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
죠 깁켄 + 아임 드 파미유 (청도)
늪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져버린 이유는 그래, 이틀간 벌어졌던 잔갸크 행동대장과의 전투 때문이었다. 욕실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침대에 쓰러져버린 몸이 푹신한 이불 사이로 사라졌다. 보송보송한 섬유 유연제 향기가 피로에 절여진 나의 등을 토닥였다. 조금만 눈을 감자. 그렇게 옷을 입는 것조차 망각하고선 침대 아래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경쾌하게 울리는 아침 새소리에 눈을 떴다. 이런 곳에 새가 있을 줄이야. 과도한 수면으로 멍해진 머리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푸석푸석해진 머리가 시야를 가렸다. 블라인드 마냥 내려져있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맑은 햇빛이 보였다. 아직은 햇빛을 볼 때가 아니었다. 달콤한 잠에 더 취할 요량으로 베개를 찾아 침대 위로 손을 더듬거렸다. 베개 대신 손에 말캉한 물체가 쥐어졌다. 누가 장난이야? 잠잘 때는 잔갸크도 안 건드린다고 했는데,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감색 태양빛이 매섭게 눈을 스쳐 지나갔다. 흐릿해진 풍경이 명확해 지는데 에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풍경이 너무나도 이질적이라서,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호기심과 겁이 공존하는 커다란 두 눈망울로 마주보고 있는 한 여자. 아임? 자신의 이름이 불리어지자 아임은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째서 아임이……. 마주 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를 아시나요? 이상하리만큼 어색한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장난도 잘 치지 않던 아임이 어째서 이런 고약한 장난을 친단 말인가? 묘해진 느낌에 시선을 옮기니, 아임의 손목을 자신의 왼손이 단단히 잡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재빨리 손을 떼어 냈다.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주위의 풍경들. 갈레온에 있는 자신의 방보다 웅장하고, 고풍스럽고, 더 없이 화려한 방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숨을 멈추었다. 제 방에서 뭘 하시는 겁니까? 조금은 날이 서있는 말투에 굳었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꿈이로구나.
아직 잔갸크 제국은 파미유 행성을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때까지의 사실을 이야기하자 예상 의외로 아임은 쉽게 수긍했다. 오히려 화를 내며 성 밖으로 내쫓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구원자가 드디어 도착했다며 기뻐했다. 파미유 행성의 고대 전설에 당신이 나온다나, 뭐라나. 심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듣던 아임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 행성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행성을 버리고 도주하기 보다는, 잔갸크에게 당하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훈련 하겠습니다.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최상의 시나리오는 아니었지만 충분했다. 이걸로 적어도 꿈속의 아임 드 파미유 왕녀는 행성을 지킬 수 있겠지. 그에 반해 흘러넘치는 감정을 추스르며 매일 싸워 나가는 현실 세계의 아임이 생각났다. 어째서인지 미안해진 마음에 고개를 돌려 커다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아임을 바라보았다.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던 아임은 시선을 밑으로 내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언인지 여쭈어 봐도 괜찮을까요?
죠 깁켄. 그녀에게 닿지 못한 말이 허망하게 흩어졌다. 눈을 뜨니 덜컥이는 소리를 내는 나무판자 천장이 보였다. 대답을 위해 살짝 벌어졌던 입을 닫았다. 참으로 이상한 꿈이었지. 의자 위에 걸쳐진 옷을 주워 입고, 머리를 질끈 묶고선 문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죠가 무슨 일이래? 놀려 먹을 생각에 신이 난 루카의 목소리가 마중을 나왔다. 참 시끄럽네. 양 쪽 귀를 막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마벨러스는 항상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고, 루카는 히죽거리며 소파에, 박사와 가이는 부엌에서 막 나오던 참이었다. 보이지 않는 그녀, 아임은? 기분 나쁜 루카의 웃음이 얼굴에서 사라졌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사람이 왜 여기에 있겠어? 네비가 바보! 라며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꿈속보다 더 현실 같지 않은 말에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던 마벨러스가 보다 못해 한 소리 내뱉었다. 아임 드 파미유는 파미유 제국의 왕이잖아. 그런 고귀하신 분이 여기에 머물겠어?
그게 꿈이 아니었구나. 그러니까. 먼 옛날의 내가 왕녀였던 당신의 별을 구해냈고, 당신은 날로 장성해져가는 왕국의 군주에 군림하여 빛나는 영생을 살아가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처참히 짓밟힌 왕국을 등에 지고 날마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던 당신은 누구였는가? 이제는 어떤 상황이 단지 꿈속의 상황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찬란한 명예를 얻고서 살아가는 당신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올라가지는 말아줘. 호흡이 가빠져왔다. 비틀거리는 몸을 루카가 부축해온다. 죠! 갈레온의 선원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턱, 턱.
그러나 그 사이에서도 당신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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