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07-12
桃
07
“루카, 그 돈은 우리 다 같이 쓰기로 한 돈이잖아!”
“시끄러워, 바-보! 내가 챙겨온 돈을 왜 너희와 나누어 써야 하는데?”
“루카 씨이……. 갈레온이 없으니 잘 곳이 없어졌다고요…….”
“그러니까. 잘 곳 정도는 알아서 챙기라고. 이 3억을 얻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가.”
루카가 그렇게 나온다면! 박사님이 앓는 소리를 내며 돈가방에 매달렸다. 두 눈을 질끈 감고서는 깍지를 껴 가방에서 자기 몸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웠다. 루카 씨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이내 입을 삐죽거리며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박사님이 비명을 지르기는 했으나, 돈가방에서 몸이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저도! 그 모습을 보던 가이 씨가 비장한 얼굴로 양팔을 걷어붙이더니 박사님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당황스러운 표정의 루카 씨가 있는 힘껏 돈가방을 흔들었다. 그러나 자존심보다 당장의 살길이 우선인 두 분은 돈가방과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아, 정말! 알겠으니까 떨어지라고! 무거워!”
“정말?”
“약속한 거예요, 루카 씨!”
항복을 선언한 루카 씨의 말에도 영 믿지 못하겠는지 두 분의 손이 돈가방 근처를 배회했다. 이를 앙다문 루카 씨가 팔꿈치를 휘두르고 나서야 꼬리를 내리고 손을 거두었다.
“두 분이 그러지 않으셨어도, 루카 씨께서는 저희를 재워 주셨을 거예요.”
그렇죠? 전과 다를 바 없이 활기찬 에너지를 발산하는 세 분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정말요? 가이 씨가 감동하셨는지 턱에 주름을 잔뜩 만들고서는 루카 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루카 씨가 나와 가이 씨를 번갈아 보다가, 시끄러워 바보, 하고서는 가이 씨의 가슴팍을 팔꿈치로 꾹 눌렀다. 그 모습을 보던 박사님이 호탕하게 웃고서는 내가 들고 있던 남은 레인저 키를 들고 가셨다.
“그러고 보니. 아임, 용케도 크리스탈리아에서 그 방패를 가져왔네.”
“베리타스의 방패 말씀이죠? 그게…….”
“아임 씨께서 부탁하셨으면 당연히!”
방패를 빌려 왔을 거라 굳건하게 믿고 있는 가이 씨에게 차마 훔쳐 왔다는 진실을 말할 수가 없어 어색한 웃음만 흘려보냈다. 조만간 크리스탈리아에 가서 사죄의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자러 가볼까요? 가이 씨의 말에 저 멀리 서 있던 두 분이 천천히 다가왔다.
“제가 아주 끝내주는! 호텔을 알고 있거든요. 물론……. 돈은 제가 내지는 않지만…….”
가이 씨가 루카 씨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말했다.
“크흠, 하지만! 호텔의 쾌적함만큼은 저 이카리 가이가 보장합니다!”
과장된 몸짓을 하는 가이 씨를 뒤로하고 마벨러스 씨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루카 씨가 손을 휘휘 흔들고서는 마벨러스 씨의 뒤를 따라갔다. 그쪽이 아니라구요! 가이 씨가 소리를 치며 박사님에게 어깨동무하고선 앞서가는 두 사람의 꽁무니를 따라갔다. 박사님이 무어라 소리쳤지만, 발음이 불명확해 알아듣기 어려웠다.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10년 전과 다름없는 것 같아 절로 맑은 웃음이 삐져나왔다. 몸을 들썩이며 웃다가 아직 옆에 남아있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껴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아, 여기. 10년 전과 다른 게 딱 하나 있었지. 추억에 젖어 한껏 누그러졌던 입가가 단단히 굳어갔다.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그저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만 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단지 눈동자를 마주하고,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그동안의 생활을 짐작하다 버석하게 말라버린 우리 사이를 비관하며 등을 돌렸다. 눈꺼풀이 떨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옅은 한숨만이 우리 대화의 전부였다. 비교적 더운 계절임에도 습기 하나 없이 흩어진 한숨을 신호로 그가 먼저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나도 그의 걸음을 따라갔다. 10년 전의 우리가 그래왔듯, 익숙하게.
가이 씨의 말은 단순한 허풍이 아니었는지 도착한 호텔은 친절하고 쾌적했다. 보통이라면 몇 명씩 묶어 같은 방을 썼겠지만, 큰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보상으로 각방을 쓰게 되었다. 물론 거기에는 가장 큰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마벨러스 씨와 돈을 쥐고 있는 루카 씨 두 분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가 좋으니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호텔 로비에서 소란스럽게 다투고 있는 우리 해적분들을 뒤로 한 채, 먼저 방으로 쏙 들어왔다.
지구에서 특별히 발달한 기계인 ‘안마의자’에 몸을 맡기고 노곤하게 늘어졌다. 5년 만에 오는 지구라는 별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 인간들이 레전드 분들을 이용하여 배틀을 벌인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으나, 직접 지구인들을 마주하고 두 눈으로 그들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바쿠토 해적단을 무찌를 수 있었다. 끄응. 안마의자에서 일어나 차 종류가 놓은 테이블 위로 다가갔다. 성분표를 한참 살펴보다 몇 년 전에 특이하다고 느꼈던 종류의 티백을 집어 들었다.
