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사쿠라다 히로무 + 우사미 요코 (적황)
+ 본 글은 특명전대 고버스터즈 결말 이후의 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실이란 생각했던 것 보다 더욱 가혹하게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런 진실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옆에서 비틀거리는 너를 지탱해 줄 정신조차 없었다. 손이 떨려왔다. 아버지께서는 엔터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진실을 숨기실 생각이셨겠지. 이치간 버스터로 메사이어를 겨누는 네가, 결국에는 팔을 힘없이 내려버리는 모습을 보았다. 약해지는 너의 모습을 보고선 잠시 망설였다. 젠장, 젠장. 잠시의 망설임으로 인해 결국 우리는 메사이어에게 밀쳐졌고, 건물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내려 쳐지는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우리에게 있어서 13년 치의 진실은 너무나도 무겁고 벅찼다.
결국, 난 너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몇 번이나 외쳐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미안해. 요코. 13년 전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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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는 악몽을 꾼다. 아공간에서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꿈. 찬바람이 방을 메우는 어젯밤도 어김없이 악몽을 꾸었다.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한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리기 위해 노력한다. 아직 푸른 새벽의 하늘 빛, 코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아침 공기가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려준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구나. 하얀 벽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 이내 다시 편안한 숨소리와 함께 잠에 빠져든다.
“히로무! 일어나!”
닉이 외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는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일어난 탓에,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부산스럽게 나를 깨우던 닉과 이마를 부딪쳤다. 머리가 아프다. 인상을 쓰며 닉을 바라본다, 오늘은 일도 없잖아. 열심히 금속을 문지르며 툴툴거리던 닉이 내 말에 상기된 듯 말한다. 무슨 소리야, 히로무, 오늘은 중요한 날이잖아! 어디선가 가져온 달력을 내 눈앞에 들이민다. 오늘은 12월 24일, 그렇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오늘 다 같이 만나서 준비하기로 했잖아! 빨리, 이러다 약속 시간에 늦겠어.”
억지로 나를 침대에서 끌어내는 닉의 손길에 그저 알겠다고 말하며 욕실로 향한다. 그랬구나. 그래서 악몽을 꾼 건지도 모르겠다. 하필 그게 크리스마스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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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류씨랑 에너지 관리국 사람들 못 오게 되었어.”
“그래. 그 정도로 중대한 일이겠지.”
약속 장소였던 에너지 관리국 정문 앞에는 요코만이 서 있었다. 말 해주길, 급작스럽게 오늘 큰 문제가 생겨 다들 출장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전날인데 못 가서 미안하다며 류지씨가 나에게 전해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요코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5년 만에 겨우 다 같이 크리스마스 준비를 할 수 있나 싶었는데, 하필 오늘 그 커다란 탑이 고장 날 일은 무엇이냐고. 추위로 인해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우사다에게 기댄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잖아, 요코. 귀를 열심히 움직이며 우사다는 요코를 달래기 시작한다. 그래, 5년. 모든 일이 끝난 뒤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류지씨는 평소에 공부를 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엔지니어로 취직하여 에너지 관리국 산하의 기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13년 간 감출 수밖에 없었던 꿈을 다 털어 놓는 듯 여러 과학 관련 잡지와 뉴스에서 자주 모습을 보인다. 요코는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고버스터즈 활동을 인정받아 특별 전형으로 항공운항학과를 들어갔다. 그동안 RH-03를 운행 해왔기 때문에 대학생활도 무리 없이 하고 있는 것 같다. 특명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른 부서로 흩어졌다. 나는, 나는 지난 5년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해보았다. 닉과 함께 여행을 떠나보기도 했고, 에너지 관리국에서 잠시 일도 했었고, 얼마 못 갔지만 제과점에서 빵을 만들기도 했었다. 특명부와 고버스터즈는 3년 전까지는 유지되고 있었지만 이내 이름만 남은 자리가 되어버렸다.
각자의 일이 바빴기에 지난 5년간 다 같이 모이지 못했고, 이번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고아원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서. 그 동안은 류지씨와 요코 둘이서만 고아원에 크리스마스마다 찾아가 공연을 했다고 한다.
“히로무, 무슨 생각해?”
짤그락 거리며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생각에서 벗어나보니 근처 카페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춥다면서 요코가 끌고 왔겠지. 손에는 따뜻한 코코아가 들려있었다. 조금 토라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요코에게, 아무것도 아냐, 시선을 카운터 쪽으로 돌리면서 코코아를 마셨다. 뭐야, 싱겁게.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었지, 응, 히로무? 책상을 툭툭 치며 뜨거운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런 거 아냐.”
