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간론파

[아마사이] 열한 번째 계절

뉴 단간론파 V3 2차 창작, 아마미 란타로X사이하라 슈이치

길잡이 by R

백업 :: 2020. 10


#스포일러(아마미 란타로의 비밀설정, 재능, 베니쟈케단 등)

덜컥, 덜컹.

수하물 벨트는 느릿하게 돌아갔다. 그 주변으로는 같은 항공기를 탔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플라스틱이 퉁 하고 벽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캐리어가 추가로 빠져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시선이 몰렸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그중에 누군가는 자신의 캐리어를 끌어내려 사라지고, 또 누군가는 집어 들었던 것이 타인의 것임을 깨닫고는 다시 올려놓았다. 늦는 주인과 달리 서둘러 나온 캐리어들은 벌써 몇 바퀴고 계속 벨트를 따라 돌고 있었다. 직전에도 보았던 도트무늬 손수건이 묶인 캐리어가 세 번째로 지나가고, 초반에 나오고도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파란색 캐리어가 다섯 번째로 지나갔다. 또 한 번 지나가는 노란 곰 캐릭터의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캐리어를 바라보며 사이하라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곁에 서 있던 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움찔.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음에도 저도 모르게 몸이 작게 반응했다. 수하물 벨트 위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조금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모습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자를 수가 없어 전보다 길어진 녹색 머리카락이 드러났던 목덜미의 경계를 가리며 조금 내려왔다. 그 아래 목덜미의 피부는 볕이 강한 국가에서 지내며 약간 짙은 색으로 그을린 상태였다. 등에 지고 있는 배낭은 커다랬지만 움직임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한 같은 태도였다. 뻗어진 손이 스트라이프 무늬가 두드러지는 회색 캐리어를 끌어내렸다. 손가락에 끼고 있는 여러 개의 반지가 손잡이와 부딪치며 달그락 소리를 냈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캐리어를 끌어내린 그는 손잡이를 뽑아 캐리어를 끌며 사이하라에게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시선이 마주쳤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사이하라를 바라보던 둥그런 녹색 눈이 머뭇거리며 한 번 깜빡이고는, 이내 먼저 시선을 피해버렸다. 끌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굴러가는 캐리어의 바퀴가 사이하라의 곁에서 멈춰 섰다.

덜컹. 또 다른 캐리어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수하물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주변이 소란스러웠음에도 사이하라는 침묵이 불편해 눈을 한 데 고정할 수밖에 없었다. 손수건을 묶은 캐리어가 네 번째로 지나가고, 끌어내려졌다 다시 올려진 건지 위치가 바뀐 파란색 캐리어가 여섯 번째로 지나갔다. 아. 그 옆에서 자신의 캐리어를 발견한 사이하라가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달라붙는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캐리어를 끌고 사이하라가 자리로 돌아오자 그는 말없이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덜컹. 수하물은 계속해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바닥에 무언가가 걸린 것인지 끌고 있는 캐리어가 짤막히 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사이하라 역시 캐리어를 힘주어 끌며 움직였다.

수속을 마치고 입국장을 빠져나오자 훨씬 커다란 소음이 밀려들었다. 사방에서 각개 국어 언어와 항공 방송들이 울려 퍼지고 커다란 전광판에는 항공기의 운행정보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방향을 확인하거나 사람을 피할 때를 제하고는 내내 살짝 내리뜬 눈을 정면의 바닥에 고정한 채로 캐리어를 밀고 있던 사이하라는 문득 곁에서 걷고 있던 발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주변을 둘러보다 뒤로 돌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익숙하고도 낯선 눈동자를 사이하라는 함께 멈춰 서서 조용히 응시했다. 설핏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표정에도 사이하라는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로 바라볼 뿐이었다.