전기포트에 물을 올리고서는 폭신한 소파에 몸을 맡기곤 눈을 감았다. 몇 주간 우선으로 해왔던 일이 끝나니 당분간은 푹 쉬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해야만 하는 일들이 태산같이 쌓여 있었다. 우선은 해적단 분들과 앞으로의 거취에 대해 의논해야 했다. 잔갸크를 해치우고 우주의 보물들을 대부분 손에 넣은 이후로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여 각자의 갈 길을 걷기로 한 일이었는데, 이렇게 새로운 세력들이 우후죽순 생겨날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예전과 같이 여섯 명 모두가 뭉쳐, 네비까지 합한다면 일곱 명이, 우주를 다시 여행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하는 일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똑똑. 노크 소리가 생각을 깨고 들어왔다. 루카 씨가 찾아온다고 했었는데, 몸을 일으키고서는 총총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루카 씨가 아니었다. 푸른 외투를 벗어 얇은 티셔츠만 입은 그가 뻣뻣한 자세로 있었다. 초대하지 않은 사람의 등장에 말문이 막혀 내가 침묵을 유지하는 사이 그가 입을 열었다.
“...들어가도 되나?”
그 순간은, 그와 재회한 두 번째 순간이었다.
08
그는 항상 그래왔다. 로맨스 영화를 보아도 맥락을 파악하는 데 급급했고 인물들의 감정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곧잘 흥미를 잃곤 했다. 내가 질문하는 것에 충실하게 답변하고 식은 팝콘을 입에 넣는 행위만을 반복했지만, 나는 그런 그가 좋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일을 하러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끈덕지게 내 옆자리를 지켰다. 하다못해 옆에 앉아 부족한 잠을 잘 수도 있었으나 내가 영화를 다 보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날 때까지 그는 묵묵히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보여주는 사랑이란 그런 형태였다. 영화에 나오는 노골적인 사랑조차도 해석하지 못해 자신의 사랑이 어떤지 잘 몰라 무의식적인 형태로만 도출되는 게 그의 사랑이었다. 자세히 보아야만 드러나는 그의 사랑을 나는 사랑했다.
어떤 연인들이 극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을 보고선 나는 낭만적이라고 말했고 그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잘 모르겠다고 답하며 나의 손을 슬며시 쥐어오는 그가 좋아 나는 까르륵 웃었고, 웃는 나를 바라보던 그 역시 옅은 미소를 짓다가 헛기침을 몇 번 하며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얼마 뒤 몸을 슬며시 기대는 그에게 몸을 마주 기울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영화에 나오는 재회가 아무리 낭만적이더라도 부럽지 않다고, 우리는 서로 떨어질 일이 없으니 재회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서 참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살짝 떠올렸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그의 팔에 얼굴을 묻고서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영화를 보며 생각을 머리에 묻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재회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기에, 두 번째의 재회임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얇은 문턱을 두고서는 한참을 대치했다. 늦은 밤이라서인지 혹은 이 복도를 해적단이 통째로 빌려서인지 사방이 고요했다. 고요함에 숨이 턱 막혔다.
“들어가도 되나.”
그가 다시 물음표가 아닌 마침표로 물어왔다. 내가 허락하지 않더라도 들어오겠다는 말이었지만, 그는 내가 긍정의 의사를 표할 때까지 문턱을 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오래 감지 않아 말라버린 두 눈을 끔뻑거리고서는 불가항력적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뭐야? 아임, 죠도 오기로 했었어?”
그의 어깨를 밀치며 내 옆으로 비집고 들어온 루카 씨가 말했다. 물음은 나에게 향했지만, 아니꼬운 시선은 그에게 콕 박힌 채였다. 그가 열었던 입을 다물고서는 시선을 루카 씨에게 옮겼다. 루카 씨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지더니 꽤 불량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내가 먼저 아임과 약속을 잡았거든. 순서 지켜.”
“...하아.”
“하아?”
한숨과 비꼼이 오갔다. 그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서는 휙 뒤돌아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흥, 마치 무뢰배를 처치한 것처럼 루카 씨가 손바닥을 몇 번 털고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감, 감사합니다.”
“안 봐도 알겠어. 또 죠 녀석이 아무 말도 안 하고 뚱하니 있었지?”
“아무 말도 안 했던 건 저지만…….”
“어찌됐든. 죠가 잘못했어.”
말을 돌려버린 루카 씨가, 여기 서 있지 말고 들어가자, 문고리를 잡고 있던 내 손 위로 손을 겹쳐 쥐며 말했다. 나는 그가 사라진 복도 끝을 살며시 보았다가 루카 씨의 닦달에 황급히 방문을 닫았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동료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은 해적단분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동료 사이에서 피어난 사랑이 불편할 법도 한데 그분들은 감사하게도 우리의 사이에 대해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침울해할 때 그의 등을 떠밀며 위로해 주라 구박하거나 그가 혼자 있는 장소를 나에게 은근히 흘리는 정도로 우리 사이를 알고 있다는 암시를 할 뿐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시작을 알았으니 끝 역시 알고 계시겠지,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루카 씨 앞으로 다과를 내왔다.
“도대체 언제 화해하는 거야, 너희 둘?”
“네, 네?”
“지난번 둘이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 화해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저와 죠 씨가 무슨 화해를…….”
이미 끝났는데요, 뒷말은 씹어 삼켰다. 탁자에 놓인 과자를 집어 와작 씹어 먹은 루카 씨가 몸을 쿠션에 툭 하고 기댔다. 삼켜 버린 말을 뱉으라는 듯 꼬아진 다리를 슬쩍 흔들었다. 나는 입을 오물거리다 루카 씨의 맞은편에 살며시 앉으며 쓰디쓴 말을 뱉었다.