달달한 코코아가 입 안 가득히 퍼졌다. 요코가 또 다른 소리를 하기 전에 일어나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코코아를 단숨에 마셨다. 이제 그만 가자. 겉옷을 걸치고선 고갯짓을 해 보인다. 무어라고 외치는 말을 뒤로 한 채 가게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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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극의 주제는 루돌프의 이야기였다. 요코가 주인공인 루돌프는 히로무에게 정-말 잘 어울릴 것 같다며 빨간 솜뭉치를 내 코에 붙였다. 그리고선 글리터가 반짝이는 머리띠를 나에게 씌어 주었다. 옆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줄 솜 인형을 만들던 닉이 내 모습을 보고선 한바탕 웃더니, 어디서 가져왔을지 모를 카메라로 나를 찍기 시작했다. 야, 닉! 번쩍이는 카메라를 빼앗기 위해 닉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우사다가 짜증을 내는 목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좀 있어! 우리 둘을 지켜보던 요코는 의상 고르던 일을 멈추고선 한바탕 웃기 시작한다. 그렇게 마냥 즐거운 크리스마스이브가 지나가고 있었다.
“히로무, 이거 봐봐.”
그런 분위기를 휘저어 놓은 건, 다름 아닌 요코가 발견한 한 장의 사진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의 우리가 함께 찍혀있는 사진. 이제는 다 사라져 버린 줄로만 알았던 사진이 버리려고 빼놓았던 크리스마스트리 속에 꽂혀져 있었다. 우사다와 닉은 저 만치 서서는 사진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17년, 혹은 18년 전 크리스마스였을 그 사진에 감정이 흔들린 건지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이 때는 히로무도 어렸구나. 사진을 형광등 불빛에 이리저리 비추어보며 요코가 말했다. 빛이 사진에 들어오자, 세월에 의해 손상된 사진의 흔적이 투명하게 드러났다.
다시 저 시절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설령 다시 그 날로 되돌아가더라도 우리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지난 13년은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사진을 곱게 접어, 들고 온 쇼핑백에 사진을 조심히 넣는 요코를 보며 나는,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류씨도 이때 같이 찍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때 류지씨는 부모님들을 도와 파티 준비를 하고 있었어.”
아, 그래? 그 때의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이 없네. 요코가 멋쩍게 웃음을 터뜨리고서는 시선을 밑으로 내린다. 우사다가 요코에게 다가와선 그 짧은 팔로 발목 언저리를 토닥여준다. 있잖아, 히로무. 요코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제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 때와 비슷한데, 희망에 실려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오늘 그 남매를 보았어. 기억나? 우리가 엔터와의 마지막 결전 때...”
“기억나.”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18년 전의 우리와 겹쳐 보였던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기에, 악몽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에 온 힘을 다해 엔터와 싸웠었다. 그 때 그 아이들. 하지만 갑자기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그저 손을 옴지락거리며 요코를 바라보았다.
“부모님과 함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고 있었어. 잘 됐지? 엄-청 기뻐 보이더라.”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며 요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요코... 우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요코를 불렀지만, 이야기를 끊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가슴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18년 전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긴 시간동안 약속을 생각하며, 엄마를 만날 수 있다고 믿어온 요코에게 자신은, 그 때의 크리스마스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메사이어를 셧다운 시킨 이후 서로는 아공간에서 있었던 일들을 굳이 꺼내어 말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가 지속될수록 어깨의 짐은 더해져 갔다. 오늘 그 남매를 보며 분명 요코는 엄마와 자신의 모습을 그렸겠지.
“히로무. 부모님들도 이런 미래를 그리셨겠지? 그래서 그런 의지를 우리에게 주신 걸 거야. 미래의 크리스마스에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셔서. 13년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어. 지금의 우리도 행복하잖아?”
5년 사이에 생각을 읽는 법이라도 배웠는지 가슴에 틀어박히는 말뿐이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과 부끄러움이 몸에 흘러들었다. 그 동안 내가 짊어지고 있었던 죄책감은 전부 무의미했었다. 요코는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고, 18년 전처럼 울며 내 손을 잡을 사람도 아니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다 기지개를 펴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마저 끝내볼까? 내일 류씨를 깜짝 놀라게 해 줄 거야! 다시 활기를 되찾은 듯 우사다의 머리에 산타 모자를 올려놓았다. 어쩐지 가슴이 시려왔다. 지금이 아니면 이 감정을 고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요코, 내가 약속 하나 할게.”
입에서 급작스럽게 튀어 나온 말은, 지난 5년간 내 마음 속에 지녔던 죄책감의 산물이었다. 가족과 동료 그리고 친구 사이의 미묘한 관계. 그 사이에서 피어난 감정이 내 죄책감을 더욱 가중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감정을 너도 지니고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런 마음 만큼은 이기적이어도 좋잖아. 조금 당혹스러움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어본다, 약속?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솔직해지지 못하는 내 성격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이것도 사랑이라고 칭할 수 있다면. 약속은 사랑의 또 다른 형태였다.
https://sugar131013.wixsite.com/mo-i-sikanai
위 합작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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