고작 몇 걸음 떨어져 있을 뿐인데도 그 사이의 여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로지르며 지나갔다. 몇 번씩이나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드러났다. 잿빛 공항에서도 금방 시선을 잡아채는 녹색 머리카락에 물끄러미 시선을 옮겼다. 시선을 조금 떨궈 귀를 빙 둘러 해놓은 피어싱 사이에서 자신이 새로 뚫어주었던 자리를 한참을 응시했다. 뚫을만한 자리가 남지 않아 꽤나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함께 떠올랐다. 그 옆에 자리한 사람 좋은 인상에 기여하는 부드러운 눈매가 어떤 식으로 휘어 웃는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차갑게 굳고 또 어떻게 불꽃을 담아 피우는지 역시도 얼마든지 기억 속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처음이라면 처음인 감정에 흠뻑 매몰되어 있었다. 입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모든 소음들이 멀어지고 그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둘 사이를 가르는 사람들의 옆모습에도 구애되지 않은 채로 문장을 엮어나가는 입만이 눈에 들어왔다.

사이하라 군, 우리…

 

 


 

“여기도 허탕인가 봄다, 사이하라 군. 하하. 이번 단서는 꽤나 신뢰도가 높다고 생각했는데 말임다. 정말 곤란하다니까요.”

“아마미 군. 이 단서가 말하는 대로라면…”

“…….”

“아마미 군?”

“이것 참… 이번에는 나름 기대했던 터라 마음이 아픔다. 다음엔 어딜 가봐야 할지… 돌아가서 메일이라도 확인해 봐야 할까요. 이동할 비행기도 알아보고 말임다.”

할 말 있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깜빡임마저 적은 연한 금색 눈동자가 아침 햇살과 부드럽게 어우러졌다.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것을 알아차리고도 아마미는 제게 익숙한 미소를 활짝 지어 보일 뿐이었다. 하고자 하는 말을 짐작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그건 제 안에서도 일부러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하지 않고 이리저리 산재시켜놓은 것이었다. 결코 정돈되기를 원치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아마미가 이렇게 미소를 지어 보일 때면 사이하라가 보일 반응은 결국 하나였다.

“……으, 응. 알았어…”

하고 싶었던 말을 집어삼킨 그가 조용히 눈을 내리감는 것이 보였다.

아마미가 실종된 여동생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한 것은 한두해 지난 일이 아니었다. 여행을 즐기는 성정과 포기할 수 없는 뚜렷한 목표 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진작에 포기했을 터였다. 이러한 긴 여행의 과정에서 아마미가 부가적인 성취로 얻어낸 것을 전부 말하자면 한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으나, 정작 주된 목적에 대해서는 사소한 단서를 겨우 건져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나가는 단서에 매달려 국경과 바다를 넘나들었다. 많은 일만큼이나 많은 어려움과 곤경을 겪었고, 어쩌다 보니 남들과는 다른 위험한 외다리 위에 서 있는 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만 이 위태로운 다리를 건너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단서들이 있었다. 그러니 안전한 길로 돌아가 내려설 수도 없는 자신을 알았다. 그 과정에서 설명하기 난해한 일에 휘말렸다 만난 이가 바로 제 앞에 있는 사이하라 슈이치였다.

활동에 분명한 제약이 있을 고교 재학시절에 이미 초고교급 탐정이라 불리던 이였다. 자신을 소개할 때면 지나칠 정도로 멋쩍어하고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이지만 일을 대할 때면 순식간에 가라앉아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다른 이를 고른다는 선택지가 있었을 테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긍정해 주는 이는 그가 유일했다. 그렇기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지체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 것은 불행이었으나, 그럼에도 그 결과로 사이하라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어차피 이미 시작된 여행이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손을 내밀자 사이하라는 그 손을 잡았다.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아달라는 말에,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반 우스갯소리에도 차분한 태도로 순응하던 긴 속눈썹이 드리운 여린 금빛을 기억한다.

그렇게 떠나온 여정이었다.

함께 여행을 시작한 뒤로 열하나의 계절이 지나갔다. 즐거운 일도 적잖게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간 있던 일을 정리해 자서전으로 낸다면 말도 안 되는 분량이 나올 정도로 고생과 고난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일도 만만찮게 자주였고, 엉망진창이었던 날도 적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동행을 관두겠노라 선언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험한 사건 역시도 마주칠 수 있는 것이 탐정이라 하지만 이렇게 폭풍 같은 한복판에 들어서 있는 것은 그에게도 처음인 일일게 분명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들이 하는 것은 붙잡은 작은 단서를 연이어 뒤쫓아 검증하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이는 사이하라가 ‘실례합니다.’하고 말할 수 있게 된 외국어가 열 손가락을 넘어갈 때쯤까지도 달라진 점은 없었다.

