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

'빈아' 님 글 리퀘스트: 사극 타입

좁다란 서고에 봄빛이 들었다. 겨우내 내린 눈이 품고 있던 새싹들을 떨치고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라 알리는 시기가 돌아왔으니, 이는 낯선 사건이 생겨도 생길 징조라. 봄빛을 마주한 서적들도 새 생명의 가치를 아는 듯 은은한 다색을 띠었다.

조용한 서고 안에서 홀로 책장을 넘기는 여인에게 있어 초대하지 않은 활기는 썩 달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열린 창틈으로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소저가 눈살을 찌푸렸다. 정갈하게 쓰인 흑색의 글자들이 일순 흐릿해졌다 다시 모양을 잡았다. 창을 닫으려 손을 뻗어보니 바깥에서 시끌시끌하고 어린 동생이 또 야단이다. 소리 높여 저를 찾다 이내 서고로 뛰어오는 발소리에 소저는 깊은 한숨만을 푹 내쉬었다.

꽃신 두 짝이 우당탕하고 서고로 들이닥친다. 동시에 책 몇 권이 우수수 떨어진다. 이곳으로 말하자면 유달리 책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보는 자매의 부친이 소설이며 생활 서적 가릴 것 없이 사 모은 책들의 보금자리로, 한자를 깨치지 못한 이들이나 향유할 법한 글부터 귀하디귀한 의료계의 명인이 집필한 서적까지 담겨 있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이 낡은 건물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아냐며 소저가 여동생을 나무랐다. 여동생이 말하기를,

“그리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으시니 사람이 갑갑해지는 것 아닙니까?”

하니, 소저가 뒤이어 꾸짖기를,

“정녕 이 세상 수많은 지식을 깨우치는 일의 즐거움을 모르는 게로구나. 함부로 바깥을 나다니며 한글 소설이나 듣는 너로서는 이해 못 할 게다.”

“모든 이들이 소설을 즐깁니다. 구닥다리 가르침보다는 자기 전에 홍길동전을 곱씹고 꿈에서 흥부의 박을 함께 타는 일이 훨씬 즐겁습니다. 벼슬에 올라, 한몫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글을 읽고 외워 무엇합니까? 아버지께서 암만 독서를 허락하셨다 한들 그것이 나가 노니는 일보다 기쁩니까?”

투덜거리던 여동생은 저가 들어온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웬 사내 하나가 서고를 둘러본다 합니다.”

그 고을에는 오래전 무과에 합격하고도 아직 발령받지 못한 사내가 있었다. 성은 사씨요 이름은 칠성이라, 무과 훈련을 하다 입은 흉인지 왼쪽 귀는 깊이 패 있고, 키가 여섯 척은 되는 데다 생김이 무척이나 사나워 한걸음에 아이들이 놀라 달아나고 두 걸음에는 빨래하던 아낙들이 집안으로 숨기 바쁘다. 하지만 칠성의 고운 심성을 잘 아는 이들은 그의 그림자만 보여도 부드럽게 웃으며 대문을 활짝 열어주고는 했다. 소저의 부친도 그런 이에 속했다.

근래에야 출세 한번 해 보겠노라 가벼운 마음으로 무과를 응시하는 자가 한 집 건너 한 집이요, 혹여 임진년과 같은 전쟁이 다시 일어날지 급급하여 그들을 전부 합격시키는 관리만 열 돈이니, 무과 합격자는 발에 챌 만큼 흔한데 정작 발령이 나는 이는 없다. 울분이 터져 주막을 제 집처럼 들락거릴 법도 하건만 칠성은 그저 묵묵히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소저의 부친이 그런 모습을 훌륭히 여겨 몇 번 만남을 갖던 것이 마침내는 서고에 그득한 귀중한 서적들을 빌려주는 데까지 온 것이다. 낯선 사내를 안내하라는 부친의 말에 소저는 그저 난처한 표정으로 칠성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 나라가 그 문을 연 지도 이백여 년이 훌쩍 넘었다. 오래전에야 무과라도 이론이며 실기 시험까지 꼼꼼하게 치렀으니 그렇다 치자. 합격자가 널리고 널린 지금에 와서 칼 차고 말타기에 급급하던 이가 어찌 고서의 귀중함을 안단 말인가. 서고 깊은 곳으로 칠성을 안내하며 소저가 생각하기를,

‘옳아, 이 집안 큰딸이 혼기가 지났는데도 서고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으니, 꽃 한번 따 보겠다고 무작정 들어온 게로구나.’

그래, 네깟 놈이 어디 무슨 책을 그리 고심해 고르나 보자. 소저가 칠성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데도 칠성은 곰곰이 생각하며 서가에만 시선을 둘 뿐이었다. 마침내 그가 책 한 권을 골라 드니, 한글로 된 소설이라, 입소문이나 쫓는 아낙네들이 부엌일을 하며 간간이 읽는 그것이다. 소저가 내심 혀를 차며 묻기를,

“다른 귀한 서적들도 많건만 어찌 그것을 고르십니까?”

이에 칠성이 답하니,

“서적에 귀천은 없습니다, 다만 옳고 그름이 있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담은 내용이 올바르지 못하여 사람이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게 하고, 잘못된 것을 널리 퍼뜨리는 서적이 있으니 그른 서적이라고 합니다. 내용이 지나치게 외설스럽거나 잔인하여 차마 눈에 담을 수 없는 서적도 그른 서적이라고 합니다. 그런 서적이야말로 진정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간에 천하다 천하다 소문만 무성한 서적들에도 반드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소인은 식견이 짧으니 작은 것들이라도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됩니다.”

소저가 실로 궁금하다는 듯 덧붙이니,

“말뜻은 사대부의 가르침이 아니라 한낱 영웅담을 써 내리는 소설도 귀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것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나라를 위해 싸울 용기입니다.”

칠성이 그렇게 말하고는 소설을 들고 서고를 나갔다. 그날 내내 그 말을 곱씹어 보니 하나도 그른 것이 없기에, 소저는 자꾸만 그 일을 떠올리고 떠올렸다. 되새길수록 마음 한구석에서 그날의 그 서고가 자꾸만 선명해졌다. 이른 오후의 볕을 받아 아득하게 빛나는 다색의 책들, 그 한가운데에서 저가 모르던 것을 알려주었으나 다만 질책하지 않았던 그 청년이.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이 나긋하면 나긋할수록, 자꾸만 따사로워지는 봄빛이 간지러워서 소저는 그를 기다렸다. 저가 모르는 것을 그가 한 아름 안고 다시 서고를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그것이 지식에 대한 갈망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 대한 타는 듯한 목마름인지, 소저만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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