“...끝났으니 화해할 것도 없습니다.”
“아, 정말 답답하네. 두 사람 다.”
내가 무슨 연애 상담을 해주겠다고,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루카 씨가 혼잣말을 가장해 투덜거리며 고개를 뒤로 휙 기울였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던 루카 씨는 푸르르 숨을 내보내며 말했다.
“너희가 말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지 않아?”
딱히 나의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임과 죠의 눈이 말하고 있었거든. 두 사람이 주고받는 눈빛에서 사랑……. 하여튼 그런 게 느껴졌어. 연인의 사랑이 뭔지 모르는 생명체도 너희를 보면 바로 알 정도였으니까. 말은 안했지만, 모두가 알 수밖에 없었지. 눈치 없는 박사마저도 나에게 물어보더라니까? 저기, 아임과 죠 두 사람 사귀어? 라면서.”
박사님을 따라 한 루카 씨가 자세를 바로 했다. 가벼웠던 루카 씨 주위의 공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기다란 눈썹을 몇 번 들썩이다 팔짱을 낀 루카 씨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도 그래. 두 사람이 어떤 눈으로 서로를 보고 있는지 잘 모르나 봐?”
루카 씨의 물음에도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더라, 문을 열고 그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그는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었더라. 그에 대한 원망으로 흐릿해진 망막에 제대로 된 상이 맺힐 리가 없었다. 대답이 없는 나를 보던 루카 씨는 어깨를 으쓱이다 TV 리모컨으로 손을 뻗었다. 작은 소음과 함께 켜진 TV에서 타이밍 좋게 청춘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두 주인공이 입을 맞대고 숨결을 나누다 한참 서로를 바라보았다. 주인공들 위로 한 때의 우리를 겹쳐 보았다. 연인들의 눈에서는 사랑이 떨어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랑한다는 대사는 단 한마디도 없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다 문득 그가 내 방으로 들어와도 되겠나 묻는 아까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올렸다.
그는 옛날과 다를 바 없는, 드라마의 주인공과 같은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09
팔을 뻗어 요란하게 소리가 나는 곳을 짚었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금속성의 물체가 손에 잡혔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버둥거리던 물체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잠에 취해 귀담아듣지 못했다. 이렇게 시끄러운 알람시계는 산 적이 없었는데, 눈을 비비며 침대에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이거 놔 아임!”
잔뜩 화가 난 네비가 양 날개를 퍼덕거리며 몸통을 잡고 있는 손을 부리로 쿡쿡 찔렀다. 네비였군요……. 어제 늦게 잠든 탓인지 네비의 재촉에도 몸이 무거워 다시 침대에 고개를 푹 하고 묻었다. 일어나지도 자신을 놓아주지도 않는 모습에 단단히 화났는지 네비가 덜컥거리며 신경질적인 기계음 소리를 냈다. 네비의 잔소리가 시작하려던 찰나 다른 누군가가 손에 있던 네비를 휙 하고 낚아챘다.
“아침부터 사람을 깨우고 난리야!”
소파에 널브러져 잤던 루카 씨가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네비를 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아침잠을 억지로 깨워 단단히 화가 난 루카 씨의 기세에 네비가 한풀 꺾였다. 가이와 박사가 밑에서 기다린다고, 나에게 너희를 깨우라는 임무를 맡겼단 말이야! 타당한 네비의 말이었지만 루카 씨는 개의치 않고 네비를 빙빙 돌렸다. 이러다 아침부터 싸움이 나겠다 싶어 잠이 덕지덕지 묻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죄송해요. 저희가 어제 늦게 잠들어서……. 금방 나가겠다고 전해주시겠어요?”
“그럼, 당연하지!”
루카 씨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벗어난 네비가 황급히 대답하며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하품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니, 마치 교대라도 하듯 루카 씨가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나는 더 잘 테니까 쇼핑은 너희끼리 다녀와, 말한 루카 씨는 이내 꼼지락거리며 얇은 이불 안으로 몸을 숨겼다. 짧은 시간이지만 루카 씨가 혹여 잠이 들었을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루카 씨는 어젯밤 내내 떨어져 있던 4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해주었다. 어디서 지내왔고 어떤 적들을 만났으며 우주에 널리 퍼진 시시콜콜한 소문들을 주워 기억해다가 나에게 전부 알려주었다. 그에 대한 생각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를 보던 루카 씨는 의도적으로 그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따금 대화가 어색하게 멈출 때면 지금은 떠올리지 말라며 몇 번이나 우려 연해진 홍차를 찻잔에 따라 건넸다. 루카 씨와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어서인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그에 대한 생각은 쨍 울리는 찻잔 소리 몇 번에 뒤로 밀려났다. 오늘 있을 약속에 대한 생각들도 같이 밀려난 게 문제기는 했다.
로비에 내려가 보니 가이 씨와 박사님이 테이블에 앉아 팬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 많았으나 두 분은 개의치 않고 이렇게 먹는 방법이 더 맛있니 아니니 하며 티격태격 다투었다. 그러다 가까이 다가오는 나를 본 가이 씨가 먼저 표정을 밝히며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아임 씨!”
“뭐야, 아임.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박사님이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가이 씨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뒤늦게라도 토라졌음을 표출하듯 팔짱을 끼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기다리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아, 아녜요. 별로 안 기다렸는데요. 그렇죠?”
