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우스와 세 여신
1. 서문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세 여신의 어긋남을, 봉합을, 사랑을-.
들려주소서, 여신이여! 험한 땅을 지키기 위한 세 여신이 선택한 서로 다른 길을,
서로의 능력이 얽히던 지점을.
이것은 세 명의 여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2. 남겨진 자
리즈는 남겠다 했다. 하이옌은 묻고 싶었다. 열 살 짜리 아이에게. 이 땅에 남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냐고. 네 앞에 펼쳐질 수 없는 가시밭길과 사람들이 네게 던질 수없는 돌멩이를 설명하고 싶었다. 어차피 이 곳에 남은 것은 불행뿐……. 하이옌이 걸어온 길이기도 했다. 하이옌은 자신의 슬픔에 짓눌렸다. 무릎을 꿇고 싶었다.
리즈…….
하이옌은 무릎을 꿇지도 않았고 자신의 슬픔에 당하지도 않았다.
리즈, 다시 한번 물어보겠어. 정말 나와 같이 가지 않을거야?
엄마 로젠이 없잖아.
리즈는 하이옌을 쳐다보았다.
엄마가 없으면 난 쓸쓸해. 그 곳에 맛있는 앵도가 많다고 해도 난 여기 있을거야.
하이옌은 마음 속으로 울었다. 그러나 겉으로 내보이지는 않았다. 하이옌은 리즈의 또 다른 어머니니까. 그냥 이 시간이 무한대로 늘어나 엿가락처럼 이리 휘고 저리 휘며 세상을 휘감기를 바랐다.
시간이 없어.
그러나 멜이 외마디 비명처럼 말했다. 하이옌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하이옌, 내가 시간을 끌게. 리즈를 안전한 곳에 두고 네 일을 해!
하이옌은 고개를 끄덕이고 리즈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리즈를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부르며 달렸다. 사랑은 잔인해서, 잔인해서, 나는 울었네, 홀로. 하이옌은 멜이 그가 달아나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았음을 알고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하이옌이 리즈의 심장에 어둠을 박아넣은 이유를 리즈가 모르듯이 하이옌도 멜이 맨 마지막에 이렇게 중얼거렸음을 몰랐다.
나의 아이야, 내 자랑스러운 수호자-…….
3. 일어나소서 여신이여
일어나소서 여신이여 당신은 만들어진 자이니 당신의 신격까지도 만들어질 수 있나이다. 엘리자베스 알포트, 속칭 “리즈” 로 불리는 이 아이는 실험관에서 만들어졌다. 불법으로. 연구자는 엘릭스니와 인간의 합성물을 만들 생각이었다. 원래부터 아기를 만들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실수인건지는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왜냐면 연구자는 저항하다 사살당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살려야합니다. 아이는 죄가 없지 않습니까.
어머니로 각성했다거나, 애틋한 끓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하기 때문에. 도덕률, 그것을 로젠이 수호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아이라는 이름의 도덕을 한 손에 들고 다시 한번 말했다.
아이를, 살게 하십시오.
선봉대는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죽여야한다는 쪽의 손을 들고 있었다. 그래서 로젠에게 알포트를 데려갈 것을 제안했다. 로젠이 데려가지 않으면 처분할 계획이었다. 로젠은 아이를 데리고 회의장을 나갔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었다. 선봉대는 이후에도 로젠의 아이를 죽이려고 했다. 적극적인 움직임이었으면 로젠이 총과 칼로 응징했을 것이다. 선봉대는 약아빠지게 굴었다. 그들은 절차와 합리를 내세워 철저한 무관심으로 리즈를 대했다. 이를테면, 리즈는 아파도 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부탁해.
로젠은 선봉대에게 무언가를 따져야 할 때 새벽제비를 불렀다. 다행이 그 시점에 새벽제비는 하이옌이었다. 로젠은 하이옌에게 기괴한 사건을 말해주었다.
누가 리즈에게 상복을 보냈어.
하이옌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지한 척을 잘 했다. 로젠도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로젠이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상복이 아니었다. 그건 수의였다. 시체에게 입히는 물건 말이다. 그걸 갓난아이 몸에 딱 맞게, 리즈가 갖고 있는 네 개의 팔이 쏙 들어갈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 보냈다. 이건 악의적인 장난이다. 로젠은 새벽제비에게 리즈를 맡기고 정갈한 분노와 함께 집을 나섰다. 새벽제비는 로젠이 떨어뜨린 수의를 집어들었다. 그건 새벽제비가 슈일 때 보낸 물건이었다.
4. 정화의식
로젠은 오래지 않아 허탕을 칠 것이고, 돌아올 것이다. 하이옌은 서둘러야했다. 수의를 리즈에게 입히고, 왼손으로 금현을 뜯듯 손을 움직였다. 오른손으로 네 방위를 짚자, 녹색 불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하이옌은 자신이 군체 마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 까지는 꽤 오랜 비밀이 흘러야 했다. 멜은 주변을 둘러보며 로젠이 오는지 확인했다.
아프지 않아.
