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른 (단편)

[명헌태섭] 당신에게 사랑을

* 명헌이 눈물 많고 태섭이 사랑 많은 명태가 보고 싶었다.

** 근데 사실 진짜 거두절미하고 좆됐다뿅!!! 을 외치는 이명헌이 보고 싶었는데 머… 그렇게 됐습니다.

***

[ 형, 오늘 언제 와요? - 태섭]

[ 미안뿅 갑자기 회식이 잡혀서 오늘 늦을 것 같아.]

[ 아 그래요? 그럼 가야지. 다녀와요. - 태섭]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게릴라성 회식이 종종 잡히는 경우가 있다. 오늘이 그런 경우였다. 명헌은 항상 그랬듯 먼저 퇴근해서 저를 기다릴 태섭에게 허락을 구했다. 태섭은 대부분 갑작스러운 회식에도 웃으며 허락했다. 회사 일을 마치고 일어나는 직장 동료들을 따라 정장의 겉옷을 움켜쥐는 명헌의 약지에 은빛의 결혼 반지가 반짝 빛났다.

***

여기저기 소란소란. 시끌시끌. 명헌은 제게 다가오는 잔에 마주 잔을 들어 짠 하고 망설임 없이 술을 들이켰다. 직장 동료들은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갑작스러운 회식이 스트레스가 될 법도 한데 그렇게 느껴진 적 없을 정도로 동료들과의 사이가 좋았다. 크으! 맛 좋다! 하며 깨끗하게 비운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맞은편 동료가 식당 벽에 붙어있는 전자시계를 본다. 그러다, 어? 하고. 명헌을 본다. 명헌은 잔이 빈 옆자리 동료를 위해 소주를 따라주고 있었다.

"이 팀장, 그러고보니 오늘 태섭씨 생일 아니야? 용케 회식을 보내줬네. 보통 이런 날은 같이 있자고 하지 않나?"

"어?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태섭씨 원래도 이런 깜짝 회식 허락 잘 해주긴 했는데 오늘 생일이라 하지 않았어요?"

"……."

좆됐다뿅!!!!

명헌이 희게 질린 얼굴로 동료를 따라 벽에 붙은 전자시계를 홱 소리나게 돌아보았다. 시계에 찍힌 숫자를 보는 명헌의 눈이 크게 확장된다. 8월 1일 00:47 에서 00:48로 넘어가는 시간에 숨이 콱 막혔다. 명헌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워낙 급하게 일어난 탓에 가득 채워졌던 소주잔이 넘어져 테이블 위를 굴렀다. 의자 다리에 제 다리가 꼬여 버벅이다 자리에서 벗어난다. 명헌의 분위기에 장난스러움은 없었다. 명헌은, 이명헌 팀장은 미묘한 뿅체에 간혹 엉뚱한 말을 하긴 했지만 됨됨이가 좋고 일을 하는데 있어 직급에 맞는 운영을 잘했다. 운영을 잘했다고 하는 게 뭔가 애매한 말인 것 같지만 어쨌든 잘했다. 명헌이 회사에 들어온 이후 직장 내에서 트러블도 상당수 줄었고 거래처와의 거래도 수월했으며 사내 커플은 줄줄이 결혼해 부부가 나란히 직장생활을 하는 등 근속 상태도 상당히 좋아졌다. 그 모든 것이 정말로 명헌 혼자의 힘은 아니겠지만 아래 직원과 상급자들 사이의 조율을 잘한 덕분에 명헌은 직장 내에서 입지가 탄탄하다 못해 인기가 많을 정도였다. 항상 여유있고, 항상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던 명헌이 다급한 모습을 보인다. 결혼한 와이프의 생일을 진심으로 잊어서 급하게 일어난다. 웃고 떠들던 회식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하게 가라앉았다.

"어, 음…, 태섭씨한테 연락 넣어볼까?"

명헌에게 회식이라는 이름의 손을 내밀었던 동료가 삐질거리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헬쓱해진 얼굴로 그를 보던 명헌이 침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뿅… 잊은 건 내 불찰이니 내가 해결뿅……."