가이 씨가 황급히 표정을 풀고서는 박사님을 향해 물었다. 박사님께서는 가이 씨를 한 번 흘겨보고서는, 아임이니까 봐주는 거야, 한숨을 쉬며 말했다. 테이블을 보니 이미 팬케이크 말고도 빈 접시가 하나 더 있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짐작이 갔다. 무거웠던 마음에 무게가 더욱 실렸다. 고개를 숙이고서는 다시 죄송하다고 말하려던 찰나 가이 씨가 능청스럽게 내 팔을 잡아 이끌며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반대편으로 가까이 다가온 박사님 역시 내 어깨에 손을 올리시더니, 오늘 날씨가 참 좋다며 대화의 물꼬를 트셨다. 해적단분들은 항상 이런 식으로 애정을 보여주셨다. 미안하다는 말 보다는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잘못했다는 사과보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가고 이해하는 것, 몇 년이 지나도 내가 해낼 수 없는 용서의 방법을 그들은 해냈다. 변하지 않는 애정에 코끝이 찡하니 아려왔지만, 태연하게 누르고서는 두 분이 하는 대화에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이건 내가 그 분들의 애정에 답하는 방법이었다.
쇼핑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점심을 먹기에는 늦은 시간이었기에 제과점에서 각종 빵을 사서 하나씩 입에 물었다. 지구인들은 그대로였지만 그들이 사는 도시는 짧은 세월 동안 많이 바뀌었기에, 나와 박사님은 과거에는 어땠는지 말하며 변한 것들을 살피기 바빴다. 그런 우리를 가이 씨가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장서 안내했다. 바뀐 패션 유행에 따라 편한 옷을 파는 매장에 들어가 구경도 하고, 그간 새로 나온 도서가 궁금하다던 박사님을 위해 서점에도 들렀다. 괜찮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나를 데리고 찻잔을 파는 가게로 들어가 어떤 게 나와 어울리는지 짧은 논쟁을 벌였다. 결국 두 개를 사고 나서야 가게를 나설 수 있었다.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을 루카 씨를 위해 금은방에도 들렀다. 자고 있는데 뭘. 박사님이 투덜거렸지만, 그 누구보다도 열과 성을 다해서 루카 씨를 위한 반지를 골랐다. 작지만 특이한 모양으로 세공된 사파이어 반지를 하나 사고서는 거리로 나왔다.
바쁘게 돌아다녀서인지 배가 고파진 우리를 위해 가이 씨가 근처에서 맛있는 걸 사 오겠다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가만히 광장 한복판에 서 있을 수는 없으니 근처 가게의 쇼윈도를 구경했다. 도란도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걸음이 느려진 건 어느 공예품 가게 앞이었다. 입은 박사님의 말에 착실히 대답하고 있었지만, 눈과 마음은 쇼윈도 넘어 진열된 무언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거울에 비친 표정을 바라본 박사님이 입을 꾹 닫았다. 내 시선을 빼앗은 물건이 어떤 물건일지 가늠하는 듯 옅은 신음을 흘리던 박사님이 이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잘 어울리겠네, 그렇지?”
“...네.”
“저기, 아임. 그러지 말고 사서 죠에게 주는 건 어떨까? 죠도 기뻐할 거야.”
정말 그럴까요, 망설임 가득한 내 목소리 위로 확신에 찬 박사님의 목소리가 덮어졌다. 당연하지. 나비넥타이를 매만지던 박사님이 재촉하듯 내 어깨를 슬쩍 두들기며 출입문을 가리켰다. 손을 따라 홀린 듯 매장 안으로 들어가니 앞치마를 맨 직원이 반겼다. 필요한 게 있냐고 묻는 말에 내게서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자, 박사님이 대신 물건을 말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계산대 앞에서 곱게 포장된 선물을 양손으로 받고 있었다.
“누구에게 선물하시나요, 혹시……. 애인?”
가벼운 직원의 말에 박사님이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멀거니 바라봤다. 그는 나의 애인이 아니었으나 아니라는 대답이 섣불리 나오지 않았다. 연인이라기에는 이미 끝났고 남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운 사이를 정의하는 단어는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직원이 웃으며 무슨 사이냐 되물었다. 고운 빛의 푸른 포장지가 손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아마 선물을 받는 그도 모를걸요, 대답을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10
지구에 도착한 지 7개월이 지났다. 오랜만에 지구의 공기를 맡아 들떴던 기분도 잠시, 국가적으로 커져 버린 사업을 정리하는 데에는 큰 노력이 필요했다. 한 번 어그러진 일을 바로잡는 건 종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국가적으로 발생한 손실을 메우고 여러 면에 얽힌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힘썼다. 해적단분들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그래도 도와주는 게 옳지 않겠냐는 나와 박사님의 설득에 우리는 예상보다 긴 시간을 지구에서 머물게 되었다. 국가 그리고 더 나아가 슈퍼전대에 대한 불신이 생긴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주된 임무였다. 예전처럼 변신하여 적들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자잘한 일들을 도와주고 그들이 내는 목소리를 들어 행정 업무를 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몸이 바쁘니 자연스럽게 그와의 문제는 뒤로 밀려났다. 지구에 온 이튿날에 샀던 선물은 새롭게 태어난 갈레온에 있는 내 방 서랍 속에 고이 잠들게 되었다. 혹시 선물에 먼지가 쌓일까 싶어 꺼내 천으로 선물을 닦고 한참을 들여다보는 일이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선물이 뚫어져라 바라보아도 그에게 건넬 용기가 솟아나지 않아 한숨을 쉬며 다시 서랍 속에 넣는 것까지가 루틴의 완성이었다. 여섯 명이 함께 다니니 그와 마주치고 소통할 기회는 늘어났지만, 사적인 대화는 많이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서로의 일상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이는 익숙한 천장이 반가웠다. 아무리 좋은 객실이라도 갈레온에 있는 내 방만에는 견줄 게 못 되었다. 기지개를 켜고 헝클어진 머리를 협탁에 놓인 빗으로 풀어 내렸다. 오늘은 고카이쟈로서 지구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다. 지구에 온 뒤로 이유 없이 외출해 본 일이 없었기에 오늘은 바뀌었을 산책길을 여유롭게 걸어보고 싶었다. 아이보리색 슈슈로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묶고는 두터운 코트를 두르고 문밖으로 나섰다. 이른 시간이라 복도에는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안내를 부탁할까 싶어 가이 씨의 방문을 두드리려 했지만, 어제 늦은 시간까지 마벨러스 씨와 많이 먹기 대결을 벌이다 쓰러졌던 가이 씨의 모습이 생각나 그만두었다. 내가 없다고 걱정하면 어쩌지, 혼자서 어디를 가야 새로운 만남을 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아.”
