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 桃靑

도청 01-06

소리꾼 by 박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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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정말 여기서 내리시게?”

묵묵히 노를 젓던 우주 뱃사공이 한마디를 던졌다. 무언가를 찾는 듯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커다란 눈을 도르륵 굴려 사방을 살폈다. 고개를 갸우뚱하곤 지도를 펼쳐 이곳의 위치를 짐작하듯 이때까지 왔던 경로를 소리 내 되짚었다. 여기는 이미……. 쓰읍. 그리곤 다시 고개를 들어 미동 없이 밖을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데, 해적 양반. 여기에는 당신이 탐할 수 있을 만한 게 없어. 예전에 왔더라면 모를까. 털어갈 만한 것을 다 털어갔거든, 다른 해적들이. 그러니 다른 행성으로 가는 게 어떨까? 그동안 은하를 같이 가로질렀던 정이 있어서 내가 얘기하는 거야.”

남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듣고 있지도 않은지 알 수 없는 박자에 맞추어 손가락을 투명한 창 위에서 톡톡 두들길 뿐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답에 뱃사공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닫고 다시 제 할 일을 했다.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노가 갈랐다. 나무판자로 조잡하게 짜인 배가 덜컥이는 소리를 내며 잿빛 행성을 향해 나아갔다. 뱃사공이 남자를 흘끔 보고서는 정적을 깨기 위해 말을 붙였다.

“...참 안됐어. 이 행성 말이야. 잔갸크 놈들이 멸망시켰다며? 아, 그러고 보니 해적 양반이랑 전에 일을 같이하던 여자가…….”

“그쯤 하지 그래. 그동안 은하를 같이 가로질렀던 정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남자가 이 전의 말을 뱃사공에게 돌려주었다. 서늘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는지 뱃사공이 고개를 급하게 끄덕이며, 당연하지, 노를 젓는 행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는 몸을 천천히 뒤로 젖혔다. 곰팡이 내가 나는 나무판자가 남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조금 뒤틀렸다. 그러나 뱃사공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면 좋을 게 없으니.

“...도착하면 깨워.”

그렇게 말한 남자의 목울대에선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좋은 여행 되라고. 해적 양반! 본래 받을 뱃삯의 두 배를 받은 뱃사공은 언제 기분이 나빴냐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나의 안녕을 빌었다. 그가 이 별에 대해 무어라 말하기는 했으나 더 들을 가치는 없었으므로 뒤를 돌아 낡아빠진 배에서 뛰어 내렸다. 지면에 거칠게 닿은 발이 뿌연 흙먼지를 일으켰다. 배가 생각보다 높은 곳에 있었는지 발목부터 저린 느낌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끄응, 모양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천천히 추슬렀다.

파괴된 것들이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 규모가 클수록, 본래의 아름다움이 뛰어날수록 과거의 영광을 찾기 위해선 파다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잔갸크가 없어진 뒤에도 이 행성은 빛을 잃은 채로 존재하는 거겠지. 손에 잡히는 것들은 전부 생동감을 잃어 그 구조만 남아 아무런 감각도 내게 선사하지 못했다. 아직도 불타는 저 집은 어떤 단란한 가정이 이야기를 만드는 곳이었겠고, 발에 채 바스러지는 풀은 언젠가 이 주민들이 마음 놓고 뛸 수 있는 공간을 선사했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있는 생명체라곤 나 하나뿐인 거리를 거닐며 그가 사랑했을 행성의 아침을 그렸다. 이 즈음에서 백성들에게 인사를 했을까, 그는 길을 걷는 걸 좋아하니까 아침에는 분명 산책하러 나갔을 테지. 그럼, 산책을 다녀와서 아침을 먹었을까.

바로 여기에서.

다른 건물보다 유독 많은 폭격을 받은, 본래는 그 어떤 건물보다 높고 아름다웠을 그의 집. 아쉽게도 어느 곳에 그의 방이 있었을지 모를 정도로 무너져 내가 모를 그의 흔적을 찾는 일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대신 무더기로 쌓인 잔해들을 하나둘 파헤치며 그가 사랑했던 자들이 남긴 자국들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그가 왔을 때 슬퍼하지 않도록, 울지 않도록.


그날은 여느 날과 같이 생명을 잃은 식물에게 물을 주고 사용할 자가 더 이상 없는 물건들을 주워 모으는 그런 의미 없던 날이었다.

달력이 없어 흙바닥에 대충 네모만 이어 붙여 그린, 숫자조차 없는, 달력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무언가의 옆으로 오늘 수확한 물건들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건 검이었나? 조각나버린 철 조각을 이리저리 맞추어보았지만, 한 번 어긋난 것들이 제자리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손에 쥐고 있던 조각을 던지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어느새 길어 어깨까지 자란 머리칼을 거칠게 넘겼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돌아가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보랏빛의 성운이 머리 위를 지나는 것으로 보아 새벽쯤의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오늘도 늘 그랬듯 작은 네모 칸 안에 작대기를 그을 요량이었다.

“...죠 씨?”

의미 없던 날을 보내려던 찰나 문득 의미를 가져다 온 건 희미한 실낱같은 목소리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바람이 시작되는 곳으로부터 그가 우뚝 서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고동빛 머리카락과 분홍색 케이프 자락,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붉어진 그의 코끝. 그가 멸망한 행성에 발을 디디기만 했을 뿐임에도 멈춰있던 별이 옴지락거리며 태동했다. 넘쳐흐르는 숨을 참고서는 그에게 되물었다.