명헌이 회사에 유명한 만큼 태섭도 유명했다. '그' 이명헌 팀장과 결혼한 남자이기도 했고, 간간히 열리는 부부동반 회식에 대부분 참여하여 분위기도 잘 띄우고 싹싹해서 명헌을 좋아하는 만큼 태섭을 좋아하는 직장 동료가 많았다. 워낙 좋은 인성의 부부였다보니 직장 동료들 중에서도 태섭과 연락처를 교환한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휴대폰 메신저에서, 태섭의 생일을 스치듯이 봤겠지. 그러니 명헌에게 태섭의 생일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할 수 있는 거였고. 아무튼. 어찌됐든. 명헌은 좆됐다. 명헌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회식장소를 떠났다. 회식하면서 술을 입에 대는 정도로 가볍게만 마시는 명헌을 알았지만 그래도 음주는 음주라, 저마다 음주운전을 걱정했으나 아무도 명헌에게 대리를 부르거나 택시를 불러서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표정을 본 직원이라면 누구든.

"……."

"……."

"…우리도 다음에 팀장님 통해서 태섭씨한테 뭐라도 보내드려야겠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팀장님이 태섭씨 생일을 까먹은 건 좀 의외긴 하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생일선물 고른다고 인터넷 뒤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선물이라도 준비됐으면 그나마 다행일텐데요……."

"어……."

모두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최근에 들어온 신입 직원을 향했다. 신입이 우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팀장님이요… 부인분 선물 뭐 해야할지 모르겠다며 행복한 고민만 하시고 어제까지 못 고르셨는데……."

…….

모두가 조용히 명헌에게 위로를, 혹은 명복을 빌었다. 한동안 명헌을 게릴라 회식에 부르지 말자는 암묵적인 합의도 했다.

***

직장 동료들이 암묵적인 합의를 하든 말든 명헌은 미친듯이 악셀을 밟고 묘기에 가까운 운전기술을 뽐내며 엉망진창으로 집까지 달려왔다. 단속하는 경찰이 없어서 진짜로 다행이었다. 몇 잔 마시지 않았지만 명헌은 분명 음주운전을 했다. 태섭이 걱정하기도 했고. 그치만뿅. 태섭의 걱정은 뒤에 받으면 되지만 태섭의 생일을 지나친 자신은 걱정도 받을 자격이 없다뿅!! 헐떡이며 명헌은 숨 돌릴 틈도 없이 현관문 앞까지 단숨에 달렸다. 

10년을 만났다.

10년 중 결혼한지 4년하고도 7개월 차.

명헌은 상당히 동요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10년을 태섭과 만나오면서 단 한번도 생일을 놓쳐본 적이 없으니까.

굳게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는 명헌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미친듯이 돌렸다.

"아……."

미친듯이 돌리려던 시뮬레이션이 삽시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회사에서 그렇게 잘한다던 운영도 지금 상황에선 필요 없었다. 운영은 개뿔. 지금은 믿지도 않는 신에게 빌어야할 판이다. 제발. 제발 태섭이 화내지 않게 해주세요. 아니, 화내도 좋으니까 서운하다고 눈물 보이지 않게 해주세요뿅. 진짜 제발. 제발뿅. 도어락으로 향하는 명헌의 손 끝이 사정없이 떨렸다. 긴장과, 헐떡임으로 인해 잔뜩 마른 목구멍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명헌은 도어락에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에도 도어락의 비밀번호가 바뀌어있으면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했다. 선명한 입구컷을 당하면 탈탈 털린 멘탈로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태섭에게 전화로 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기분이 풀린다면 응당 그렇게 할 것이다. 명헌은 정말이지, 태섭의 서운해하거나 우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비번 바뀌어 있으면 그냥 나가뒤져야겠다뿅. 

명헌은 진심이었다.

비장한 각오를 한 명헌의 손 끝이 도어락 키패드에 닿았다. 긴장 어린 시선이 도어락에 내리꽂힌다. 숫자 4개를 꾸욱꾸욱, 천천히 누른다.

4…7…4…7…… 

삐리릭

도어락이 손쉽게 풀리고 주인을 맞이한다. 명헌이 자신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그제야 골랐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문을 열었다. 모든 불이 꺼져 새카만 어둠속의 집이 명헌을 반겼다. 

"……"

현관 안으로 발을 들인 명헌이 잠시 침묵했다. 맥이 풀릴 정도로 쉽게 열린 도어락까진 괜찮았는데. 어둠만 존재하는 집의 풍경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 앞이 캄캄한 게… 앞으로 펼쳐질 내 미래인가뿅…….

