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진은영 - "나는 도망 중" 에서 영감을 받다
내 집으로 천쪼가리를 뒤집어 쓴 커다란(사실 그렇게 커다랗지도 않은) 사람이 찾아왔을 때, 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집에서 몸을 녹이게 해줬지. 그 사람은 어설펐다. 문간에 몸을 부딛혀 하마터면 천이 벗겨질 뻔 했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 허둥거리는 꼴이 퍽 우스웠다. 사람은 의자에 앉았고, 나는 일단 차를 내어주었다. 손을 잡지는 않았다. 소매 밑에 칼을 숨기고 있을 테니까. 천을 쓴 사람은 천 안에서 빈 종이 한 장을 내주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래서 그 종이에 네가 돌아와야 하는 이유를 1번부터 적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네가 그리워서였다. 너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렇게 우리 사이에는 간극이 생겼고, 우리는 그 간극이 우리를 안정되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네가 그리웠다. 그 간극을 뛰어넘어 네 품으로 뛰어들어보고 싶어서.
두 번째는 네가 그리워서였다. 우리는 수많은 곳을 떠돌아다녔다. 대부분 임무 때문이었지만 너는 임무를 완수하기까지 나있는 수많은 곁길을 알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네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밟았다. 어느 날은 우리, 곁길에 앉아 밤하늘을 보고 있었지. 너는 믿기 힘든 진실을 말했다. 저 은하수에는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다고. 그래서 네가 그리웠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우주선 엔진을 태워 네가 말한 곳으로 가보고 싶었다.
세 번째는 네가 그리워서였다. 나는 너의 몰락을 보았다. 그것은 나의 몰락이기도 했다. 나는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섰다. 가끔, 아니, 어쩌면 자주 네 무덤에 갔다. 네가 기어들어가던 동굴 근처에 널 묻었다. 그 옆에서 며칠이고 앉아있었다. 답하지 않는 네가 부러웠다. 그래서 그 고요를 깨기 위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래서 네가 그리웠다. 이젠 우리에게 남은 기회는 다 떨어졌음으로.
네 번째는 네가 그리워서였다. 이유는 점점 사적이고 개인적으로 변해갔다. 어떨 때는 네가 만든 음식들이 먹고 싶어서였다. 어떨 때는 섹스가 되기도 했고, 어떨 때는 리즈와 함께 다시 놀러가고 싶어서. 어떨 때는 비밀을 말하고 싶어서였다. 물가가 점점 비싸져. 기후 위성이 고장나고. 오늘은 폭탄 세일을 했어. 잼에 초파리가 빠져 죽어있더라. 그래서 네가 그리웠다. 그래서 나는 네가 돌아와야하는 이유를 아흔 아홉 개 썼다.
백 번째는. 적지 않았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아흔 아홉 개 뿐이었다. 글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제출했다. 천을 뒤집어 쓴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종이는 반려되었다. 나는 이 일을 평생 후회할 것이다. 우리는 찻잔이 다 식도록 가만히 앉아있었고 사람은 시간이 되자 문 밖으로 나갔다. 아무래도 어설펐다. 사람은 나갈 때 문간에 이마를 찧었다. 천을 뒤집어 쓴 사람은 맨발이었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너는 항상 그랬으니까.
벌써 후회가 밀려온다. 지금 울부짖으면 네가 나를 돌아볼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악으로 버텼다. 나는 후회할 것이다. 너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기회를 아집으로 잃어버린 멍청이여야한다. 나는 너에게서부터 도망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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