리즈가 불에 타는 동안 하이옌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왼손으로 금현을 뜯듯 복잡한 손놀림을 해보였다. 아니, 단순하기 그지 없는 손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왼손이 움직이자 리즈를 둘러싸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뜯겨져 나가 가슴 한복판에 구멍을 만들었다. 그 구멍 속으로 작은 심장이 박동하고 있었다. 리즈는 자신의 확률이 모빌이라도 된다는 듯 방긋방긋 예쁘게 웃으며 쳐다보았다. 하이옌은 지켜보았다. 아주 중요한 순간을. 로젠의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였다.
아프지 않아.
리즈의 가슴에 난 구멍에 생명이 스치던 그 순간, 하이옌은 오른손에 모아둔 어둠을 리즈의 심장에 박아넣었다. 녹색 불길이 요람처럼 리즈를 감쌌고, 곧 사라졌다. 리즈의 울음소리만 시끄럽게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괜찮아, 아프지 않아. 아프지 않아.
하이옌은 피곤해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리즈를 안고 얼렀다. 그는 등 뒤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은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악공일 뿐이란 걸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믿어준 것인지. 그건 알 수 없었다. 로젠은 집에 돌아와 난장판이 된 집과 울고 있는 리즈에 미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멜이 로젠을 부드럽게 달래며 새벽제비가 아이를 재미있게 하려다가 집에 불을 낼 뻔 했고, 그래서 아이도 새벽제비도 놀라 지쳤다는 거짓말을 했다.
너도 애처럼 그러기야?
로젠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앞뒤가 맞는 말은 로젠을 힘이 나게 했다. 그는 질서를 수호하는 자였으니까.
미안.
하이옌이 쉰 목소리로 답했다.
5. 어둠이 심겨진 아이
가끔가다 흉통이 리즈를 덮치긴 했지만 리즈는 건강하게 자랐다. 원인불명의 흉통을 진단해줄 의사가 있었다. 의사는 선봉대에게서 엄중한 주의를 받았지만 그 사람은 권력에 굴종할 정도로 나약하진 않았다. 로젠은 의사와 아주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님은 내가 왜 아픈지 알죠?
리즈는 대기실에서 다리를 달랑거리며 하이옌에게 물었다. 하이옌은 리즈의 머리에 꽂은 핀을 고쳐 꽂아줬다. 선봉대가 허락한 몇 안 되는 외출이었다. 리즈는 아래 팔 한 쌍을 단단히 묶고 평범한 어린이인 척을 했다.
우리 리즈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하이옌이 물었다. 리즈는 다리를 멈추고 깊게 생각했다.
그야……. 그게 새벽제비 선생님이니까.
아직 하이옌은 아이에게 자신의 본명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리즈에게라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이름을 얘기하면 올 혼란을 피하고 싶었다. 하이옌은 이제 지쳤다. 혼란을 잠재우고 자신을 이해시키는데 지쳤다. 그리고, 그러기엔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기도 했다.
내가 뭐든 알 것 같아보였니? 영광이네.
하이옌은 과장되게 인사했고 리즈는 까르륵 웃었다. 리즈가 손짓을 해서 하이옌의 귀에 속삭였다.
근데 선생님이 내 가슴에 초록 불을 넣지 않았어?
하이옌의 표정이 굳었다. 대답을 못하고 있는 어른을, 아이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른은 뭐든 다 아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위대한 존재니까. 리즈는 팔이 묶인 채 총총 일어나 하이옌의 얼굴을 보려고 걸음을 옮겼다. 진찰실에서 로젠이 나왔다. 리즈는 자신의 의문을 탐구하는 것을 멈추었다. 아이다운 집중력으로 리즈는 로젠에게 달려갔다. 다리가 바쁘게 움직일 때 마다 묶인 아랫쪽 팔이 움찔움찔 움직였다.
불편하니까 빨리 집에 가자.
로젠은 리즈를 안았다 내려주었다. 로젠은 리즈를 잘 안아주지 않았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안는 것은 새벽제비의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뭐해, 빨리 집에 가자.
로젠이 재촉했다. 하이옌은 그제야 잘 정돈된 표정으로 일어나 리즈에게 갔다. 리즈는 그러나, 눈치 챘다.
선생님 표정 너무 무서워.
하이옌은 뭐라고 답해야했을까. 무섭지 않아? 화 안 났어? 알 수 없었다. 하이옌의 고스트, 멜이 나와 리즈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었고 리즈는 다시 한 번 더 하이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멜의 이야기는 무서웠고, 결국 리즈는 비명을 지르며 하이옌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겁에 질려 우는 리즈를 보고 로젠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애보다 못한 존재들이라고. 멜은 그 소리가 꼭 듣고 싶었다는 듯이 경쾌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6. 나는 이 곳에서 살 것이다.
하이옌……. 혹은 슈, 혹은 새벽제비가 꾸민 일을, 로젠이 눈치챈 것은, 그가 사라진 뒤의 일이었다. 로젠은 미칠 것 같았다. 리즈가 납치된 사건. 그 사건은 몇 시간 만에 해결되기는 했지만, 리즈를 데리고 도망친 것은, 다름아닌, 새벽제비였다. 충격이었다. 로젠은 일상을 영위해보려고 했다. 새벽제비가 사라진 뒤 리즈의 수의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로젠은 다시 충격받았다.