집은 왜 조용한지, 태섭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던 명헌이 순간 숨을 들이켰다. 거실에서 자고 있으면 어떡하지? 거실 불을 켜면서 태섭을 깨우기라도 한다면? 명헌이 멈칫하던 걸음을 천천히 거실등이 있는 곳까지 옮기기 시작했다. 태섭이 거실에 있으면… 일단 무릎부터 꿇자뿅. 명헌이 익숙한 벽을 더듬었다. 눈을 질끈 감고 거실의 불을 켠다. 환하게 비치는 불빛이 명헌의 눈꺼풀을 찌르고 들어와 시야를 붉게 비추었다. 주위가 조용했다. 닫힌 눈꺼풀 위로 비쳐지는 붉은 장막을 천천히 거두어낸 명헌의 시야로 식탁 테이블이 잡혔다. 정확히는,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 상자에. 

아.

명헌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천천히 테이블에 다가간다. 단정하게 놓인 개봉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케이크 상자. 나란히 놓인 빵칼과 태섭의 나이를 알리는 초. 마주보는 자리 한쪽은 접시와 젓가락, 다른 한쪽은 접시와 포크가 놓여있었다. 눈물이 쏟아지는지도 모른 채 명헌이 케이크 상자 옆에 놓인 고급스러운 티켓봉투를 집어들었다. 안을 열어 티켓을 확인한다. 

[7월 31일 오후 7시 40분 송태섭님 예약 - VIP (2인)]

좆됐다.

이명헌 진짜 좆됐다.

예약권을 쥔 명헌의 손이 떨렸다. 생일의 주인공은 태섭이었다. 그런데 생일 케이크도, 식당도, 모두 생일 주인공인 태섭이 준비하게 만들었다. 태섭의 목소리가 명헌의 머릿속을 왕왕 울렸다.

'형 바쁘잖아요. 우리 집에서 할 수 있는 생일 축하는 간단히 하는 걸로 해요.'

회사에서 공공연하게 알려져있는 이미지. 송태섭을 사랑하는 사랑꾼 이명헌. 그러나 명헌만 사랑꾼이 아니었다. 명헌이 태섭을 사랑하는 만큼, 태섭 역시 명헌을 사랑하는 사랑꾼이었다. 케이크 상자와 예약권을 번갈아보는 내내 명헌의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케이크 상자를 보자마자 터져나온 눈물은 끝도 없이 흘러내려 넘치고 있었다. 제대로 입지도 못한 정장 위로, 발등으로, 발 사이의 거실 바닥으로 뚝뚝 흐른 명헌의 눈물이 흩어졌다. 

왜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생일을 잊은 걸까. 왜. 왜?

명헌은 어느샌가 직장생활과 게릴라성 회식에 너무 익숙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갑작스레 생긴 회식에 항상 태섭을 먼저 떠올리고 꼬박꼬박 연락해 허락을 구하던 것이 점차 뜸해진 자신을 발견했다. 갑작스런 회식 소식을 전해들으면, 항상 웃으면서 조심히 다녀오라고 하던 연인이 떠올랐다. 

"진짜 미쳤다뿅……"

분명 지난주까지만 해도, 지난주에 선물을 고를 때까지만 해도 태섭과 웃으면서 무슨 선물을 갖고 싶은지, 갖고 싶은 게 따로 있는지 대화를 나누었었는데. 당신이 주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요, 하며 사람 좋게 웃어보이는 태섭이 너무나도 행복해보이고 사랑스러워서, 몇 번을 그 입술에 입을 맞추었었는데. 인터넷에서 태섭이 좋아할만한 선물을 고르는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들이었는데.

생일 당일에 갑작스럽게 잡힌 회식 소식을 전해듣고, 그걸 또 허락하면서 혼자 케이크를 준비하고 레스토랑 예약권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예약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혼자 이 자리에 앉아서 태섭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쥐 죽은 듯 조용하고 캄캄한 집 안은 명헌으로 하여금 혼자 남겨진 태섭의 어둠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명헌이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조용히 태섭과 함께 밤을 보내는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처럼 닫혀있는 문을 바라보며, 그 문고리에 조심스레 손을 올리는 명헌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태섭이 화를 내면, 서운해하면, 나가 뒤져야겠다느니 무릎을 꿇어야겠다느니 하던 생각은 어느샌가 사라져있었다. 명헌의 머리가 캄캄한 집안만큼 하얗게 물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모든 상황이 명헌에게 아프게 다가왔다. 문고리를 잡고, 열어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자신에게 이 문을 열고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었다. 자신의 불찰이고, 방심이고, 잘못이었다. 

