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간론파

[아마사이] 외로운 방

뉴 단간론파 V3 2차 창작, 아마미 란타로X사이하라 슈이치

길잡이 by R

백업 :: 2020. 08


머리가 지끈거렸다.

더 이상 일에 몰입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두통에 사이하라는 결국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벌써 몇 시간째 깨어있는 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충 48시간이 지날 즈음, 창에서 쏟아지는 햇빛에 눈이 아려서 암막 커튼을 쳐버렸기에 그 뒤론 시간을 가늠할 낮과 밤의 흐름조차 기억에 없었다. 고장 난 벽 시계는 내내 같은 시간만을 가리키며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뻑뻑하기 그지없는 눈은 눈알 뒤쪽으로 모래 알갱이가 잔뜩 달라붙은 듯 꺼끌하기만 했다. 집중이 끊기자 갑자기 시력이 뚝 떨어진 듯 눈앞이 뿌옇게 가물거렸다. 눈을 감고 눈두덩을 누르려는 짧은 동작에도 찾아온 어둠을 따라 까무룩 정신이 멀어졌다 돌아왔다. 머릿속을 피잉 하고 울리는 기계음 같은 이명과 함께 현기증이 났다. 그 속에서 애써 정신을 다잡으며, 사이하라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책상 위에 놓인 수많은 머그컵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일부러 가벼운 것을 구비해둔 것이었음에도 손이 부들거렸다. 머그컵을 입술에 가져댔지만 넘어가는 것이 없었다. 눈을 내리뜨자 바닥에 말라붙은 커피 얼룩이 보였다. 컵을 내려놓고 다른 컵들을 들어봤지만 모두 비어있는 것뿐이었다. 찌그러진 드링크 캔들 역시 전부 비어있었다. 한숨과 함께 급격한 피곤이 밀려들었다. 책상에 팔꿈치를 기대어 수그린 이마를 지탱했다. 이마를 덮지도 못하고 대충 쥔 손에 미끄러지듯 기댔을 뿐이었다. 짜증이 울음처럼 번졌다.

소리로 뱉지도 못하고 속 안에서 뭉그러진 말이 기도를 따라 눌어붙었다. 숨을 쉬는 것이 버거웠다. 무엇 하나 제대로 연결되지가 않아 사이하라는 그저 제 숨소리에 집중했다. 미적지근한 숨에 속마저 답답해졌다. 사고가 돌아가지 않아 그저 틱틱 시끄럽게 제자리를 맴도는 시곗바늘 소리와 함께 부유할 뿐이었다. 또 한 숨만큼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는 겨우 작은 생각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시원한 물 한 잔이면 이 답답함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사이하라는 비치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로 연결된 방문을 열자 환한 거실이 눈에 담겼다. 이내 핑 도는 머리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한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닿는 대로 손을 뻗어 방문을 붙잡고 그만 습관대로 입을 열었다.

“…아마미 군… 나, 물…….”

사이하라는 눈앞이 흔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손에 힘이 풀렸다. 바닥이 가깝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쿵. 커다란 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울림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소리가 멀어지고…


이내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

.

 

깜빡.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갑작스럽게 정신이 들었다. 알을 깨고 나온 것처럼 갑자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삽시간에 변화했다. 아무것도 없이 웅크린 것만 같던 침묵하는 어둠은 순식간에 빛이 되고 소리가 되어 잠을 깨웠다. 그러고 나서야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에 으슬거리는 몸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짝 메마른 입안에서는 침조차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목이 아팠다.

“…무, 울…….”

목구멍을 긁어내며 토해내듯 입을 벌려 겨우 한 단어 뱉어냈다. 그것마저도 금속을 긁어내는 소리마냥 거칠기 짝이 없었다. 입을 벗어나는 더운 숨이 바닥에 닿아 다시 얼굴 피부에서 습하게 느껴졌다. 얼굴에 닿는 바닥이 차갑고 딱딱했다.