어떻게, 어떻게 자기 아이를 갖고 장난을 칠 수 있어?
로젠이 소리쳤다.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이런 때에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 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나로 가만히 있었다.
우리를 사랑하기는 한걸까?
로젠은 산산히 부서졌다.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나 그 파편은 로젠을 다시 산산조각 부서뜨렸다. 로젠은 화가 풀릴 때 까지 화를 내야했다. 그래서 로젠은 자신을 수복했다. 증오의 대상도 다시 지었다. 그리고 산산조각 내고,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로젠은 화를 내야했고, 그리고 로젠은 수복됐으며, 그리고 로젠은…….
그만 하십시오. 진정해요.
무용한 말임을 알았지만 나는 로젠을 붙잡아 막을 수 밖에 없었다. 로젠이 내 팔을 쳤다.
이게 진정 할 일이야? 화내는 내가 이상한거야?
로젠의 파편이 나를 날카롭게 때렸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게 가족이니까.
리즈의 흉통, 뭐 때문이니? 그 새끼가 한 것이 맞지?
저는 몰라요,
리오! 리즈의 일이야. 그 새끼가 단순히 리즈를 훔치려고 했을 리 없어, 리즈는 그 새끼에게 뭔가 특별한,
특별한 아이였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듯이.
참으로 참으로 진실이었다. 나는 그것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밀린 만큼 앞으로 나아가 로젠을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로젠은 숨죽인 채 눈물을 흘렸다. 그 때의 나에게 조언을 한다면, 밀린 것 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로젠은 길게 울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람 없이 살아야한다.
7. 해결사
길고양이가 죽던 날이었다. 나는 왜인지 그 고양이가 죽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 생명체를 지키기엔 직감밖에 없었다. 쟤는 죽을 거야, 이 생각 하나로는 아무도 지키지 못한다. 전장에서 오랫동안 현을 뜯다보면 생기는 고질병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때 마다 슬픈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고, 로젠은 내가 지키지 못한 것들을 묵묵히 파묻어주었다. 길고양이는 그러나 전장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얘기 들었어. 고양이를 정성껏 보내주자.
리즈는 열 다섯이었다.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지는 고작 오 년 밖에 되지 않았다. 로젠의 염려와 달리 리즈는 바깥을 잘 견뎌냈다. 견뎌내지 못한 것은 바깥이었다. 리즈는 팔이 네 개 달렸고, 눈이 여러개란 이유로, 고작 그 이유 만으로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감내해야했다.
리오. 리오도 고스트가 있잖아, 고양이를 되살려줘.
리즈는 케이크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덧붙여 그다지 매력 없는 제안도 덧붙였다. 이를테면 한 달 간 노예처럼 부려도 된다던가. 리즈는 제안이 별로라 내가 고개를 저은 줄 알았다. 다른 제안을, 또 다른 제안을 제시하다 리즈는 지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새벽제비 선생님이라면 살려줬을거야!
리즈는 금지된 단어를 내뱉었다. 나는 순간 고개를 들고 로젠이 있는지 확인을 했다. 리즈는 눈물로 이글거리는 눈을 들어 나에게 쏘아붙였다.
선생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언니도 선생님을 미워하는거지?
아냐, 리즈.
거짓말. 다 거짓말쟁이야! 어른들은 다!
나는 이게 올바른 때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였다. 내가……. 리즈가 우는 것을, 내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이기심을 노래했다.
리즈. 새벽제비가 네 안에 어둠을 넣는 것을 봤어.
리즈는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바람에 양쪽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내가 아니면 흘리지 않았을 그 두 줄기의 눈물에서 나는 전장을 읽었다. 리즈의 삶은 항상 전쟁이었고, 리즈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탄압 속에서 스러져내렸다. 나와 로젠 어쩌면 새벽제비 만이 탄압에 저항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랑일 것이다.
로젠은 모르는 일이야. 새벽제비가 나에게 말해주었어. 잘 들어.
8. 고해소
나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하이옌이 행한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몰랐고, 그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서인지 하이옌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칼리오페.
하이옌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유독 지친 것 같았다. 나는 비밀이 도사림을 알아차렸다. 그는 말하면 안되는 것을 행하다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당신의 죄악을 털어놓으십시오.
나에게는 새벽제비를 용서할 권능이 없었지만, 죄를 털어놓는 행위는, 다 함께 탈출구를 찾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내가 그 날 했던 것을, 너도 죄라고 생각하니?
저도……. 라니, 로젠이 눈치 챈 것입니까?
하이옌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알 수 있었다. 하이옌은 하면 안 되는 것을 하고 있었다. 후회. 나는 그의 후회가 리즈에게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둠과 빛은 초인과적인 힘이었고, 하이옌도 자신도 아무튼 초인과적인 힘의 일부였다. 어느 순간부터 하이옌은 달라진 것 같지만. 두 사람은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로젠은, 로젠은 모르지만, 로젠은 자신이 연결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빛의 힘을 쓰면서도 그 힘에 깊게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로젠도 결국 수호자, 언젠가는 새벽제비와 자신의 작당모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저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 아이를 통해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네요.
