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다은태성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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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그럴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말을 하다 보면 눈이 마주치고 무언가를 주고받다 보면 상대방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감이 올 때가. 사람 간의 관계라는 것은 참 힘들어서 서로 주고받는 감정의 크기는 보통 어긋나기 마련이고 자기는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넘쳐났다. 공태성도 그걸 안다. 타인에게 멋대로 기대를 해봤자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운이다. 공태성은 이제까지 그 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에 기나긴 시간이 걸려도 기어코 그 결실을 받아내는 타입이었으니 어쩌면 조금은 오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자각은 느렸다. 선배들이 졸업하고 우리 중에서 가장 성격이 좋은 희찬에게 주장을 맡기고, 새로운 후배들을 맞이하는 학기 초. 선배라고 있는 놈들은 희찬을 빼면 하나같이 구력 짧은 초보자들 뿐이니 감독님은 좀 더 바빠졌다. 공태성이야 뭐. 연습은 꾸준히 한다지만 저보다 구력 긴 놈들에게 가르쳐줄 것은 없었고 기껏 해봐야 뻐길 수 있는 것은 탄력 뿐이니 가끔 옆에서 기상호와 정희찬이 부추기거나 후배들이 와~ 소리를 내주면 슬쩍 덩크 하나 꽂아주고 으쓱거리는 게 전부였다.

방학동안 다시 재미 붙인 농구를 잘하고자 말 그대로 또 토를 할 만큼 열심히 연습한 덕에 부끄러운 꼴은 덜 보일 수 있었다. 그래도 결국 힘든 건 힘든 거라. 힘 쭉 빠져서 주저앉아있으면 여전히 멀쩡한 모습의 김다은이 제게 다가와 물을 내밀었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내밀면 제 손안으로 쑥 들어오는 찬 냉기가 느껴진다. 힘 없는 공태성을 위해 이미 뚜껑이 따져있는 것은 김다은의 배려였다. 기실 그 배려가 저만을 향한 것이 아닌 것을 앎에도 제게 내밀어지는 배려는 잘 아는지라. 낯간지럽다며 피해왔던 살가움을 공태성은 이제 쉽게 내밀 줄 알았다.

"맨날 고맙데이."

"별말씀임. 님은 체력 좀 더 길러야겠음."

"그게 내 맘대로 되나. 노력하고 있다."

"알고 있음."

여전히 이상한 말투를 쓰면서도 살갑게 후배를 챙길 줄 알게 된 놈은 품에 가득 찬 물을 후배들에게 일일이 나눠주고 다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것도 길지 않다. 한참 그 모습을 보다 차가운 물을 들이킨다.

공태성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잘 아는 편이었다. 좋아하는 방법을 찾는 것에는 꽤 미숙하게 굴었으나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를 오해한 적은 많이 없었다. 자각은 느렸으나 제가 김다은에게 마음이 간다는 것을 알고 나서 당황하진 않았다. 아니, 아예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긴 하다. 살면서 남자를 좋아해 본 적은 처음이라 당황하긴 했다. 착각이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분명히 그 감정은 우정이라는 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왜 쟤를 좋아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답은 쉽게 나왔다. 사랑이란 감정은 원래 별 이유 없이 생겨나니까.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2학년이 되면서 나름 얌전해진 저에게 김다은이 좀 더 담담히 다가왔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통학을 하는 제가 혹시나 늦을까 갠톡으로 늦지 말라며 계속 연락을 넣는 것이나, 2학년들 끼리 놀러 갈 때 김다은이 저를 언급하고 불러주는 것들. 기실 저를 부르는 것은 주로 희찬이었으나 다은이가 불러주는 것을 신경 쓰는 것은 온전히 제 마음이겠다.

그러한 다정이 이제까지 받아온 것들과 특별한 것도 없는데 받아들이는 마음이 특별해지니 속절없이 그것에 휘말린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은이랑 함께 하는 시간도 늘었다. 원래도 지상고... 어쨌든 그런 묶음으로 묶여 불렸으니 같이 다닌 것이 흔한 일이지만 같은 2학년에서도 같이 유급한 동지는 서로 뿐이었으니까. 1학년 때에 방황하며 PC방을 전전할 때 저를 가장 많이 찾아낸 것도 김다은이었다. 어쩌면, 시작은 그때 부터였을 지도 모르지.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해도 크게 다르진 않다. 밥을 할 때에 김다은이 먹고 싶다는 것을 조금 더 많이 만들고 김다은이 하고자 하는 것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주기를 반복할 뿐이다. 그런 것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 주변 사람은 제가 김다은에게 약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것을 지적하는 말을 할 때엔 공태성은 입을 꾹 다물었고 김다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얘랑 지낸 세월이 김. 따위의 말을 주워섬겼다.

