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전대 고카이쟈

정의의 정의

아임 드 파미유

소리꾼 by 박메론
25
1
0

 *해당 글에는 극장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적의 일격에 고카이오가 해체된 후, 가장 먼저 잿더미로 변한 것은 고카이 갤리온이었다. 공중으로 떨어지는 머신들 앞으로 재빠르게 날아가 쏟아지는 폭탄을 막고서는 그렇게 사라졌다. 다음으로는 고카이 트레일러가 화마에 먹혔고, 고카이 제트가 격추를 시도했지만 그 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고카이 레이서가 마지막으로 적진에 돌진했으나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기체의 오른쪽에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아. 나는 눈을 감고서는 마지막으로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 어마마마, 아바마마. 나의 백성들, 파미유 별, 고카이쟈 동료들, 지구별의 사람들, 전부 죄송합니다. 저는 이제 그만 생의 마지막 숨을 쉬려 합니다. 붉은 화염이 분홍빛 고카이 마린을 덮쳤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잔갸크와 맞서 싸워서 다행이라고, 비겁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숨을 참았다, 흡.

 

 하지만 나는 살았다. 그것도 잔갸크의 새로운 사령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는 선장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를 향해 목소리를 내고 싶었으나 연기로 턱 막힌 목에서는 기침소리만이 흘러 나왔다. 거센 기침을 몇 번 했다. 켈룩 켈룩. 옆에 서있던 졸병이 시끄럽다며 몸을 세게 밀쳤다. 딱딱한 돌바닥과 힘없는 몸이 충돌했다. 오른팔부터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와 머리마저 지배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흐릿해진 눈을 열심히 굴려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노란 머리카락이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그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앞으로 퍽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선장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아임과 박사를, 먼저 치료해주세요. 투박하지만 다정한 손이 다가와 나의 몸을 흔들었다. 아임, 정신 차려! 그 답지 않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희는 정말로 잔갸크 제국에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다급하게 말을 이으며 사령관을 설득시키는 선장, 그런 그를 조롱하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바커스 길.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말을 몇 번 마벨러스 씨에게 내뱉고 나서야 바커스 길은 선장의 제안을 수락했다. 아냐. 저는 이렇게 비겁하게 사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입 사이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아임! 루카 씨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희망의 등불이 완전히 사라진 듯 보였다. 버석버석한 짚더미 위에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 나는 살아있는 것에 대한 후회를 했다. 사랑하는 고향별을 잔혹하게 파괴하고 부모님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원수에게 무릎을 꿇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비굴하게 굴어서까지 살고 싶지 않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떠지지 않는 눈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 아임! 루카 씨의 손이 눈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치웠다. 눈에 힘을 꾹 주니 천천히 시야가 확장되었다. 루카 씨는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깨어났구나. 죠 씨가 말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죠 씨를 바라보았다. 양 다리에 부목을 고정시키며 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특별히 아픈 곳은 없어? 루카 씨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 답했다. 그 보다는 어째서…….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최후의 작전이다.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그를 마주볼 수 있게 되었다. 붕대를 감지 않은 곳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행색이었지만, 소리를 내 웃을 수 없었다. 살아야 다음 기회를 볼 수 있어. 무슨 의문을 품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마벨러스 씨는 잽싸게 말을 이었다.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입을 앙 다물고서는 그를 노려보았다.

 

 바커스 길은 한동안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상태가 위중하여 좀 더 좋은 시설에 있었던 박사님은 죠 씨의 간호로 상태가 나아져 다시 감옥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박사님은 ‘여기나 거기나 시궁창 같은 건 같더라.’라며 툴툴거리기 일 수였다.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던 마벨러스 씨도 점차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가장 부상이 적었던 죠 씨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를 썼고, 루카 씨는 그 어느 때보다 나에게 신경을 많이 쓰며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 역시 감옥에서의 생활에 점차 적응해 나갔다. 그래, 살아 있어야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어. 파미유 별의 백성들이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어. 지구로 돌아간 네비와 가이 씨도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는 꼭 살아서 이 곳을 걸어 나가야 한다. 꺼진 줄만 알았던 희망이 다시 타올랐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누던 5일 째의 아침, 바커스 길의 깜짝 선물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바커스 길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우리의 어깨를 두들겼다. 너희를 위한 선물을 준비했어. 어때? 검은 색으로 물든 돛에는 잔갸크 제국의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박사님이 정성스럽게 수리했던 갑판은 흉측한 물건들이 들어섰고, 나와 죠 씨가 디저트를 나누어 먹던 홀도 쟌가크의 동력실로 바뀌어 있었다. 루카 씨와 가이 씨가 가끔 별똥별 찾기 내기를 하던 망루 끝자락에는 낡아빠진 잔갸크 제국의 국기가, 항상 마벨러스 씨의 자리였던 선장 의자에는 바커스 길이 앉아있는 그런, 이상한 형태의 고카이 갤리온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때까지 우리가 쌓아온 모든 노력들이 한 순간에 부정당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한 순간 두려움과 좌절감이 온 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싫어요, 이런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는 없어요, 저는, 저는 파미유 별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아악-! 내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났다. 몸을 세차게 돌리고선 뜀박질을 시작했다. 어이, 아임! 죠 씨가 발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이를 바커스 길이 저지했다. 선장 자리에서 최대한 멀어져야해, 저 자리는 마벨러스 씨의 자리인데. 귀를 틀어막고서는 중앙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커스 길의 웃음소리가 복도를 타고 내려왔다. 하하, 몰락한 파미유 별의 공주님께서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나 봐? 파미유 별의 백성들이 보면 정말 희망에 가-득 차겠어, 하하하!