리즈를 위해서 나는 나의 감상을 솔직하게 말했다. 하이옌은 잠시 침묵했다.
리즈를……. 신으로 만들어 저편으로 데려갈 것이다.
저편이요?
승천차원이라고 말하는 곳, 그 곳으로 말이다.
내가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달 공세 때 그런 말들이 오갔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아리송함보다 먼저 나를 덮친 것은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새벽제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이제 완연히 정말 완연히 미지의 것에 속했다. 역겨웠다. 이건 그냥 다른 것일까 아니면 나의 적을 바라봄일까. 나는 억지로 새벽제비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적이면 리즈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애의 몸 속에 힘을 숨겨두었다. 그 애의 몸에서 힘이 자라는 동안, 나는 그 애를 먹일 것이야.
몸 안에 어둠을 심었단, 말씀이시죠.
그렇단다.
그럼 누군가의 목숨을, 리즈를 위해,
공물로 바치는 것이지.
저도 돕겠습니다.
아니, 리오. 너는 도울 수 없단다. 이 이야기를 리즈에게 해주렴. 그 애는 신이고, 적당한 때가 오면 난 그 애를 데리고 신전에 갈거란다. 그리고 그 곳에는…….
하이옌의 통신이 잠시 끊겼다. 피드는 멀쩡했다. 그는……. 그는 울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하이옌이 자신을 가다듬고 다시 돌아와 말했다.
그 곳에는 앵도나무가 많았으면 한다. 리즈가 따먹을 수 있게.
8. 분노하소서 여신이여
……, 그래서?
리즈는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질문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이 타이밍이 아니었나.
지금 나는 여신이 될 수 있었는데, 내가 걷어찼단 말이지?
네가 걷어 차?
나는 납치 사건 때, 새벽제비한테 같이 안 가겠다고 했어. 새벽제비는 날 산딸기 덤불 밑에 내려주었고, 난…….
잠에……. 들었지.
나는 중얼거렸다. 로젠은 그 이후로 리즈를 과보호했다. 나와 리즈가 단 둘이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만 갔다. 리즈가, 안 가겠다고 해서, 납치 사건이 일개 소동으로 끝났다니. 신전에 가야 할 자가 이 땅에 머무르게 되다니. 그 때, 의문이 들었다.
리즈, 그럼 왜 안 가겠다고 한거야?
로젠. 로젠 엄마가 없잖아. 그 곳에는,
리즈는 눈가를 박박 문질렀다. 눈가가 짓물러 발갛게 부풀었다.
이젠 어떻게 돼도 상관 없어, 엄마는! 난 신이야. 난 여신이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거야. 내가 원하는 것을.
그 이후로 몇 번 소동이 있었다. 리즈는 하이옌이 남긴 어둠의 힘을 어떻게 꺼내 써야 하는지 몰랐다. 그 힘으로 뭘 하려고 했을까? 어쩌면 죽은 고양이를 되살릴지도 모르지. 어쩌면 자신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두려움을 타파할지도. 홀로 다른 차원으로 날아가 버릴 지도 모른다. 그건 조금 쓸쓸할 것 같았다. 리즈는 옥상에서 떨어지려고도 했고,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명상을 하기도 했고, 슬픔의 서를 몰래 읽기도 했다. 슬픔의 서는 내가 전해준건데, 부주의로 로젠에게 들키게 되었다.
그러니까.
로젠이 슬픔의 서를 한 페이지도 남기지 않고 삭제하면서 말했다.
갈아 처먹어도 시원찮을 새끼 때문에 리즈에게 삿된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그 다음, 로젠은 리즈의 심장 초음파 사진을 가져와 꼼꼼히 살펴보았다.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게 생긴 심장이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것도 그의 인지에서 비롯된 진단이었다. 현실에 기반한 인지말이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진단하는 것은 대부분 인과적인 것에서 비롯하므로, 초인과적인 물체를 본다 해도 현실에 기반한 눈빛으로 그것을 해부할 것이다. “엘릭스니와 인간의 혼합체이니 당연히 심장이 다르게 생겼을 것이다” 라는 편견 안에서 의사는 최선을 다 했다.
힘들게 생기긴 했어요.
의사가 말했다. 로젠이 의사의 말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힘들게, 생기긴, 했어요.
그 박자에 맞춰 리즈의 초음파 사진을 짝짝 찢어버렸다. 로젠은 그리고 자리에 허망하게 앉아 천장을 보았다. 그는 이 가정의 수호자였고, 이 가정의 가장이었고, 어머니였다. 로젠은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누군가가 로젠의 심장에 면도날을 하나하나 집어넣고 있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지고한 고통을 남기고 싶은……. 새벽제비가.
난 아무것도 몰랐어.
로젠이 중얼거렸다.
난, 아무것도, 몰랐다고.
로젠이 박자에 맞춰 발을 굴렀다.
난! 아무것도! 몰랐다고!