이번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번에는 단서를 잡는 과정에서 유독 고생스러운 일이 많았다. 제법 신뢰도 높은 정보도 덧붙어있었다. 그렇기에 그간의 고생을 한 방에 털어낼 수 있는 확실한 단서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미는 자신 앞에 놓인 결과에서 눈을 돌렸다. 이건 엉터리다.

실제로도 지금까지 여행을 하며 중대한 단서인 줄 알고 매달렸다가 실은 별것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던 경험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그런 거겠지. 당장 수중에 남은 단서가 없어 가야 할 곳을 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같은 일이 한 번도 없던 것도 아니었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서 이메일을 확인하자. 지금까지 지나왔던 여정 중에서 누군가 새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보내줬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자료가 부족하다면 지나왔던 장소들 중에 개운치 못했던 곳을 다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아마미는 웃으며 제안했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는 게 좋겠슴다. 역시 무리한 일정은 좋지 않다니까요. 사이하라 군도 피곤하지 않슴까?”

아마미를 한참 바라보던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였다면 피곤하다 말하면서도 바로 숙소로 향하진 않았을 터였다. 설탕 탄내가 강렬한 길거리 음식부터 본 적 없는 과일 따위를 맛보기도 했을 테고, 타피오카 주스를 각자 손에든 채로 눈에 띄는 건물이 있으면 일단 들어가 둘러보고 나왔을 거였다. 투박한 장식으로 꾸며진 관광 상품 가게를 찾아 들어가 기념품이라며 미적 감각이 달아난 기괴하게 생긴 물건도 샀을 지도 몰랐다. 목적 있는 여행이라고는 하나, 어찌 되었던 두 사람은 여행 중이었으므로.

그러나 오늘은 해가 중천에서 얼마 기울지도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탈력감 때문인지 급격하게 피곤이 밀려들었다. 아마미가 말한 대로 먼저 숙소로 걸음을 옮기자 조용한 걸음으로 사이하라가 뒤따라왔다. 일행이 있는 와중에 쉽게 누릴 수 있는 편의를 여행의 운치 운운하며 무르지는 않는 성정이었기에 숙소는 거대한 체인 호텔이었다. 호텔 정문을 앞두고 걸음을 옮기는 아마미의 등 뒤로 멀어진 사이하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고개를 돌리자 호텔에 들어오지 않고 걸음을 멈추어 선 그가 보였다.

“아마미 군 먼저 들어가 있어. 나는… 조금 더 둘러보고 올게.”

탐정의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아마미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으리라는 직감을 했다. 고집 어린 얼굴을 마주하던 아마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사이하라 군, 잘 다녀왔슴까?”

아마미의 피로는 신체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자기 관리에 능숙한 그는 방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것으로 금방 컨디션을 회복했다. 멀쩡해지고도 가만있기엔 지나치게 성실한 그는 여행지의 숙소에서는 늘 그랬듯 이메일을 확인하고 정보원이라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것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조급해질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독였다. 그 뒤에 다음 여행 계획을 짜고 비행기까지 예매를 마치고 났을 때는 어느덧 저녁 시간대였다. 그때까지도 사이하라는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연락을 해봤지만 먼저 먹으라는 짧은 답변만이 돌아왔다. 몇 가지를 더 묻는 연락에는 답장조차 없었다. 어느샌가 동행자 있는 여행에 익숙해져 있던 아마미는 고민 끝에 레스토랑을 이용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홀로 늦은 디너를 여유롭게 즐긴 아마미는 그길로 산책로까지 한 바퀴 돌았다. 방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어째서인지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숨이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뱃속에서만 뱅뱅 맴도는 기분인 탓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제법 개운해진 속으로 시원하게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아마미는 불도 켜지지 않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검은 인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낯선 이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하다면 무척이나 익숙한 모습이었기에 금방 다시 안정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 수 있었다.