“...왔나?”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눈을 한 그는 입을 크게 열었다간 닫고, 뒤를 돌아 방금까지 걸어 왔었을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그를 따라가 잡지 않았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잘 알 수밖에 없었던 사이였으니 그가 발을 세차게 구르며 다시 내 앞으로 불쑥 다가왔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주먹을 쥐고 있는 힘껏 내 어깨를 내리쳤지만 나는 흔들리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계속해서 나를 때리는 그를 말리지도 않았다. 그가 채 삼키지 못한 울음을 결국 쏟아내도 나는 그의 뺨을 다정하게 훑어주지도 않았고, 울지 말라는 그 흔한 말도 내뱉지 않았다.

다정하게 굴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으니 그저 자리에 우뚝 서서는 그가 천천히 무너져 내릴 때야 같이 무너져 내리는,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라기에는 너무나 건조한 행동거지로, 여전히 사랑스럽고 소중한 그를 마주했다. 그는 나를 향한 원망의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퍽. 퍽.

그건, 그와의 첫 번째 재회 순간이었다.



02

언젠가 그와 함께 보았던 영화에는 사랑했던 이들이 몇 년 뒤 눈물로 젖은 재회를 하며 다시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있었다. 본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부둥켜안고서는 달짝지근한 말과 함께 서로의 눈이 닳도록 바라보던 영화 속의 연인들. 그런 그들을 보던 그는 덮고 있던 담요를 끌어와 양 볼을 감싸며 옅은 비명을 질렀다. 너무 두근거리지 않나요? 동의를 구하는 설렘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입에 있던 팝콘을 마저 삼키고서는, 잘 모르겠는데, 무미한 대답으로 화답했다. 무어라 한마디 할 법도 한 대답이었는데도 그는 내 대답이 꽤 재미있었는지 와르륵 웃고서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너와 함께 있는 지금이 더 두근거리는데,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할 대답을 애써 삼키며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목에 무언가가 걸린 줄 착각한 그가 몸을 일으켜 콜라를 건네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걸리긴 걸렸지, 목에서. 반은 맞았으니 딱히 부인하지 않고 콜라를 받아 마셨다. 내 상태가 멀쩡해진 걸 본 그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료로 적셨음에도 말라오는 입에 마른침을 몇 번 삼킨 나는, 몸을 슬그머니 기울여 그의 어깨와 내 어깨를 맞대었다. 그 역시 몸을 내 쪽으로 기울였다. 적당한 온도가 몸을 타고 흘렀다. 그래서 아까의 주인공들이 서로의 몸을 그렇게 부둥켜안았던 걸까? 재회의 장면이 조금은 로맨틱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재회가 그때의 영화처럼 달콤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무의식인 기대를 했었나 보다. 조금의 진정 뒤 멀찍이 떨어진 그의 두 눈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나의 시선을 피하며 애꿎은 흙바닥만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간만이네.”

대략 462일 만이지만. 정확한 수치는 입에 담아 올리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는지 그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은 항상 정확한 감정만을 말하고 있어 좋았다. 약간의 분노, 원망, 슬픔, 아주 많은 그리움, 걱정 그리고 애정. 그의 커다란 두 눈이 나의 감정을 파악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옛날처럼 읽는 것을 포기하고선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그사이 변하지 않는 버릇, 말하는 이의 목을 바라보는 것.

“왜 오셨나요, 죠 씨?”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내가 이곳에 왜 있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확실히 알아야만 했다. 내가 여기에 오기를 그가 바랐으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을 했던 때에. 하지만 내 대답이 마음에 와닿지 않았는지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지 그 작은 입을 벌렸지만 이내 입매를 굳혔다. 그리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뒷걸음을 치며 고요한 목소리로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내렸다.

“...여기에 계실 필요 없으세요. 그때는... 그 시절은 지났으니까요. 그러니 죠 씨. 이만 이 행성을 떠나주세요.”

“싫다면.”

“네...? 네?”

예상과는 다른 답변이었는지 그가 과도하게 놀란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와 슬며시 입가를 가리며 미소를 지었다. 내 웃음을 다른 방향으로 오인했는지 그의 얼굴이 붉어지더니 씩씩거리며, 그럼 죠 씨 마음대로 하세요, 평소보다 높아진 톤으로 말하고서는 뒤돌아 콩콩거리며 왔던 길을 돌아갔다. 어, 어. 그를 잡으려 했을 때는 이미 멀어진 뒤였다. 입안이 씁쓸했다. 연인으로서의 다정함은 보여주지 못해도 동료로서의 배려는 보여줄 수 있을 거란 다짐이 무색했다. 우리는 이제 동료보다도 더 멀어진 사이가 되어버렸구나. 같은 행성에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쩐지, 그가 은하 끝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흙바닥에 그린 엉성한 달력은 발로 문질러 지웠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귀찮기 짝이 없는 이 달력이 존재할 이유는 더 이상 없었다. 그 옆에 늘어진 잡동사니 역시 다른 곳으로 모조리 옮기고서는 내가 마당이라 정한 영역을 분주히 청소했다. 다음은 집 안에 있던 가구를 정리했다. 가구라고 칭할 수 있는 건 얼마 없었지만, 먼지가 쌓인 곳을 닦고 흐트러진 물건들을 가지런히 두었다. 집 밖으로 다시 나와 그가 걸어간 방향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는 따라오지 않기를 바라겠지, 그렇다면 나는 감히 그를 따라가선 안 될 일이었다. 먼저 작별을 고한 이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다정함을 가정한 애정을 보여주지 말아야 했다. 사과하거나 다시 사랑을 하자는 말은 더더욱. 그저 그가 원할 때까지 기다리고 무너지고 마음을 굳히며 선택을 기다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과 화해는 이러한 방식밖에 없으니까. 하얀 별이 머리 위로 떠오르는 아침까지 그가 걸어온 길을 바라보며 다시 걸어오지 않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하다 눈이 침침해질 때쯤에서야 다 떨어져가는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얀 별이 뜨고 지는 걸 세 번 목격하는 동안 그는 나의 앞에 머리카락 한 톨도 비추지 않았다. 역시 그때 쫓아가는 게 정답이었나 싶다가도 마지막으로 본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집에서 운동하며 그가 문을 두들기기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나가는 줄 알았던 네 번째 날, 무언가가 문을 두들겼다.