로젠은 어린 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었다. 그건 어머니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나는 이전처럼 로젠을 말릴 수 없었다. 로젠은 산산히 부서졌다. 스스로를 이전 상태로 복구할 수 없을 만큼 부서지고 말았다. 리오는 눈을 살짝 내리 깐 채 악을 쓰는 로젠을 볼 수 밖에 없었다.
9. 당돌한 계획
로젠은 그 날 이후로 평소처럼 행동하긴 했지만, 태도가 살짝 달라졌다.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로젠은 더 이상 리즈와 나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리즈도 그걸 느낀 것 같았다. 나는 리즈가 불안해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10. 용과 거래하다
리즈는 로젠의 정신이 나가 있는 틈을 타 로젠의 방을 털었다. 분명 고스트 말고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 것이었다. 나는 신이니까, 나의 능력을 일깨울 수 있는 진기한 유물이나, 죽은 자를 되돌려오는 리프의 성물 같은 것. 리즈가 찾은 것은 먼지구덩이를 굴러다니는 허물……. 이었다. 리즈는 더럽다고 생각해서 버리려 했다. 쓰레기가 말했다.
나는 너의 욕망을 본다, 오 나의-…….
쓰레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곧 웃음소리가 리즈의 머릿 속을 한가득 채웠다. 웃음은 불쾌할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리즈는 당혹스러웠다. 하이옌은 리즈를 기이한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리즈에게 기이한 것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리즈는 이런 것이 처음이었다.
오 나의 여신이여……. 이런 미천한 용과 거래를 하시다니.
리즈는 자신이 균형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음을 알아챘다. 그 선을 잘못 넘으면 자신의 완패로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잃는 정도로 끝날까? 한번 해보는 수 밖에 없었다. 리즈가 물었다.
용이여,
곧 적절한 단어를 찾았다.
아함카라여,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리즈는 최대한 허세를 부렸다. 아함카라는 자신이 에오아라고 말했다. 리즈는 에오아에게 빌 소원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리즈는 균형 위에 있었다. 아함카라는 그 균형을 탐하는 존재이다. 리즈의 열 다섯번째 생일이 다가온다.
나는 나에게 유예기간을 주려고 한다.
유예기간은 며칠 전 시험에 나온 단어였다. 리즈는 명석하게도 그 단어를 알았지만, 리즈를 두려워하던 영어 선생님은 그걸 칭찬해주는 것을 잊어버렸다.
오, 좋다. 이렇게 된 이후로 오랫만의 소원이구나.
그러므로 에아오여-……. 네 소원은 뭐니?
에아오는 또 웃었다. 리즈는 보라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함카라에게 소원을 묻는 이라니! 물론 꿈의 절멸이다……. 그들이 스스로의 꾀로 몰락하는 것을 보고싶지만,
깊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마치 리프에서 일어난 재난과 재해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래 전의 원한이라 더는 원하지 않아도 되겠군.
리즈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아함카라와 거래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스케일이 큰 것 같았다. 살짝, 아주 살짝 겁을 먹은 리즈는 알겠다며 비늘을 다시 상자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 때 아함카라가 말했다.
나에게 몸을 만들어다오, 그러면 공정한 거래를 해주겠다.
리즈는 죽은 길고양이가 생각났다. 고양이의 영혼을 치우고 다른 것의 영혼을 넣는 다는 것이 께름직했다. 영혼을 믿던 안 믿던 그건 께름직한 일이었다. 그러나 리즈는 행하기로 했다. 리즈는 하루 전 묻은 길고양이의 무덤을 파헤쳤다. 그리고 그 안에 에아오가 깃들게 했다.
너의 소원은 보류한다 했던가.
리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에아오는 몸에 묻은 흙을 뒷발로 털어냈다.
5일 뒤 오겠다.
에아오는 담장을 넘어 사라졌다. 리즈는 익숙한 흉통을 느꼈다. 그러나 이건 어둠이 가슴 안에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원. 그것 때문이었다. 리즈는 자기가 무엇을 빌어야하는지 알았다. 그러나 언어가 문제였다. 리즈는 언어가 자신을 명확히 드러낼 때 까지 소원을 쪼고, 쪼고, 또 쪼았다.
11. 칼날이 향하는 곳
리즈의 열 다섯 째 생일은 엉망이었다. 리즈는 내내 뚱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로젠과 내가 노래를 불러주든 선물을 내밀든 상관하지 않았다. 로젠은 리즈가 결국 이상한 것에 빠졌다고 상심했다. 리즈의 책상은 알 수 없는 지도로 가득 뒤덮였고, 책장에는 어둠침침한 주술서 같은게 꽂혔다. 모두 가짜였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난……. 수호자니까.
난 새벽제비 선생님을 다시 불러올거야.
리즈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자는 승천차원으로 갔어. 에리스 몬과 마라 소프만 아는 그 공간으로 말이야.
에리스 몬이랑 마라 소프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 심장엔 그 공간이 심겨져있잖아.
리즈. 누가 부추겼어?
안 부추겼어.
누군가 네게 바람을 넣긴 했단 말이구나.
바람도 안 넣었어.
그럼?
그냥, 어느 날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기 전에 한 마디 했다.