그러니까, 공태성은 빌어먹게도 제게 쏟아지는 마음들을 너무나도 잘 알아서 김다은이 저와 같은 마음이지 않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코트 위에서 제게 패스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종종 제 쪽으로 튀는 볼을 붙잡으라 제 이름을 부르고, 가끔 제가 멋지게 덩크를 넣거나 하여튼 어떻게든 볼을 넣을 때. 환히 웃으면서 잘했다고 칭찬하게 등을 쳐주며 가끔은 어깨동무까지 해주는 그 모든 행동들에는 나름의 정이 담겨있겠으나 거기에 애愛는 없어서.

그것만 없으면 다행이겠지. 어느 순간부터 공태성이 김다은의 행동 하나하나 신경 쓰기 시작하면서 다른 것이 보인다. 제게 연습에 오라며 단단히 말해두는 것을 관심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정말로 제가 연습에 빠질까 걱정했다는 것을 깨달으면 마냥 좋아지긴 어렵다. 김다은은 무언가 약속을 했을 때 공태성이 나타나기 전까지 믿지 않았다. 가령 연습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 만나기로 했거나 무언가를 하기로 했다면 약속한 장소에 공태성이 올 때까지 오는 게 맞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남에겐 하지 않는 짓이었으니 왜 그러는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를 못 믿나? 싶다가도 곰곰이 생각하면 그 신뢰를 깨 먹은 것은 본인임을 안다. 그래서 공태성은 화도 못 내고 그만 물어보라고 짜증도 못 냈다. 그냥 걱정 말라고, 꼭 갈 거라며 보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만 물어보라고 해도 계속 묻는다면 다행이지, 그것조차 하지 않는 것은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부산은 다른 곳보다 비가 많이 내렸다. 바닷가라서 그렇다기보다는 무슨 기후가 통과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알아봤자 비가 덜 오게 할 수는 없고 시험에도 나오지 않아서 공태성은 그 이야기를 일찍이 잊어버렸다. 애초에 멀리 나설 일도 없는 운동부라 특히나 그랬다. 다니는 길이라고 해봤자 학교에서 체육관까지의 거리였고 좀 젖어봤자 운동복으로 갈아입으면 끝나니까.

하지만 아직 학교에서 많은 지원이 들어오지 않았고 탓에 종종 장을 보러 가는 것에는 조금 애로사항이 있었다. 부원이 많지 않으니 선배고 뭐고 당번에 빠질 일이 없었다. 그날 장보기 당번은 김다은이었고 공태성은 목록을 꼼꼼히 적어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고 보내놨더니 뒤늦게 들어온 후배가 밖에 비가 온다고 했다. 김다은은 휴대용 우산을 들고 다니는 일이 없었다. 숙소 밖으로 나가보니 쉬이 그칠 비가 아니다. 공태성은 휴대폰을 들어 김다은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니, 우산 들고 갔나?"

"아니. 좆됨. 어캄?"

"어카긴... 어데고? 내 갈게."

"나 XX마트 앞. 빨리 오셈."

"어, 걱정 마라. 내 간다, 꼭 갈게."

"알고 있음."

전화가 끊긴다. 숙소로 다시 들어가 가장 큰 우산 두 개를 꺼내 들었다. 가기 전에 우산을 펴보니 하나가 상태가 이상했다. 어쩐다. 가볍게 흔들거리니 꺼덕거리는 꼴이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해체될 것 같았다. 쯧, 혀를 차고 접은 뒤 버리기 위해 문 옆에 던져놓고 휴대용 우산을 꺼냈다. 아까보다 작은 우산이지만 어깨가 젖지는 않을 것 같았다. 색이 밝기는 했지만... 배부른 생각이니 별수 없다. 두 손 무겁게 기다릴 녀석이 눈에 선해 그냥 길을 나선다.