“...뭐야.”

콧등 위로 차가운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침낭에 몸을 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불청객이 밀려오는 잠을 도로 몰아냈다. 투덜거리기도 잠시, 방금은 맛보기였다는 듯 세찬 비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쏟아졌다. 차마 보수하지 못한 지붕 사이로 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금세 사방에 물웅덩이가 생겨났다. 비척비척 침낭에서 나와 그나마 물이 새지 않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사이였지만 몸이 꽤 젖어 찝찝했다. 고무줄로 머리카락을 다시 동여매고 몸에 찰싹 달라붙은 윗옷을 벗으려는 순간, 빗소리를 뚫고 희미한 두드림이 들려왔다. 동작을 멈추고 잠시 문을 바라봤다. 이건 명백한 그였다. 그가 서 있을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지체 없이 문을 열었다.

다시 문을 두들기려고 했던 건지 그가 어정쩡하게 손을 든 자세로 서 있었다. 축축하게 젖어버린 나를 보고 놀라 두 눈을 크게 뜨며 그가 쓰고 있던 우산을 냉큼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 때문에 그가 젖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보다 내가 젖는 게 더 마음이 쓰였는지 연신 눈으로 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음이 눅눅해져만 갔다. 우산을 쥔 그의 손 위로 손을 겹쳐 쥐고서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는 우리가 모두 하나의 우산 아래 모여 있었다. 그가 숨을 참는 게 느껴졌다. 잡힌 손을 옴지락거리던 그가 시선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같이 가실래요?”


03

“나 잠시 어디 다녀오려고.”

이제 더 이상 싸울 일도 없잖아? 9 스트레이트를 내려놓으며 루카가 말했다. 졌다는 사실에 좌절할 틈도 없이 테이블 위로 떨어진 폭탄 발언에 눈을 크게 뜨며 루카를 바라보았다. 나를 힐끔 바라본 루카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뭐야, 죠가 그렇게 놀라면 다른 애들은 더 놀라겠네.”

“...갑작스럽네.”

목을 몇 번 가다듬고서는 발언에 대한 감상을 내놓았다. 다음 게임을 위해 패를 섞던 루카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돈이 되는 일이 없나 싶어 계속 있었는데 말이야. 벌써 반년째 건수 없이 떠돌고만 있잖아?”

돈이 되는 일이 아니더라도 루카는 우리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하고자 했을 것이다.

“나는 한번 결정한 일은 바로 실행하는 편이라.”

아니, 아마 밤 잠 설쳐가며 고민했겠지. 그러나 루카의 말에 대꾸하거나 반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루카 마음의 공간이 부족해 그것들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었으니, 그래, 가볍게 대답하고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에 들린 패를 확인했다.

루카가 간단한 짐만 챙겨 배를 떠나고 나서는 마벨러스가 이때다 싶었는지 남은 인원들을 배에서 내쫓았다. 물론 가이와 박사는 배에 남고 싶다며 마벨러스의 바지를 붙잡고 애원했지만, 혼자만의 목표가 생겨버린 마벨러스에게 통할 리 없었다. 가이는 지구로 돌아갔고 박사는 머리를 붙잡고 혼자 고민을 하더니 우주공학회가 열리는 별로 떠났다. 마벨러스가 갈레온과 함께 사라지는 모습까지 지켜본 우리 둘은 그 누구도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같이했다. 뚜렷한 목적지도 없었지만, 작은 비행선 안에서 서로에 기대어 잠들고 모르는 행성에 발을 디딜 때 마다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 확신했다.

그래, 그날 전까지는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번듯한 선실이 있는 조각배에서 지내고 있었다. 눈동자를 굴려 비가 새거나 바람이 들어오는 곳은 없나 보았지만 따뜻하고 포근한 공기만이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삐져나왔다. 잠깐이지만 쏟아지는 비를 맞아서인지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에 어쩔 줄 몰라 어정쩡한 자세로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뻗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의 손이 다가와 재킷을 쥐었다. 느릿느릿 탈의한 옷이 그의 팔에 걸렸다. 옷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의 팔과 치마를 적셨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욕실은 저 방향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는 옷을 세탁하려는 요량인지 뒤돌아 작은 통로로 들어갔다. 남은 옷가지들을 차례대로 벗고 조심스럽게 욕실로 들어섰다. 따뜻한 물로 몸을 적시는 동안 문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가운밖에 없어서……. 말끝을 얼버무린 그는 문 앞에서 몇 번 서성거리다 선실 문을 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본래 지내던 곳에 여분의 옷이 있었지만, 이런 날씨에 그를 다시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욕실 문을 살짝 열었다. 가운과 함께 두터운 수건이 탑처럼 쌓아져 있었다. 이렇게는 필요 없는데. 그는 아마 내가 감기에 걸릴 것을 걱정해서 이렇게 둔 것이겠지. 푸스스, 웃음이 습기 사이로 퐁퐁 솟아올랐다.