서로 사랑한 기간만 10년이었다. 서로 사랑하면서, 시간을 보내면서, 아무리 바쁘고 함께 생일을 보내지 못해도 문자나 전화는 꼭 주고받았는데. 명헌은 오늘 잡힌 회식에 대한 허락을 구하면서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가슴에 돌이라도 눌러놓은 듯이 마음이 무거웠다. 눈물이 흐르는 만큼 전신을 흠뻑 적실 정도로 흐른 땀이 급하게 오느라 더워져서 흘린 땀인지, 식은땀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태섭이 화를 내도 좋았다. 서운해해도 좋았다.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태섭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하고 싶은 건 다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고나면, 태섭의 분이 풀리게 되면. 그때 진심을 담은 사과를 전하고 늦어버린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다. 선물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래도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명헌이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을 여는 순간에도 침실에 태섭이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문고리는 소리도 없이 돌아가 명헌의 출입을 허가했다. 창가에 위치한 침대 위로 새벽을 향해 달려가는 달빛이 내려앉았다. 명헌이 숨을 멈추었다. 태섭이 잠들어있었다. 어딘가에 사라지거나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날의 밤인 것처럼.

"……."

명헌이 조심히 침대 근처까지 다가갔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혼란 그 자체였다. 명헌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렇게 잠든 태섭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제 옆에 누군가 서 있다는 인기척을 느낀 건지 잠들어있던 태섭이 인상을 찌푸리다 천천히 눈뜨기 시작했다. 명헌은 태섭이 눈을 뜨는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거칠고, 무겁게 뛰었다. 잠에 취한 흐린 눈이 몇 번 깜빡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흐릿한 갈색 눈에 점차 빛이 돌아온다. 제 앞에 서 있는 명헌의 존재를 서서히 인식한 듯 몇 번 눈을 깜빡인다. 명헌이 마른침을 삼켰다. 명헌을 보던 태섭의 입술이 달싹인다.

"으음, 왔어요…? 지금이 몇 시야. 옷도 안 갈아입었네. 씻고와서 자요."

"……?"

태섭이 제 옆의 빈자리를, 명헌의 고정석 위로 손바닥을 두드린다. 명헌의 머리가 미친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잔머리를 굴리는 그런 의미의 회전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 산왕과 북산으로 태섭과 처음 만났던 시절, 경기 운영이 최고조였던 머리가 태섭의 말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팽팽 돌아갔다. 태섭의 말을 몇 번이나 되새기고, 분석해봐도 내려진 결론은 단 하나였다. 

태섭은 현재 화가 나거나 삐지거나 하지 않은 상태였다.

명헌의 머리가 회전하기를 멈추었다. 애초에 태섭과의 은근한 밀당이 있었을 때나 굴렸던 머리다. 태섭과 사귀고 난 이후에는, 적어도 태섭에 대해서는 계산적으로 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명헌과 가장 가까운 산왕 농구부가 이게… 이명헌…? 이라고 할 정도로. 명헌은 태섭에 한해 한없이 순정했고, 순애했다. 그런 명헌이 머리를 빠르게 굴려 태섭의 의중을 파악한 바 태섭이 정말로 화가 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인식한 순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태섭의 손을 잡고 손가락 하나하나마다 입을 맞추었다. 결혼반지가 끼워진 약지에 입을 맞추면서, 입술에 닿는 금속의 감촉이 오늘따라 냉랭해 명헌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명헌의 모습을 비몽사몽하여 보던 태섭이 슬쩍 말했다.

"술 냄새."

"뾰오오옹;"

황급히 얼굴을 뒤로 물린 명헌이 다른 손을 들어 제 입 앞에 대고 습하습하 술냄새를 확인했다. 몇 잔 안 마셨는데뿅… 하며 고장난 명헌의 모습에 태섭이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뻗었다. 명헌의 입술 가장자리에 양 손가락을 놓고 중앙으로 모은다. 명헌의 두툼한 입술이 오리 입술이 되었다. 흔들리는 눈빛의 명헌을 보던 태섭이 말을 이었다.

"벌써 두 시가 넘었잖아요. 피곤하겠다. 씻고와요."

"…미안."

명헌의 속삭임에 명헌 앞에서만 보이는 다 풀린 머리를 제 손으로 쓸어넘긴 태섭이 잠으로 살짝 풀린 눈과 표정으로 말했다.