휴대용 우산 하나 주머니에 대충 밀어 넣고 조금 걸어가면 두 손 무겁게 짐 들고 있는 김다은이 보인다. 공태성은 가까이 다가갔고 짐을 나눠 들어주며 그 빈손에 제가 쓴 우산을 넘겨주려고 했는데, 김다은이 불쑥 다가와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뭐고?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면 예의 그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김다은이 말했다.

"님이야 말로 우산을 하나만 들고 오면 어떡함?"

"아니..."

반박하려던 공태성의 입이 다물린다. 김다은은 젖지 않기 위해 가까이 붙었고 공태성은 우산을 그에게 조금 더 기울여준다. 감독님이 어디서 받아왔다던 고급 우산은 웬만한 사람들은 들고 있는 것도 힘들만치 무겁고, 그만큼 컸다. 어떻게 둘이 옹송그리면 어찌어찌 어깨는 젖지 않는 정도였다. 김다은은 젖지 않기 위해 이제 반쯤 공태성에게 기댄 상태였다. 공태성은 불편함을 꾸역꾸역 참으며 걸어간다. 휴대용 우산을 밀어 넣은 주머니는 김다은이 위치한 반대여서 들킬 일은 없을 것임에도 마음이 들썩거렸다.

걸어올 때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었는데 이젠 좁은 보폭으로 느릿하게 걸었다. 이제는 졸업한 선배가 운동부니까 몸 조심하라고 잔소리를 해대며 비 오는 날 꼬박꼬박 우산을 챙겨준 뒤로 2학년들도, 그 가르침을 그대로 전해 받은 새 후배들도 웬만하면 비를 안 맞으려고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걸을 빌미가 생겼다. 짝사랑 하는 이와 같은 우산을 쓰고 가까이 붙어서 가는 것은 보통 두근거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공태성은 두근거리지 않았다.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걱정하는 클리셰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공태성이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느리게 걸어도 언젠가 길은 닿는다. 금세 도착한 숙소에 김다은은 공태성이 들고 있던 짐을 다시 가져갔고 공태성은 문을 열며 우산을 조금 뒤로 젖혀 김다은이 들어가는 동안 우산에 흐르는 비도 맞지 않도록 했다. 들어가는 뒷모습을 한 번 쳐다보고 우산을 털어낸다. 그것을 우산꽂이에 넣고 들어가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용 우산도 꺼냈다. 그것 역시 대충 우산꽂이에 넣어둔다.

공태성이 농구부에 쉬이 스며들지 못했을 때는 그러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성질머리를 죽이기 시작한 뒤로 농구부원들은 종종 공태성의 집에 놀러 오곤 했다. 그럴 만큼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이 공태성 밖에 없었고 꽤 사는 집이었던 공태성의 집에 놀러 가면 어머니께서 준비한 게 없다며 간식이라도 사 먹으라고 용돈을 꽂아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작년만 해도 농구부 관련 연락이라고는 태성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코치님의 전화가 전부였는데, 이번 연도에는 친구라고 농구부 애들이 놀러 오니 어머니가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놀러오기 전엔 미리 연락을 넣는 덕에 올 때에 먹을 간식거리들을 미리 사 온 녀석들이 공태성의 방에 몰려들어 간다. 숙소에서 지내다 보니 깔끔하기 그지없는 방에 남자애들이 몰려들어 간다. 원래는 꽤 깔끔을 떠는 성격이었으나 합숙을 하며 이런저런 선이 많이 내려간 공태성은 이제 녀석들이 냅다 침대 위에 앉아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둥글게 모여 앉은 녀석들이 가져온 음료수와 과자를 꺼내는 것을 보며 공태성이 일어났다. 컵을 가지고 올 요량으로 나오니 그 뒤를 김다은이 따른다. 둘이면 컵 여러 개를 들고 오기에 충분했다. 이제 후배들은 선배들이 선만 넘지 않으면 위계질서에 민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 눈치 보며 따라오는 일은 없었다.

공태성이 찬장을 열자 김다은이 손을 내밀고 가만히 기다린다. 그냥 쟁반 하나 꺼내면 되는 일인데 그게 귀찮다고 손으로 들고 가다 보니 이렇게 하는 것이 버릇이 됐다. 그 커다란 손에 컵을 하나하나 끼워주면 혼자 드는 것보다 더 많이 들 수 있기도 했고. 작지 않은 컵들을 여섯개나 들려준 뒤 공태성도 컵을 네 개 정도 든다. 그대로 방으로 돌아가면, 그래도 사준 선배님 오기 전에 먹으면 안 된다고 얌전히 기다리는 놈들이 환히 웃으며 손을 뻗는다.