말하지 않은 게 무색하게도 그는 내가 본래 지내던 곳에서 짐을 가져와 물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총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선 옷가지를 꺼내 갈아입었다. 걸치고 있던 가운을 손에 쥐고 다시 뒤돌아보자, 그가 얼굴을 잔뜩 붉히고선 올망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기우뚱거리자, 그가 새된 목소리로 이유를 설명했다.

“...죠 씨!”

아무래도 그의 앞에서 바로 옷을 갈아입은 게 부담스러웠나 보다. 새삼스럽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서는 맞은편에 털썩 앉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파자마 소매에 얼굴을 묻고 두어 번 마른세수하던 그는 나를 힐끔 보고서는 가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여기에서 머무는 건 어떠실까요? 원래 지내시던 곳은 너무 춥고, 빗물도 새는 데다가 문도 너무 약해서 손대면 부서지고…….”

“부쉈구나.”

그가 입을 합 다물고서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넓적해진 입술을 씰룩거리다, 정말 살짝 열었을 뿐이에요, 부끄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해명하는 모습에 나는 또 무력하게도 더 깊은 사랑에 빠졌다.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본 그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물렸다. 내 사랑이 그에게 보였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선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조금은 풀어졌다고 생각했던 사이가 단단히 경직되어 우리의 목을 조여 왔다. 분명히 들어올 때는 따뜻했는데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는지 온도가 점차 식어갔다. 그가 나를 훔쳐봤다. 나도 그를 훔쳐봤다. 이미 끝난 사이에서 사랑에 던져지는 것은 호흡 장치 없이 물에 들어가는 것과 진배없었다. 내가 숨 쉬는 곳은 물속이 아닌데도 자꾸만 숨이 먹먹해졌다.

수건으로 물건을 닦고 내려놓는 소리만이 작은 선실을 채웠다. 그에게 먼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을 걸었고 잠시 말을 고르던 그 역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대답을 했다. 실을 끊을 수는 없었지만, 목을 조이던 게 느슨해질 때까지 우리는 목울대를 움직여 말했다. 멀어졌던 몸을 가까이 붙이고 우리가 동료였던 시절처럼 시답지 않은 장난을 쳤다. 아까의 일은 서로 함묵하기로 했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침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멀찍이 떨어진 문 앞에서 자도 된다고 말했지만, 문 앞은 너무 추우니 자신 근처에서 자라며 그는 완강한 태도로 내게 주장했다. 이불을 바닥에 펼치고 팡팡 두들긴 그는 숄을 여미며 작은 침대에 먼저 누웠다. 사실 밖이 보이지 않아 지금이 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가 누웠으니 순순히 불을 끄고 이불에 천천히 몸을 뉘었다. 옅은 홍차 향이 났다. 그가 누워있는 곳을 살짝 바라봤다. 주위보다 어두운 그의 몸이 천천히 움직여 모로 누웠다. 나를 마주 보고 있는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가 조각조각 눈에 맺혔다 사라졌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은 올바른 길일까, 잠시 갈라져 지름길을 모색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제는 영영 갈라져 만나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일까. 그가 이불을 올려 실루엣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 나는 등을 돌렸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네가 길을 알려주길 바라며 나는 꿈으로 향했다.



04

눈을 뜨면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했던 간밤의 꿈이 무색하게도 그는 간단한 아침을 먹은 뒤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그는 아침 내내 침묵을 고수했지만, 길을 걷는 와중에도 잘 따라오고 있는지 힐끔거리며 바라보는 눈빛이 하나의 말과도 같아 나 역시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그가 나를 바라볼 때 마주 바라봐주며 눈인사를 건넸다.

어디까지 가려나 싶어 그에게 목적지를 물어보려던 순간 그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의 뒤통수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니 그와 내가 이 별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장소였다. 그가 걸음을 움직여 가지런히 쌓인 흰 대리석 조각 앞으로 다가갔다. 대리석 조각을 툭 건들던 그가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어요, 다 무너져 내렸을 텐데. 이렇게 쌓여있을 수는 없는데…….”

다 무너져 있었다, 내가 쌓기 전까지는. 부자연스럽게 반듯한 대리석들은 내가 매일 쌓아 올린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서, 찾아다닌 겁니다.”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여기 있음을 그는 확신했었다. 대리석은 그가 언젠가 내 손바닥에 대고 그렸던 궁전의 기둥 모양과 얼추 비슷하게 놓여 있었으니, 그는 엉성한 기둥의 모양을 보고서 나를 떠올렸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진실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굳어있던 고개를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이고서는, 해적다워졌네, 되지도 않는 칭찬을 하며 시선을 기둥 끝 언저리에 두었다. 그런 나를 보던 그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근처에 있던 작은 대리석 조각을 손에 쥐었다. 내가 만든 기둥 바로 옆 땅을 발로 평평하게 다지더니 손에 쥐고 있던 대리석 조각을 내려놓았다.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그는 그나마 멀쩡한 조각을 아까 바닥에 둔 대리석 조각 위로 쌓았다. 그리고는 그 행위를 반복했다. 색이 바래지 않은 조각을 찾아 그 위에 두고, 잠시 멀리 떨어져 쌓아 올린 모양을 보더니 조각을 빼내어 다른 곳에 두고. 나는 거리를 두고 그가 쌓아 올리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그의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아지자, 손바닥을 탁탁 털어내고서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렇게 생겼답니다.”