머리 위로 그늘과 함께 짧은 음성이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이제 막 운동을 갔다 왔는지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있는 그가 서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서는 그의 옆으로 지나갔다. 늦겨울이었지만 아직 아침은 기온이 낮은지 그의 몸에서 찬바람 내가 났다.
“...저기, 아임.”
그가 말만으로 나를 멈춰 세웠다. 뒷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지 딱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고서는 한마디를 꺼냈다.
“같이 가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와 함께 산책하러 나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계단 밑에서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그를 찾는 루카 씨의 외침이 났고, 나와 계단을 번갈아 보던 그는 머뭇거리다 다시 들려오는 날카로운 외침에 꾸역꾸역 발을 옮겼다. 배 밖으로 나가는 내 등 뒤로 그가 무어라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이유 모를 한숨이 목에서 터져 나왔다.
새로운 산책길로 걸음을 옮겼으나 주변 풍경이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마음 한켠에 묻어두었던 우리 사이에 대한 고민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에 사전이 있다면 이별이라는 단어는 종이에 찍혀있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어떤 단어보다 선명하게 인쇄되어있다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이별이란 단어를 그가 입에 올려 우리의 사전에 새긴 순간부터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게 된 게 아닐까? 사랑과 애정이라는 단어로 지우기에는 너무 짙고 커다랬다. 설사 그런 단어들로 이별을 지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그만큼의 단어가 존재하는지도 미지수였다. 모두 그가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다 말했지만 나는 그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사랑한다면 헤어지지 말고 같이 있었어야지 아니,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올린 이유라도 말을 해줬어야지. 그의 침묵을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침묵을 용인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를 향한 나의 사랑도 물음표였다. 지구인들이 말하는 구질구질한 전 애인처럼 미련이 남아있는 게 아닐까, 사랑이나 애정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너무 길고 서로에게 소중해 관계가 아닌 과거의 시간을 바라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다시 갈레온으로 올라가는 길목 앞에 다다랐다. 하늘을 바라보니 해가 머리 위에 쨍하니 떠 있었다. 점심쯤이 된 것 같았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단지, 내일이면 지구를 떠나 각자 갈 길을 다시 걸어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결정 나지 않은 우리의 사이가 답답해져서 가슴을 몇 번 두들겼다. 지구의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조금 미웠다. 왜 그는 청색이라, 나에게, 아. 머릿속에 갑자기 파란색의 무언가가 번뜩 스쳐 지나갔다.
서랍에서 하늘색 포장지로 둘러싸인 선물을 꺼냈다. 매일 꺼내 닦은 덕분에 포장지에 먼지 한 톨, 구김 하나 없었다. 선물을 들고 복도로 나오니 아침과같이 고요했다. 점심을 먹으러 가겠다 하더니 다 같이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발소리를 죽여 복도를 살금살금 걸어갔다. 아무런 꾸밈이 되어있지 않은 매끈한 철문 앞에 멈춰 섰다. 손을 들어 노크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방문 앞에 선물만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었지만,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며 빠른 속도로 뛰었다. 내 방에 다시 들어와 문을 닫고서는 벽에 기대 숨을 골랐다. 이걸로 모든 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선물을 주었고, 선물을 그에게 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내 손에서 선물이 드디어 떠났다는 게 중요했다. 그는 선물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가 주었다는 걸 알까. 고작 선물 하나 그의 방 앞에 두고 왔을 뿐인데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 어지러웠다.
선물을 손에 든 순간 문득, 우리 사이를 이제 그만 끝내야 할 때가 오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주려는 선물에 내가 어떤 마음을 담았는지조차 불분명했지만, 나는 그에게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우리 사이가 뭔데,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지, 나도 그를 아직 사랑하고 있는지 아니라면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그에게 묻고 싶은 많은 문장을 함축하여 선물에 담았다. 나의 물음에 답하는 것도 선택하는 것도 나는 모두 그의 몫으로 떠넘겼다.
복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 나간 게 아니었나, 혹여 내가 그의 방 앞에 둔 선물을 볼까 싶어 조금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급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리더니 바로 내 방문 앞까지 이어졌다. 노크도 없이 문이 불쑥 열렸다. 깜짝 놀라 몸을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였다.
“들어가도 되나.”
저번과 같은 말이었지만 그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방 안에 발을 들였다. 그의 손에는 내가 바닥에 둔 선물이 들려있었다. 그가 나의 방 안에 서있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이 풍경이 그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등 뒤로 문이 천천히 닫혔다.