네가 뭘 할지 얘기해야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새벽제비를 불러온다. 그러나 어떻게? 나는 새벽제비가 부렸던 어둠의 힘을 생각했다. 현을 뜯듯 작고 정제된, 그러나 복잡한 손짓으로 리즈의 심장 주변부를 경우의 수로 분해했다. 그리고 구멍을 뚫었다. 아마 아이의 흉부보다 더 크고 더 복잡한 곳에도 적용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현실과 이차원이라던가……. 승천차원은 광활하다. 지도도 없다. 흔히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라 소프는 사라졌고, 에리스 몬은 다가가기 쉬운 인물은 아니다. 그러다 문득, 리오는 생각했다.
내가 네게 새벽제비 얘기 해준 것 기억하지?
나는 리즈를 다시 한번 떠보았다. 리즈는 서글픈 표정으로 고민을 했다.
사실, 나도 좀 의문이었는데.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을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심장 대신 어둠의 힘이 들어있는 것이니까. 나는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한테 말하지 마.
아니, 이건 로젠에게 말해야 해.
싫어. 싫어, 싫어, 절대 싫어.
고집 부리지 마, 리즈. 너도 누군가에게서 들었잖아?
아함카라 에오아에게 말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겁먹었다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면서, 나를 떠나갔던 모든 것들이 돌아왔으면 해. 아함카라 에오아는 주둥이를 벌리고 그 소원을 음미했다.
너를 떠나갔던 것들은 그러나 너만이 돌아올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뭐?
그래, 머리 좀 굴려보길 바란다, 오 나의 미숙한 여신이여.
에아오는 그렇게 폴짝폴짝 담을 넘어 사라졌고 리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생각했다. 내 안에 있는 것이 어둠이면 새벽제비가 나를 통해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게 아닐까? 에아오는 공정한 거래를 하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만이 떠나간 사람을 데리고 올 수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리오가 말했다.
몇 년 전에, 어쩌면 나와 로젠이 죽을 수 있을거라고 얘기한 거 기억 해?
리즈는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나는 리즈의 고개를 억지로 잡아 돌렸다.
나랑 로젠이 네 안의 어둠, 그리고 새벽제비를 해결할 수 있어. 왜냐면 우리는 그 땅의 본래 주인……. 오릭스를 죽였으니까.
리즈는 오릭스라는 이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여중생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답해야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 땅의 주인이 사라졌대도 뒷 동네 마실 가듯 새벽제비의 손을 잡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진 않을 것이다. 리즈는 생각했다. 소원과, 원망과, 자신의 힘이 뒤섞여서 리즈는 단단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정했다. 여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들을 뛰어넘을 것이다.
12. 그들은 모르는 이야기
멜을 잃었다. 앵도나무는 근처에 없었기에 급한대로 새벽제비는 리즈를 산딸기 나무 밑에 놓았다. 그리고 아이를 현혹시켜 잠에 빠지게 했다. 곧 깰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없겠지. 새벽제비의 눈에는 현실이 존재로 보였다.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걸 들어내기 위해선 존재를 낯설게 하면 된다. 하이옌은 수 없이 연습한 어둠의 기술을 펼쳤다. 현실의 장막을 낯설게 해 그걸 그 자리에서부터 뜯어내는 것이다. 천천히 왼손이 움직이고, 오른손에 모인 어둠의 힘은 현실에 금부터 그었다. 깨졌다. 해냈다. 현실은 탄력성이 크기에 곧 이 틈을 닫을 것이다. 새벽제비는 승천차원으로 들어갔고 지독한 냄새에 잔기침을 했다. 현실이 조각나 떠다니고 있었다. 하이옌은 소리에 집중했다. 저 멀리서 굉음이 들렸다. 하이옌은 두 팔을 펼쳐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날아가 신이 자신을 보도록 연기했다. 다친 새처럼 절뚝이며 후드득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신이 손을 들어 하이옌을 내리치자 하이옌은 멀쩡히 날아 또 그만치에서 다친 새를 연기했다. 다시 한 번, 또 다시 한 번, 약이 오른 신은 다른 방법으로 하이옌을 내리치려고 했다.
로젠.
로젠은 리즈를 안고 행복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도덕의 수호자는 이제 어머니가 되어 신을 안고 어르고 있었다. 그는 어느 때 보다 따사로왔고 너그러웠다. 하이옌은 햇살같은 미소가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음을 알았다.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어서.
하이옌이 말했다. 로젠은 뭘 그러냐는 듯이 눈썹을 한껏 내렸다. 과장되게 슬픔을 표시했다. 하이옌은 장난이었다는 듯이 웃었다. 역시, 말할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이옌의 잘못이었다. 그는 너무 깊이 어둠에 대해 파고들었다. 그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존재를 신들이 조금씩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는 신들이 비열함을 알고 있었다. 가장 약한 곳부터 파고 들 것이다. 엘리자베스 알포트. 하이옌은 리즈를 신으로 만들었다. 신들이 리즈를 잡아먹는다면, 그들은 내부로부터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리즈만 살아남겠지. 그러나 그런 강력한 신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 필연적으로 누군가가 눈에 띄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없는 평소에, 언제나 아이들을 돌봐주잖아, 그치? 그래서 내 마음을…….
