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전대 고카이쟈

당신의 우주

죠 깁켄 + 아임 드 파미유 (청도)

소리꾼 by 박메론
30
0
0

죽음에 관한 직접, 간접적인 묘사가 있습니다.



 화려한 금색 무늬가 새겨진 분홍빛 찻잔이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찻잔은 조각조각 부숴 졌다. 찻잔을 들고 있던 자신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이 느껴지자, 황급히 두 손을 모아 풍성한 치마 속으로 숨겼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찻잔 안에 들어있던 레이디 그레이가 마룻바닥을 스멀스멀 타고선 신발 밑을 적셔왔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볼만큼의 용기는 나지 않아, 시선을 고정시키고선 파들거리는 입 꼬리를 씰룩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는 양 팔 소매를 걷더니 무릎을 굽혔다. 그러고선 깨져버린 찻잔의 조각을 그 넓은 손에 조심스럽게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와 사뭇 가까워진 거리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탁하고도 진한 체향에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아 황급히 숨을 참았다. 여기서 그를 들이 마쉬었다가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 쏟아낼 일이었다.

 

 고개도 들지 않고 볼품없이 반짝이는 조각들을 주워 담던 그는, 천천히 무릎을 피고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부엌에 위치한 커다란 양철 휴지통 속으로 마지막 남은 파미유 수제 찻잔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타올을 가져온 그는 다시 무릎을 굽히고선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신호탄을 쏜 지금 그의 행동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태연했다. 어째서인지 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훅 들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눈앞의 그는 슬픔 한 점 없는 얼굴로 잔뜩 붉어진 나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허망해진 기분으로 샅샅이 그의 표정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길게 펴진 입술 사이로는 공허함만이 느껴졌고,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한 눈에서는 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헉. 그 사실이 너무 놀라워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왼쪽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왜 전부 저를 떠나가나요?”

 

 분노로 인해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선 물기어린 목소리로 내뱉은 말은 겨우 이것이었다. 차마 그를 붙잡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목구멍이 원망스러워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 변화 없는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슬슬 이게 현실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꿰뚫어 보았는지 그가 시선을 슬며시 내리는 게 느껴졌다.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마지막까지 눌러두었던 감정이 머리부터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예쁘게 장식한 드레스가 자신의 두 손에 의해 볼품없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제가 그렇게 못미더우신가요? 아직도 의지하지 못 할 정도인가요? 동료로 언제 즈음 인정받을 수 있는 건가요? 다들, 다들 그랬어요. 저에게 같이 싸우자고, 자신을 믿으라던 마벨러스 씨는 잔갸크 제국을 파멸한 다음 날 홀연히 사라지셨지요. 그 뿐만인가요. 저를 언제나 피가 이어진 동생처럼 아껴주시고 앞으로의 나날을 그리던 루카 씨 역시. 역시 반대편 성운에서 보자며 떠나셨어요. 박사님은 또 어떤가요. 그렇게 많은 고민을 나누고 서로의 짐을 덜어주기로 했지만 새벽에 예비 비행선을 타고 어딘가로 가셨죠. 가이, 씨는.”

 

 목소리가 갈라져 듣기 싫은 소리를 자아냈다. 억울하다며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는 자신의 꼴이 보기 싫었다. 그렇지만 눈 한번 꿈뻑이지도 않고 올려다보는 그의 시선 너머로, 추해진 한 해적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코는 점점 더 빨개져 왔고 서서히 말라가던 마룻바닥에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형 캡슐에 몸을 실고 있는 그 지구인을 마지막으로 발견한 건 자신이었다. 뒤늦게 말리려 했지만 과도하게 친절한 그 사람은 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우주를 떠돌며 사람들의 미소를 지켜주겠다고. 펴지지도 않는 관절을 움직여 브이를 만든 그 이. 소형 캡슐이 나가기 전 편안한 한 숨과 함께 눈을 감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무력한 자신. 모든 기억들이 몸을 휘감아 뼈를 조각조각 으스러지게 만들었다. 귀를 막고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를 그가 다가와 기다란 양 팔로 자신을 감싸 안았다. 속 깊이 스며든 흐느낌 소리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웅얼거렸다.

 

 “사랑한다며 밤새 속삭이던 당신의 그 입에서 어째서, 어째서 저를 떠나간다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올 수 있나요? 그 모든 말들은 순 거짓이었나요. 옆에서 그렇게 힘들어 했던 저를 지켜본 눈은 없었던 건가요? 대답해주세요. 죠 씨.”

 “이 모든 게, 다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헛된 말은 하지 마세요! 정말 저를 사랑했더라면, 다들 저를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인생을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전부 사라졌어요. 전부, 전부. 이젠 당신도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도.”

 

 말을 가쁘게 했다. 숨이 헐떡거려 산소를 공급하기 어려워 가슴이 아릿해져 갔다.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주면서도 자신의 말에 반박하지 않는 그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전부 알고 있었지만 모든 게 현실이라고 깨닫기 싫었다. 마벨러스 씨의 수명이 짧다는 사실도, 옛날의 생활로 인하여 루카 씨의 살 수 있는 날이 매일 마다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박사님의 인생도 곧 있으면 막을 내린다는 것도, 눈에 띄게 늙어가는 가이 씨의 숨도 언젠간 마지막 한 숨이 될 거라는 사실도. 외형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몸이 둔해진 눈앞의 그의 생명도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믿어야만 했다. 그리고 생생히 귓가에 들려왔던 말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갤리온의 모든 선원들은 공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어느 순간 그들은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이 여정의 최후에는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파미유 별의 공주님만이 홀로 남게 된다. 빈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자신들을 부여잡고 우주의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벌써부터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이른 나이었지만, 공주님이 없는 틈을 타 해적들은 모여 의견을 나누었다. 가장 이상적인 결론에 도달한 선원들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씩 떠나자. 높은 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꽤나 무겁고 진중한 주제였지만 해적들은 활기를 잃지 않았다. 잠결에 일어나 계단을 올라오던 공주님, 자신을 제외하고선.

 

 “같이 있어줘요. 죠 씨, 네? 죠 씨 우주의 마지막 순간까지 제가 함께하게 해주세요.”

 

 애절한 목소리에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부슬부슬한 털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자신만큼이나 가빠진 호흡이 목덜미에 그대로 와 닿았다. 입에서는 온 힘을 다한 단어 하나만이 되풀이 되었다. 제발.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최후의 해적들. 바르르 떨려 그 단어 하나조차도 내뱉지 못하는 입술에 갑작스럽게 그의 숨결이 겹쳐졌다. 그 역시 눈물에 막혀 잠겨버린 목소리로 물어왔다.

 

 “정말, 그러길 바라? 난 곧 사라져.”

 “제발, 제발.”

 

 낮게 한숨을 쉬던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우뚝 서서 둥근 유리창 너머의 성운을 바라보았다. 영생을 사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