돌아왔을 때, 사연은 끝난 뒤였다. 자글자글. 자글자글. 로젠은 사라진 사연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불쾌했다. 라디오를 껐다. 다시는 듣지 않으리라. 새벽제비에게 돌려주면 다른 필요한 사람에게 주겠지. 로젠은 하던 일을 멈추고 거친 발걸음으로 새벽제비의 숙소에 들어갔다.

나를 놀렸어.

로젠이 탁자에 라디오를 놓았다. 마음같아선 부서져라 내려놓고 싶었지만, 이건 귀중한 자원이었다. 로젠은 이빨을 꽉 깨무는 것으로 화풀이를 대신하려 했다. 새벽제비는 짐을 챙기다 말고 로젠을 슥 보았다. 그리고 계속 짐을 챙겼다.

이딴 어린애 같은 것은 갖다 버리든, 누구에게 주든 해.

그러도록 하지.

새벽제비는 무덤덤하게 라디오를 챙겨 전령 가방에 집어넣었다.

라디오를 싫어하다니 의외군.

라디오가 아니라 네가 친 장난이 싫은거다.

아, 그러고보니 강철군주들이 주인에게 돌려달라 하더군.

새벽제비는 간이 서랍장에 넣어둔 디스크를 하나 꺼내 로젠에게 건넸다. 로젠은 얼결에 디스크를 받았다. 새벽제비는 간다는 말도 없이 로젠을 지나쳐 숙소를 나갔다. 로젠의 심장이 뛰었다. 그건 마리아의 디스크였다. 그 안에는 황금기의 편린이 들어있었다. 엘릭스니 자매들이 자신을 보호해주었을 때, 이후로 그 디스크가 어떻게 되었더라?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엘릭스니 자매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자매들의 자손 역시 무참히 살해당했다.

나를 죽인 범인을 찾고 있습니다.

로젠은 선명히 들리는 청년의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자글자글. 라디오였다. 새벽제비는 끝까지 이런 저질스러운 장난을 치고 갔다. 로젠은 분노해서 고함을 내질렀다. 라디오를 찾아 박살을 내고, 새벽제비의 대가리도 박살을 낼 것이다. 그러면 분이 좀 풀릴 것 같았다. 로젠은 천막을 헤집어놓았다. 간이 서랍장을 뒤집어엎고, 책상을 반쯤 박살냈고, 바구니에 들어가있는 과일들을 바닥에 흩뿌렸다. 라디오는 없었다. 애매한 배신감이 들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누구에게 배신당했단 말인가? 로젠은 어느 병원에서 가져왔다는 간이 침대에 몸을 기댔다.

감정을 돌볼 수는 없었다. 세상은 망해가고 있고, 로젠은 세상을 구하는 쪽에 가담하기로 했기에. 사소한 감정은……. 피로했다. 이마가 뭉근하게 아파왔다. 자매들의 시체가 보였다. 한 자매가 제발 자손들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그 사람은 마지막 알까지 짓밟아 터뜨리고 깨뜨렸다. 어쩌면 다행인 일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기계의 배신으로 그들은 몰락해 몰락자가 되지 않았는가. 묶인 자매들은 차례로 팔이 뽑히고, 다리가 묶여 동굴 천장에 데롱데롱 메달렸다. 고기의 피를 빼듯 그렇게 자매들은 피가 빠져 죽어갔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디스크를 주웠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본다. 동굴로 어슴푸레하게 들어오는 불빛이 콧날과 뺨에 푸른 윤곽을 만든다.

자매들을 죽인 범인.

로젠은 숨을 죽였다. 산발인 머리카락, 낮은 콧대, 피곤해보이는 눈, 흐린 빛 아래서 자글자글 드러난 것은 새벽제비였다. 그는 강철인장을 달고 한 손에는 디스크를,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목격자를 찾지 못한 새벽제비는 유유히 동굴을 빠져나갔다. 새벽제비가 그들을 죽였을 리 없다. 로젠은 진짜 범인은 모른다. 디스크는 항상 로젠의 품에 있었기에, 도둑맞은 적도 없었다. 전쟁군주들의 수하를 하나 잡아 자매들이 당한 것처럼 했더니 명령 받은 내용을 술술 불었고, 그래서 로젠은 일대의 전쟁군주들을 다 잡아다 족쳐놨다. 고스트까지 남김없이, 깔끔하게.

