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5 축복이 나를 부르니 그가 명령하여
우츠기 란기리, 우츠기 노리유키
배역은 종이를 집어 든다.
눅눅한 나무 향이 코끝에 더는 걸리지 않았다. 필체가 장마다 어지럽게 흐트러져 무용지물이다. 개중 유일한, 발자국 없이 온전한 편지. ‘친애하는’ 따위의 수식언에서 먹물이 넘쳐흐른다. 이어서 쓰자. 그가 바닥 위를 거듭 밟을 때마다 마루가 삐걱대며 불평했다. 위로 음영이 진다. 어두운 숲이 창문 너머로 굽이쳐 움직이고 있었다. 암울한 그림자 사이로 비친 달이 샛노랗다.
붓끝을 입에 물고, 그는 빛을 눈에 담는다. 어느새 종이를 다 썼다.
구두 굽이 타박거리며 불 꺼진 복도를 활보한다. 발걸음은 가볍게, 번민하더라도 그마저 흔쾌히.
등불이 하나씩 나타나면, 몇 없는 사용인이 그를 보기도 전에 자리를 피한다. 무가치하다. 하하하! 웃음소리가 공간을 휘젓다가 곧 사라진다. 모퉁이를 돌자 조명 아래 창백한 안색이 서 있다. 도망간 줄 알았던 사용인이 죄스러운 얼굴로 눈치를 본다. 한때 주인으로 모셨던 이에게 남은 일말의 정일지, 날이 갈수록 언동에 광기를 덧바른 자와 엮이고 싶지 않은 공포감일지, 어느 쪽이든 책무를 다하지 못한 이유로는 부적합하리라. 배우는 히죽히죽 웃기만 한다. 울음소리가 그쳤더구나. 설마하니, 치웠어? 상대는 묵묵부답이다. 대신 불안한 동공이 계단을 잠시 스치고 지나간다. 아하! 아래층이로군. 더욱 파리해진 낯빛을 감추지 못한 이가, 황급히, 손을 뻗는다.
“아, 버님.”
“으음?”
“아직, 안사람이…… 직후라 많이 힘들어 합니다. 적어도, 주무시고 나서─”
“달이 참 밝지?” 기다란 손가락이 앞에 놓인 손목을 잡아챘다.
“……. 그렇군요.”
“네가 이은 가업도 저리 환한 전망이면, 좋지 않겠니?”
자식이 깊게 뱉는 탄식을 뒤로 하고, 그는 잡은 것을 간단하게도 놓는다. 마치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은 양. 어쩌다 잡힌 돌멩이를 내던지듯이. 그에게는 손에 쥘 원석이 따로 있다.
이윽고, 층계를, 정신없이 내려가는 발소리가, 집안을 울린다. 발목이 유쾌하게 구른다. 마지막 계단에서 그는 기어코 중심을 잃었으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약간 우스꽝스러웠을 뿐이다. 이토록 멋진 춤사위를 보아 줄 이가 있는지는, 판단하지 않기로 하자. 어차피 볼 것이다.
가로지르는 걸음마다 여전히 요란하다. 저택 곳곳에서 상주하던 인원이 또 질겁하고 만다. 문을 연다. 침대에는, 막 잠자리에 든 산모와 품에서 얕은 숨을 내쉬는 새 생명이 누워 있다. 그가 여인에게로 다가간다. 잘해 주었다, 아주 훌륭해. 아가, 너는 우리를 이끌 선도자를 낳았단다……. 뱀이 혀를 놀리듯 속삭인 후에는 아이를 바라본다. 달이 기울어져 창틈 새로 금빛을 흘리던 참이다. 기척을 느꼈는지, 갓난것이 꼬물거리다 눈꺼풀을 조금 들어 올린다. 딱 그만큼 눈이 노랗게 물든다.
“오! 어질고 지혜로운 현인이시여. 일찍이 견신에 다다른 그의 스승을 내가 뵙습니다.”
아기는 눈앞에 들이밀린 손가락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래, 그래. 너는 그것으로 하자…….”
곧은 검지를 작은 손이 감싼다.
“미덕(徳)으로 조력자(のり)가 되어라. 불길이 닥쳐도 함께 인내(ゆき)하여라. 그러면 행복(幸)이 따르리니!”
순진한 입술이 그것을 입으로 가져간다.
“그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역을 부여하지! 사랑스러운 내 손자, 태어나 줘서 고맙다.”
때는 1959년 10월 15일이라. 나는 그대의 각본에 기쁘게 복종하였다.
제목 및 마지막 문장: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 지옥편 오마주, 제2곡 中
이름 풀이 참조: https://namedic.jp/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