11
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우리 사이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방에 들어올 때는 당당한 태도를 보이던 그도 막상 들어오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애꿎은 선물만 매만졌다. 익숙한 공간에 그가 들어와 있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그가 시선을 테이블 위로 옮기더니 드디어 한마디 꺼냈다.
“...고맙다.”
선물을 살짝 들었다가 다시 어색하게 툭, 그의 팔이 떨어졌다. 그는 선물이 무엇인지 확인하지도 않았으면서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만약 내가 선물이 아니라 다른 걸 주었으면 어쩌려고, 그게 당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거라면. 그렇지만 그는 손에 들린 물건이 소중하다는 듯 포장지가 구겨질까 세게 쥐지 않고 있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장난이나 악의를 담은 무언가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설령 선물이 원하지 않던 거라도 그는 내가 주었다는 그 의미 하나로 무엇보다 소중하게 대할 것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다가오는 애정이 버거웠다. 이제 이런 애정을 주고받을 사이가 더 이상 아니라는 걸 그에게 확실히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을 돌려 그가 들어왔던 방문을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는지 물기가 어렸는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 말을 들은 그가 숨을 멈추었다. 그렇게 다시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길어지는 침묵에 뒤돌아 그를 바라봐야하나, 하고 고민하는 와중 그가 테이블 위에 선물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등 뒤로 찬바람 내음이 훅 느껴졌다.
“아임, 우리 대화를…….”
“대화요? 죠 씨.”
차분하고 고요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격앙되었다. 휙 뒤도니 그가 한 걸음 남짓한 거리에 우뚝 서있었다. 갑자기 난 큰 목소리에 놀랄 법도 했지만 그는 평소와 다름 없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게 더 싫었다 아니, 섭섭했다.
“헤어지자고 말했던 그날 이야기 해주셨어야 해요. 제가 이유를 여쭤봤는데도 끝까지 말해주지 않으셨죠.”
그에게 반걸음을 다가갔다.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내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만났던 날에도 대화를 나눴더라면, 지구에서 만났을 때 이야기를 했더라면…….”
말끝이 흐려졌다. 우리가 지나온 순간들에 대화를 했더라면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순간이 달라졌을까. 그와 시선을 맞추고서는 눈동자 속에서 지나온 과거의 감정을 되짚어보려 했다. 그 역시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서는 내 얼굴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조용하게 이루어진 무언의 대화는 내가 눈을 먼저 돌림으로써 끝났다. 중요한 건 지나왔던 과거나 흩어진 감정이 아닌 우리가 서 있는 현재였으니, 어쩌면 이런 가정과 대화마저도 불필요하다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 그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작은 한숨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몇 분을 대치했을까, 우리는 마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반 발자국의 거리에서 서로를 말없이 마주했다. 우리는 서로의 행동에 대해 답을 찾지 못했다. 제자리에 우뚝 서 있는 의미도 모른 채 그저 각자의 손끝이나 발끝만을 노려보았다. 이래서는 끝이 나지 않겠다 싶어 내가 먼저 뒷걸음질을 쳤다.
“...하실 이야기가 없으시다면 이만, 부디, 나가주세요.”
왼손에 차가운 문손잡이가 만져졌다. 나는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고서는 나갈 그를 위해 문을 열어주려 했다. 그러나 내가 문을 여는 것 보다 그가 다가와 손잡이를 잡고 있는 내 손을 붙잡아 행동을 저지하는 게 더 빨랐다. 문이 덜컥거렸다. 따뜻한 방 안에 있었음에도 그의 손은 차가웠다. 그가 손에 힘을 주어 문손잡이에서 내 손을 떼어내곤, 그의 손바닥 안으로 내 손을 감춰 쥐었다. 짧고도 긴 그 순간 동안 우리는 시선을 마주한 채 사냥을 앞둔 사람들처럼 숨을 천천히 골랐다.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공기를 먼저 놓은 건 그였다.
“...미안.”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겨서는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 두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는 항상 미안하다 사과를 건네기보다 마음이 담긴 선물을 주거나 행동으로 미안함을 표현하는 편이었기에, 그의 사과는 내겐 너무 뜻밖의 행동이었다. 이 사과는 어떤 의미일까. 아주 짧은 단어였지만 어쩐지 어지러웠던 마음이 차츰 질서를 찾고 가라앉는 듯했다. 속이 울렁거려와 숨을 흡 들이쉰 뒤 그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불편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내 손을 흘끔 보고선 살짝 놓았다가 다시 편하게 고쳐 잡았다. 손목, 팔, 어깨 그리고 다시 얼굴로 올라온 그의 시선이 내 두 눈과 맞닿았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가 말을 하다 말곤 입을 꾹 닫았다. 아까와 같이 반 발자국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온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아임 너를.”
다시 말이 끊겼다. 비어있던 그의 손이 올라와 어깨에 걸쳐있던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넘겼다. 끊어진 말 뒤에 나올 단어가 무엇일지 너무나도 잘 알겠기에, 내 호흡이 헐떡거리며 가빠졌다. 그 역시 단어를 감히 입에 담는 게 어려운지 인상을 찌푸렸다가 침을 삼켰다가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사이로 어루만졌다가 결국 뺨을 타고 흐르는 나의 눈물을 보고 나서야 고백했다.