 

 나는 이미 그들에게서부터 부정당했구나. 복잡해진 구조 속에서 겨우 찾아낸 곳은 나의 방이었다. 갤리온에 있는 방들 중 가장 커다란 나의 방, 폭신폭신한 침대와 옷가지들이 걸린 기분 좋은 방이었는데. 지금은 혐오스럽고 가장 끔찍한 형태로 남아있었다. 숨을 고르고서는 문 앞에 주저앉았다. 살아있다면 기회가 생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가 살아있는 그 순간부터 기회는 사라진 셈이었다. 잔갸크가 소문을 떠벌렸겠지, 파미유 별의 옛 공주님도 우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파미유 별의 백성들은 그 소식을 듣고서는 어떤 좌절감을 맛보았을까. 나는 어째서 그 순간 생존을 택한 것인가. 창문 사이로 붉은 빛이 들어왔다. 아. 그 때도 그랬다. 파미유 별이 박살나는 순간에도 이렇게, 굉음과 함께 커다란 창문 사이로 붉은 빛이 들어왔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저 멀리서 또 다른 작은 행성 하나가 파괴되는 모습이 보였다. 파미유 행성이 절반 정도 붕괴 되었을 때, 나는 성문을 지나 거리로 뛰쳐나갔다. 누구 하나라도 더 살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나의 발길을 돌린 고통스러운 목소리, 제발 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세요, 그 사람은 괴로움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안식. 나는 그것을 위해서 살았다. 그 당시에는 차마 제 손으로 안식을 선사할 수 없어 등을 돌려 성 안으로 도망쳐 왔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고향별을 잃은 사람들은 평생 고통을 가지고 살아간다. 전쟁으로 굶주림에 고통 받고, 잔혹한 선택의 기록에 놓여 고통 받는 이들 역시 존재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긴 싸움에 지친 이들, 누군가에게 구원받음으로서 새로운 고통을 떠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영문도 모르고 침략을 당해야 하는 별의 사람들. 이 모두에게 안식을 선사한다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은 논리였지만 괴이한 생각은 끝을 모르고 향해갔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예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화를 선사하기 위해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합리화를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잠깐, 합리화? 이건 정당한 생각이고 논리였다. 아. 그랬지. 어느새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걸려있었다.

 

 천천히 옷장을 열었다. 잔갸크풍의 옷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정말 새로 태어나려면 옷차림부터 다르게 해야겠지. 거추장스러운 원피스를 벗어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누군가 원피스를 맞고서는 화를 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경박한 웃음이 방 안에서 메아리 쳤다. 짤랑거리는 팔찌를 차고서는 가벼운 형태의 치마와 상의를 걸쳤다. 화장대 위에 마구잡이로 올려져 있던 목걸이들은 전부 착용하고서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들었다. 아하! 과거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었다. 동료들 중 누군가가 선물해준 머리끈을 뜯어 바닥에 버렸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완벽했다. 항상 하던 대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저는 행복해요, 다른 사람들에게 안식을 줄 기회를 가져서, 이런 식으로 새롭게 태어나서 행복해요. 뭔가 달랐나? 그렇지만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게 중요했다. 덜컥거리는 구두를 신고서는 문 앞에 섰다. 이봐, 밥 먹으러 나와! 거친 바커스 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장을 바라보고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문고리를 잡고서는 돌렸다. 붉은 빛이 내 몸을 비추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별안간 붉은 빛이 사라지더니 방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찼다. 나는 문을 열고서는 어둠을 이끌며 끈적이는 복도에 발을 디뎠다.

 

 박사는 언젠가 말했다. 사람이 거짓된 짓을 하면 순간 엔도르핀이 돌며 짜릿한 기분이 든다고, 그러나 그건 일시적인 현상이라며 주절주절 늘어놓는 걸 듣고 있었던, 그런 순간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게 거짓된 짓인가? 나는 진실 된 정의를 위해 살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절대 거짓된 선택이나 삶이 아니었다. 복잡한 생각을 뚫고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저기 아임? 박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드르륵- 시끄럽게 의자를 끌고서는 자리에 앉았다. 아임. 죠가 불렀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루카의 목소리 역시 무시하고서는 포크를 들었다. 어이! 화난 마벨러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고카이쟈를 바라보았다. 각가지 표정들을 훑고 나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어서 만찬을 즐겨 보아요.”


흑화 합작에 제출한 글입니다. https://s-ryunmin.wixsite.com/toku-black  합작은 이쪽입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