대리석 기둥이 두 개가 되어 있었다. 하나는 반듯하지만, 그의 기억과는 다른 기둥이었고 하나는 삐뚤었지만, 그가 매일 봐왔을 형태의 기둥이었다. 그가 손바닥에 그린 기둥의 감촉을 따라 쌓았지만, 내가 쌓은 기둥은 이 별의 것이 온전히 되지 못했다. 기둥 하나만으로도 그와 나의 격차가 보였다. 이 별에 대한 이야기를 곱씹고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아도 나는 그가 그리는 시절 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는 없었다. 어쩐지 입안이 씁쓸해 기둥에 대해 종알거리며 설명하는 그의 음성을 들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매일 기둥을 세웠다. 아침을 먹고 점심쯤에 나가 저녁이 되기 전에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적당한 크기의 대리석을 그가 가져오면 내가 대리석을 세우며 기둥의 형태를 만들었다. 그렇게 기둥이 여덟 개쯤 세워졌을 때, 내가 세운 기둥은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게 좋지 않겠냐,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내가 세운 기둥을 그대로 두는 게 좋다고 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파미유 별의 기둥은 아니지만, 죠 씨께 기억하시는 이 별의 기둥이니까요. 내 손바닥에 기둥을 그린 날을 기억하는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유를 말한 그가 등을 휙 돌리고 포르르 대리석을 찾으러 갔다.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내가 처음으로 세운 기둥 주위로 세워진 아홉 개의 기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보여주는 다정은 항상 이랬다. 잘못 세워진 기둥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 다르게 세워진 기둥마저도 옳다고 말해주는 것. 질문을 한 다음 날부터 기둥을 세우는 대신, 이 별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그의 기억을 꺼내 나에게 들려주는 것 역시 그의 다정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우리 사이가 어색했음을 잊었는지 그는 쉴 새 없이 말하며 내 옷자락을 손에 꼭 쥐고 다녔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동그란 두 눈으로 올려다보며 이제는 알겠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충분히 그리고 별에 스며들 수 있을 때까지 설명해 주겠다는 의지가 두 눈에서 보였다. 그럼 나는 그런 눈빛에 속수무책으로 숨이 막혀 매번 목을 가다듬고, , 짧게 한마디를 말했다. 맨살이 닿고 있지 않아도 우리 사이에 흐르는 다정함을 통해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옛날의 나라면 온기를 남김없이 받아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조건 없는 따스함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되돌려주지 못하는 다정은 나에게 부채와 다를 바 없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우리는 전과 같은 사이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동료 사이에 그쳤던 시절처럼 서로에게 말을 건넸고 적절한 수준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그러나 사랑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는 선을 누군가 넘으면 다른 누군가 귀신같이 알아채고서는 우리 사이에는 명백히 선이 존재함을 알렸다. 목을 조이던 실은 이제 우리 둘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다. 우리 둘 다 섣불리 선을 넘거나 끊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서로를 보이지 않는 선 너머로 밀고 당기기만 했다.


그와 재회한 지 56일이 되던 날이었다. 이 배에 올랐던 날과 같이 추적추적 비가 내렸고, 나는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산책을 나섰다. 혹여 감기가 들까, 걱정했던 그는 나의 목에 어울리지 않는 푹신한 목도리를 빙빙 두르고 커다란 우산을 손에 쥐어주었다. 이 정도의 비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우산 손잡이에 남은 따스함을 되새기고 싶어 그가 바라는 대로 우산을 들고 나갔다. 우산은 두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매우 컸다. 우산의 크기가 그의 마음이라도 되는 것 같아서, 웅덩이를 밟아 물이 발목을 적셨음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우산에 밀려 마음이 붕 떠올랐다.

마음이 떠오름에 따라 몸도 떠올랐는지 평소에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게 들어왔다. 스무 개가 넘는 기둥 중 하나의 기둥 틈에서 어두운 빛을 내는 돌을 발견했다. 기둥이 무너지지 않게 조심스레 돌을 빼냈다. 빼내고 보니 돌이 아니라 단단한 흙으로 둘러싸인 작은 보석이었다. 그도 모르게 대리석 사이에 끼어 기둥의 일부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옅은 분홍빛을 내는 보석에는 주인의 이름이 없었지만 누가 보아도 그의 보석임이 확실했다. 세공된 모양을 보니 티아라의 정중앙에 박혀있을 법한 장식이었다. 손으로 뽀득 문질러 보석을 닦아 주머니에 넣고서는 돌무더기를 헤집으며 티아라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내게 한 번도 자신이 썼던 장식들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보석이나 반지 따위는 그가 기억하는 파미유 별의 아름다움에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사치품에 대해 말하기보단 이 별의 자연환경에 대해 말하는 걸 좋아했다. 하지만 티아라를 찾아 그에게 안겨주고 싶었다. 어떤 모양인지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정말 티아라가 맞는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는 그가 이 별의 물건을 손에 쥐었으면 했다. 파미유 별의 풍경은 과거에서 멈춘 게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자연을 되살리는 일은 불가능했으나 티아라를 다시 조립하거나 기둥을 세우는 일은 가능했으니까. 손잡이는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지만 몇 번이고 매만지며 건네준 마음을 되새겼다. 몇 분을 뒤졌을까. 보석이 박혀 있었을 만한 은색 장신구가 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몇 년간 울리지 않았던 모바이레츠가 시끄럽게 울었다.