“사랑하고 있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구멍에서 울음이 터져 나와 방안을 가득 울렸다. 그는 내 울음을 예견했는지 당황한 기색 없이 낮은 침음을 내며 잡은 손을 당겨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도록 했다. 잡힌 손을 빼내어 손목부터 시작해서 팔을 지나 어깨까지 매만지곤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 역시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감싸안고 남은 손으로는 뒤통수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우리의 몸이 빈틈없이 딱 붙었다. 같은 박자지만 엇갈리게 뛰고 있는 우리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서로의 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아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어, 다 보여. 언젠가 그가 말했던 대사를 현재의 그가 느리게 읊었다. 내 머리 위로 그의 코가 볼이 내려앉아 뭉개졌다. 훌쩍이는 소리가 더 커졌다.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려는 듯 그가 허리에 있던 손을 등으로 옮겨 토닥였다.
우리는 도대체 무슨 사이일까, 정답이 없을 질문을 울음으로 토해냈다.
12
우리는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멀고도 가깝게 느껴지는, 행복했던 시절의 우리가 아닌 이별하던 순간의 우리 모습으로 돌아와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첫 번째 이별의 순간 같기도 했고 두 번째 이별의 순간 같기도 했다. 우리가 이별하던 순간의 모습이 그림의 레이어가 깔리듯 현재의 우리 위로 겹쳤다. 나는 울고 그는 아무 말 없이 날 위로하기 위해 등을 토닥이고, 나는 그를 붙잡고 그는 나를 붙잡지 않고 그만 놓아주는 순간이 다시 찾아오고야 말았다. 어쩌면 우리는 5년 동안 빙글빙글 제자리만을 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떻게든 헤어지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우리는 ‘이별’이라는 단어가 만든 원 안에 갇혀 계속 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그랬다.
내가 이 자리에서 고개를 들면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사랑한다며 내게 말했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붙잡았던 손을 놓고 뒤돌아 그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걸어 나가겠지. 그가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다 자신있게 말하는 것만큼, 나도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예상에 대해 확신하게 될수록 내 기분은 비참해져만 갔다. 사랑을 힘겹게 입에 담은 그를 사랑하면서도 밉고 화가 났고, 그냥, 품에 안겨 엉엉 있는 힘껏 울음을 터트리는 게 내 감정이자 고작의 대답이었다.
그가 등을 두드리는 손에 힘을 주어 더욱 그의 쪽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우리의 다리는 겹쳤고 머리카락 또한 누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서로의 몸을 타고 흘러 내렸다. 심장 박동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이 역시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박자로 뛰고 있었기에 소리의 주인을 가리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의 호흡이 내 머리 위로 흩어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끌어안은 힘에 비해 쏟아지는 호흡은 얇고 동시에 깊었다. 뭉개진 그의 코와 볼이 내 정수리 부근을 떠돌다 살짝 떨어지고, 다시 뭉개지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울음을 쉽게 멈출 수는 없었다. 마냥 서러웠다. 눈물로 가득 절인 마음과 정신 때문에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이유조차 알 수 없었지만, 원 궤도의 종착점이자 원점에 도달해 버렸다는 생각 하나가 몸을 가득 메웠다. 우리는 그렇게 나의 울음소리를 배경 삼아 또 얼마의 긴 시간을 보냈다.
복도가 소란스럽다가 다시 조용해지기까지, 나와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시간이 멈춰버린 내 방에 서 있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던 점점 줄어들어 방안 역시 덩달아 어두워졌다. 불을 켜기 위해 움직일 법도 했지만 우리는 그저 어둠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눈앞에 있던 그의 옷과 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밤이 되었을 때, 나는 울음을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킨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고 무엇이라도 말해야만 했다.
그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옮겨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손짓에서 애정이 가득 묻어났다. 날것인 그의 감정을 만나 놀란 내가 뒷걸음질을 쳤지만, 그는 내 허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고 볼을 감싸며 더욱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가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갑자기, 어쩌면 그동안 그는 나에게 항상 사랑한다고 간접적으로 외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나 파미유 별에서 만났을 때의 눈빛,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던 때의 눈빛.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눈빛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별 이후의 그에게 항상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갈구했었는데, 답은 가까운 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죠 씨.”
그가 내놓은 확신에 대한 답의 문장은 가볍게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죠 씨, 가끔은……. 말을 해 주셔야 확신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비록 저는 죠 씨에 대해 모든 걸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이 대목에서 그가 고개를 저었으나 나는 그의 말을 부러 듣지 않고 계속 문장을 이어나갔다.
“저는 죠 씨에 대해 모든 걸 알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차오르는 눈물과 다르게 목이 바싹 말랐다.
“그런데……. 그게, 그게 아닌가 봐요, 죠 씨.”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만 문장이 엇나갔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괜찮지 않았나, 봅니다. 말을……. 말해야 알아요, 저는. 확신을 주셨으면, 아, 부디…….”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주먹을 쥐고 그의 어깨를 한 대 툭 쳤다. 그는 아프지도 않은지 입을 꾹 다물고서는 엉망이 되어버린 문장을 뱉는 나를 바라만 보았다. 그 모습이 또 괘씸하여 한 대를 더 쳤다. 두 대, 세 대. 조금씩 힘이 실렸지만, 그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끊겨버린 문장 사이에 담긴 의미를 알겠다는 듯 그저 허리에 감긴 손을 꿈질거리고 볼을 타고 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의 입이 우물거렸다. 내 답에 대한 회신을 다시 하려는 듯싶었다.
“미안.”