하이옌이 두서없이 말했다. 로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랄까, 리오는 아직 미숙해도 성인이야. 수호자라고.
로젠.
하이옌이 리즈와 로젠을 모두 안았지만, 다음에 할 말을 꺼내지 못했다. 로젠. 그렇게 하이옌은 두 사람을 안아주고 자리를 떴다. 로젠은 술 마셨냐고 농담을 했지만 하이옌은 무시했다. 하이옌은 이 땅에 미련을 남겨버렸다.
그거로구나.
잔인할 정도로 자애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하이옌은 잡혀 신의 화가 풀릴 때 까지 무참히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그게 백 년이 될지, 이 백 년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리는 부러졌고, 내장은 헤집어졌으며, 두 눈은 먼 지 오래였다. 그거로구나. 신은 새벽제비와 로젠의 연결고리를 알아차렸다.
13. 신격
로젠이 위험해.
내가 리즈의 귀에 속삭였다. 로젠은 망가지고 무너져 더 이상 수호하지 못하게 되었다. 리즈와 내가 로젠을 지켜야했다. 리즈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내가 로젠 엄마를, 왜?
그야 로젠은 네 양어머니시니까. 그러나 그게 당연한 이유가 되나?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리즈는 새벽제비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로젠을 미워하는 지경에 이르르고 말았다. 로젠의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젠이 새벽제비에 대해 좀 더 너그럽게 굴었다면 리즈가 집착할 일도 없었겠지.
왜 로젠에게 말하지 않구요?
내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새벽제비는 그래야 로젠이 우리를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얘기했다. 과연 그의 판단이 맞았을까? 로젠은 요 며칠 간 미친 사람처럼 밤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곱슬이라 배로 헝클어진 머리와 그 안에서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는 귀신 들린 사람 같았다. 선봉대는 로젠의 위업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로젠에게 이상한 것이 발견된다면, 가차없이 추방 될 것이다. 선봉대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양해를 구하며.
로젠이 미워?
나는 뻔한 질문을 했다.
미워서 버리지 않고는 못 버틸 정도로?
리즈는 나를 밀쳤다. 그리고 골이 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나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노래를 하는 것 말고 쓸모가 없다. 나는……. 나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난 리즈의 침대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나는 기계다. 엑소다. 그러면 이 요동치는 감정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노래하소서…….
아주 먼 옛날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먹먹한 가슴으로 나머지 가사를 허밍으로 부르다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로젠은 왜 이상해 진 것일까? 나는 로젠에게 닥쳐온 이상현상을 모르진 않았다. 오히려 그걸 감추는데 적극적으로 굴었다.
로젠. 나에겐 털어놔요.
고해였다.
나는 사랑하게 되었단다, 신을.
로젠이 황홀하게 말했다. 정말로 신을 사랑하게 된 걸까? 우리는 그 신의 오라비를 죽이고 그의 논리 속에서 퇴패시켰는데? 로젠은 신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신은 로젠에게 왜 다가온 것일까. 나는 그걸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다. 우리는 적대적인 지성체들의 표적이 되기 쉬우니까. 이유 없어도 그렇게 표적이 될 만한 위치니까. 우리는……. 영웅이니까, 학살자니까.
리즈! 잠깐만, 리즈!
로젠 엄마 때문이라면,
새벽제비가 위험해.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어. 그래서 로젠이, 로젠이…….
나는 리즈가 알아듣기 쉽게 노력했지만, 리즈는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긴박함은 확실히 전달이 되었는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14.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심장
계획은 없었다. 리즈의 심장을 통해 새벽제비를 구출한다. 새벽제비를 구하고 나면, 그가 신에 맞서 나와 싸울 것이다. 트로이메라이가 죽어서 얼마나 큰 전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로젠을 구해내고 싶었다. 절대 로젠을 휘어잡은 마수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넌……. 원한다면, 로젠과 화해하기 싫다면…….
무슨 소리야! 여고생의 말을 믿어?
리즈는 울상을 지었다. 그럼 이제 첫번째 문제를 풀면 됐다. 리즈의 심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리즈는 나에게 사실을 고백했다. 자신이 아함카라와 만난 적이 있다고. 에아오라는 아함카라가 리즈가 스스로 열쇠를 쥐고 있다고 말했다고.
시동은 걸려있다는 뜻인가.
리오 언니, 엄마한테 그거 말 했어?
뭐를?
내 가슴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아니.
내 심장이 좌표라면 어떡해?
그러니까…….
나는 더듬거렸다.
그러니까, 네, 심장이……. 새벽제비가 있는 곳으로 연결된다, 고?
그러고보니 새벽제비는 신전으로 가 리즈를 신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새벽제비가 말한 신전이, 그 곳으로 가는 길이, 리즈의 몸에 심긴 어둠 속에 있다면?
안돼. 절대 안돼. 다른 방법으로 좌표를 구하자.
로젠 엄마는?
리즈가 다급하게 말했다.
선생님을 이 땅으로 돌려놓아야 로젠 엄마가 살 수 있다며.