05

손에 들려있던 보석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돌무더기 사이로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다시 줍지 않았다, 아니, 주울 여력이 없었다. 모바이레츠에서 들려오는 마벨러스의 음성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믿기지 않아 나답지 않게 되물었다. 마벨러스가 한숨을 내쉬고서는 다시 말했다. 갈레온이 부서졌다, 바쿠토 해적단 녀석들이 비겁하게, 지구로 향해서. 그 녀석들에게 당해 어딘가 다친 모양인지 말 사이사이로 마벨러스의 신음이 섞였다. 이를 아득갈며 분노하는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그래서.”

내 물음에 마벨러스가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옅은 한숨과 함께 말을 뱉어냈다. 다른 녀석들에게도 연락해야지.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알겠다 답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반대편 손에 들려있던 우산 손잡이의 매끈한 감촉이 마음에 걸렸다. 다급하게 마벨러스를 불렀다. 이른 시일 내로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었지만 그래도, 갈레온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걸 될 수 있는 한까지 미뤄두고 싶었다. 마벨러스는 그런 내 생각을 코앞에서 보고 있는 듯, 아임은 가장 나중이야, 말하고서는 통신을 끊었다.

모바이레츠를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우산이 뒤로 기울어 비가 고스란히 얼굴 위로 내려왔다. 이대로 비를 맞으며 열을 식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우산을 바로 썼다. 비를 맞은 나를 보면 그가 걱정할까 봐, 그가 둘러준 목도리가 젖을까 봐, 그가 우산과 함께 건네준 마음이 상할까 봐. 나는 아직도 그의 소중한 미소를 지켜내고 싶었다.


그는 아무 연락도 받지 못한 듯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했다. 춥지는 않았는지 어디까지 갔다가 왔는지 종알종알 묻는 모양새를 보고서도 나는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어정쩡하게 현관문 앞에 서서 그가 크지 않은 선실을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입매가 일자로 굳어졌다. 지금 입을 열면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것 같아서, 옴지락거리며 재킷을 벗고 괜히 머리를 털며 선실 한복판에 우뚝 섰다. 커튼을 치던 그가 나를 보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사뿐 다가와 말했다.

“죠 씨. 무슨 일 있으신가요?”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고서는 내 시선을 따라 몸을 살짝 움직였다. 나는 또 그 행동에 마음이 간지러워져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작은 행동 하나에 나의 숨을 조이던 생각들이 부질없이 사라졌다. 이때까지 무슨 고민을 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참으로 이상했다.

“전혀. 배고프네. 밥 먹자.”

그는 무언가 묻고 싶었던 모양이나 이내 입을 꾹 다물고서는 주방으로 향하는 나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밥을 같이 준비하면서도 나를 흘끔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걱정이 어려있었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 걱정할 만한 일이 뭐가 있나 골똘히 생각하는 게 생생히 보였다. 그렇지만 내 걱정을 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수저를 상 위에 놓고 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보이기 위해 태연하게 행동하였다. 고개를 두어 번 갸우뚱거린 그가 맞은편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나도 젓가락을 들었다. 다시 숨을 조여오는 생각들이 넘어가길 바라며 잘 익은 고기를 입에 넣고서는 꿀꺽, 씹어 삼켰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날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니 침대에 그가 없었다. 자고 있던 나를 위해서인지 커튼이 굳게 쳐져 있었고 창밖에서 며칠째 그치지 않는 빗소리가 들렸다. 산책하러 나갔나 싶어 몸을 쭉 늘리며 그의 부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때 모바이레츠가 울렸다.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발신자를 본 나는 몸을 스프링처럼 일으켜 세우곤 재킷도 우산도 챙기지 않고 선실 밖으로 나왔다.

모바이레츠를 바닥에 떨어트린 그가 빗속에서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지 꽤 된 듯 항상 뽀송하던 옷은 축 늘어져 그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는 듯 그는 덜덜 떠는 양손을 꼭 쥔 채로 고여가는 물웅덩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끝까지 알리지 말았어야 했어, 말도 안 되는 욕심이 가득 차올랐다. 왜 하필 내가 자고 있어서, 오늘은 왜 비가 내려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망을 뒤로 한 채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올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죠 씨, 갈레온이…….”

비와 눈물이 분간이 가지 않을 법도 한데 그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길은 선명했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지는 않았지만,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일 때 팔을 벌려 품을 내주었다. 아무 말 없이 떨리는 그의 몸을 엉성하게 토닥였다. 비로 인해 추워서 몸을 떠는 건지 들린 소식이 충격적이라 떠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갈레온은 고치면 괜찮다는 그런 통상적인 위로를 건넬 수 없었다. 고칠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비겁한 자식들이 갈레온을 파괴했고, 괜찮을 거라 믿고 있었던 마벨러스가 다쳤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테니. 그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잘 굽혀지지 않은 손을 움직여 재킷 언저리를 꾹 쥐었다. 나는 그를 가만 바라보다 예전과 같이 자세를 살짝 낮추고는 그를 안아 들었다. 보통이라면 내려달라 말했을 그도 이번에는 가만히 몸을 맡긴 채 내 목에 얼굴을 묻었다. 공기와 다르게 따뜻한 그의 숨이 목 가에 닿았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서로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선실로 같이 향했다.