새벽제비일 리가 없잖아.

로젠이 중얼거렸지만 허튼 수고였다. 차라리 로젠은 이렇게 말해야했다.

새벽제비가 자매들을 죽였어, 그가 범인이다.

새벽제비가 갑자기 라디오에 대해 운을 뗀 것 부터가 수상하다. 그리고 나를 죽인 범인이라니, 새벽제비는 자매들을 죽였고, 자매들의 이름으로 사연을 보낸 것이다. 강철군주의 지시로 로젠을 농락하기 위해 자매들에게서 탈취한 로젠(혹은 마리아)의 디스크까지 돌려준 것이다. 나를 죽인 범인은 새벽제비이다. 새벽제비가 뭐라고 말했다. 로젠은 어디서 들리는 라디오의 자글거리는 소음 때문에 새벽제비의 말을 당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유독한 전파가 느껴진다. 어디선가 난민들을 향해 쏘아대고 있는 것이다. 세뇌하는 효과가 있는걸까? 하지만 강철군주를 미워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은 집단이다. 로젠은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로, 강철군주, 라는 단어를 새겨놓은지 오래였고 무엇보다 그들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이미 그는 강철군주에게, 정확히는 펠윈터에게 진 적이 있었다. 날 죽인 사람을 찾습니다 이름은 로젠바움 브레히트,

조용히 해봐!

로젠이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굴렀다. 로젠은 아무렇게나 발을 굴렀다. 자꾸자꾸 자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맞서 로젠은 악, 악, 소리를 질렀다가 지쳐서 숨을 쉬는 법을 까먹었다. 콜록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어지러워. 로젠이 어렴풋이 생각했다. 어지러운 상태에서는 어떻게 숨을 쉬더라. 새벽제비는 이런 일을 많이 겪어봤다는 듯이 로젠을 자신의 품에 안고 낮게 노래를 부르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숨 쉬는 방법이 기억이 안 났지만, 숨이 쉬어지고 있었다. 지쳤다. 완전히. 로젠은 처음 듣는 노래를 어설프게 흥얼거리다가 새벽제비의 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런데 저 자식이 언제 일을 끝내고 돌아온거지? 아니면 내가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달리기라도 한 것일까?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든, 로젠은 다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제비는 편한 사람이었다. 사람, 이라기보단 놈, 자식, 이런 말이 더 어울리는 이. 새벽제비가 말했다.

네가 일어나면 고백하려고 했다.

로젠은 새벽제비의 간이 침대 위에서 눈을 끔뻑였다.

로젠바움, 널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미친게 분명하다. 로젠은 콧웃음도 안 치고 그냥 그 말을 무시했다. 새벽제비도 그걸 받아들였다. 로젠은 간다, 한 마디와 함께 미친놈의 숙소를 나섰다. 트로이메라이의 안목을, 여행자의 선택이 이토록 틀릴 수 있다.

그에겐 널 사랑할 자격이 없어.

로젠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동의했다. 로젠은 자신의 숙소까지 와서 생각했다. 누가 말했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혼잣말로 로젠은 매우 즐거운 사람이 되었다. 로젠은 종종 들리는 소리에 대꾸를 했다. 소리는 유쾌하고 재치가 있었다. 촌철살인을 잘 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심심하면 로젠은 자글자글하는 소리를 분해했다. 소리는 점으로 이루어졌고, 그 점은 또 다른 점의 집합체였으며, 마지막 아주 작은 점까지 도달하고 귀를 기울이면 소리가 돌아왔다. 소리는 친구를 불렀다. 소리의 친구, 소리는 만만치 않게 유쾌하고 재치가 있었다. 소리와 소리는 또 친구를 데려왔고, 또 친구를 데려왔고, 또 친구를 데려왔고, 또 친구를 데려왔고, 또…….