"어쩔 수 없죠. 갑자기 잡힌 회식이고. 당신이 내 생일을 여태 잊고있었다면 정말 서운했겠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며칠 전까지 우리 같이 생일 선물 고민했었잖아."

"그랬는데 결국 선물도 못 골랐다뿅… 선물도 못 골라놓고 케이크도, 외식도 다 태섭이 준비하게 만들었어뿅… 난 회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태섭만 중요하게 생각해왔었는데… 나도 내가 오늘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뿅……."

태섭의 반응에 놀라 잠깐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터져 두 뺨을 재차 적시기 시작했다. 태섭이 천천히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어깨까지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떨어져 허리께에 감긴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물기 어린 목소리나 젖은 뺨의 실루엣을 미루어보건대 명헌이 집에 올 때부터 울고 있었음을 짐작한 태섭이 서로 앉은 상태로 시선을 나란히 마주하며 명헌에게 손을 뻗었다. 다가오는 손에도 눈 깜빡임 하나 없이 손길을 받아들이는 명헌의 모습에 엄지로 두 뺨의 눈물을 닦아낸다.

"내 생일 까먹은 게 그렇게 서러웠어?"

"응……."

"에구. 이리와요."

"화내고 서운해할 수 있는데 그러지도 않았고뿅."

태섭의 부름에 명헌이 태섭을 끌어안았다. 태섭의 어깨 위로 명헌의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울먹이는 목소리에 태섭이 피식 웃었다.

"이봐요, 이밍힝씨."

"피뉴우웅……."

"우리가 무슨 사이죠?"

"피뉴훙?"

"우리가 여태 만난 게 10년이에요. 오래 만났다면 오래 만났다고 할 수 있죠. 우리는 10년을 만났고, 알았고, 사랑해왔지만. 우리에게는 여태 사랑해온 날보다 앞으로 사랑할 날이 더 많잖아요. 지나간 생일보다, 앞으로 챙겨줄 생일이 더 많다고요. 심지어 당신 나와 함께 지내면서 생일 놓친 거 오늘 처음이잖아요? 근데 왜 이렇게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울어요? 우리 오늘 만나는 게 마지막이었어?"

삐뉴우우웅… 울먹이면서도 정체성인 뿅체를 놓지 않는 명헌의 모습에 작게 웃던 태섭이 명헌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몇 차례 쓸어내리다가, 명헌의 두 팔을 붙잡고 제게서 떼어냈다. 여전히 눈물 범벅으로 울고 있는 명헌이 못 말리겠다는 듯 태섭이 짝짝으로 솟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잔뜩 부은 눈두덩에 입을 맞춘다. 손으로 한 차례 닦아낸 것이 무색하게 잔뜩 젖은 두 뺨에도 천천히 입을 맞춘다. 

"울지마요. 우리 앞으로 함께할 날이 더 많다니까?"

"크흥, 응…."

"ㅋㅋㅋㅋ 생일 두 번 놓치면 죽겠네 진짜."

"진짜 죽을거야 뿅 ㅠㅠ"

"진짜 죽지는 말고요. 사랑하는 송태섭을 누가 기다렸다는 듯이 낚아채가도 되는 거야? 유령되서 손가락만 빨고 있을거야?"

"그건 안된다 뿅!!"

"푸하하하."

태섭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민 명헌이 태섭을 꾸아악 끌어안았다. 그 어깨에 뺨을 마구 부빈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어리광에 태섭이 저를 꽉 끌어안은 명헌으로 인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어떻게든 펼쳐 그의 넓은 등을 마주 안았다. 등을 도닥이는 태섭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나 정말 괜찮아요. 화도 안났고, 서운하지도 않았어. 아까도 얘기했지만요. 여태 당신이 내 생일을 잊은 게 아니잖아요? 내가 당신의 사회생활도 이해 못 할 속 좁은 놈으로 보여요? 10년을 만나놓고?"

"……."

잠시 말이 없어진 명헌에 혹시? 하고 태섭이 그를 다시금 떼어냈다. 얼핏 쑥쓰러워하는 듯한 표정에 태섭의 누그러졌던 눈썹이 위로 솟았다.

"당신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거든요?"

명헌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자 태섭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기가 찬 웃음도 함께 흘려낸 태섭이 명헌의 등 뒤로 시계를 보더니 명헌의 손을 잡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먼저 잡아오는 손을 꼭 잡은 명헌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다. 명헌의 시선이 꼭 잡은 두 손을 못 박힌 듯 내려다보았다.