“...그래서 네가 크리스탈리아에 가는 거야.”

바쿠토 해적단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앞으로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계획을 설명했다. 머그잔에 담긴 따뜻한 차를 마시던 그가 멍하니 앉아있다가 담요를 추스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죠 씨는요?”

또 떠나시나요? 그의 말이 비수가 되어 내 마음 한구석에 쿡 박혔다. 또, 라는 단어 하나에 얼마나 많은 감정과 말이 압축되었는지 알기에 그의 눈을 피해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는 내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갈레온에 갔다가 같이 크리스탈리아로 떠나도 괜찮잖아요, 저희는 동료니까요. 대신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그의 의견을 피력하며 손을 뻗어 그 옛날처럼 내 옷자락을 쥐었다. 그의 작은 손짓에 내 마음이 무력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옷깃에 있는 그의 손을 살며시 떼어냈다. 그러고는 말했다.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알 텐데, 아임 따로 가는 게 나은 선택이야.”

우리를 위한 최선의 선택은 이거야, 꺼내지 못할 말을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혹여 그의 얼굴을 보면 말을 바꾸게 될까 봐 필사적으로 닿아오는 시선을 피했다. 우리 사이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죠 씨는 항상 그랬어요……. 그가 작은 소리로 울먹였다. 그가 자신을 똑바로 보라는 듯 있는 힘껏 내 손을 꼭 쥐고서는 그 가까이 당겼다.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큰 두 눈이 다시 벌게지더니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크게 숨을 들이쉰 그가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저는……. 죠 씨를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아마, 계속.”



06

원점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공간에서 지내기는 했으나 며칠 전과 달리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시시콜콜한 농담 따위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묵묵히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고서는 각자의 몫을 정리하고 각자의 공간에서 이 별을 떠날 채비를 하다 늦은 밤이 되면 각자의 시간에 맞게 잠에 들었다. 이따금 대화를 나눌 때에는 철저하게 해야 할 임무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다 용무가 끝나면 칼같이 돌아섰다. 그는 크리스탈리아로 떠나기 위해 이곳저곳에 연락을 넣고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기 바빴다. 나 역시 갈레온이 있는 곳으로 향해야 했기에, 이동 수단을 알아보고 얼마 있지 않은 짐들을 정리하여 등에 짊어질 수 있도록 쌌다. 처음에는 짐을 미적거리며 챙겼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루카의 전화 한 통에 내 흔적을 그의 배에서 정리하는 일을 서둘러야만 했다.

파미유 별을 지나는 이동 수단이 얼마 없는 탓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올 때 타고 왔던 낡고 시끄러운 배의 뱃사공에게 연락을 했다. 뱃사공은 마치 내 연락을 기다렸다는 듯 길고 시끄러운 메시지로 답변을 보냈다. 별 영양가 없는 내용은 쓱 넘기고서 도착하는 날짜를 확인했다. 나흘 후. 한숨을 쉬며 연락용 통신기를 닫고 딱딱한 선실 벽에 몸을 기댔다. 창밖으로 그가 지나갔다. 무언가를 옮기는 듯 조그마한 창문으로 그의 얼굴이 사라졌다가 다시 보이기를 반복했다. 내 시선이 닿아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그는 표정을 찌푸렸다가 피고 미소를 지었다가 돌연 슬픈 표정으로 무언가를 들여다보았다. 과거의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참 표정이 다양해, 말하고는 투박한 두 손으로 그의 부드러운 얼굴을 감싸쥐기도 했다. 그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생각을 알 수 있다는 점은 내가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요 며칠 간도 그랬다. 그가 말을 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고, 매 순간 어떤 감정으로 나를 대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는 전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서 선택지를 온전히 쥐고 있는 것은 그이니 내가 먼저 다정과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을 그에게 들이밀 수 없었다. 그건 기만이었다. 먼저 이별을 말한 게 누군데, 이번에도 매몰차게 같이 가자는 제안을 거절한 게 누구인데,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그가 우리 사이를 재단하는 일만 기다리면 될 텐데, 그게 정답일 텐데.

생각에 잠긴 사이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서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물건들을 옮기려는 모양인지 선실 밖에서 여러 번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입 안이 씁쓸해졌다. 숨통이 조이는 것 같아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서는 입술을 푸르르 떨며 숨을 내뱉었다. 마른세수를 했다. 푸석한 살결끼리 마찰하며 뻣뻣한 소리를 냈다. 머릿속에서 나비효과라는, 언젠가 지구에서 본 적이 있는 용어가 떠올랐다. 그는 내 마음에 있어서 나비였다. 그가 내뱉는 작은 숨결 하나 눈가의 떨림 하나 손끝이 향하는 방향 하나가 내 마음에 얼마나 커다란 태풍을 불러일으키는지, 내가 소리내어 마음을 고백하지 않는 이상 그는 평생을 모르고 살 일이었다.