야경을 즐길 수 있도록 난 전면 유리창에서는 환한 달빛 쏟아졌다. 어둠 위로 온통 푸른빛이었다. 덕분에 현관 등이 꺼졌지만 불을 켜지 않고도 방 안의 사물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는 등받이 없는 소파 끄트머리에 웅크리듯 걸터앉아 팔꿈치를 무릎에 지탱해 세우고는 깍지 낀 손 위로 이마를 기댄 자세였다. 쉬고 있다기엔 심히 불편한 모습이었고, 잠들었다기엔 숨을 쉬며 들썩이는 등허리가 불규칙했다. 주변이 적잖게 밝은 탓에 그 모습을 무리 없이 알아본 아마미는 잰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잠깐 서 있는 동안 꺼졌던 현관 등이 다시 점멸하며 불이 들어왔다.

“어디 아픈 검까? 약이라도 가져다 줄까요?”

자신의 목소리에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고개가 기이할 정도로 선명했다. 매끄럽게 움직이는 영상이 아니라 사진처럼 멈춰있는 장면들을 하나씩 눈 안에 직접 집어넣는 것만 같았다. 본래부터 색이 옅었던 금안은 쏟아지는 달빛 아래에서는 제 색을 잃고 하얗게 바랜 것처럼 보였다. 평소라면 푸른빛이 흘러내렸을 머리카락도 지금은 새카맣게만 보여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피부 위로 흐드러진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둠에서 자아낸 실타래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대리석을 깎아낸 듯한 푸르스름한 하얀 피부, 굳은 채로 하얀 빛을 내는 눈동자를 마주한 아마미는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쏟아지는 달빛 탓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아는 존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마미 군.”

“옷도 안 갈아입었네요. 춥지 않슴까? 금방 물을…”

꿰뚫을 것 같은 시선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마미는 시선을 내리며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가느다란 손목이 흠칫 놀라게 될 정도로 차가웠다. 아마미는 어렵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일으켜 세우려는 아마미의 손을 그가 저지했다. 자신의 손목을 잡아챈 아마미의 손 위로 자신의 다른 손을 스치듯 가져댄 그는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 여동생에 관한 얘기야.”

“사이하라 군.”

처음으로, 그 입을 막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방금…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왔어. 실수라도, 놓친 게 있으면 안 되니까.”

“…듣기 싫슴다. 하지 마세요.”

“내가 처음 의문을 가지게 된 건 두 번째로 방문했던 도시에서부터 였어.”

그는 시선조차 피하지 않은 채로 오래된 사건부터 덤덤하게 읊어나갔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가졌던 의문, 지니고 있던 단서와 두 사람의 행적, 상황이 결과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였다. 단정한 목소리에 담긴 확신이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보기 좋다고 생각했던 가느다란 입매에서 흘러나오는 다정하지 않은 말들이 제 속을 온통 난도질했다. 첫 번째 계절부터 열하나에 이르는 계절까지, 그들의 모든 여행 속에서 건져 올린 물먹은 진실들이 하나로 엮어지고 있었다. 아마미가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사이하라 군, 제발.”

손을 뻗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던 아마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닿았던 손끝부터 혈관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앞에 있는 존재가 낯설고 먼 존재처럼 느껴졌다. 아마미의 목소리에도 여전히 자신 위로 쏟아지는 창백하고 차가운 달빛에 감싸인 사이하라는 인간답지 않게 느껴지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볼 뿐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그에게서 멀어졌다.

“지금까지 얻은 모든 단서들이 의미하는 건 결국 하나야.”

어째서 제 마음을 긍정해 주었던 사이하라마저도…

머릿속이 폭풍을 맞은 듯 뒤흔들렸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에도 냉정한 달을 눈 안에 담은 그는 기어코 끝내기 위한 마지막 말을 입에 올렸다. 그것은 마치 딛고 있는 땅이 꺼지고 서 있던 다리가 무너지는 것과 같아서.

“아마미 군, 네 여동생은 죽었어.”

아마미는 더 이상 그 자리를 지킬 수가 없었다.