그만 좀 해!

명령을 듣다가 로젠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만, 그만 좀 얘기하라고, 정신 사나워 죽겠잖아!

막아놓았던 둑이 터졌다. 강철군주의 전령, 새벽제비는 로젠이 조용히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는 것을 보았다. 로젠이 자기 자신에게 화를 다 내고 나자 새벽제비가 말했다.

로젠바움 브레히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쉰다고 전달하겠다.

뭐?

로젠이 되물어봤지만 새벽제비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로젠은 결국 자신의 숙소에 갇혔다. 천막 속에 갇힌 광인은 손톱을 피가 날 때 까지 물어뜯으면서 종종 귀를 막고 싫어, 싫어, 조용히 해, 이렇게 중얼거렷다. 유쾌하고 재치있던 말은 함정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가 많아지자 로젠을 갉아먹고 뜯어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젠장, 나를 죽인 사람이 시작이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새벽제비가 들어왔다. 로젠은 초췌한 표정으로 새벽제비를 보았다. 그는 로젠에게 맛있는 과일 한 알과 알약 한 정을 가져다주었다.

뭔데, 이건.

로젠이 절대 먹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먹어. 독약이다.

새벽제비의 말에 로젠은 당황했다.

난 죽지 않아.

정말로 그런가?

로젠은 순간 자기가 죽인 전쟁군주들을 생각했다. 승천자도 죽을 수는 있다. 로젠은 독약이 정말 자신을 죽이기를 바라며 삼켰다. 유독한 약은 들어가 소리를 살해했다. 하나씩. 소리들은 입가에 흰 거품을 물고 죽었고, 복수를 다짐하며 달팽이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로젠에게 남은 것은 자글거리는 소리 하나 뿐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한 달 가량 걸렸다. 강철군주들은 아무도 로젠을 찾지 않았다. 펠윈터도.

로젠은 계산을 해보았다. 어림잡아……. 서른 명의 아이. 한 아이 당 십 년 정도 키웠다 해도 삼백 년 이다. 삼백 년 보다 긴 시간동안 아이들과 정이 들고 죽음을 감당해야했다. 로젠은 그렇게 계산하며 라디오를 틀었다. 송신탑을 보강해 더 깨끗한 소리가 들렸다. 방송 내용도 다양해져 사람을 찾는 것 뿐만 아니라, 개그, 음악 등을 방송해주었다. 로젠이 좋아하는 방송은 가사 없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클래식 방송이었다. 디스크는 다시 강철군주의 손으로 들어갔다. 로젠바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 보다 강철군주라는 집단에게 들어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하지 않다. 선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라디오에 어떤 남자가 발광을 하며 왜 나에게 이런 짓을 하는지 따져묻고 있었다. 새벽제비는 이미 미쳐있었기 때문에 로젠의 광증을 다룰 수 있었다. 그는 로젠의 광증을 대신해 우는 곡비였다.

다시 듣는군. 내가 말하지 않았나, 들을 만 하다고.

새벽제비가 로젠의 숙소에 들어왔다. 로젠은 한숨을 쉬었다.

나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잖아. 아직도 유효한가.

싫으면 무시해도 돼. 이미 무시하기로 마음 먹은 줄 알았는데?

그건 그렇지만, 아무래도 열불이 나서 한번 더 물어봤어.

새벽제비는 키득거렸다. 그는 몇 가지 문서를 로젠의 간이 책상에 놓고, 저 멀리서 받았다는 맑은 술을 덤으로 놓고 갔다. 로젠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걸 무시하고 자기가 만든 미궁 속을 헤메는데에 골몰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승천자도 살기 위해 노력을 해야했다. 희생양은 약할수록 무고할수록 좋다. 새벽제비가 나가고 펄럭이는 천막 문을 보다가 로젠이 중얼거렸다.

그래, 모두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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