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간론파

[사쿠아사] 꿈, 슈가파우더

단간론파 2차 창작, 오오가미 사쿠라X아사히나 아오이

길잡이 by R

백업 :: 2021. 05. 14 로즈데이


색이 사라져간다. 날카로운 주사기를 꽂아 색깔만을 빼낸 듯 시야에 담기는 전경이 무채색으로 물들어간다. 푸르렀던 하늘은 회색으로, 싱그러웠던 초목은 흑색으로. 색은 사라지고 하얀 빛은 가루로 바스라진다. 색을 앗긴 풍경이 점차 어두워진다. 향기가 사라진 풍경은 먼지 냄새보다도 너저분한 인상을 안긴다. 외로움과 쓸쓸함만이 오롯한 감정이다. 그 안에서 홀로 바람에 거세게 휘날리는 검은 꽃잎을 움켜잡는다.

잿빛.

색 바랜.

아무 의미 없는.

꿈.

손을 펼치자 잡았던 꽃잎마저 다시 바람에 휩쓸려 날아간다. 텅 비어있는 손이 눈에 담긴다. 아무것도 없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들뿐이다. 고개를 들어 식어버린 찻잔과 텅 비어있는 앞자리를 본다. 사쿠라. 닿지 않는 이름을 부르며 눈을 감는다. 세상이 어둠에 잠긴다.

 

다시, 꿈.

시작.

누군가 정지되어 있던 화면에 재생 버튼을 누른 것 같다. 투명한 물에 떨어진 한 방울의 색깔 잉크가 퍼져나간다. 둘러싼 풍경이 일순간에 망막 위에 스스로를 아로새긴다. 물들어간다. 되살아난다. 멈춰있던 바람이 다시 산들거리며 불어온다. 찡긋거리는 코에는 진한 꽃내음이 내려앉는다. 말라비틀어진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 풍경에 자리 잡은 것들이 기지개를 켠다. 흔들리는 검게 보일 정도로 짙은 잎과 그 위의 붉디붉은 색. 몸을 던지면 풍덩 소리가 날 것 같은 파란 하늘. 오직 나아갈 방향만을 제시하는 수영장의 레일을 닮은 길. 그 앞에 다시 홀로 선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사람처럼 아사히나 아오이는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터트린다. 상체에 걸친 져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허리만을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본다. 크게 꺾어진 자세에도 흔들림조차 없다. 아사히나 아오이는 고민도 않은 채로 걸음을 뗀다. 어지럽게 엉킨 장미 덩굴이 앞을 가로막는다. 뻗은 손끝에 날카로운 가시가 스친다. 초콜릿 냄새가 난다. 얼굴 위로 떠오른 미소는 그대로다. 가로막는 것들을 치우며 계속 걷는다. 키보다도 높게도 자란 덩굴이 길을 숨긴다. 제자리를 뛰는 걸음이 경쾌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고개를 까딱까딱, 손을 빼고 팔을 앞뒤로 크게 흔들며 흥얼흥얼. 높다란 장미의 벽에도 햇빛은 선명하게 떨어져서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흥에 겨워 손을 내민다. 정전기가 이는 것처럼 가깝기보다는 먼 듯한 통증이 손가락 끝에서 난다. 손가락 끝이 붉다. 장미를 본다. 이곳은 많은 것이 붉어 꽃과 다른 것의 흔적을 대수롭지 않게 한다. 다시 손을 본다. 핏방울인지 꽃물인지 알아보기가 어렵다. 손가락 끝에 혓바닥을 댄다. 달콤한 딸기잼 맛. 쏟아지는 햇빛에서는 설탕 냄새가 난다.

부서지는 빛.

하얀 슈가파우더.

그 사이를 아사히나 아오이는 계속 걷는다. 장미의 덩굴이 정돈되지 않고 잔뜩 늘어진 공간에 들어선다. 꽃 같은 곡선을 가진 하얀 티테이블과 의자 두 개. 짙은 꽃향기 사이로 은은하고 차분한 차향이 스민다. 먼저 앉아있는 이가 고개를 든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서, 바람 때문에, 그저 그것뿐이라, 눈이 시렸다. 한 방울 빗줄기가 뺨을 타고 흐르는 기분. 아사히나 아오이는 메마른 뺨에 홍조를 그린다. 사쿠라! 많이 기다렸어? 도넛보다 몽글몽글 기분 좋아지는 이름이 허공에서 소리를 내며 터진다. 소중한 비눗방울. 반짝이는 소리. 괜스레 반가워져 아사히나 아오이는 괜히 입을 오물거린다. 사쿠라, 사쿠라!

…음, 아사히나여.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침 일찍 찾은 아무도 없는 수영장 같다. 천장에 나있는 불투명한 창을 타고 넘어오는 햇빛도 아직 어둑한 시간. 지나치게 푸르러 보여 조금 겁이 나는 시간. 아직 물기에 젖지 않은 차가운 바닥 타일을 밟고 레일 앞에 서는, 오롯한 아사히나 아오이의 시간. 안겨들면 안아주는. 아사히나 아오이는 비어있는 의자에 앉는다. 비어있던 찻잔에도 찻물이 채워지고, 따뜻하고 향기로워 이대로 잠들 것 같은 포근함에 입꼬리가 풀어진다. 짙은 녹음. 붉디붉은 장미꽃. 하얀, 너. 바람이 불어올 때면 머리카락이 길게 흔들린다. 이토록 시선을 사로잡는데도 일순간 주변의 짙은 색에 물들어 사라져버릴 것 같다. 그것이 겁이 나, 아사히나 아오이는 별것 아닌 일상을 재잘재잘 입에 올린다. 눈을 떼지 않는다. 마치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시간이 흐른다. 좋아하는 것들 위에 뿌려진 달콤한 슈가파우더가 바람에 쓸려 날아간다. 하얗고 하얗게. 텅 비도록.

바람이 그치고 나면 앞에 있는 것은 멈춰버린 무채색의 공간. 많은 단어들이 의미를 잃는다. 홀로 남아 비어있는 자리에서 사라진 하얀 잔상을 떠올린다. 눈을 감는다. 어둠만이 전부인 곳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부르는 제 이름만을 반복해 듣는다. 아사히나여. 바닥을 보이는 찻잔을 들어 마지막 찻물을 들이킨다. 빈자리를 보며 아사히나 아오이는 활짝 미소 짓는다. …또 봐, 사쿠라.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도 네가 있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아사히나 아오이는 다시 반복한다.

처음부터.

처음처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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