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간론파

[아마사이] 절망을 위해

뉴 단간론파 V3 2차 창작, 아마미 란타로X사이하라 슈이치 (태랑종일)

길잡이 by R

백업 :: 2020. 08


#스포일러(V3 엔딩 직접 스포)

손이 끈적거렸다. 또다시 땀이 나는 손바닥을 허벅지 위에 문질러 닦았다. 챙겨왔던 손수건은 땀을 훔치다 눅눅해진지 오래였다. 거듭 문질러 닦기만을 반복한 손바닥은 기분 나쁠 정도로 끈적거렸다. 마음에 여유라도 있다면 화장실에 가 물에 손을 닦고 올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의 기분으로는 화장실에 간다면 그대로 돌아오지 않고 이 장소를 뛰쳐나갈 것 같았기에, 그저 꾹 눌러 참는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죽 늘어진 의자에는 제각기 개성으로 가득한 사람들뿐이었다. 낄낄대며 게임기를 만지는 사람,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는 사람, 넉살 좋게 옆 사람을 붙잡고 시시덕거리는 사람, … 하나같이 평범한 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독특한 사람들이었다. 심장을 입 밖으로 토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딩- 동.

 

학교의 종소리를 닮은 소리가 나고, 인터뷰실 문 위쪽에 매달린 전광판에 숫자가 떠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154》. 찰칵, 연이어 잠금쇠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내내 속으로 외우고 있던 숫자를 다시 한 번 속으로 읽어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내게로 쏠리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앞서 그랬듯 금세 관심을 잃고 흩어졌다. 그저 관성적인 시선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떠오른 숫자가 제 번호와 일치하는지의 여부이지, 번호에 해당하는 사람의 얼굴이나 정체 따위가 아니었다.

전광판 앞에 서자 그 아래에 위치한 문이 좌측으로 밀려나며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캄캄하여 아무것도 없었다. 등 뒤, 복도의 빛으로도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밟을 수 있는 바닥이 존재한다는 것 정도였다. 걸음을 내딛었다.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도 없이 문이 닫혔다. 철컥, 다시금 잠금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시야는 온통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눈앞의 어둠을 응시했다. 이제는 아무런 빛도 스미지 않았다. 슬쩍 시선을 떨궈도 내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이이이잉.

또 다른 소리였다. 잠시 숨을 죽이자, 팡. 프레시가 터지듯 방 안에 불이 들어왔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터라 나무로 마감된 바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에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비어있는 공간, 그리고 그 중앙에 C자로 빙 둘러서 설치된 수많은 카메라였다. 어찌나 다양한 각도로 설치되어 있는지 카메라만으로 작은 돔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외에는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카메라가 내 걸음을 쫓아오는 기분이었다. 카메라들 사이에 섰다. 그제야 카메라 사이에서 빛을 내는 작은 전광판이 보였다.

[ 154번. 자기소개를 시작하세요. ]

모든 카메라의 렌즈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저것들은 모두 ‘눈’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저들’은 나를 보고 있다.

“154번… ●X△□입니다.”

그중 중앙, 시야보다 높게 설치된 가장 커다란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했다. 준비해왔던 자기소개 문장을 풀어놓았다. 목덜미를 따라 흐르는 땀방울이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긴장한 목소리가 짧은 호흡을 타고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외국어로 말하는 것보다 더 어설픈 목소리였다. 밤새 달달 외운 것을 겨우 뱉어내는 듯한 흔하고 정석적인 멘트가 더듬거리며 익숙한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X△□.

 

입으로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서, 속으로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다독였다. 별 것 아닌 말이었지만 참가 신청서를 내는 그 순간부터 수도 없이 되뇌어왔던 말이었다. 불안감에 젖어 잠겨들지 않도록, 우울함에 빠져 질식하지 않도록. 주저앉지 않고 똑바로 서 있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렇지만…

이걸로는 안 돼.

 

“이 살인게임에 참가하게 된다면…….”