다들 컵 하나씩 나눠 들고 음료수를 따른다. 공태성이 자리를 잡으니 불쑥 컵 하나가 내밀어진다. 저도 모르게 그것을 받으면 제가 즐겨 마시는 이온 음료였다. 내민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리면 김다은이다.

"뭐고?"

"님 항상 그것만 마시잖음."

"글킨하지."

긍정하며 컵에 입을 댄다.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그러니까, 저건 아까 전 후배 놈들이 둘을 얌전히 기다린 것과 같은 이유다. 돈이 공태성 주머니에 나왔으니 음료수 먼저 따라주는 건 특별할 것이 없었다. 공태성은 이런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럴 시기는 지났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내민 이 음료수 한 잔을 느릿하게 마시는 것 밖에 없었다. 달면서도 어쩐지 씁쓸한 맛이 나는 것을.

운동부 놈들이라 한 번에 쭉 마시고 나면 또 각자 좋아하는 음료수를 하나씩 든다. 제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든 놈한테 컵을 들이미는 것을 본다. 김다은은 사이다를 들고 있었다. 공태성이 그쪽으로 컵을 내밀면 김다은이 따라줄 것 처럼 페트병을 내밀다가도 거둔다.

"뭐하노? 안 따라주고."

"님 탄산 잘 못 먹으면서 사이다는 무슨 사이다임. 알로에주스 드셈."

그리 말하곤 다른 녀석이 내민 잔에 음료수를 따라준다. 공태성은 그것을 보다가 알로에주스를 들고 있는 녀석에게 컵을 내밀었다. 차오르는 주스를 보며 공태성은 제 혀를 꾹 깨문다.

마음이 쌓인다. 공태성은 언제나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안 좋아하는 법을 몰랐다. 미워해 보려고 해도 기어코 돌아와 사랑받고자 하는 것은 공태성을 이루는 성질이었다. 좋아했던 초기에는 김다은에게 투덜거리기도 했으나 그것이 의미가 없고 자승자박이나 다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그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공태성은 그저 쭉, 김다은을 좋아했다. 마음을 받아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고 마음을 덜어내려고 헛짓거리를 하지도 않고 그저 옆에서 가만히 서서 흘러넘치는 마음이 김다은에게 튀어 눈치채이지 않도록.


3학년이 되었다. 공태성이 2학년으로 지내면서 대단한 신입 한 명이 들어와 지상고는 그 해 우승을 몇 번이나 해냈다. 그렇기에 공태성이 3학년이 되었을 때 새로운 부원은 조금 더 늘었다. 겨울 방학 때는 숙소를 리모델링 한다고 부원들을 모두 쫓아냈고 돌아온 숙소는 모두에게 방을 주지는 못해도 서너명이 한 방에 같이 있는 정도는 되었다. 전보다 프라이버시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놈들 사이에서 4명 밖에 없는 3학년들은 자연스레 같은 방을 썼다.

농구부원들의 평균 키를 생각하여 들여놓은 2층 침대도 길쭉하여 자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래도 키 큰 놈들이 위로 가서 자긴 힘드니까, 김다은과 공태성은 자연스럽게 1층을 썼다.

이제 공태성이 밥을 해주지 않아도 되었지만 3학년들과 2학년들은 예전 음식이 그립다며 가끔 우는 소리를 내었기에 아주 가끔, 출출 할 때에 야식을 만드는 건 여전히 공태성의 몫이었다. 귀찮기도 했으나 이렇게 뭔가 해 먹일 때 후배들이 공태성을 조금 더 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1년 간 체득했다. 지금은 좀 풀어주고, 어느 정도 얼굴을 익히면 관리를 하는 것이 다루는 것에 편했다.

3학년 때는 주장이 바뀌었다. 2학년의 대단한 후배가 주장이 되었다. 워낙 잘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성격도 불같으면서 선을 지키는 타입이고 지상고 승리의 주역이기도 해서 카리스마가 있었다. 1학년은 물론이고 동기인 2학년들도 걔 눈치를 보니 주장 시켜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맡겼다. 새 주장은 아주 일을 잘해주었기에 3학년들은 후배 관리에 대한 걱정을 좀 덜 수 있었다.