 

 


사이하라 군, 우리…

그 말이 계속 목소리 그대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피로한 낯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일그러진 표정이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댔다.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가 같은 장면만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착각할 수도 없게 말하는 입술 모양 하나하나가 확대한 듯이 틀어박혔다. 결코 잊어버리는 일 없는 기억력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토씨 하나도 틀리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 순간 지나가던 상관없는 이가 걸친 상의의 색깔, 방송을 타고 들려오던 운행 준비 중인 항공기의 기체 넘버 따위마저도 떠올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지나갔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사이하라만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사이하라는 고개를 떨궜다. 더 이상 서 있는 이가 없는 맨바닥을 바라보면서 머릿속에서는 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지나치게 지쳐있는 목소리였다. 사이하라 군, 우리…

먼지라도 들어간 건지 갑자기 눈이 시큰거렸다. 열기 오른 건조하고 뻑뻑한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풍경 위로 하얗고 검게 일그러진 빛이 얼룩지듯 점멸했다. 시야에 빛이 산란하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팔락거리던 속눈썹이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은 여전히 불편했다. 캐리어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던 손을 떼고 눈두덩을 꾹 눌렀다.

그 순간 누군가 등을 탁 밀쳤다. 힘을 빼고 있던 몸이 크게 휘청거린 탓에 두어 걸음 크게 밀려났다. 거기에 몸이 기운 상태로도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으려다 보니 몇 걸음 더 비틀거리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겨우 균형을 잡고 일어서기도 전에 짧은 외국어가 사과의 말을 뱉으며 멀어졌다. 사이하라가 본 것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허겁지겁 뛰어가는 외국인의 뒷모습과 그가 끌고 있는 스트라이프 무늬의 짙은 회색 캐리어뿐이었다. 그나마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금방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부딪힌 부위의 작은 통증만이 남은 전부였다. 자신만이 이곳에 혼자 덩그러니 있을 뿐임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사이하라는 덩그러니 놓인 자신의 캐리어를 바라봤다. 그마저도 자신과 같은 꼴이었다. 우습게도, 자신과 캐리어의 거리가 그와 자신이 서 있던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자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며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렸을 속내를 알 길은 없었다. 생각은 멈추지 않았지만 나아가는 것 없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아마미가 어떤 마음으로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고 있는지는 사이하라도 알고 있었다. 칭호를 가지고 있다 한들 특별할 것 없는 자신을 평생에 걸친 의뢰라는 명목하에 동행 삼은 까닭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대답을 돌려주었을 때 크게 뜨였던 눈도, 다음날 다가와 보여주었던 진실로 즐거워서 웃는 밝은 미소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경계하며 거리두기를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지 않겠냐며 손을 내밀었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함께하는 여행은 힘들고 고됐지만 그럼에도 사이하라는 그 시간들이 좋았다. 자신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같이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어주던 아마미의 마음으로 충분히 기뻤으니 자신 또한 진지하게 임하고 싶었다.

서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 아니었나?

사이하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여동생을 찾아내 둘을 고향으로 함께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은 지킬 수 없게 되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전제부터 어그러진 의뢰에서 사이하라는 자신을 믿어준 이를 위해 최선의 결과물을 제시했을 뿐이었다. 가혹한 진실이라도 진실인 이상 외면해도 달라질 일은 없었다. 그러니 어차피 알아야 할 진실이라면 온전하게 정리해 완벽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눈 돌리고 외면하는 것보다 차라리 모든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자신을 믿고 의뢰한 아마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게 사이하라가 생각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그런데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시야 어디에도 그를 찾아볼 수 없었다. 목적을 가지고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사이하라 혼자만이 갈 길을 잃어버리고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늠할 수조차도 없었다.

놓친 캐리어를 챙겨야 할 텐데도 걸음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미끄러지듯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빛이 번지는 눈앞은 어지럽고 숨이 쉬어지지 않으니 속이 메스꺼웠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사이하라는 몸을 움츠렸다. 멀어졌던 소음들이 갑자기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소음 속에서도 그의 목소리만은 계속되었다. 그저 지쳐있을 뿐인 목소리가 끊임없이 책망을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손톱으로 억지로 끄집어낸 것 같은 헐떡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사이하라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 수가 없었다. 어디든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어디도 갈 수 없었다. 마침표 위가 아닌 사방 낭떠러지에 홀로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뀌지 않는 상황만이 그의 목소리로 거듭 사실을 고하고 있었다. 외면할 수 없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여행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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