어쩐지 요즘은 나답지 않게 마음을 소리내어 전부 고백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자주 든다며, 시답지 않은 생각을 뒤로 한 채 눈을 감고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냉기가 도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사흘 전. 그가 갑자기 금화가 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거절하려 했더니 다른 이들과의 합의로 주는 돈, 임무를 위한 돈이라며 부담가지지 말고 받으라 했다.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걸 알고 있었으나 별다른 말을 붙이지 않고 주머니를 받았다. 그리곤 그가 곤히 자는 새벽에 금화를 도로 그의 코트 안 주머니에 넣었다.


이틀 전. 점심을 먹다 그에게 이틀 뒤 떠나겠다는 통보를 했다. 그는 수저를 챙 소리 나게 내려놓고 나를 흘기더니 숄만 챙겨서는 선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밤이 되어서야 붉어진 코를 하고 돌아온 그는, 저는 이해 못 하겠습니다, 말하고서는 작은 주먹으로 내 팔을 툭툭 쳤다. 나는 그가 원할 때까지 맞아주다 품에 안기는 그에 뻣뻣한 자세로 마주 안아주었다.


하루 전. 낯선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보니 그가 별빛을 맞으며 침대에 누워 울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침대 위로 몸을 기울이자, 내 팔을 잡아당긴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몸을 붙여왔다. 죠 씨. 눈도 뜨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이름이 가슴에 시큰함을 남겼다. 그의 옆자리로 비집고 들어가 허리춤에 팔을 두르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뜨지 않았다. 자는 척을 할 모양인지 이름을 부른 게 잠꼬대인 것처럼 옅게 무어라 중얼거리고서는 몸을 움찔거렸다. 내가 허리에서 손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 몸을 천천히 틀며 자세를 편하게 하기 위한 움직임처럼 보이게 몸을 뒤척였다. 나는 그를 깨우지 않았다. 전혀 고르지 않은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호흡을 가다듬고 그가 불편하지 않게 자세를 바꿀 뿐, 그가 흘려버린 마음을 주워 담아 올리지는 않았다.

당일. 아침이 다가오는지 하얀 별이 쏟아내는 빛이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빛 때문에 그가 깨어날까, 물론 그는 이미 깨어있었지만, 상체를 조금 일으키고 손을 뻗어 커튼을 단단히 쳤다. 가까이 닿는 숨결에 그가 눈을 질끈 감았지만 나는 다시 모른 척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아까보다 거칠어진 호흡이 들렸다. 침대에서 나와, 싸둔 짐을 어깨에 메고서는 한숨을 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우리의 숨이 공중에서 동시에 흩어졌다.

“아임.”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묵직하게 떨어진 이름을 들은 그가 숨을 멈추었다. 이제 이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 건 나 하나였다. 그의 숨통을 틔워주기 위해 다시 말했다.

“아임 드 파미유.”

내가 부르는 그의 이름을 한 어절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는 더욱 숨을 죽이고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기적인 나는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공주님.”

이번에는 나 역시도 숨을 참았다. 그에게 있어 당연한 호칭이었는데도 내가 입에 올린 순간 터무니없이 멀어져 버린 우리의 사이가 실감이 났다. 어쩌면 우리의 거리는 이만큼이나 벌어졌을지도 몰라, 그 역시 점차 멀어지는 우리의 간격을 듣고 숨을 터트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자는 척을 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가 슬픔을 내게 내비치고 싶지 않다면 나는 필사적으로 모른 척을 할 셈이었다.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울음소리가 커졌지만, 발걸음을 재촉하여 선실 문고리를 손에 꽉 쥐었다. 죠 씨. 사박거리는 이불 소리가 그가 몸을 일으켰음을 알렸다. 녹이 슬은 문고리 너머로 흐릿한 그의 인영이 비쳤다. 문고리를 힘주어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흐렸던 그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며 문이 열렸다. 그가 마룻바닥에 발을 내려놓았다. 비틀려버린 바닥이 끼긱거렸다. 나는 어깨에 힘을 단단히 주고서는 선실을 나섰다.

나는 쉽게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항상 빙빙 돌아 가장 어려운 방법으로 그를 사랑했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펼 생각도 하지 않고 갈레온으로 향하는 배가 있을 장소로 향하는 것, 그가 쉬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 다정을 핑계 삼아 그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 것, 사과와 용서라는 단어는 우리 사이에 품어보자는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입에도 담지 않는 것, 나는 그를 그렇게 홀로 두고 그 방식을 사랑이라 명명했다.

옛날 그 언젠가 그가 내게 말했다. 죠 씨는 생각보다 사랑이 많으시군요. 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가지고 있는 사랑이 많다며, 그 사랑이 자신을 향해서 기쁘고 감사하다 말하는 그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그의 사랑이 더 많아 보인다는 나의 말에 그는, 죠 씨 역시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웃으며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었다. 그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까. 서둘러야 할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고개를 들어 파미유 별의 아침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파괴되어 폐허가 된 대지와는 다르게 드넓은 하늘은 아름답게 발광하며 생명의 태동을 알렸다. 우리의 사랑도 이런 걸까, 이 별과 같은 거였을까, 아임.

 

중얼거린 남자는 어긋난 것들이 가득한 별을 떠나기 위해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 桃


타 사이트에서 연재했던 분량 중 01~06 (靑) 까지의 분량을 한 번에 올립니다.

즐거운 감상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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