걱정을 덜어내면 하는 것은 연습이라. 공태성은 그동안 많이 연습을 했다. 후배들에게 배우는 것은 조금 부끄러우니까 감독님, 감독님이 아니면... 김다은. 똑같은 초보자여도 숙달되는 정도가 달랐던 덕에 김다은은 이제 남을 가르칠 정도는 되었다. 적어도 남 폼 봐줄 정도는 되어서 그동안 김다은과 많이 연습을 했다. 덕에 공태성은 이제 다른 기술들도 꽤 할 줄 알았고 자유투 성공률도 전보다는 많이 올랐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은 그냥. 고마움의 표시였던 거다. 공태성은 이제 남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거나 칭찬을 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제 속을 다 터놓는 것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말을 다듬을 줄 알았다. 그래서 그냥, 그 해 모든 경기를 끝내고 다가오는 겨울 방학 때. 공태성은 집이 먼 이들이 집에 가기 전날에 김다은에게 가볍게 물었을 뿐이다.

"김다."

"뭐임?"

"내 용돈 받았는데 맛있는 거 물러 갈래."

"진짜임? 다른 애들은?"

"다 데리고 갈 돈은 없고, 니가 내 많이 도와줬으니까 니만 특별히 사주는기다."

"헐. 대박. 좋음. 비싼 거 먹어도 됨?"

"내 알아본 가게 있으니까 가자."

그래, 제기랄. 데이트 신청 맞다. 고마움의 표시? 감사 인사? 그냥 친구랑 놀러 가는 거? 그 모든 게 말이 되려면 공태성이 김다은을 좋아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공태성은 여전히 김다은을 좋아했다. 그럼 사심이 안 섞일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을 알아도 공태성은 김다은과 단 둘이 가자고 이야기 했다. 김다은은 응했다.

이 권유는 수많은 생각들을 거치고서야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2학년이 될 쯤만 해도 김다은은 공태성과 같이 다녔지만 정작 둘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코트 위 말곤 거의 없었으니까. 그때 아마 이런 권유를 하면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태성이 성질머리를 죽이고 농구를 열심히 하고 기상호와 김다은의 헛짓거리에 적극적이진 않아도 가끔은 어울려주면서 김다은은 좀 더 공태성에게 다정하게 굴어주었다. 마치 원래 그럴 수 있었다는 것처럼.

3학년이 되고 둘은 이제 아무렇지 않고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고 김다은 역시도 아무렇지 않게 공태성과의 관계에 많이 친함. 따위의 말을 했으니까. 어쩌면 둘이 놀러 가자고 하는 것도 받아줄 지 모르겠다고.

한참 그렇게 재고 따지고서야 공태성은 말할 수 있었고 언제나처럼 김다은은 아무렇지 않게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공태성은 답지 않게 하얀 코트를 입었고 김다은은 평범하게 후드티에 검은 패딩을 걸쳐 입었다. 가는 곳이 좀 분위기 있는 양식집이라는 말은 안 했다. 어차피 김다은은 신경 안 쓸 테니까. 도착해서 메뉴를 정한다.

"니 고기 좋아하니까 이거, 이거랑... 이거 묵으라."

"님은 면 좋아하잖음. 이것도 시키셈. 아, 이것도."

원체 둘은 많이 먹는 편이라 이것저것 시킨 뒤 음료수까지 정하고 나면 기다리는 동안엔... 짧은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그동안 둘이 열심히 연습했던 것들, 이겼던 경기들, 거기에서 서로가 해냈던 슈퍼플레이라던가,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면 김다은이 장도고를 상대로 보였던 3점 슛이나 공태성이 해냈던 사람을 뛰어넘는 덩크 같은 것이 빠지지 않고 튀어나왔다.

이어 음식이 나와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어느 순간부터 공태성은 김다은과 말을 할 때면 우물거리는 입을 슬쩍 가렸다. 김다은은 의외로 음식이 입에 있을 땐 말을 하지 않았다. 대화가 조금 늘어지면서도 끊기지 않는다. 맛있게 다 먹고, 공태성이 결제한 뒤 밖으로 나올 때도 그랬다.