비단 그 방법만이 있는 게 아냐! 엘리자베스, 넌 수호자가 아냐!
난 선생님을 믿어.
리즈가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선생님을 믿어, 선생님이 날 해치려고 이런 걸 계획하지 않았을거야. 그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리오는 리즈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네 심장을 여는 상황까지 새벽제비가 계획했을 것 같냐고. 리즈는 겁에 질려있었다. 심장을 찌르면 웬만해선 죽는다는 걸. 리즈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엄마를 구하자.
나도 울고 싶었다. 나도 리즈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새벽제비를 믿기 때문에 벌이는 위험천만한 모험에 뛰어들고 싶었다. 대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안에 들어간 바다 짠내와 비오는 날의 습함을, 온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라며.
15. 칼날이 박히는 곳
혹시나 주술적으로 효과가 있을까 하여 나는 리즈에게 로젠의 단검을 건넸다. 리즈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을 받았다. 심호흡을 세 번 하고, 리즈는 자신의 옷자락을 헤쳐 맨가슴을 드러냈다. 칼 끝이 흰 피부에 닿았다. 작게 핏방울이 맺혔다.
언제라도 아니다 싶으면 말해. 이 방법만 있는 게 아닐거야, 리즈.
내 목소리도 리즈의 손만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리즈는 그대로 굳어서 울었다.
못 하겠어, 언니……. 언니. 나 못 하겠어.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리즈에게서 칼을 뺏으려고 팔을 뻗었다. 칼이 날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둘 다 칼을 놓은 적이 없었다. 리즈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숨이, 숨이 막혀! 리즈가 끅끅거리며 손으로 목을 미친듯이 긁었다. 늙은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것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리즈가 먼저였다.
안되지, 안돼. 그 자는 나에게 패배했고, 나는 그 자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단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은 적 있었다. 리즈를 어떻게든 풀어주기 위해 나는 리즈 앞에 섰다. 나는 타이탄이다. 나는 방벽이다. 그러나 빛의 힘으로 방패를 만들어보아도, 방벽을 세워봐도, 리즈는 질식해 죽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 자의 가족이 아니다. 너는 가족에 대해 아나?
오, 너희만큼 아주 잘 알지.
아니. 넌 아무것도 몰라.
바깥에서 호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었다면 내 딸에 칼을 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늙은이의 실루엣은 스르륵 사라졌고, 로젠이 그 환영을 넘어 창문으로 허겁지겁 들어왔다. 리즈는 콜록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로젠을 보고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랐다. 나도, 아니 내가 이 사태의 원흉이니까. 리즈가 콜록이다 로젠에게 헐떡이며 말했다.
엄마, 로젠 엄마, 새벽제비가…….
알아.
로젠이 속삭였다.
내가 길을 알고 있어.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럴 필요 없다, 리즈. 내가 다 막아낼게.
그 말을 증명하라는 듯이 검의 환영이 로젠을 꿰뚫었다. 로젠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되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타들어가는 고통을 견뎌냈다.
여긴 나한테 맡기고 가렴, 얘들아.
로젠이 이빨을 꽉 깨문 채 말했다. 리즈는 소리쳤다.
안돼! 우리 얘기해. 새벽제비 선생님도 그렇고, 로젠 엄마도 그렇고, 다 얘기를 안 해, 난 그게 너무 싫어.
리즈가 나와 로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는 로젠에게 꽂힌 환영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신호탄이었다. 내 동생이 죽을 수 있었는데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원했기 때문에. 그걸 막는 것이 수호자이자 언니이자 어른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로젠과 리즈의 몸이 맞닿았고, 검의 환영은 리즈의 등 뒤로 뻗어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소리가 나며 검이 현실에서 분리되었다.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렸고 로젠과 리즈는 서로를 껴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선봉대를 통해 구급차를 불렀다. 다행이 두 사람 모두 멀쩡했다.
새벽제비 선생님은 어떻게 된걸까?
리즈가 침상에서 물었다. 나는 리즈의 심장에 귀를 대어보았다. 여전히 심장 박동이 아닌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언젠간 돌아올 것 같아. 네가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이겠지.
리즈가 정정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하이옌도 이 안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을.
16. 발문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뭔가 이상해서 악기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다듬을 필요도 없는데 목을 다듬었다. 다시 한번 악기를 뜯었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세 여신의 어긋남을, 봉합을, 사랑을. 들려주소서, 여신이여! 험한 땅을 지키기 위한 세 여신이 선택한 서로 다른 길을, 서로의 능력이 얽히던 지점을. 뒷 부분은 허밍으로 부르며 곡을 만들었다.
언제나 네 곡이 좋다고 생각했다.
오랫만에 들어 낯선 목소리였다. 리오는 하이옌을 쳐다보았다. 하이옌은 리오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의 눈은 완전히 멀었다. 그는 결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항상 자신의 발 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야 뭐, 하는게 노래하는 재주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해야지 않겠습니까?
리오는 장난을 쳤다. 하이옌은 슬픈 표정으로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희게 띈 눈을 리오의 눈에 맞췄다. 리오는 놀라 굳었다.
너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칼리오페.
새벽제비가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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