팔과 무릎, 이곳저곳 할 것 없이 전신이 두들겨 맞은 듯 아렸다. 몸이 무거웠다. 한참을 미동도 없이 숨만 쉬고 있던 사이하라는 그만큼의 시간이 더 지나고서야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굳은 손이 먼저 움직였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조금 신경을 쓰자 손가락 끝, 깎는 것을 잊은 손톱이 낡은 장판을 긁으며 미끄러졌다. 그러고도 손가락에 감겨드는 천은 없었다. 그것이 낯설어 허우적거리는 발버둥처럼 바닥을 긁던 손이 멈췄다. 어둑하게 막힌 눈앞을 보며 끔뻑이던 사이하라는 슬슬 느껴지기 시작하는 이마의 아릿한 통증을 무시하며 팔과 어깨에 힘을 주었다.

─쿵.

중간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지탱하지 못한 몸이 큰 소리를 내며 뒤집혔다. 무게를 지탱하며 먼저 바닥에 부딪친 날개뼈와 삐끗한 뼈마디가 욱씬거렸다. 윽. 다물린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신음을 삼켰다.

천장이 보였다. 익숙함에도 낯설다는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직 무거운 눈을 굴려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이 나서려 했던 방안의 천장이 시야 끝에 걸렸다. 정보가 모이자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은 거실로 나오기도 전에 정신을 잃었다. 어쩌면 밀린 잠을 채우듯 깊이 잠들었던 것뿐일지도 몰랐다. 탁자 등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은 것만이 다행이었다. 방 안에 걸려있는 시계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걸음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더 흘러간 것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전 같았으면 침대에서 일어났을 텐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사이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것으로 흩어냈다.

난방을 해야 할 날씨가 아님에도 방 안은 서늘하기만 했다. 마치 존재해야 할 모든 온기가 사라져버린 듯했다. 제 몸 안에 흐르는 피마저도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집 안 어디에도 사람의 기척이 없었다. 고개를 옆으로 툭 떨궈도 머리카락 한올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사이하라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무것도 집히는 것이 없었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근처 바닥을 더듬자 차갑고 익숙한 것이 손안에 감겼다.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지는 휴대폰을 쥐어 얼굴 가까이로 가져왔다. 화면에 불이 들어오자 꽤 많은 연락이 쌓여있음을 알리는 작은 아이콘들이 나란히 떠있었다. 몸은 아프고 머리마저 지끈거렸지만 미확인을 알리는 숫자만큼의 작고 기운 없는 기대가 새싹처럼 비실비실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조작으로 도착한 연락을 확인했다. 사이토 씨, 스즈키 씨, ……. 아는 이름들이었다. 누군가는 한 번만, 또 누군가는 여러 번. 나열되는 이름들은 제각기였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일과 관련된 연락이라는 것이었다. 도착한 연락들의 본문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사이하라는 스크롤을 맨 위로 끌어올렸다. 첫 번보다 느릿하게 스크롤을 내리며 도착한 이름들을 확인했다. 미나모토 씨, 고바야시 씨, ……. 그 속에는 그가 찾는 이름이 없었다.

단 하나,

짧은 문자 하나도.

팔을 옆으로 떨어뜨렸다. 바닥을 구르는 휴대폰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거슬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그제야 자신이 침대가 아닌 맨바닥에서 눈을 떴음이 절절히 와닿았다. 이렇게 찬 바닥에 누워있어도 뻗어질 온기가 없었다. 손안에 감기는 부드러움도, 다정함조차도……. 당장이라도 저기 일렁대는 천장이 무너져내려 저를 영영 감춰버렸으면 싶었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돌아와달라고.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원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사이하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오래전에 익숙했던 대로 삼키고, 끊임없이 삼켰다. 나 따위가 가질 수 있었던 건 없었잖아. 내내 토해내지 못했던 오래된 진심들이 눌어붙은 목구멍에서는 아무런 말도 넘어오지 않았다. 과분한 허락 속에서 태어났던 감정들마저도 가시가 맺혀 넘길 수 없는 열매로 변해 제 속을 끊임없이 긁어댔다. 저도 모르게 뱉어버렸던 이름마저도 현실을 자각하자 더 이상 혀끝에 매달 수가 없었다.

아, 아. 그래. 더 이상은…….

두 눈두덩에 손을 올리고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헐떡이는 숨 대신 가슴이 들썩였다. 눈물을 삼키듯 치켜든 턱 밑에서는 끅끅대는 소리만이 거칠게 흘러나왔다.

삼키지 못한 서러움만이 밀물이 되어 온몸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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