 

아. 아아. 어설픔을 삼키고 절박하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목소리를 높여 또렷하게 발음을 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가 헛된 미래를 꿈꾸고 그것에 홀려버린 듯, 스스로의 단꿈에 취해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흥분한 모습으로 빠르게 나만의 포부를 늘어놓았다. 설레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안달하며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나를 선택하도록. 내게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오롯하게 그것만을 위해 내 모습을 과장되게 꾸며서 선보였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면 놓으면 그만이었다. 지금 느끼는 불안과 긴장은 분명 진솔한 것이었지만 그것에 휘둘릴 이유는 없었다. 그것마저도 이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온전한 자신을 내보이는 대신 완벽한 참가자를 꾸며 내보이기로 스스로 결심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다.

연약하고, 누구보다 약한 존재로 보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저들’이 열광해 마지않는, 성장하고 성장하여 끝내는 무너지고야 마는 덧없는 존재의 가능성을 내게서 발견하도록.

 


…그것이 지금껏 단간론파를 보아온 내가 내린, 참가자로서의 완벽한 조건이었다.

 

‘저들’이 나를 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존재라고 인식해야 해.

이미 지루해질 대로 지루해진 ‘저들’의 흥미를 끌어야만 해.

 

절망의 유희를 바라는 이들이 바라는 것은 평범한 실패가 아니었다. 모두가 일찌감치 무너져버려서야 게임이 성사되지 않았다. 상처마저 딛고 일어서려는 존재로 키워놓고 희망의 꼭대기에서 떠밀어버리는 것, 무엇보다 처참한 절망 그 자체. 그런 최대최악의 절망 앞에서도 그들이 일어설 수 있을지에 거는 내기 따위가 모두 유희 안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미 그저 그런 자극에 익숙해져 버려 권태에 빠져버린 이들마저 열광할 수 있는 최고의 장면을 내가, 당신들에게 보일 수 있다고 허풍을 쳐야만 했다.

그러니 가장 큰 꿈을 바라는 것처럼 보여야만 했다.

저들이 헛웃음을 터트릴 정도로 허황된 꿈을 꾸는 것처럼 여겨져야 했다.

이걸 위해서 이미 전부 외우고 있는 52회차 간의 모든 트릭을 처음부터 다시 정리했다. 단어 하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내고 익숙함을 배제해왔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얻어낸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여태까지 나온 적 없는, 그럼에도 반드시 실패하고야 마는 트릭을 입에 올린다. 나와 같이 ‘단간론파’를 보아온 이들이라면 얼핏 완벽해 보이는 이 계획에 존재하는 작은 허점을 분명히 눈치챌 터였다. 그럼에도 실패하기 위한 트릭임을 숨기고 이것으로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탐정’으로 더 많은 것을 보여주겠노라고 절박한 자신감을 내비친다.

그 우스꽝스러운 절망을 위해 저들이 나를 택할 수 있도록.

 

이제 와 새삼 실패와 비웃음이 두렵지는 않아. 내가 자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그려내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이들이 앞서 걸었던 모든 길을 언제든 기억 속에서 끄집어 올릴 수 있었다. 그저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외울 수 있는 것을, 검토까지 해가며 머릿속에 채워 넣어왔다. 모든 이의 길을 외울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을 찾아내는 것 또한 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을 이용해 ‘저들’이 끄덕이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 모습이 재밌을 거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아, 여행은 어떻슴까?

그리운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 목소리를 다시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

할 수 있어.

다음 게임에는 반드시 ‘초고교급 탐정’이 있을 거야. 네가 먼저 약속을 지켰으니, 이번에는 내가 노력할 차례야. 그렇다면 나는 반드시 해낼 수 있어. 그래, 여행을 가자고 했지. 그곳이 살인만을 위한 세계면 뭐 어때. 나는 줄곧 너를 뒤따라왔어. 그렇다면 그곳이 어디든 네 발자취를 따라 내가 걸을게. 네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갈게. 그러니…

 

다시 한번 더. 기다려줘.

 



* IF :: 만약, 인터뷰 당시의 모습이 사이하라가 의도적으로 꾸며낸 모습이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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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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