"시간이 늦어서 좀 그렇긴 하지만, 케이크도 먹어야하고 당신도 씻어야하니까 같이 씻을까요?"

"…뿅!!"

"거 그런 뜻으로 얘기한 거 아니니까 얼굴 붉히지 마시죠! 농담으로 얘기하긴 했지만 당신 지금 술냄새 나는 거 맞거든?"

"표호옹……."

눈을 반짝이던 명헌이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태섭과 맞잡은 손이 아닌 반대쪽 손으로. 그 모습에 태섭이 웃음을 터뜨렸다. 태섭을 보는 명헌의 검은 눈이 일렁인다.

***

함께 목욕하는 것을 좋아하는 명헌을 위해 둘이 들어가고도 여유가 남는 특수주문제작한 욕조 속에서 노곤하게, 뜨끈한 목욕을 즐긴 후 노곤따끈한 빵떡이 되어 나온 둘이 식탁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술을 얼마 먹지 않았어도 음주하긴 했는지 욕조에서 일어나는 명헌이 어지러워한 탓에 뺨에 얼음 주머니를 댄 상태로.

"음주 상태인 걸 간과했네요. 다음에는 술 먹은 날은 같이 목욕하면 안 되겠어요."

태섭이 손도 대지 않은 케이크 상자를 개봉하며 말했다. 노곤한 표정으로, 눈만 잔뜩 부은 명헌이 뿅뿅거렸다. 싱싱한 딸기가 잔뜩 올려진 딸기 생크림 케이크 위로 함께 빵칼을 움직여 케이크를 잘랐다. 제 앞으로 내밀어진 케이크 접시를 보던 명헌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스토랑은……."

"뭐, 지정한 날짜와 시간은 지났지만 위약금 좀 내고 오늘로 다시 잡으면 되죠."

"…! 돈 더 드는 건 다 내가 해결뿅!!"

"그래요, 그래. ㅋㅋ"

한 손을 번쩍 들며 외치는 명헌에 태섭이 웃었다. 그러면서 제 접시에 놓은 케이크 위를 장식한 딸기를 젓가락으로 집어들어 명헌의 접시에 덜어준다. 옅게 미소 지으며 눈썹을 늘어뜨린 태섭을, 명헌이 말없이 바라보았다. 눈을 감듯 내리뜬 시선을 케이크에 둔 채로 입술을 우물거리는 그 모습을 보는데 태섭이 얘기한대로 화가 전혀 나지 않고, 서운한 것도 전혀 없는 표정이라 괜히 속에서 울렁울렁한다. 울렁울렁. 일렁일렁.

"…왜 화를 내지 않아뿅?"

"화 냈으면 좋겠어요?"

태섭의 장난기 어린 물음에 명헌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낸 태섭이 젓가락으로 케이크의 생크림을 뭉개며 입술을 달싹였다.

"글쎄, 왜일까……"

그러면서 딸기를 젓가락에 콕 찍어 명헌에게 내민다. 명헌이 몸을 살짝 일으켜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입을 살짝 벌려 태섭이 건네는 딸기를 받아먹는다. 그런 명헌을 보며 태섭이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당신을 사랑해서겠죠."

느긋하고 평화로운 표정과 어투에 명헌의 손에 쥐어져있던 포크가 힘없이 접시 위로 떨어졌다. 분명 태섭은, 여유롭고 평화로운 표정으로 말한건데, 그것은 명헌에게 폭탄처럼 날아들어와 가슴 속에 콱 박혀 크게 터져나갔다. 사랑스러웠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가슴에 날아들어 폭탄처럼 터진 것처럼, 명헌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금 왈칵 터져나왔다.

"아하하학. 아니, 왜 또 울어?"

"태섭, 내가 많이 사랑해애애……."

"못 말린다니까 진짜."

킥킥 웃던 태섭이 말했다.

"우리 앞으로도 오래오래 사랑해요, 이렇게."

"응."

"생일 한 번 놓쳐도, 바로 다음 생일 생각하고, 다음 기념일 생각하고 서로 사랑하기로 해요."

"응."

"사랑해요."

"나도. 나도 사랑해. 태섭."

태섭이 케이크 상자 옆의 예약권을 젓가락으로 가리켰다.

"우리 한숨 자고 일어나면, 진짜 밥 먹으러 갑시다. 여기 맛있대."

"응. 사랑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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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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