공태성과 김다은은 가는 대학이 달랐다. 나란히 빅맨 둘을 데려갈 대학은 많지 않으니까. 어쨌든 무리 없이 1부 대학을 갔으니 코트 위에서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런 이해 관계없이 얼굴 마주할 기간은 지금이 끝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공태성이 제 마음을 털어낼 기회는 지금 뿐이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공태성은 계속 걷는다. 공태성은 고백할 마음이 없었다. 어떠한 마음은 꺼내놓지 않을 때에야 아름답다. 이대로 묻어둔다면 아주 가끔 정희찬이 만나자며 저희를 꼬셔내겠지. 그럼 저는 귀찮다는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나갈 것이고 거기엔 김다은도 있을 것이다. 근황을 주고받다가도 가끔은 추억처럼 지상고의 나날들을 꺼내 들 것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엔 기쁘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쌓이고 쌓인 마음을 털어내는 방법으로 공태성은 기다림을 선택했다. 언젠가 김다은이 건네주던 다정이 더 이상 익숙해지지 않을 때, 그것이 하나의 추억으로 남을 때, 아주 가끔 마주하며 지금의 어리숙한 저를 다시금 떠올리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때.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방법을.

"님."

"뭐고."

"나한테 할 말 없음?"

이변은 가깝다. 공태성은 멈추어 선다. 시간대는 밤이었고, 부산은 따뜻해서 눈 한 점 내리지 못하지만 공기에선 겨울 냄새가 났다. 어둑해진 탓에 가로등이 둘을 비추어내린다. 주변 건물의 빛 덕에 어둡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서 공태성은 제 옆의 이를 쳐다보고 김다은 역시 그 눈을 마주한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알고는 있냐고. 그런 말도 나오지 않아 공태성은 그 담담한 얼굴을 쳐다만 보았다. 언제부터 알았던 거지. 알면서 왜 묻는 거지. 왜? 공태성은 입을 꾹 다물고 김다은은 가만히 있었다.

그래, 언젠가부터 그랬다. 공태성은 김다은 앞에서 가끔 말을 멈췄고 김다은은 그런 공태성이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러면 공태성은 적당한 변명을 주워섬겼고 김다은은 그런 공태성을 가만히 보다가 그 대답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또 적당한 변명을 내뱉는다면 김다은은 그것이 정답인 것처럼 받아줄 것이다. 근데, 나는 그게...

"언제부터 알았는데?"

"의심은 2학년 때 부터, 확신은 방금."

"왜?"

"니 내한테 고백하려고 했잖아."

"뭐?"

내가? 아닌데. 공태성은 고백할 마음이 없었다. 제 마음을 꺼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공태성은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공태성이 바라봤던 것은 먼 미래,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만날 수 있을 순간이었다. 지금 이때, 고백을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닌 숨기고 싶은 게 있으면 입부터 다물잖아."

공태성은 손을 들어 올려 제 얼굴을 쓸어내린다. 코트 주머니에 꽂아둔 손은 조금 미지근했고, 그 손에 닿은 얼굴에는 열이 났다. 공태성은 제게 쏟아지는 마음을 잘 안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제가 생각한 마음이 틀리지 않았다면 김다은이 이럴 이유가 있었을까. 제 버릇을 들추고 제가 버려둔 고백을 들이밀면서 제 대답을 기다릴 이유가 있었을까. 그 이상한 말투는 어디 가져다 버리고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해줄 이유가 있었을까? 김다은에겐 아주 쉬운 길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만히 있는 길이.

공태성은 그제야 제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는 것을 느낀다. 김다은은 언젠가부터 공태성에게 다정했다. 그것이 남들에게도 쉬이 주어지는 다정이라 생각했다. 공태성이 거기에 특별하다는 표식을 붙였을 뿐이었는데. 어쩌면...

"니도 내 좋아하나?"

"그게 니 고백이냐?"

"...내는 니 좋아하는데."

김다은이 작게 웃는다. 기상호와 가끔 짓는 빙시같은 웃음 말고, 남들 앞에서 적당히 웃어주는 웃음 말고.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그런 웃음에 공태성 역시 속절없이 웃고 만다. 한 번도 상정하지 않았던 상황 앞에서 공태성은 웃고, 웃고, 웃다가.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김다은이 다가왔다.

"닌 울 때 못생겼으니까 이왕이면 울지마라."

"미친놈이... 답이나 빨리해도."

"아... 내도 이런 말 하기 그런데. ...1일이네."

다시 둘이 웃는다. 대단히 로맨틱하진 않았지만 해피엔딩의 끝으로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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