아까보다 훨씬 담백해진 어투로 한마디를 뱉은 그는 한숨을 쉬며 어설프게 사과했다. 분명 그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그의 사과를 듣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 예상에 대한 확신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내 예상과는 다른 결의 대답에 잠시 얼이 나간 나의 두 눈과 시선을 맞추더니, 말해주어야만 안다며, 약간의 웃음이 들어있는 말투로 그가 말했다. 나는 그게 또 괘씸해지고 부끄러워져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슬쩍 가린 채 힘을 실어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윽. 이번에는 정말 아팠는지 그가 옅은 신음을 내며 몸을 살짝 비틀거렸다. 죄, 죄송해요……. 로맨스 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안절부절못하다가, 박장대소는 아니었지만, 작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심장을 맞대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그의 어깨에 양손을 가볍게 올리고서는 물었다. 몇 분 사이 부드럽게 풀어진 분위기에 마음이 놓인 건지, 그는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음, 소리를 내며 흩어진 내 머리카락들을 살살 정리해 주던 그는 약간의 망설임이 묻어나는 어투로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나는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그는 이 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며 내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별이란 단어가 만든 원 안에 갇혀 빙글빙글 돌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 단어는 우리에게 있어 너무 짙고 커다란 존재이기에 원을 부숴버리거나 궤도를 이탈하는 짓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지금, 관계를 다시 이어나간다 해도 다시 원점이자 종착점으로 돌아와 서로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버석해져 버린 감정들에 대해 비관할 터였다. 과거의 그가 말해왔듯 이대로 서로가 가야 할 길을 각자 걸어가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내 대답까지의 침묵이 길어지자,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가 스르르 풀리는 게 보였다. 급하게 무어라 덧붙이려는 그의 입가를 엄지로 매만졌다.
“죠 씨.”
최선을 익히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최선의 선택이 아닌 힘들고 고된 길을 그와 함께 걷고 싶었다. 이별이라는 원에 갇혀 있는 우리는 그 원이 만드는 궤도를 영원히 뱅뱅 돌겠지. 그렇게 계속 돌다 보면 원점이나 종착점 같은 작은 점들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우리 사이에는 기다란 선 하나만이 남는 순간이 올 것이고, 나와 그는 선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다시 써내려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이 사랑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모양이 될 때까지 언제까지고 돌고, 다시 시작하고, 언제까지고 계속 같이 걷고 싶었다. 서로를 믿고 사랑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그게 우리를 걷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 지치지 않고 영원히 궤도를 빙빙 돌 수 있을 것이다. 궤도를 이탈할 수 없다면 그 궤도 안에서 영원히 우리의 방식대로 지내는 일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생각과 과정이 정말 해적답다고 느껴졌을 때,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의 목에 양팔을 둘렀다.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였지만, 이 말 이외에는 우리 사이를 설명할 수 있는 마땅한 단어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내 얼굴에 떠오른 장난기를 그가 읽었는지 불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양팔에 힘을 주어 그의 얼굴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죠 씨. 다시 이름을 불렀다. 왜. 그가 대답했다. 대답하지 않고 방긋 웃기만 하자 그가 허리께를 토닥이며 재촉했다. 팔에 더욱 힘을 주자 그의 코끝과 내 코끝이 맞닿았다. 그리고 미래로 향할 문장 하나를 뱉었다.
“화려하게 사랑해 봐요, 저희.”
고카이 갈레온이라 불리는 커다란 배 앞으로 여섯 명의 우주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여서, 이제 이 별에 언제 올까, 아직 인사를 다 못했는데, 따위의 이야기를 시시콜콜 나누며 배에 승선했다. 선장처럼 보이는 이가 뱃머리에 올라 넓게 펼쳐진 지구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마벨러스 씨.”
선장의 곁으로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이가 다가왔다. 선장은 여자의 부름에 눈썹을 들썩이다 다시 풍경으로 눈을 돌리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내놓지 않았다. 여자 역시 그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싱긋 미소를 지었다가 선장이 보고 있는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우주인은 아무 말 없이 지구의 환경이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고요함을 깬 건 두 우주인의 뒤에서 들려온 고함이었다. 나머지 선원들이 한데 엉켜서 이게 옳니, 저게 맞니 하며 다투고 있었다. 선장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한숨을 쉬었고, 여자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그들이 하는 짓을 멀거니 구경하였다. 선장이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쩔 거냐, 너희는.”
바람에 휘날리는 원피스를 갈무리하며 여자가 뒤를 돌아 선장을 바라보았다.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글쎄요……. 아직 정해진 게 없어서…….”
“...때가 되면 싫어도 가라 할 테니까. 미리 정해놔.”
선장이 말을 내뱉곤 뒷통수를 긁적이더니 뱃머리에서 내려와 싸우고 있는 선원들 사이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여자는 방긋 웃고서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지구를 내려다보았다. 아침이라서인지 도로는 꽉 막혀 있었고 사람들은 바삐 길가를 거닐었다. 노란 모자를 쓴 어린이들이 줄지어 횡단보도를 건넜다. 공원에는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뜀박질하고 있었고, 벤치에는 어르신들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람은 차가웠으나 대지는 뜨거웠고 산은 멈춰있으나 하천은 흘러갔다. 지구의 움직임을 보던 그는 고개를 들고 실눈을 떠 머리 위에서 펄럭거리는 검은 깃발을 눈에 담았다. 안녕히 계세요, 지구의 모든 분들.
중얼거린 그는 가까이 다가온 푸른 남자의 손을 붙잡고서는 뱃머리를 내려와 지구를 떠나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도청 ; 桃靑
完結
타 사이트에서 연재했던 분량 중 07~12 (桃) 까지의 분량을 한 번에 올립니다.
즐거운 감상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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